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와 색마-170화 (170/225)

EP.170 17장. 애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 (16)

수증기를 뚫고 알몸이 된 검후가 안으로 들어오자, 독고령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몸을 가렸다.

“… 무슨 할 얘기요?”

“그냥 이런저런 얘기 때문에 그렇노라. 다리 좀 벌려보거라, 안에 들어가게.”

“아니… 굳이 좁은데 이 사이로…”

“내가 직접 벌리고 들어가리?”

“…”

독고령이 욕조의 안에서 가랑이를 손으로 가리고 다리를 벌리자, 검후가 그 사이로 들어가 자리잡고 앉았다.

“하아… 좋구나.”

“…”

“턱이라도 올리고 싶으면 올리거라. 그 정도는 용서해주마. 보타문에 있을 적에도 다른 문도들이 본녀를 껴안는 것을 참 좋아했노라.”

“… 애 취급이라도 받고 싶으신 거예요?”

“후훗, 그럼 본녀가 너를 껴안아주리?”

“…”

묘하게 기분 좋아보이는 검후를 바라보며 독고령은 잠시 망설이다가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 검후의 머리 위에 턱을 올리자, 몸의 긴장이 탁 풀렸다.

아무리 속에 들어찬 게 할머니라고는 할지언정 어린 아이의 몸으로 돌아간 검후의 몸은 말랑말랑하기 그지 없었다.

이런 몸으로 용케도 그런 거대한 내공을 품고 있다 생각하며 독고령은 별 생각없이 자연스레 손이 움직이는 대로 검후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남궁소소를 대하듯이.

그러자 검후가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볼까지는 허락한 적 없거늘.”

“… 죄송합니다. 습관적으로 그만…”

“됐다.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 이 정도는 용서해주마.”

고개를 휙 뒤로 젖히고 편하게 머리를 가슴에 기댄 뒤, 발을 첨벙이는 검후를 보고 있자 독고령은 그녀가 정말 어린 아이가 아닌가 의심이 됐다.

“후후… 정말 기쁜 날이야. 네가 큰 일을 해주었다, 령아야.”

“그렇게 좋으세요?”

“가끔 보면 네게서 대협의 풍모가 느껴진단 말이지. 그리 대단한 일을 해놓고 아무렇지 않듯이 얘기하는 걸 보고 있자니 참 신기하구나.”

“대협 소리는 별로 듣기 싫은데…”

“그럼 여협이라 불러주리?”

“… 그것도 싫어요.”

“크큭, 그래.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구나. 진정 대협의 풍모야.”

“…”

검후의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독고령은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이 할매가 오늘 무슨 일이 있나…’

그렇게 한참 욕조의 물을 찰박거리던 검후는 문득 독고령에게 손을 내밀어보였다.

“… 잡아달라고요?”

“아니. 완맥을 좀 짚어보려고 하노라.”

“갑자기요?”

“그냥 만약을 대비해서다. 아무튼 혈교주 놈이 네 몸에 들어갔던 것은 사실이니 혹여나 잔재가 남아있을까 싶어서 걱정되는구나.”

“아… 네.”

독고령이 순순히 팔을 내주자, 검후가 그녀의 완맥을 붙잡아 기를 흘려보냈다.

검후의 청량한 기운이 몸 안을 훑자 독고령은 약간의 간지러움을 참아내며 그녀의 기운이 일주천 하는 것을 견뎌냈다.

“… 다행히도 아무 이상 없구나.”

“그렇죠? 혹시 몰라서 저도 아까 한 번 살펴봤는데 괜찮더라고요.”

“흐음… 혹시 혈교주와는 무슨 일이 있었더냐?”

“그냥 뭐…”

심상의 세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할까 하다가 독고령은 문득 자신의 내면에서 만난 독고진의 심상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 별 일 없었어요.”

“뭔 일이 있긴 있었나 보구나.”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네가 숨기고 싶은 것도 분명 있을테지.”

“그럼 왜 물어봤어요?”

“그냥 물어봤노라. 네가 어린 아이도 아니고 알아서 잘 하겠지.”

“오늘 참 이상하시네요.”

“너는 어떻더냐?”

“네?”

검후는 문득 독고령의 다리 사이에서 나와 욕조의 반대편에 등을 기대고 그녀를 마주보며 물었다.

“오랜 원수를 갚았을 터인 너는 어떻더냐? 자신의 손으로 이룬 것은 아니지만, 당가위도 죽고, 당문의 가장 큰 협력자인 혈교주를 잡았구나.”

자신이 독고진인줄 알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을 듣자, 독고령은 멍하니 입을 쩍 벌렸다.

“… 알고 있었어요?”

“속여서 미안하구나. 남궁원청이 말해준 게 아니라 본녀가 알아냈노라.”

“… 거짓말 같은데.”

“믿지 않아도 본녀에게 별 수 없구나.”

남궁원청에게 들었단 얘기는 끝까지 안 할 셈이었는지 검후가 모른 척하자 독고령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아니, 잠깐만요. 그… 그럼…”

“걱정말거라. 본녀는 음… 이해할 수 있노라.”

“ㅁ… 뭘요…”

“본녀도 몇 십년을 지킨 처녀를 위일청에게 받치는 순간 그 날부로…”

“캬아아악!!!”

독고령이 욕조를 뒤엎었다.

“…”

“진정되었더냐?”

“더 이상 아무 말도 묻지 마세요. 제발…”

“… 물을 생각은 없었거늘…”

“으으으…”

“생각해보니 본녀보다 다른 이가 너에게 많이 묻지 않겠더냐? 예를 들면 아까 대로변의 그 일로…”

“캬아아악!!!”

독고령이 다시 날 뛸 징조를 보이자, 검후가 급하게 내공을 끌어올려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좀 진정하거라!”

“캬아아아아아아아악!!!!”

처음 여자의 몸으로 변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마음이 무너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독고령은 광증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체감 중이었다.

“… 본녀가 미안하구나. 너도 스스로 품고 있는 고민이 많을 터인데 홀로 너무 기뻐했나 보구나. 네 한 몸 희생하여 무림의 안녕을 위했음은 본녀가 잘 기억…”

“그마안…”

“알았다.”

“끄어어…”

독고령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 검후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 그래서 정녕 아무 일도 없었더냐?”

“많았죠… 일 참 많았죠…”

“… 그거 말고 말이다. 혈라가 너에게 대법을 시행했음은 알고 있노라.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없었더냐?”

“심상의 세계에 끌려갔어요… 제 마음 속 심상이라던데…”

“허어, 참으로 신비한 사술이도다.”

“그 곳에서 독고진을 만났어요.”

“응?”

독고령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검후에게 순순히 심상의 세계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다 실토했다.

10인의 혈교주, 독고진, 불타는 대지와 눈보라가 내리치는 자신의 심상.

막상 속내를 털어놓자 신기하게도 독고령은 자신의 마음이 편해졌음을 깨달았다.

모든 것을 다 얘기한 뒤, 독고령이 중얼거렸다.

“… 뭐 그런 일이 있었어요. 신기하네요. 털어놓고 나니깐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네요.”

“비밀이란 게 다 그런 법이지.”

“네?”

“네가 떠안고 있던 비밀이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지 않더냐.”

“… 하긴, 그렇죠.”

“그 얘기는 조금 이따가 하고… 10인의 혈교주라…”

잠시 눈을 감고 있던 검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초대 혈라는 도인이었다. 알고 있더냐?”

“… 그 새끼가 지 입으로 말하던데요?”

“그렇구나. 혈라 그 자의 영혼육백에 대한 깊은 고찰이 결국 영혼육백을 더럽히고, 그걸 보존하여 다른 몸에 옮기는 사술로 발전하였겠지.”

“이게 왜 궁금하셨어요?”

“본녀의 의무였으니깐.”

“의무요...?”

“본녀가 강호에 모습을 많이 드러내지 않았던 것은 다 이유가 있었노라. 역대 모든 보타문주와 소림의 방장은 대대로 혈교와 싸워왔거든.”

“왜요?”

“불가의 문파가 윤회 전생하는 사마외도의 무리를 눈 앞에 두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더냐?”

“아…”

가끔 까먹곤 했지만, 보타문은 불가 쪽의 문파였다.

불교의 기본 뼈대를 이루는 윤회 사상을 개인의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 혈라였으니 그의 존재가 이미 불문에 적대적인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혈교가 준동하고 어림 잡아도 천 년의 세월이노라. 그리고 그 긴 세월동안 보타문도, 소림사도 해내지 못 한 대업을 네가 이루었구나.”

검후가 욕조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보타문의 역대 문주와 소림의 역대 방장 대사를 대신하여 본녀가 대신 감사함을 표하마. 나중에 소림에도 따로…”

“아잇, 왜 이러세요. 부담스럽게…”

“그래도 감사함을 표하는 게 도리가 아니겠더냐? 따로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

“… 됐어요. 낯간지럽게.”

“후훗. 혹시 뭐든 원하는 것은 없더냐?”

“원하는 거요?”

“본녀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해주마. 필요하면 소림에 연락해서 대환단이라도 하나 구해주리?”

“… 그냥 뭐 소현이 환골탈태 시켜주면 그걸로 충분해요. 일청한테 절기도 계속 가르쳐주고…”

“그것만으로 충분하겠더냐?”

“…”

검후가 계속 거듭하여 묻자, 독고령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 뭐라도 요구해야 말이 끝날 거 같은데…’

하지만 독고령은 정말 다로 원하는 게 없었다.

무공은 이미 충분했고, 내공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냥 자기 주변에 있는 이들을 챙겨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으나 검후는 그게 부족하다 느끼는 듯 했다.

결국 독고령은…

“그냥 얘기나 좀 들어주세요.”

“음?”

“… 상담이라고 해야하나…?”

검후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요청했다.

독고령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한 번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뒤, 독고령은 왜 그제서야 무명을 처음 만났을 때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위일청이나… 소현이, 관영이한테는 못 하는 얘기지만… 검후님은 사정을 알고 있으니깐…”

“…”

“그걸로 갈음하죠. 안 될까요?”

“너만 괜찮다면…”

검후가 등을 똑바로 펴고, 독고령을 마주보며 언제나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띄었다.

“들어주마.”

*

막상 상담을 해달라고 해놓고 독고령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욕조의 물이 식는게 빠를 듯 하더냐? 아니면 너의 고민이 끝나는 게 빠를 거 같더냐?”

“… 그러게요. 뭐가 더 빠를지 모르겠네요.”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망설이게 하더냐?”

검후의 말을 들은 독고령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어떤 말이라도 다 들어줄 것만 같은 자애로운 그녀의 표정을 보고, 독고령은 결국 입을 열었다.

“… 독고진이요. 제 과거요.”

“아까 혈교주의 얘기구나.”

“… 네.”

혈라와 싸울 때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지만, 싸움이 끝난 뒤.

심상의 세계에서 만난 독고진이 독고령의 가슴 속에 의문으로 남았다.

일영기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익히며 남성의 자아와 여성의 자를 모두 하나로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심상의 세계에서 여전히 독고령과 분리되어있는 독고진을 마주치자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녀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대답 또한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뭐라고 해야지. 제 과거 아세요?”

“당문에게 큰 복수심을 가지고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노라.”

“… 맞아요. 당문이… 제 가족을 죽였죠. 그 놈들을 죽이려고, 스스로 복수를 이루려고 무림에 뛰어들었고요.”

“헌데?”

“… 저는 내내 혼자였어요 아니, 진짜 혼자는 아니었는데 계속 혼자라고 생각하고 행동했었죠. 모든 당문을 죽이면 그걸로 속이 후련해질 줄 알았어요. 그래서 여인의 몸이 되고 난 뒤에도 계속 복수를 위해 행동했고요.”

검후는 담담한 독고령의 말이 가슴 아팠다.

짧은 고백의 말 속에서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대충이나마 짐작이 갔기에.

“그런데 말이죠…”

독고령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 이제 혼자가 아니네요.”

“그래. 더 이상 혼자가 아니지. 이전에도 네가 말한대로 혼자가 아니었고.”

“제 마음 속에 아직도 독고진이 남아있었어요. 그건 아마 복수심이겠죠. 제가 살아온 과거고, 당문에 대한 원한이라고 생각해요.”

“… 계속 해보거라.”

“근데 아까 모든 게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당가위의 시체를 봤어요. 그 동안 몇 번이고 죽이고 싶었던 원수. 당문의 2인자니깐 분명 제 가족의 죽음에도 책임이 있는 놈이겠죠. 근데요…”

독고령이 검후와 눈을 마주쳤다.

“… 아무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복수란 원래 허망한 것이다, 뭐 그런 얘기를 듣고 싶은 건 아닌 듯 하구나.”

“그렇죠. 그 얘기는 너무 많이 들었어요. 제 마음 속에 독고진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저는 당문을 용서할 생각이 없어요.”

“그럼 무엇이 너를 괴롭히더냐?”

“위일청이요.”

독고령은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듯, 두 손을 들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 저는 복수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요. 하지만 그 복수심보다 더 크게…”

독고령이 크게 숨을 들이키고는, 토해냈다.

“위일청을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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