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3 18장. 무림맹 - (1)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와 자신의 머릿결을 간지럽히는 숨결에 독고령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
술기운이 남아 여전히 머리를 무겁게 만들었지만,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위일청의 팔을 배고, 그의 가슴에 안겨 잠을 자고 있던 것을.
‘… 더 잘까…’
햇살이 살포시 자신의 얼굴을 비추는 것을 느꼈음에도 독고령은 위일청이 주는 안락함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나를 여자로 만들어줘요.]
“으아아…”
[일청의 애가 가지고 싶어졌어요.]
잠들기 전의 고백이 떠올랐다.
자연스레 얼굴이 달아오르고, 시야에 들어온 앞머리가 분홍빛으로 물드는 게 보였다.
‘미친년아… 또 술 쳐먹고 무슨 사고를 친 거야…’
술에 취해 자제심을 잃었다.
어제 무명이 준 백주는 그의 말대로 정말 독했다.
첫 한 모금을 넘기는 순간 목이 매마르며 뜨거운 기운이 올라올 때 이미 눈치챘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얼굴을 알고 지낸 백리소현과 함께 밤을 보냈을 때도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근데 그것도 모자라 근처의 다른 이들이,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보는 앞에서 아무리 혈교주를 몰아내기 위한 방법이었다고는 하지만 대놓고 위일청과 사랑을 나누었다.
처음엔 잊기 위해 술을 마셨고, 도중부터는 위일청에 대한 생각으로 자연스레 머리가 가득찼다.
‘아니, 아무리 내가 부탁했다고 하더라도 길거리에서 남사스럽게…’
‘그냥 한 것도 아니고 엄청 많이…’
‘얼마나 싼 거야 도대체…’
목욕하며 몸을 씻어내던 중에도 계속하여 흘러나오던 그의 백탁색 액체가 떠오르자, 독고령은 문득 겁이 났다.
은약벽이 말하기로 이 행위는 참으로 즐겁지만, 애를 가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쩌면 임신도 되는 게 아닐까?
막상 거기까지 생각하자 지난 번 남궁소소를 껴안고 위일청과 자신의 아이를 상상했던 때가 떠오르면 조금씩, 술기운에 취해 독고령은 의식의 흐름을 따라 어느새 걱정보다 행복한 상상으로 빠져들었다.
‘위일청의 아이라…’
술기운이 올라와서 그런지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그래. 어차피 이대로 살면 계속 여자일텐데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
어느새 텅 빈 백주를 보고 독고령은 술병을 내버려두고 침실로 올라갔다.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위일청의 방에 들어가자 혼자 잠이 든 그를 발견했고, 고작 얼굴을 본 것만으로 하단전이 욱씬거렸다.
그리고는 방금까지 혼자 술을 마시며 했던 생각들이 떠올라 그를 깨웠다.
그 후로…
“… 미쳤어.”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자, 독고령은 자신이 얼마나 미친 짓을 했나 자각했다.
술에 취해서 애교도 부리고, 막무가내로 애를 낳고 싶다고 떼를 쓰고…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기에 위일청의 옷깃을 꼭 붙잡고 그의 가슴팍을 파고들자,
“으음…”
위일청이 몸을 뒤척거리더니 독고령을 꼭 껴안았다.
“… 령, 조금만 더 잡시다.”
“… 미안해요. 내가 깨웠어요?”
“아니에요.”
위일청은 여전히 잠기운이 묻어나는 목소리와 함께 깊은 숨을 내쉬며 독고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기분좋아 독고령은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 일찍 일어났네요, 령.”
“해가 떴어요…”
“어제 술을 많이 마신듯 한데 몸은 괜찮나요?”
“괘… 괜찮아요.”
“다행이네요.”
혹시나 어제 자신이 했던 얘기들이 튀어나올까 독고령은 떨리는 가슴을 붙잡고 가만히 위일청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령.”
“ㄴ… 녜헷!”
“꿈을 꿨어요.”
“갑자기요?”
“네. 어제 령과 나눈 이야기 때문인가봐요.”
“그… 그건…!”
“셋이 좋겠어요.”
“…”
위일청이 크게 기지개를 켜고는 마른 세수를 몇 번 하고난 뒤, 독고령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가를 쓰다듬으며 위일청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꿈에서 령과 함께였어요.”
“그랬어요…?”
“령이 아이들과 놀고 있더라고요. 딸은 아마 막내처럼 보였고, 그 위로 언니 하나와 맏이는 남자아이였어요.”
“…”
“령이 웃으면서 막내를 껴안고 있었고, 맏이는 무언가를 령한테 묻고 있더라고요. 그 모습이… 되게 보기 좋았어요.”
“으으… 일청, 어제 한 얘기는…”
“령이 없던 걸로 하고 싶다면 없던 걸로 해도 되고요.”
“… 네?”
위일청이 피식 웃으며 독고령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술에 취해서 하는 얘기 말고, 나중에 온전한 정신으로. 마음의 준비가 되면 다시 한 번 얘기해주세요.”
“으으…”
“기다릴게요. 기다리다 못 참으면 내가 먼저 말하고요.”
“ㅁ… 뭘요?”
쪽.
위일청이 독고령의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씻으러 갈게요, 령. 아니면 같이 씻을래요?”
“ㅁ… 뭘 말할 건데요?!”
“같이 씻는 건 이따 밤에 하죠. 먼저 내려갈게요, 령.”
“뭘 말할 거냐니깐요?”
“크큭, 갑니다.”
위일청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홀로 남은 독고령은 쿵쾅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 뭘 먼저 말하냐고…”
*
객실을 나서 밖으로 나오자 독고령은 주변의 시선이 신경쓰여 미칠것만 같았다.
도끼눈을 부릅 뜨고 눈을 마주치는 이마다 ‘뭐, 새끼야!’라고 난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이 곳에 모인 이들 대부분이 하오문도고 남궁소소를 찾는 데 큰 도움을 주었기에 꾸욱 참고 있었을 뿐이었다.
‘시발, 진짜…’
독고령의 기세가 워낙 살벌해서 그런지 마주치는 이들마다 하나같이 그녀의 눈길을 피할 즈음…
“누님!”
“어, 좋은 아침이다.”
“누님도 고생이 많으십니다!”
청운을 포함한 무당삼검을 만났다.
“어제는 고생이 많으셨소, 독고 소저.”
“흐엑?!”
“혈교주를 처리했다 들었소. 정말 강호에 큰 홍복이 아닐 수가…”
“다… 닥쳐!”
“…”
독고령의 격한 반응에 현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현상은…
“… 고생하셨소, 소저.”
“너 시발 알고 있지?”
“아… 아무 것도 못 봤소.”
“캬아아악!!!”
얼굴을 붉히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이 십새끼야, 주하나 지킬 것이지 뭐 했냐?!”
“아니 밖에서 소리가 들리니 어쩔 수 없이…”
“…어.”
”예?”
“죽어엇!!!!”
독고령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칼을 뽑아드는 순간.
“아침부터 시끄럽구나, 령아야.”
“…”
등 뒤에서 나타난 검후가 그녀의 칼을 붙잡았다.
자신의 칼을 멈춰세운 게 검후임을 알자 독고령이 툴툴대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 잘 주무셨어요?”
“오냐. 너는… 아니다. 그럴 수 있지.”
“뭐가요? 내가 뭐?! 내가 왜요?!!”
발작하듯 따져묻는 독고령을 무시하고 검후가 현상을 바라보았다.
“… 현상아.”
“예, 검후님.”
“강호를 위해 희생한 것이니 뭐… 너무 많이 떠올리지 말거라.”
“… 부끄럽습니다. 제가 아직 수행이 미진한 탓에…”
“캬아아악!!!!”
독고령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또 다시 날뛰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녀는 혈교주고 나발이고 상관없이 당장이라도 과거를 갈아엎고 싶었다.
’쪽팔려서 못 살겠네, 진짜! 시발! 시바아아아알!!!!’
그 때.
그녀의 난동 때문일까?
아침을 먹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하나둘씩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숙취는 없나보오, 다행이구려.”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무명이었고,
“령, 아직 자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 뒤에 위일청이 나타났으며,
“아, 령 매. 아침부터 활발하네, 후후.”
“그러게요.”
은관영과 백리소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두 여인의 등 뒤로…
“빨간 언니!!”
“소소야!”
남궁소소가 뛰쳐나와 독고령의 품에 안겼다.
“언니이… 보고 싶었어요, 흑…”
“왜 울고 그래…”
“흐아앙…!!”
갑작스레 자신을 보자마자 눈물을 터뜨리는 남궁소소를 보고 독고령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다친 덴 없어? 괜찮아?”
“네… 흑.”
“뚝. 그만 울어. 이따 목 매여서 밥 먹기 힘들겠다.”
“네…”
“코 풀고, 자. 흥!”
“흥!”
자신의 소매를 내주며 남궁소소의 눈물을 닦는 그녀를 보고 백리소현이 웃었다.
“후훗, 령 매도 어느새 애보기가 익숙해졌네?”
“… 왜?”
“아니이. 그 령 매가 모성애를 품은 거 같아서 뭔가 보기 좋네~”
“흐엑?!”
“그러게요오. 언제 엄마가 돼도 안 이상하겠네요오.”
“아… 아니이… 그…”
독고령이 당황하자 위일청이 피식 웃었다.
“령은 아마 좋은 부모가 될 겁니다.”
“이… 일청은 잠시 빠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욧!”
“뭐야뭐야. 령 매랑 위 오라버니랑 수상해? 설마…”
“아… 아니야!”
독고령의 눈이 뱅뱅 돌아 혼란이 극에 치달 즈음.
“소문주 후보.”
“네.”
“맹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일찍 오셨네요.”
은관영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보고를 한 하오문도가 자리를 피했다.
그 말을 듣고 독고령은 남궁소소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웃었다.
“니네 아빠 왔단다. 아빠 보러 갈래?”
“네!”
독고령이 남궁소소를 안아들자, 검후와 무명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객잔의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서자…
“”무림의 영웅을 뵙습니다!!!””
“… 와 씨 뭐야.”
오와 열을 맞춘 한 무리의 무인들이 일제히 독고령과 일행을 쳐다보며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그 무리의 제일 선두에 서있던 남궁진이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무림의 영웅을 뵙소. 독고 여협, 위 대협, 태극삼검, 은 여협, 백리 여협,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도와주신 하오문과 검후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소. 맹주로서, 가주로서, 그리고 아비로서.”
“뭘 이런 걸 다…”
남궁진이 고개를 들고는 무인들의 사이사이 위치한 화려한 장식의 사두 마차를 가르켰다.
“영웅들을 맞이하기 위해 조촐하지만 연회를 준비해뒀소이다. 부디 거절치 말아주시오.”
누군가에게 이런 극진한 환대를 받는 게 익숙치 않았던 독고령은 당황한듯 위일청을 쳐다보며 물었다.
“… 어쩌죠, 일청?”
“일단 가봐야겠네요. 거절하기도 힘들어 보이고요.”
“…”
혹시라도 빠질 방법이 없을까 독고령이 고민하고 있었으나…
“언니, 같이 가요!”
남궁소소가 독고령을 붙잡았다.
“하아… 그래.”
그렇게 독고령은 무림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