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와 색마-171화 (171/225)

EP.171 17장. 애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 (17)

“위일청을 사랑해요.”

막상 말을 내뱉긴 했으나, 독고령은 검후의 눈치를 슬며시 살폈다.

“…”

“무슨 대답이라도 기대했더냐?”

“… 안 이상해요?”

“세상에는 가끔 표리가 부동하여 속마음을 전혀 알 수 없는 이가 있더구나.”

검후가 피식 웃으며 독고령을 바라보았다.

“허나 그런 자가 있는가 하면 표리가 일치하여 속마음이 그대로 겉으로 드러나는 이도 있더구나. 너 같은 아이 말이지.”

“… 제가 그랬어요?”

“고작 일주일 못 만나서 세상 잃은 표정을 짓고 내가 마치 천마라도 된다는듯이 내내 덤벼들던 아이가 누군지 기억이 안 나는구나.”

“흐엑?!”

독고령이 당황하며 손을 내젓자, 검후가 천천히 웃음을 거두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농지거리는 이 쯤 해두고… 그래서 뭐가 문제더냐? 위일청도 너를 사랑하고, 너 또한 위일청을 사랑하는데.”

“… 안 이상해요?”

“무엇이?”

“… 전 남자였잖아요.”

“지금은 여자인데 뭐가 문제더냐?”

“남자일 때의 은원이 아직도 응어리져서 가슴 속에 남아있고요.”

“네가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니고?”

“… 네?”

“부처님께서 남기신 말씀 중에 이런 말이 있노라.”

검후가 독고령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고통이 너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네가 그 고통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

“복수는 누가 품고 있던 것이더냐?”

“… 저죠.”

“남자였던 사실을 들키면 위일청에게 사랑받지 못 할까 걱정하는 것은 누구더냐?”

“… 그것도 저네요.”

“남자였던 사실을 놓기 싫더냐?”

“… 그것도 저잖아요.”

“포기하면 더 이상 네가 아니겠구나.”

“그게 어떻게…”

“생각해보거라. 네가 독고진이었던 것을 아는 자가 중원에 얼마나 있더냐?”

“5명 정도 있네요.”

“그 중에 입이 가벼워 이미 다른 이에게 그 사실을 말했을 이는?”

“… 없어요.”

은약벽은 정보문파인 하오문의 수장답게 비밀을 잘 엄수하는 여인이었다.

운영은 평소 깝죽거리는 모습을 잘 보여주긴 했지만, 기개가 있는 사내였다.

약속을 어기리란 생각은 크게 들지 않았다.

그리고 무명을 떠올릴 때면 과묵함이 먼저 떠올랐으니 그 또한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5명 중에 나와 원청 그 놈도 포함되어 있겠지?”

“네.”

“본녀야 뭐 환골탈태를 했지만, 수명이 늘어났을 지는 잘 모르겠구나. 숨이 붙어있는 동안,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노라 약조하마. 남궁원청 그 놈은 천마의 상처 때문에 골골 앓던 놈이니 조만간 가겠구나. 다른 세 명 또한 약속을 잘 지킨다면 그대가 이대로 독고령으로 살더라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

“네가 포기한다면, 네가 이대로 위일청에게 숨긴다면. 아무도 네가 독고진이었음을 모르노라.”

검후의 말을 듣고 독고령은 새삼스레 다시금 깨달았다.

그녀가 독고진이었음을 아는 이는 중원에 고작 5명 뿐이었다.

그리고…

“복수 또한 마찬가지노라. 네가 망설이는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가는구나. 복수를 포기하자니 당문이 눈 앞에 아른거리더냐?”

“… 그것도 모르겠어요.”

“네 마음인데 어찌 모르더냐?”

“저는…”

독고령은 욕조의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다시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얼굴에서, 죽은 지 오래된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려금 애썼다.

“… 모르겠어요.”

“음?”

“제 가족은 모두 당문의 손에 죽었어요. 저는 그 복수를 위해 강호에 몸을 던졌고요. 근데 막상… 당가위가 죽은 걸 보니깐요.”

독고령의 눈이 흔들렸다.

“…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요. 여전히 당문을 떠올리면 그 날, 가족이 죽은 날의 산 풍경이 떠올라요. 그런데…”

독고령이 괴로운 듯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눈 앞에 위일청이 있으니깐 그런 기억들이 다 사라졌어요. 지금 이렇게 혼자 있을 때는 당문에 대한 복수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도… 좀 이따 일청을 보면 다시 이 마음이 사라지겠죠.”

“행복하구나.”

“… 행복해요. 이게 행복인가보죠. 이게 남들이 사는 거겠죠. 근데 말이죠…”

독고령은 답을 애원하듯, 검후에게 물었다.

“제가 행복해져도 될까요?”

“… 계속해보거라.”

“죽은 가족들을 잊고, 이대로 독고령으로 살아도 될까요? 당문이고, 모용세가고 다 잊고… 그냥 이대로… 적당히 산 구석에서 쳐박혀서 위일청과 함께…”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구나.”

“무슨…”

갑자기 자신을 비난하자 불현듯 화가 난 독고령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시선에 자신보다 훨씬 화난 듯 보이는 검후의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령아야, 답답한 아이야.”

“뭐가 답답한데요?”

“어릴 적 부모를 여의었다 한들 그 사랑을 잊어버린 것이더냐?”

“갑자기 그게 왜…”

“부모란 존재는 자식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이 되는 이다. 자식의 분노는 부모의 분노와 슬픔이 되지. 당정의 목을 들고 부모의 묘에 찾아갈 셈이더냐?”

“그럴 생각으로 강호에 나왔어요.”

“위일청과 함께 찾아가는 것이 더 기쁠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더냐?”

“…”

“어느 쪽이 더 부모가, 가족이 기뻐할 지 너는 모르겠더냐? 그럼 소소는 왜 구하려고 했더냐?”

독고령이 대답하지 못 하자, 검후는 계속하여 그녀를 질타했다.

“소소를 납치했으리라 생각되는 이를 다 죽이기보다, 먼저 소소를 구하기로 택했지. 왜 그랬더냐? 그게 더 행복한 길임을 알고 있지 않더냐.”

“… 알고 있죠. 하지만 소소는 가족이 살아있잖아요.”

“네 가족은 더 이상 천하에 없더냐?”

“없…”

“없다고 하지 말거라.”

“…”

“피가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그보다 더 강한 유대감으로 가족이 된 이가 네 눈 앞에 있노라. 가벼운 말로 본녀의 인생을 쉬이 부정하지 말거라.”

독고령은 문득 주하의 비밀을 알게된 날 밤, 그 날 밤의 검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은 자식을 걱정하는 어미의 표정 그 자체였다.

“… 죄송해요. 근데 저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네가 가족처럼 여기는 자는 이미 있지 않더냐.”

“…”

“모든 보타문의 문도가 본녀를 어미처럼 여기지는 않더라도 본녀는 그들을 딸 아이처럼 여기고 키웠노라. 그러니 문도들이 고맙게도 나를 어미처럼 여겨주는 것이겠지.”

검후가 일어나 좁은 욕조에 물결을 일으키며 독고령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독고령의 머리를 작지만, 참 넓은 가슴으로 껴안으며 토닥여주었다.

“너 또한 그러하다.”

“… 네?”

“일찍 만나지 못 해 본녀가 미안하구나. 힘든 시기를 홀로 보내게 하여 미안하구나, 령아야.”

“아니… 그…”

“스스로 확신이 없다면 본녀가 대신 말해주마.”

검후가 독고령의 두 뺨을 감싸고는, 포근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너는 행복해져도 된다.”

“아…”

“본녀가 단언하마. 그리고 바라노라. 네가 행복해지기를.”

“아아…”

“그리고 너의 행복을 바라는 이가 본녀 혼자일 리가 없지.”

검후가 조심스레 독고령의 머릿결을 쓸어넘기며 나직이 말했다.

“소현 아가도, 관영이도, 위일청도, 소소도. 아마 너의 비밀을 알고 있을 세 명도, 남궁원청도. 모두 너의 행복을 바랄게야.”

독고령은 저도 모르게 가슴 속에 뜨거운 뭔가가 차올랐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자, 검후가 다시 한 번 독고령을 껴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중얼거렸다.

“너는 행복해져 된다, 령아야.”

“네…”

욕조의 물은 어느새 차게 식었지만, 독고령은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

“…”

“본녀 앞에서 눈물을 보인 것이 부끄럽더냐?”

“아니요, 뭐…”

“풉, 그런 행동을 보면 영락없이 그 나이대의 여자아이 같구나.”

“흐엑?!”

“크게 신경쓰지 않으니 옷이나 입거라. 그보다 더한 꼴도 봤거늘.”

“…”

한바탕 검후 앞에서 제대로 울어재끼고난 뒤, 독고령은 약간의 어색함에 머뭇거렸으나 정작 검후는 그녀의 말대로 크게 신경쓰지 않는듯 했다.

독고령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자, 먼저 옷을 다 입은 검후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령아야.”

“… 네.”

“앞으로는 어찌할 생각이더냐?”

“…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좀 더 생각도 해보고요.”

“그러거라. 결국 결정하는 것은 네가 해야할 일이니 말이지.”

옷매무새를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검후가 나가기 전 독고령에게 다가와 그녀를 안아주었다.

“왜 또…”

“허나 기억하거라, 령아야. 정 힘들거든, 오늘처럼 본녀에게 찾아와 안기거라.”

“…”

“그럼 본녀가 너의 고민을 들어주마.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본녀는 그 선택을 존중할게야.”

검후가 독고령을 놓아주고 그녀를 보며 포근하게 웃었다.

“너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본녀는 이제 너를 내 딸아이 중 하나로 생각하마.”

“… 딸아이는 무슨.”

“싫더냐?”

검후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자 독고령이 툴툴거렸다.

“… 나이로 치면 손녀죠.”

“크큭, 고얀지고. 먼저 가 보마.”

“… 눼.”

검후가 먼저 밖으로 나서자, 홀로 남은 독고령은 옷을 다 입고도 한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 행복이라.’

원래 위일청의 얘기를 꺼낸 것은 이대로 복수를 계속하다 그가 죽을까 걱정되서였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를 따져들자, 독고령은 깨달았다.

‘… 내가 독고진이였던 게 문제네.’

독고진을 이루고 있는 근간이,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독고령을 이루고 있는 근간이, 위일청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 둘이 서로 상충하고, 대립하여 생긴 문제였다.

그 동안 독고령은 둘 다 놓을 생각이 없었다.

복수는 하고 싶으니깐 하고, 위일청도 사랑하니깐 그와 함께 지내고.

하지만 검후와 얘기를 나눈 뒤, 새로운 선택지를 하나 얻었다.

‘아예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라…’

한 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것이 독고령의 성미였다.

하지만 새로 생긴 선택지가 썩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깨닫고 독고령은 피식 웃었다.

‘… 일생을 살아온 것보다 위일청과 지낸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지나보네.’

참 많이 바뀌었구나 생각하며 독고령이 밖으로 나섰다.

밤새 피곤했는지 어느새 사람들이 사라지고 침묵만이 남은 객잔의 1층은 불이 꺼진 채 냉기만 남아있었고,

“이제 오셨소?”

그 침묵 속에 누군가 입을 열었다.

“… 누구야?”

“그대가 구해준 딸 아이의 아비.”

“어?”

“감사를 표하러 왔소.”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지 제법 긴 시간이 지난 것과 그의 얼굴이 피곤에 가득 쩔어 수척해져있었기에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 했다.

“남궁세가의 가주이자, 전 무림맹주. 그리고 소소의 아비, 남궁진이라 하오.”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이는 그 모습을 보고 독고령은 반가움에 입을 열었다.

“야, 오랜만이다. 새끼야.”

“… 예?”

“아…”

객잔 내에 싸늘한 침묵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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