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2 17장. 애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 (18)
“오랜만이다, 새끼야.”
“… 예?”
“아…”
말을 내뱉는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독고령은 입을 틀어막았다.
‘이 놈의 주둥이 진짜…’
자신의 입을 서너번 후려치고는 독고령이 머리를 긁적이며 급하게 둘러댔다.
“그… 아니… 어두워서… 아는 얼굴이랑 닮았네요….”
“아, 그렇구려. 말투가 춘부장과 닮아서 놀랬소.”
“…”
‘내가 독고진이다, 새끼야’가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아내고 독고령은 남궁진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왔어… 요?”
“감사를 표하러 왔소. 방금 검후님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대가 큰 도움을 주었다 들었소. 딸 아이를 잘 보살펴주기도 했다고 들었고, 또… 아버지의 절기를 이어받았다고도 들었소.”
남궁진이 다시 한 번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감사하오. 전 맹주로서, 남궁세가의 가주로서, 그리고… 한 딸 아이의 아비로서 어찌 갚아야할지도 모를 큰 은혜를 입었소이다.”
“… 뭘 그런 걸 가지고.”
“…”
“…”
말이 끝나자 둘 사이의 대화에 침묵이 깃들었다.
“뭐, 따로 할 얘기는 없으시오?”
“없는데… 요?”
“바라는 거라든가… 뭐든 말하시오. 남궁세가라고 하면 오대세가의 필두. 원해서 쌓은 재물은 아니지만, 재물은 많소. 그대의 무공이 뛰어나긴 하다만 필요하다면 영약이라도…”
“필요 없어… 요.”
독고령은 빨리 남궁진이 사라지길 바랬다.
계속 대화를 나누다가 또 다시 말실수가 나올까 두렵기도 했고 빨리 남궁소소나 다른 이들의 안위를 확인한 뒤, 위일청의 품에서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 아무 것도 필요없다고 하니 참으로 무림에 큰 홍복이오. 이런 협객을 몰라보고 본 모가 추포령을 내린 과거가 부끄럽소.”
“아니, 뭐. 그냥 대충 다른 놈들 얘기 듣고 그랬겠지. 크게 신경 안 써… 요.”
“허허… 참 신기하구려.”
“뭐가요?”
“얘기를 나눌수록 그대의 춘부장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구려.”
“… 그럴 수 있지.”
독고령이 노골적으로 귀찮은 기색을 내보이자, 남궁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많이 피곤하신듯 하오. 하긴… 본 모가 눈치가 없었구려.”
“… 아니에요.”
“주무시고 남은 얘기는 내일 합시다.”
“엑? 남은 얘기가 있어요?”
“그냥 가려고 하셨소?”
당황하는 독고령보다 오히려 남궁진이 당황하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다름 아닌 혈교주를 잡은 일이오. 부디 독고 소저의 혜안을 빌려주시길 간청하오.”
“아… 아니…”
“부디 청을 거절하지 말아주시오.”
“정말 미안하지만, 이번 일은 거절…”
“다른 분들은 이미 수락하였소.”
“…”
“그럼 내일 다시 뵙겠소, 독고 소저.”
떠나는 남궁진의 등을 보며 홀로 남은 독고령은 허탈한 듯 객잔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 아이고, 시발. 팔자에도 없는 혈교주 하나 조졌다고 이게 무슨…”
“고생 많았소, 동업자 양반.”
“시발, 깜짝아!!!”
갑자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독고령이 화들짝 놀라며 유성도를 뽑아들었다.
“좀, 새끼야! 소리 좀 내고 다니자, 제발!!”
“… 미안하오, 습관이라…”
“와, 시발. 진짜 음침한 새끼. 와…”
“다음엔 헛기침이라도 해드리다.”
“그래주면 고맙겠다, 진짜로. 그래서… 다친 데는 없고?”
“없소. 동업자 양반은 어떻소?”
“나는…”
육체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아니, 상처조차 없었다.
다만 자고 일어난 뒤 벌어질 일이 두려울 뿐이지.
“… 너 빨리 돌아가라. 그리고 죽을 때까지 합비에는 신경 꺼. 내 소식도 신경 끄고.”
“이미 들었소.”
“ㅁ… 뭘?”
“동업자 양반이 그… 음…”
무명답지 않게 신중히 말을 고르는 모습을 보고 독고령의 마음 속에 스멀스멀 불안감이 차올랐다.
“… 무림의 안녕을 위해 한 몸 희생했다고… 알고 있소…”
“무명, 부탁이 있다.”
“… 하시오.”
“나 좀 죽여주라.”
“…”
독고령의 공허한 말을 듣고 무명은 참으로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탁자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올렸다.
탁.
“… 독한 백주요. 술 동무가 필요하오?”
“모르겠다, 시발…”
“… 힘내시오.”
“위로하지 마, 새끼야. 더 처량하니깐…”
“먼저 들어가보겠소. 너무 많이 마시지 않길 바라오.”
“… 오냐.”
그렇게 무명마저 올라가고, 홀로 남은 독고령은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시발…’
내일 날이 밝고난 뒤, 어찌 고개를 들고 살 지 걱정하며.
*
독고령과 헤어진 뒤, 위일청은 홀로 잠을 청하게 되었다.
“소소 아가씨는 저희가 데리고 잘게요. 위 오빠도 피곤하셨을텐데 어서 주무세요.”
“네, 관영. 맹주님한테 전서는…”
“보내뒀어요.”
“그렇군요.”
“맹주님이 오늘 내로 오시든, 오지 않으시든 아무튼 모르겠어요오. 일단 잘래요. 피곤해 죽을 거 같아요오.”
“맞아. 관영이는 좀 자야해. 소소 아가씨가 납치된 뒤로 제대로 잔 적이 거의 없었지.”
“먼저 들어갈게요오…”
“잘 자요, 관영.”
“네에.”
은관영이 소소를 껴안고 먼저 방으로 들어가자, 그녀를 뒤따라 백리소현도 손을 흔들며 위일청과 헤어졌다.
“일단 내일 다 얘기하자, 오라버니.”
“그래요, 소현.”
“잘 자…”
그렇게 홀로 남은 위일청은 잠시 객잔을 둘러보았다.
‘령은… 좀 걸리겠죠.’
스스로 생각해도 오늘은 참 여러 일이 있었고, 위일청 또한 몸에 쌓인 피로가 느껴졌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강시의 무리들을 쓸어버리고 돌아와서는 독고령과 셀 수 없이 많은 정사를, 그것도 남들이 다 보는 대로변 앞에서 했으니…
‘… 자다 보면 알아서 오겠죠.’
위일청도 피곤함에 지쳐 결국 방에 들어가 먼저 눈을 감았다.
“으헤헤… 일처엉~”
술에 취한 독고령이 자신을 깨우기 전까지.
“으헤헤… 일처엉~”
“으음…”
“빨리 일어나요오. 왜 자고 이써… 내가 왔는데? 응응?”
“… 령?”
위일청이 멍한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자, 가장 먼저 느낀 건 코를 찌르는 술냄새였다.
“윽… 령, 술 마셨어요?”
“네에… 좀 마셔써요. 헤헷…”
“… 조금이 아닌듯 한데요?”
“에이~ 조금이였어요. 진짜로오~”
흐느적거리며 자신의 배에 독고령이 안기자, 위일청은 엉거주춤 그녀를 안았다.
“깨워서 미안해요, 일청. 근데에… 일청이 내가 잘 자리를 안 만들어뒀으니 어쩔 수 없었어.”
“… 술은 적당히 마시라니깐요, 령.”
“헤헷… 빨리 안아줘요.”
“하아… 이리 오세요.”
위일청이 독고령의 허리에 손을 넣어 껴안고 다시 잘려고 눕자, 그녀가 버둥거렸다.
“으히힛. 간지러워요, 일청.”
“조금만 참아요, 령. 그리고 어서 눈 감고 잡시다.”
“뭐예요? 저 여기 있는데 바로 잘 거예요?”
“… 그럼요?”
“이야기 좀 하다 자요, 일청.”
“…”
“싫어요?”
독고령이 휙 돌아누워 자신을 바라보자, 위일청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술 냄새나요, 령. 크큭.”
“일청 때문에 마신 건데요?”
“저 때문에요?”
“씨이… 생각하니깐 또 짜증나요.”
“… 아까 그 대로변에…”
“으아아아!! 안 얘기할래요. 얘기하지 마요!!”
“령이 얘기 좀 하다 자자매요?”
“싫어요. 싫어졌어요.”
“크큭.”
위일청이 독고령을 껴안자, 그녀가 또 다시 버둥거렸다.
“숨 막혀요.”
“귀여워서 그래요. 조금 참아요, 령.”
“… 알았어요.”
그렇게 잠시동안.
위일청은 독고령을 껴안고 있었다.
독고령은 위일청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는 그의 콩닥거리는 고동소리를 듣고 있다가 문득 그의 옷깃을 붙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일청.”
“네, 령.”
“… 오늘 있었던 일. 합비에 다 소문나겠죠?”
“… 아마도요. 관영이한테 부탁해서 소문을 최대한 막아달라고 부탁해보겠지만…”
“그럼 이제 다들 알겠네요.”
“네?”
“… 이제 일청은 내 꺼란 사실을요.”
“…”
“아니다. 반은 관영이 주고, 다른 반은 소현이도 줄게요.”
“그럼 령한테 남는 게 없는데요?”
“그런… 가? 헤헷.”
배시시 웃는 독고령을 보며 술만 먹었다하면 사고를 치는 그녀가 걱정돼서 음주를 막았지만, 가끔씩 이런 모습을 보기 위해서라면 술을 허락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청. 일처어엉~”
“네, 령. 듣고 있어요.”
“… 책임져요.”
“네?”
독고령의 손이 올라와 위일청의 두 뺨을 감쌌다.
“다 일청 때문이에요.”
“…”
“일청이 나한테 사랑을 가르쳐줬어요. 그래서 이제 나는 독고령이야.”
“령은 내내 령이었죠.”
“아뇨. 조금 달라요.”
“뭐가 다른데요?”
“음…”
독고령이 그의 뺨을 감싼 손을 들어 위일청의 눈썹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비밀이에요, 히힛.”
“풉… 많이 취했나봐요, 령.”
“아니에요. 나 멀쩡해. 진짜로.”
“취한 사람이 그런 말 많이 하더군요, 크큭.”
“아닌데에, 진짜 아닌데에…”
“사랑해요, 령.”
갑작스레 위일청이 사랑한다는 말을 하자,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독고령의 손이 멈췄다.
“… 나도 사랑해요, 일청.”
“그럼 이제 우리 잘까요?”
“… 조금만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무슨 얘기요?”
“다른 건 다~ 비밀인데요… 나랑 약속해요, 일청.”
“어떤 약속이요?”
“… 날 여자로 만들어줘요.”
“네?”
독고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위일청에게 말했다.
“다 끝나면… 더는 강호를 돌아다닐 일이 없어지면요… 오늘 일도 있잖아요? 위일청의 책임이 커요. 일청만 아니었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거야.”
“그런가요?”
“네. 그러니깐…”
독고령이 그의 옷깃을 꼬옥 붙잡으며 중얼거렸다.
“나를 여자로 만들어줘요.”
“령은 이미 여자잖아요?”
“으으응.”
독고령이 고개를 가로젓더니 위일청의 턱 끝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 일청의 애가 가지고 싶어졌어요.”
“…”
“일청이랑 닮은 아들이 있으면 좋겠어요.”
“저는 령을 닮은 딸이 있으면 좋겠는데요?”
“그럼 둘 낳을까요??”
“… 낳는 건 령인데요. 괜찮겠어요?”
“히힛, 만드는 건 일청인데요?”
“크큭, 내일 자고 일어나서도 령이 기억하고 있으면… 그래요.”
위일청이 독고령의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령이 내 애를 낳아주면 좋겠어요.”
“히힛…”
그의 입술이 닿은 이마를 간지럽다는듯이 손으로 매만지며 독고령이 대답했다.
“네. 약속했어요?”
“그래요. 약속.”
“이제 진짜 끝! 자도 돼요.”
독고령이 위일청의 팔을 베개삼고는 한 다리를 그의 다리 위에 올리며 품에 안겼다.
“잘 자요, 일청.”
“령도 잘 자요.”
“네에…”
위일청이 독고령의 머리를 껴안고 눈을 감았다.
약간의 주향과 독고령의 기분 좋은 체취 때문일까?
위일청은 금세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방 안에는 새근거리는 숨소리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