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6 17장. 애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 (12)
여전히 심상의 세계에서 남아있던 독고령은 자신감이 넘쳤었다.
상대는 10인의 혈교주.
처음 혈교주가 심상의 세계를 핏빛으로 물들일 때만해도 그의 압도적인 힘에 마음이 꺾일 뻔했지만, 독고령의 옆에는 세상 그 누구보다 믿음직한 존재.
독고진이 함께하고 있었다.
광소를 터뜨리며 도기를 흩뿌리며 다니는 또 하나의 자신을 보며 독고령은 천군만마를 얻은 듬직함과 함께…
“아이, 시발! 걸리적 거리지 좀 마, 새끼야!!”
“네가 왜 내 도를 휘두르는 방향에 들어오냐, 개 같은 년아!”
“병신아, 좀! 존나 개판으로 싸우네, 진짜.”
“네가 맞추던가!”
“네가 맞춰!”
울화를 얻었다.
같은 도법, 같은 성격, 그야말로 또 하나의 나.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기에 최고의 아군이라 생각했으나 드러난 사실은 독고진이 최악의 아군이란 점이었다.
“이 개새끼들, 왜 안 뒤져!!”
“흐엑?!”
독고진이 휘두른 도가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자, 독고령이 급하게 피하고는 그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나 여기 있어, 미친 놈아!!”
“왜 거기 있어, 미친 년아!!”
“캬아아악!!”
“미친 년.”
처음엔 분명 괜찮았다.
달려드는 9 명의 혈교주.
독고진이 5명, 독고령이 4명을 맡으며 전선을 분리해 잘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 시발. 내가 옛날보다 더 셀 거 같은데?’
심상의 세계에서 의외로 혈교주들은 만만했다.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다.
4명도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자 독고령은 독고진이 걱정돼서 그를 돕기 위해 교대하자고 말했다.
“야, 내가 더 세니깐 5명 맡을게.”
“내가 더 센데?”
“병신아, 내가 더 잘 알아. 4명 맡아.”
“뭐래, 미친 년이?”
“아, 좀! 내 말 좀 들어, 새끼야!”
“너도 맞는다.”
“지랄한다.”
“…”
“…”
갑자기 자신을 향해 도를 휘두르는 독고진의 공격을 쳐내고, 독고령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와… 미친 새끼.”
“방해하지 마. 저건 내 먹이다.”
독고진이 으르렁대는 걸 보고 독고령은 넋이 나갔다.
과거의 자신, 독고진은 생각보다 더 미친 놈이었고, 앞뒤 없는 새끼였다.
결국 그와 합류해서 2명이서 한꺼번에 9명을 상대하는 방법이 제일 낫겠다 생각한 뒤로는 계속 이 모양이었다.
게다가…
“커헉!”
“으캬캬캭!!”
“존나 아프잖아, 미친 새끼야!!!”
퍼석!
독고진의 배가 혈교주의 배에 손톱이 꿰뚫리자, 그가 그대로 도를 들어올려 혈교주의 머리를 박살냈다.
‘얼마 안 가서 금세 또 나타나겠지, 시발…’
싸우면 싸울수록 독고령은 위화감을 느꼈다.
혈교주의 영문 모를 사술에 갇혀 일단 저 새끼들이랑 싸우고 있긴 한데 현실과 너무나도 달랐다.
“아파라~”
“아프면 그냥 뒤져, 새끼야!!”
“으캬캭! 그럴 순 없죠.”
죽여도 죽여도 살아난다.
혈교주 뿐만 아니라 독고령과 독고진도 예외는 없었다.
분명 목을 파고드는 기분 나쁜 손톱의 느낌과 함께 자신의 목이 날아가 시야가 한 바퀴 돌았었다.
바닥에 떨어져 목 없는 자신의 시체를 보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불쾌했고,
“어?”
잠시 후 되살아나자 혼란스러웠다.
또 하나의 자신인 독고진은 원래부터 목숨을 어디 따로 마련해둔 것처럼 행동한 놈이었기에 목이 날아가도 ‘오, 살았네?’ 한 마디 툭 던지고 다시 싸움에 뛰어들었지만, 광증이 사라져 조금이나마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된 독고령은 다른 생각을 했다.
‘이거 존나 찝찝하네…’
분명 사술에 걸리기 전만해도 일영기를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자가 혈교주였다.
그런데 지금 와서 싸움이 할 만하단 것도 이상했다.
‘일단 싸울 수 밖에 없어서 싸운 거긴 한데… 왜 할 만하지?’
독고령과 독고진이 몇 번 죽은 것처럼 혈교주들도 몇 번 목이 날아가거나 사지가 찢기곤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둘 다 멍쩔히 살아서 싸우는 자체가 기괴했다.
게다가…
‘저 새끼…’
초대라고 불린 혈교주만 유독 움직임이 없었다.
정신없이 다른 9명의 혈교주와 싸우느라 방치하고 있었으나 하나 남은, 초대라고 불리던 혈교주만 처음 한 번 큰 기술을 써두고 먼 발치에 우두커니 서서 독고령과 독고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뭘 하고 있나보네, 개새끼.’
마음을 정한 독고령은 크게 일영기를 끌어올려 혈교들의 포위망을 뚫어내고 독고진에게 외쳤다.
“야! 혼자 9명 감당해라! 난 대가리 조지러 간다!!”
“뭐, 미친 년아?!”
“당가위는 줄게, 새끼야!!”
“9명은 아무것도 아니지.”
“… 단순한 새끼.”
새삼스레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나 되돌아보고 독고령은 몸을 훌쩍 날려 초대의 앞에 섰다.
“어이.”
“… 참으로 신기한 놈이야. 아니, 년이라고 해야하나?”
“둘 다 맞는 말이라 틀릴 건 없고. 혼자서 무슨 개같은 일을 꾸미고 있는지 말해줄 생각은 있냐?”
“볼수록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년이야. 그러니 이런 기괴한 심상으로 태극을 이루었을테지.”
“아, 시발 새끼. 또 혼자만 아는 얘기 쳐 하고 있네.”
독고령이 일영기를 잔뜩 끌어올려 초대를 내리쳤다.
파삭.
“… 어?”
허망하게 두 동강으로 갈라진 초대의 시체를 복고 독고령이 당황하는 순간.
“네 년은 마음이 너무 강해. 고통에도 익숙하고, 자아도 또렷하구나. 하지만…”
“미친…!”
갑작스레 뒤에서 들려오는 초대의 목소리를 듣고 당황하며 독고령이 검을 휘둘렀으나 그녀의 눈 앞에 있던 것은 거대한 피의 파도였다.
“무력감은 버틸 수 있을까?”
철썩!
피의 파도가 독고령을 집어삼켰다.
“… 시발, 이건… 응?”
다시 눈을 뜬 독고령의 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 검후 할매가 왜 저기…”
붉은 머리, 허리에 달린 유성도.
독고령이었다.
손톱이 마치 혈교주들이 가진 그것처럼 기괴하게 자란데다 눈이 붉게 물든 것이 달랐지만, 독고령은 분명 자신의 육체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왜 저기에…’
그 때 초대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퍼졌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승천하고, 백은 땅으로 퍼진다고들 하지. 그래서 혼비백산(魂飛魄散)이란 말이 나온거야.”
독고령이 휙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엔 초대 혈교주가 있었다.
찰박. 찰박.
그의 걸음걸음마다 거무죽죽한 피가 찐득하게 늘어지며 마치 도사처럼 차려입은 초대가 검후의 뒤에서 걸어나왔다.
“… 이건 또 뭔 사술이냐, 십새끼야?”
“헌데 혼백을 육체에서 떼어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어. 그 어려운 일을 해낸 게 누구냐?”
그의 형상만 뿌옇게 보는 것이 마치 귀신처럼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다른 광경은 그대로 움직이고, 오직 초대만이 따로 놀았다.
“이게 바로 본좌의 대법이야. 육신에 다른 이의 혼백을 끼워넣는거지. 한 육체에 여러 명의 혼백이 들어가는거지. 그리고는…”
그가 손을 들어올려 훅 숨을 내불었다.
“혼비백산시키는거지. 그럼 빈 육체에는 본좌의 혼백만 남는게야.”
“나는 아닌데?”
“그래. 그대는 아니야.”
초대가 두 손을 들어올리더니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그대는 본좌의 찬사를 받아마땅해. 사술이란게 으레 그러하듯 정종의 무공에 쉬이 무너지긴 하지만, 본좌는 술의 영역을 뛰어넘은지 오래거든.그래서 더더욱 의문이야. 그대는 어떻게 버티는걸까….”
그가 턱을 긁적이며 고심하는 눈초리였다.
“그대의 내면은 들여볼수록 신기하단 말이지. 양기는 도가의 냄새가 나는데, 음기는 또 한없이 자연에 가까워. 그래도 내가 한 때 도문에 몸 담은 자로서 말하는데 이런 내공은 처음 봐.”
“미친 놈. 네가 정파였다고?”
“내 별호가 뭔지 알아? 혈라신선이야. 피로 그물을 만들어 속세에 물든 이들을 해방시키는 구세주.”
“미친 놈.”
독고령은 스멀스멀 불안감이 일었다.
차라리 아까 심상의 세계가 나았다.
그 때는 저 얄미운 얼굴을 후려칠 수라도 있었으니.
하지만 지금은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는 게 너무나도 답답했다.
그리고 그런 독고령의 마음을 궤뚫어본듯, 초대 혈교주가 이죽거렸다.
“불안하지?”
“… 뭐?”
“그대의 심상을 보고 처음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태극을 이룬 줄 알았어. 헌데 자아가 두 개나 되더라고. 게다가 다른 하나의 자아 또한 한없이 또렷했어. 이런 경우는 흔치 않지. 하지만 심상이란 건 말야… 그 자가 살아온 인생을 낱낱이 보여줘.”
“…”
“저변엔 타오르는 불과 같은 마음을 품고, 겉으로는 차가운 눈보라로 남들을 밀어냈겠지. 필시 그대는 원하는 게 있으면 자신의 손으로 쟁취하는 구도자야. 남들이라면 도중에 포기하고, 무너져서 주저앉고는, 포기할 만한 고행도 원한다면 서슴지 않을 테야.”
그 때, 초대의 등 뒤로 위일청이 나타났다.
그리고 마치 독고령의 시선을 읽듯 초대가 뒤돌아 위일청을 쳐다보았다.
“남자의 마음과 여자의 마음, 둘 다를 품음으로서 자아를 유지하는구나.”
“무슨 소리를…”
“한 쪽을 무너뜨리면 어떻게 될까?”
“뭐… 뭐하려는거야?!”
“육신은 혼백에 이끌리지. 저 남자를 보는 순간, 그대의 육체가 먼저 반응하더군.”
“건드리지 마…!”
“이 남자가 핵심이야. 이 남자가 태극의 중심이자, 그대의 혼원이야.”
초대가 독고령의 가슴에 손을 올리더니 퉁하고 그녀를 밀쳤다.
“사랑하는 정인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도 그대가 자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이 개새끼가…!!!”
“정인의 심장을 움켜쥘 기회를 주지.”
초대 혈교주는 웃으며 연기처럼 흩어졌다.
혈교주의 말이 끝나는 순간, 독고령의 감각이 돌아왔다.
어색하게 길어진 자신의 손톱, 내리치며 바람을 가르는 상쾌함, 그리고 눈 앞의 위일청.
‘안 돼…!’
자신의 오른손이 위일청에게 닿기 직전의 순간…
“일청은 건들지 마, 씹새야!!”
“응?”
“음?”
독고령이 자신의 왼손으로 내리치던 오른손을 붙잡았다.
“대법이… 왜…?”
자신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말을 내뱉자, 독고령은 당황했다.
그리고 이내 그게 혈교주의 말임을 깨달았다.
‘몸이 돌아왔다, 그럼…!’
독고령이 이를 악물고 자신의 손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모든 주도권이 돌아오진 않은듯 했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입과 왼손 뿐.
왼손으로 오른손을 붙잡고 있었지만, 발이 멋대로 움직여 위일청을 걷어찼다.
“일청!!”
“으캬캭, 손이 안 된다면 밟아 터뜨려주지!”
“이런…!”
바닥에 넘어진 위일청을 향해 독고령이 휙 뛰어올랐다.
혈라가 선언한 대로 그를 밟아 터뜨리려는듯 했지만, 검후가 그녀를 밀어냈다.
“령아야! 자아가 돌아온 것이더냐?!”
“왼손이랑 입 밖에 안 움직여요! 이거 어떻게 해야…”
“자아를 유지해! 절대 네가 누구인지 잊으면 안 된다!!”
“그걸 어떻게 해요!”
“방해하지 마, 검후!!”
“이게 무슨…”
위일청은 눈 앞의 광경을 보고 혼란에 빠졌다.
한 입으로 두 개의 전혀 다른 말을 하는, 마치 두 개의 인격을 가진듯한 독고령과 그녀와 싸우고 있는 자신의 스승, 검후까지.
“스승님, 이게 무슨…”
“령아의 몸을 혈교주가 차지하려고 하노라! 일청아, 도망쳐!”
“맞아요, 일청! 멀리 가요!! 제발!!”
“아니에요, 일청~ 나한테 죽어주세요.”
“지랄 마, 미친 새끼야!!”
검후가 독고령과 위일청 사이에 서며 그를 지키고 섰다.
“일청아, 본녀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방법이 없노라. 어서 도망치거라.”
“령을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럼 네가 죽어!”
“그래, 죽어줘요 일청!”
“아, 지랄 마 미친 새끼야! 내 몸에서 좀 나가, 시발!!”
위일청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몰랐다.
그저 독고령이 잠시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그런 말도 안 되는 바램까지 생겼다.
“어서 도망치래두!”
“검후 할매!! 내가 공격한다!!!”
“윽…!”
독고령은 어떻게든 혈라가 자신의 몸으로 검후가 공격하는 걸 멈추려고 애썼지만, 왼손 하나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어떻게 내 몸을 멈출 수…’
그 때, 독고령의 머릿 속이 번뜩였다.
“일청!! 나 만져줘요!!”
“… 네?!”
“무슨 소리더냐, 령아야?”
“산적들 만났을 때처럼!! 빨리!!”
위일청이 죽는 것보다야 자신이 수치를 당하는 게 나으리라 생각하며 독고령은 이를 악물고 외쳤다.
“검후님이 나 붙잡아줘요. 빨리!”
“무슨 수가 떠오른 것이더냐?”
“일단 제압해야할 거 아니에요!”
“그래!”
검후가 독고령을 붙잡았다.
“으캬캬캭! 이게 뭐 그리 큰 의미가 있다고…”
“일청! 빨리 나 만져줘요!”
“예?”
“빨리요, 일청!”
독고령은 도저히 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위일청이라면…
아무리 화가 나도 그의 손길 한 번에 다리가 풀렸던 그 때를 떠올리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일청이 만져주면… 흐아앙!”
“음?”
“… 령?”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위일청이 당황하자, 독고령이 그를 재촉했다.
“빠… 빨리… 뎌… 만져듀세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