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9 17장. 애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 (15)
무림맹에서 장로들이 실토한 이야기를 다 듣고난 뒤, 남궁진은 이마를 감싸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궁소소의 위치를 아는 장로는 없었고, 당가위의 마수는 생각보다 더 많이 뻗쳐있었다.
“하아…”
맹의 상황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장로들 중 그에게 상납 한 번 안 받아본 자가 없었고 술에 타마시면 기분 좋아지는 약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그게 마약임을 깨달았다.
“한 문파의 장로란 자들이 어찌…! 하아…”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소.”
청성파의 장로, 청운이 민망하듯 고개를 숙이며 사죄하자 다른 장로들도 저마다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후우…”
남궁진은 연거푸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맹의 상황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그저 방관했던 자신의 멍청함과 장로들의 처분 여부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죄다 도륙내고 싶거늘…!’
이대로 모든 장로들을 처단한다면 남궁진의 속은 시원할테다.
하지만 세상사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이 곳에 모인 이들이, 당가위의 꾀임에 넘어가 잘못을 저지른 이들이 하나같이 각 문파의 배분이 높은 큰 어르신들이니 자칫 잘못했다간 다른 문파들과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주는 결코 왕과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이 아닌, 그저 정파를 하나로 모을 구심점에 불과했으니 더더욱 그 행보를 주의해야했다.
자식을 납치당한 검선 남궁진과 무림맹주 남궁진 사이에서 한창을 갈등하고 있던 와중…
“살수더냐?”
“그대가 맹주겠구려.”
상처 가득한 야행복의 거한이 인기척 하나 없이 회의실에 나타났다.
“어… 어느 틈에?!”
“예가 어딘 줄 알고 살수가…”
남궁진보다 한 발 늦게 살수의 존재를 알아차린 장로들이 당황하며 그를 보며 적의를 드러냈지만, 남궁진이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애검에 손을 올리며 남궁진은 그에게 물었다.
“누구시오?”
[살막의 수장이오.]
[… 전음으로 해야할 이유가 있었군.]
살막의 수장이란 말을 듣는 순간, 남궁진이 칼을 한 치쯤 뽑았다.
[이제 와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남궁소소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소. 검후님과 함께 하고 있고.]
그 말을 듣고, 남궁진의 눈이 커졌다.
[소소는…]
[아직 구하지 못 했소. 내가 간 쪽에는 없었지. 정말 미안한데 혹시 무림맹 본부를 벨 수 있소?]
[… 뭐?]
“창 밖을 보시오.”
전음을 끝마친 무명이 손을 들어 창 밖을 가르키자, 그 곳에는…
“… 저게 뭐요?”
“강시요. 아주 거대한 강시.”
“맙소사…”
“당가위 놈이 싸지르고 간듯한데 내게 저걸 상대할 무공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 곳으로 끌고왔소.”
“다른 양민들의 피해는 어찌하려고…!”
“…”
“맹에는 지금 많은 이들이 모여있소. 그들의 피해는 어찌 하려고…!”
“내가 생각이 짧았소. 이 곳으로 오는 길은 수하들에게 다른 양민들을 피신시키라 일러뒀으나 맹에 모인 이들을 지금부터 피신시키기엔 늦을 듯 하오.”
“…”
“도와주시오. 저 놈을 상대할 방법이 내겐 없소.”
무명은 담백하게 자신이 할 말만 딱 내뱉었다.
하지만 남궁진은 말만 듣고 그를 바로 신뢰할 수는 없었다.
누굴 믿고, 누굴 믿지 말아야할지 혼란스러웠다.
그 때, 무명이 입을 열었다.
“나를 믿지 못 해도 어찌할 수는 없소. 하지만 나에게도 방법이 없소. 하오문의 객잔 주변에서 검후님이 엄청나게 강대한 자와 싸우고 있소.”
“… 아까 느껴진 강대한 기운이 검후님 것이었군.”
“저 강시놈이 그 기운에 이끌려 향하려던 것을 강제로 이목을 돌린 것이오. 그리고 그 쪽은 시가지 방향이었기에 이리로 온 것이오.”
“…”
“어쩌겠소? 도와주시겠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또 다시 노력해보리다.”
도움을 요청하는 무명을 바라보며 남궁진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믿고 싶었다.
그냥 이 자를 돕고 싶었다.
협의지문이라 불리는 남궁세가에서 나고 자라고 배운 남궁진이었다.
곤경에 처한 자를 돕는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옳은 길을 걷는다.
그것이 남궁진 배운 협이었고, 그 협을 이루기 위해 쌓은 게 무였다.
하지만 맹주라는 자리에 올라서자 조금씩 스스로가 변했음을 이제 와서 깨닫자, 그는 눈을 감았다.
“광마 어르신의 말이 맞았소.”
“음?”
“사람은 쉽게 변하는군.”
남궁진이 마음을 정한듯 검을 뽑아들었다.
“막주. 혹여나 이게 함정이라면 그대를 베겠소.”
“그러시오.”
여전히 담담하게 말하는 무명을 보며 남궁진은 뒤돌아 장로들을 쳐다보았다.
늙으면서 추해진 한심한 인간들.
하지만 무공 하나만큼은 쓸만한 자들.
“장로들, 기회를 드리리다.”
“무슨 기회 말이오?”
“지금껏 저지른 그 패악들을 덮을 기회. 협객이 될 기회.”
“!!”
“나와 같이 저 거대한 강시 놈을 막는데 힘을 써주시오. 지금 맹 주변에는 이미 떠나버린 검후님을 구경하기 위해 너무 많은 인원이 몰려있소. 그리고 거대한 강시가 덮쳐드는군.”
“… 놈을 막는 모습을 보여 그들의 눈을 덮자는 것이군.”
“그렇소.”
“…”
장로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보고 남궁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리다. 나는 지금이라도 그대들을 모조리 참하고 싶소.”
“… 맹주.”
“더 이상 맹주라고 부르지 마시오. 이 일만 끝나면 나도 이 빌어먹을 맹주직을 떄려치우고 그냥 한낱 가문의 가주로 돌아가고 싶으니깐.”
“…”
“하지만 마음가는 대로 행하다가 백도무림의 평화를 깨고 싶지도 않소. 그대들이 하필이면 각 문파의 이름 있는 어른들이라 내 맘대로 베었다간 본가가 어찌될 지 쉬이 상상할 수 있소.”
“… 우리가 어찌하길 바라오?”
“해야할 일을 하시오. 원래 그대들이 해야했던 일.”
남궁진이 창 밖을 바라보며 어느새 훌쩍 가까워진 거대 강시를 보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래도 소싯적엔 다들 협객이 되길 꿈꾸셨을 것 아니오? 먼저 가겠소.”
창문을 박차고 먼저 뛰쳐나가는 남궁진을 보고 남은 장로들은 멍하니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 이를 어찌합니까?”
“이제와서 없던 일로 돌려주겠다는 순진한 말을 믿을 셈이오?”
“하지만 검후께서…”
“우리가 힘을 합치면 뭔들 못 하겠소?! 검선도 이제 맹주 직을 내려놓겠다 했으니…”
“참으로 한심하구려, 다들.”
챙!
검을 뽑아드는 소리가 들리자, 장로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 청운.”
검후에게 꾸지람을 듣고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청성파의 장로, 청운이었다.
“부끄럽지는 않소?”
“혼자 깨끗한 척 하지 마시게, 청운! 그대도 우리와 함께였어!”
“맞소. 나도 그대들과 함께였지. 그리고 가장 먼저 눈을 뜬 건 나 혼자 뿐이구려.”
청운은 초연한 표정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얼굴로 다른 장로들의 면면을 살피고는 코웃음쳤다.
“나는 이 일이 끝난 뒤, 돌아가 장문사형에게 내 죄를 고하고 참회동에서 내 삶을 마무리짓겠소.”
“…”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사문의 이름을 드높일 기회가 생겼구려. 본 도는 못된 꾀임에 넘어가 스스로 도인의 길을 포기하고 속세에 물들었으나 다른 이들은 맹주와 함께 양민들을 지켜낸 장로를 배출해낸 문파로 기억하겠구려.”
청운이 꾸짖었다.
“그래도 한 문의 장로란 작자들이 이제와서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가! 이미 그대들은 끝났어!”
“크윽…!”
“더는 추해지지 마시오. 지금 우리들의 꼬락서니보다 더 밑바닥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려 들지 마시오.”
“젠장.”
“먼저 가겠소.”
청운이 훌쩍 창문을 넘어 나서자, 남은 장로들은 더 이상 서로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그저 주먹을 꽉 말아쥔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는 화를 참아내듯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풉…”
다른 모든 장로들이 저마다 자신의 문파를 외치며 밖으로 나가는 꼬락서니를 보고, 무명은 결국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 했다.
*
“음란검 여협.”
“뒤진다, 진짜…”
“에이~ 걱정하지 마세요오. 내일 자고 일어나면 하오문에서 합비 일대를 기준으로 독고 소저의 업적을 방방곡곡 소문 낼테니깐요오.”
“소소 내려놔. 당장 내려놔.”
“제 생명줄을 함부로 내려놓겠어요오?”
“캬아아아악!!! 야, 소현! 네가 소소 좀 들고 있어, 제발! 한 대만 때리자. 제발!!”
“응? 음란검 여협, 어찌 그런 험악한 말을…”
“령, 가만히 있어요.”
“하으응… 이… 일청! 지금 민감하니깐 제발 좀…!”
“소소 아가씨 깨겠어요! 큰 소리 좀 내지 마세요!”
“네가… 아… 알았어요. 안 날뛸게요. 제발 그만 만져요, 일청. 나 진짜 죽어요…”
백리소현과 은관영 둘 다 합심해서 자신을 음란검이라 놀려대고, 그걸 막으려고 하니 위일청이 이곳 저곳 만져대는 탓에 독고령은 머리를 쥐어 뜯었다.
독고령이 위일청의 품에 아기처럼 안겨 멋대로 날뛰지 못 하는 것을 보고 백리소현이 웃으며 은관영에게 말했다.
“령 매 정도면 존(尊)급 정도는 되지 않을까?”
“에이, 무슨 소리세요. 혈교주도 잡았으니깐 못 해도 선(仙)급으로 해야죠. 음란검선! 캬아~”
“멋지네, 후훗.”
옆에서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둘을 쳐다보며 독고령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음란검이라니… 음란검이라니…’
지금이라도 당장 밖으로 나가 미친 척 날뛸까?
그럼 하다못해 음란검이란 별호 대신 광마란 별호를 다시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지, 시발. 이거 무림맹주가 정한다매.’
남궁진을 족쳐야한다.
그 생각이 들자, 독고령이 위일청의 가슴을 툭툭 쳤다.
“일청…”
“네, 령.”
“무림맹으로 데려다주면 안 돼요?”
“지금 그 꼴로요?”
“…”
문득 자신의 몸을 다시 쳐다보자, 독고령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방금까지 애액인지, 침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질질 흘려 흠뻑 젖은 옷.
게다가 옷은 엉망으로 풀어헤쳐져서 속살이 은근하게 드러나고 있고, 게다가…
다리 사이에서 계속 주르륵 흘러내리는 하얀색의 탁한 액체까지.
“지금 그 꼬락서니로 맹에 간다면 정말 음란검선이라 불릴 겁니다, 령.”
“… 씻고 가야겠네요.”
“맹에 급한 볼 일이 있나요?”
“엄청 급하긴 한데 일단 씻고 생각할게요.”
“그래요. 관영, 소현. 두 분도 령은 그만 놀리세요, 많이 힘들겁니다.”
“어머, 위 오빠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 예?”
“위 오빠도 이제 색마가 아니라 무림 제일의 공적을 퇴치했으니깐… 음… 소현 언니. 뭐가 좋을까요?”
“색존? 색선?”
“어감이 별로네요. 아무튼 오빠도 이제 색마라고 안 불리고 새로운 별호가 생기지 않을까요?”
“하아… 들어갑니다. 저도 씻어야겠네요.”
“같이 씻으면서 또 하려고요오??”
“흐엑?!”
은관영의 일침을 듣고 독고령이 몸을 움찔거렸다.
‘지… 지금 한 번 더 하면…’
독고령은 은근한 기대와 두려움을 담아 위일청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오늘은 더 안 할 겁니다. 지치네요.”
“아, 지금 령 매 아쉬워했다.”
“아… 아니거든!”
“역시 음란검선!”
“캬아아악!!!!”
욕조에 들어서고 따스한 물에 몸을 담근 뒤에서야 독고령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결국 위일청과는 따로 씻게 되었고, 홀로 남은 독고령은 물로 얼굴을 씻어내며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 혈교주를 잡았네. 당가위는 뒤졌고.’
뭔가 후련한 기분보다는, 허탈함만이 남았다.
정신 없는 와중에도 객잔 안으로 들어오며 싸늘하게 식은 당가위의 시체가 보였다.
뭐가 그리 기분 좋았는지 기분 나쁘게 쪼개고 있는 당가위의 얼굴을 보고…
“…”
독고령은 의외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아, 저 새끼도 결국 뒤졌구나’ 하는 이상한 허무함만이 속에 남았다.
독고령은 자신의 이 변화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불 같은 분노로 평생을 살아왔고, 마침내 마주친 원수였다.
‘내 손으로 직접 못 조져서 그런가?’
당가위라면 당문의 2인자, 이러니저러니해도 자신의 가족이 죽은 책임을 묻기에 충분한 작자였다.
헌데 왜 아무 생각도 안 들었을까?
“시발… 답답하네.”
“다 씻었더냐? 본녀도 들어가고 싶은데?”
“흐엑?! 그... 금방...!”
“됐다. 같이 씻자꾸나.”
욕실의 문을 열고 검후가 안으로 들어왔다.
“할 얘기도 있으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