EP.174 18장. 무림맹 - (2)
“… 소소야.”
“네, 아버님.”
“손님에게 실례구나 내려오거라.”
“아…”
남궁소소가 무릎에서 내려가려고 하자, 독고령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 요.”
“… 미안하오. 소소가 원래 그리 버릇이 없는 아이가 아니거늘.”
“나도 좋으니깐 괜찮아요. 신경쓰지 마세요.”
“에쁘게 봐주셔서 고맙소.”
“… 별 말을.”
독고령은 다시 남궁소소를 품 안에 껴안고 마차 안을 두리번거렸다.
‘… 새끼, 돈 좀 썼네.’
일단 거절할 방법이 없어서 마차에 올라타긴 했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그 때 옆에 앉아있던 검후가 입을 열었다.
“돈을 좀 많이 썼구나. 맹의 재산이더냐?”
“설마요. 세가의 돈입니다.”
“그새 속세에 물들었나 오해할 뻔 했구나.”
“… 아버지가 경을 치실겁니다.”
“하긴.”
마차의 안에는 총 다섯 명이 타있었다.
독고령, 남궁소소, 검후, 남궁진, 그리고…
“그보다 위 공자.”
“예, 맹주님.”
“맹에 들어올 생각은 없소?”
“… 제가요?”
위일청이 있었다.
“위 공자 정도라면 맹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단주가 될 수 있을 것이오.”
“단주라니…”
맹주, 장로, 군사.
그 아래가 바로 맹의 무력단체의 수장, 단주였다.
대문파의 이름있는 무인이지만, 문파에서 애매한 위치거나 중소문파의 모든 이가 바라마지 않는 자리였으나 남궁진이 그 제안을 하는 순간,
“… 안 돼요.”
독고령이 거절했다.
“위 공자에게 물은…”
“굳이 맹에 자리잡는 것보다 일청 정도라면 그냥 문파 하나 세우는 게 더 나을걸요?”
“그 말도 맞는 말이지긴 하나 역시 위 공자의 의견을 직접…”
“령이 꺼려하는 듯 하니 제안은 감사하지만, 거절하곘습니다.”
위일청이 살포시 미소지으며 독고령의 손을 붙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남궁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아쉽구려. 맹에 젊은 인재가 부족한 와중에 그대와 같은 걸출한 호걸이 들어온다면 참으로 좋을 터인데…”
“맹은 무슨…”
독고령이 툴툴거렸다.
말이 무림맹의 단주직이지 그냥 온갖 곤란한 곳에 다 불려다니는 자리에 불과했다.
문파끼리의 다툼이나 가끔 새로운 마두가 출몰한다거나 사파 놈들이 수작질을 부린다거나 마교가 준동하는 낌새가 있다?
제일 만만한 단주가 출동하는 자리임을 독고령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과거 남자였을 때만 하더라도 ‘안녕하시오, 이번에 새로 부임한 단주요.’ 라며 목에 힘 빳빳하게 주고 찾아온 놈들이 수두룩했다.
각양각색의 무인이 찾아왔음에도 돌아가는 뒷모습은 그저 매번 똑같았을 뿐이다.
어디 한 곳 퍼렇게 멍이 들어 돌아가거나 절뚝거리며 ‘맹은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씨알도 안 먹힐 으름장을 놓고 가는 직위.
그게 단주였다.
‘아이씨, 생각해보니깐 빡치네.’
문득 독고령이 남궁진을 노려보았다.
“맹주님.”
“… 예, 독고 소저.”
“아니, 우리 일청이 얼마나 대단한 무인인데 고작 단주 자리에요?”
“어… 아니… 그 위 공자를 무시하려던 처사가 아니라…”
“단주 새끼들 어차피 맨날 온갖 자리에 다 불려나가면서 시비나 걸리는 자리인데 그게 뭐 대단하다고 위일청을… 헤윽?!”
“… 령, 조용합시다.”
“방금 위 오빠 손이…”
“소소 아가씨는 아무 것도 못 본 거예요.”
“… 네.”
독고령의 얘기를 듣고 오히려 위일청이 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 죄송합니다. 령이 걱정이 많아서…”
“아니오, 위 공자. 두 선남선녀가 서로 아껴주는 것을 보니 오히려 내가 다 보기 좋구려.”
“… 그렇게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위일청이 고개를 숙이자, 옆에 앉아있던 검후가 피식 웃었다.
“령 아가 일청이의 앞 날을 걱정해주는 모양새가 벌써부터 내조를 하려드는 듯 하구나.”
“흐엑?!”
“그러게 말입니다, 허허.”
“아니익…”
“내조가 뭐에요, 빨간 언니?”
“몰라도 돼.”
“내조란 것은…”
“캬아아악!!”
마차가 들썩거렸다.
마차에서 내리자 독고령은 무림맹의 거대한 건물을 보고 감회가 남달랐다.
‘… 내가 여길 다 오네.’
살면서 혹시나 자신이 무림맹에 들릴 일이 있다면 그건 아마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하나는 당문의 가주, 당정이 그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사천을 나와 합비까지 찾아왔을 때고,
또 다른 하나는 아마 당정을 조지는 데 실패했음에도 운 좋게 살아남는다면 무림맹의 지하에 있다는 뇌옥에 갇힐 일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무림의 영웅을 뵙습니다!!”
“으으…”
우레와 같이 울려퍼지는 찬사에 독고령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세 걸음 정도 걸을 즈음 누군가 나타나 남궁진에게 인사를 건네면, 남궁진은 함께한 일행들을 소개했고, 그러면 그 누군가가 고개를 숙이며 큰 목소리로 저렇게 인사하곤 했다.
“… 맹주… 님.”
“무슨 일이시오, 독고 소저?”
“… 저 인사 좀 안 시키면…”
“그럴 순 없는 노릇이오. 독고 소저가 무림에 안녕과 평화를 가져다 주었음을 생각하면 되려 이 정도로도 모자라지. 너무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되오.”
“그런 게 아니라… 으으…”
독고령은 당장이라도 그냥 객잔에 돌아가서 술이나 마시고 싶었다.
인사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어떻게 혈교주를 죽였나 알고 저러는 걸까?
물론 그의 윤회를 끊어내는 위업을 이뤄냈으나 그 과정을 다시 떠올리자 독고령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당장이라도 어딘가 숨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언니? 어디 아파요?”
“… 마음이 아파.”
“내가 만져줄게요!”
“… 고맙다.”
남궁소소가 그 말랑말랑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며 독고령은 남궁진을 따라 알현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오랜만에 보네…’
익숙한 얼굴이 몇몇 보였다.
도사랍시고 깝죽대다가 자신에게 맞곤 기어서 돌아갔던 놈도 있었고,
정중하게 영약을 달라고 요구했더니 문파의 귀중한 보물이라고 못 주겠다고 버티다가 결국엔 준 놈도 있었다.
새삼스레 자신의 과거가 화려했음을 깨닫고 놈들이 달려드는 순간 바로 반격하기 위해 슬그머니 남궁소소를 등 뒤로 숨기던 순간.
“청성파의 청운이라고 하오.”
“…”
“무림의 동도들을 대신하여 감사를 표하오.”
청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선창하자 다른 장로들도 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감사를 표하오!”
“아잇, 시발. 다 같이 모여서 연습이라도 했냐?!”
결국 참지 못 하고 독고령이 욕지거리를 내뱉자, 장내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독고령이 도착하기 하루 전.
“후후, 우리가 해냈구려.”
“무림의 위기를 우리 손으로 구해냈소이다!”
“공동의 검은 여전히 날카롭더군요, 허허…”
“청성의 장로께서 그 강시 놈의 팔을 날리는 것을 봤거늘 부끄럽습니다, 으하핫.”
남궁진과 함께 힘을 합쳐 거대강시를 물리친 장로들은 흥분에 차있었다.
맹의 장로직을 맡으며 수련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시원하게 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른 것은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앞으로의 미래를 걱정하며 죄인이 되어버린, 이제는 젊은 시절의 모습과 전혀 다르게 추하게 늙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좌절한 맹주들은 잠시나마 강호초출의 마음으로 돌아가 무림을 구원했다는 흥분에 차있었다.
“맹주! 무얼 하고 계십니까?!”
무림맹주 남궁진의 말이 있기 전까지.
“… 딸 아이를 구했다는군. 당가위는 죽었고.”
“근데 무슨…”
“그리고 혈교주를 죽였다고 하오.”
“혈…!”
“설마 노부가 생각하는 그 혈교주가 맞소?”
“… 맞소. 혈교의 교주 말이오. 당대의 혈교주를 죽이는데 성공했다는 전서를 받았소.”
남궁진이 방금 막 올빼미를 통해 받은 전서를 건네주자 장로들이 모여들어 그 전서의 내용을 훑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한 문장이 있었으니…
“독고령이라면… 광마의 자식 아니오?”
“게다가 재림의 걱정 없이라니? 혈교주의 대법을 파훼했단 말이오?”
“허어…”
“독고진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아무리 빨라도 이제 막 약관(20세)을 지났을 나이 아니오?”
“어찌 그런 어린 나이에… 검후께서 뭔가 착각하신 게 아니오?”
장로들은 혈교주를 죽였음에 솔직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방금까지 거대강시를 처리하며 당가위의 손에서 시작된 일련의 사태를 무마시킬, 아니면 감형시킬지도 모를 한 줌의 면죄부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은 공은 큰 공 아래에 파묻히기 마련.
혈교주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는 위업을 달성했다는 서신을 받자 장로들은 의심부터 했다.
“맹주! 이 서신은 누가 보낸 것이오? 신뢰할 수 있는 정보입니까?”
“… 하오문이 보냈소. 그리고 여지껏 보낸 모든 정보가 들어맞은 데다가 검후님께서도 혈교주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객잔으로 돌아가셨으니 아마 맞을 듯 하오.”
“아니… 이 무슨…”
“일단 나는 객잔으로 가서 소소의 안위부터 확인해봐야겠소. 장로들은 이 곳에 남아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해주시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음에도 다시 또 밖으로 나서려던 남궁진이 우뚝 문 앞에 멈춰섰다.
“… 혹여나 허튼 짓거리를 할 생각은 마시오. 나는 아직 그대들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소. 차후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처분을 달리할 것이니 신중히 행동하시오.”
탁.
경고와 함께 남궁진이 밖으로 나서자 남은 장로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
싸늘한 침묵이 맴도는 와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공동파의 장로였다.
“… 이보게, 청운.”
“듣고 있소.”
“솔직하게 터놓고 말합시다.”
“무엇을?”
“면죄라도 받을 생각으로 그 거대 강시에게 뛰어들었지. 일부러 화려한 초식을 사용하며 큰 목소리로 이름을 외치면서.”
“하…! 다들 똑같은 생각 아니었소?”
“후우… 헌데 이제 의미가 없어졌군. 더 큰 공을 세운 자가 나타났어. 하…! 혈교주라니…”
공동파의 장로가 머리를 감싸쥐자, 다른 장로들이 여러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오, 역시 확인을 거쳐봐야…”
“검후님이 보증하셨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늦든 빠르든 소문은 금세 퍼져나갈테지.”
“그럼 이대로 당가위와 연루되었던 것으로 남은 여생을 죄인으로 살란 말이오?!”
“젠장, 지금이라도 당문에 연락을 취해…”
“어허! 다들 진정 좀 하시오!!”
모처럼 다시 하나로, 그것도 건전한 방향으로 모였던 장로들이었으나 금세 그 단합이 깨지자 청운이 그들을 뜯어말렸다.
“… 광마의 여식이라고 했지?”
“혈교주를 죽인 것 말이오?”
“괴물이 괴물을 키워냈거든. 하여튼 광마 그 자식은…”
“광마에 대한 원한은 잠시 집어넣고, 우리가 살 길을 찾아봅시다.”
“뭘 어떻게 말이오?”
“광마의 여식이 나이가 많아봤자 얼마나 많겠소. 우리보다 후배 아니겠소? 게다가 여인이라고 하니 광마의 성질머리를 닮지는 않았겠지.”
“… 무슨 계책이라도 있는 듯 하오?”
청운이 씨익 웃으며 장로들에게 말했다.
“무림맹 장로의 이름으로 광마의 여식을 치하하면 되지 않겠소? 그녀를 무림의 영웅으로 만드는게지. ‘무림맹 장로들의 인정을 받은 영웅’으로.”
“!!”
그 말을 듣고 장로들이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 약간의 와전도 섞으면 좋겠구려.”
“그것도 괜찮겠군. 뭐 실제로 그렇지는 않지만, 사실 광마의 여식이 우리들의 명을 받은 느낌으로 은근슬쩍 끌고 간다면…”
“… 그거 괜찮군.”
“아직 어린 나이라고 하니 혈교주를 잡은 것도 요행일테지. 무공을 가르치거나 속가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건 우리 공동이 하겠소.”
“어허, 검법하면 공동보단 우리가…”
“광마는 도객이니 차라리 우리 문파의…”
금세 새 희망을 찾고, 그들이 익숙한 권모술수의 장이 되자 장로들은 기운을 되찾았다.
독고령이 얼마나 괴팍한 여인인지 모르고.
“아잇, 시발. 다 같이 모여서 연습이라도 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