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5 17장. 애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 (11)
은관영과 헤어진 뒤, 청운은 북쪽의 살막주가 향한 곳으로 한없이 내달렸다.
도중에 자신을 뒤쫓는 살수의 날카로운 암기에 옷자락이 베이긴 했었으나 지독하게 치명상만은 피했다.
‘정중선… 정중선…!’
몸을 가로지르는 정 중앙의 선만 지키면 어떤 공격도 치명상이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을 되뇌이며 어떻게든 북상하는 와중.
“… 어?”
갑자기 청운이 멈춰섰다.
‘저건 무슨…’
시야의 끝,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산이 움직이는 듯한 광경에 청운이 무얼 잘못봤나 눈을 의심하던 순간.
쉬익!
“으헛?!”
뒤쫓아오던 추격자가 암기를 날려대자 급급히 칼을 들어 막아냈다.
일단 저 거대한 무언가에 신경 끄고 추적자에게 도망치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고 뒤도는 순간, 또 다시 이상한 무언가를 보았다.
자신을 에워싸는 추적자의 포위망 사이로 자연스레 누군가 녹아들어 있었다.
추격자들보다 머리 하나 큰, 상처투성이의 인물.
무명이었다.
“막주…? 언제부터 거기…”
“음?!”
청운이 넋이 나간채 입이 벌어지자, 추격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목으로 향하는 누군가의 손.
그게 추적자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뚜둑.
가볍게 추격자의 목을 꺾은 뒤, 무명은 청운에게 인사를 건넸다.
“청운 도사, 다시 만나 반갑소.”
“어… 언제부터 거기…”
“일단 정리부터 하고 얘기나눕시다.”
“주… 죽여라!!”
갑작스레 등장한 무명을 보고 추격자들이 암기를 뿌려댔지만, 그는 또 다시 연기처럼 시야에서 사라졌다.
뚜둑.
“끄륵…”
푹.
“컥…”
콰직.
청운이 눈으로 쫓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무명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살이 으깨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마침내 모든 추격자 무리가 곤죽이 되어 바닥에 널부러지자, 무명은 손을 휘휘 털어내며 청운에게 다가왔다.
“동업자 양반과 같이 간 도사, 맞소?”
“어… 독고 소저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네, 맞습니다.”
“지금 저거 보이시오?”
무명이 손을 들어 가르킨 곳을 바라보자 청운은 아까 자신이 본 산이 움직이는 형상이 허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 저 산처럼 큰 사람 형체의 무언가 말입니까?”
“그렇소. 저게 강시요.”
“예?!”
“나는 한낱 천한 살수에 불과해 저리 큰 무언가를 감당할 무공이 없소. 그래서 동업자 양반이 필요한데 혹시 어딨는지 아시오?”
“그… 그게 말입니다. 실은 저도 누님 때문에 막주를 찾아왔습니다.”
“음?”
청운이 머리를 감싸쥐며 무명에게 말했다.
“… 독고 소저가 엄청난 강자에게 제압당했습니다.”
“뭐라? 대체 누구에게?”
“…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옆에 같이 온 자가 당가위였습니다.”
“당가위…!”
무명이 이를 갈며 씹어먹을듯이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이렇게 되면 검후님에게 부탁하는 수 밖에 없겠소.”
“… 네.”
“맹으로… 음?!”
무명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시야 멀리, 무명이 출발했던 하오문의 객잔 방향 쪽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나왔다.
그 무시무시한 빛이 단순한 내공과 내공의 충돌이었음을 한 차례 뒤늦게 깨달은 무명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게 정녕… 사람의 무공인가?’
무명이 옆을 돌아보자 청운 또한 똑같은 걸 느꼈는지 몸을 떨고 있었다.
이렇게 강맹한 무공을 발할 자는, 지금 합비에 몇 없었다.
“… 검후께서 이미 객잔에 도착한 모양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검후와 싸우고 있는 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그 또한 신위에 이른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라 생각하며 무명이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거대 강시를 그 쪽으로 몰고가면 검후님께 짐을 얹는 꼴이 아닌가…’
거대 강시의 존재가 무명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지만, 그의 고민과 달리 거대 강시는 빛이난 방향을 향해 몸을 틀었다.
“설마…”
방금 전 뿜어져나온 강렬한 빛에 시선을 뺏긴 거대 강시는 아까까지만해도 무명을 쫓아 산길로 걸어오던 것을 포기하고 시가지를 가로질러 객잔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큰일이군… 청운 도사, 도와주시오!”
“무엇을 말입니까?”
“어차피 저 거대 강시를 막을 수는 없소. 허나 저 놈이 민가로 들어서는 순간, 피해가 막중할 터이니 사람들을 대피시켜주시오.”
“… 예!”
“전원! 강시의 경로에 놓인 자들을 대피시켜라!!”
“”존명!””
갑작스레 어둠 속에서 튀어나가는 10명의 그림자를 보고 청운 또한 그 뒤를 쫓았다.
홀로 남은 무명은 잠시 거대 강시를 바라보다, 객잔 방향에서 또 한 번 거대한 내공의 흐름을 느끼고 이를 악물었다.
‘거대 강시가 되려 검후의 일전에 방해가 된다면…’
무명이 이윽고 마음을 정한듯, 옆에 있는 나무를 뿌리째 뽑아들고는 거대 강시의 눈을 향해 집어던졌다.
파삭!
거대한 나무였음에도 막상 강시의 크기에 비하면 그저 자그마한 침으로 밖에 안 보였다.
하지만…
“그어어어!!!!!!!!”
시선을 끄는데는 성공했다.
“나는 여기 있다!!!”
무명이 내공을 담아 사자후를 터뜨리자, 강시가 그 거대한 몸을 허공에 띄워 날아왔다.
“… 이런.”
하늘에서 산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며 무명이 극에 달한 경공술을 펼쳤다.
잠시 후.
콰과과광!!!
지진이 일어난듯 땅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무명은 그 광경에 치를 떨었다.
‘이를 도대체 어찌해야…’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을까 살펴보던 그의 시야에 거대한 건물이 하나 보였다.
무림맹.
맹의 안에는 필시 무인들이 모여있을 터.
‘… 이름 모를 양민들이 죽는 것보다야 낫겠군.’
맹의 장로들이라면 다들 왕년에 이름을 날린 무인들이니 차라리 그 쪽이 나으리라.
무명은 거대 강시가 흐트러뜨린 대지에서 나무를 하나 더 뽑아들어 또 다시 강시의 눈을 향해 집어던지며 이목을 끌었다.
“따라오거라!”
무명이 맹을 향해 거대 강시를 유인하기 시작했다.
*
한편, 위일청이 현진을 도와 강시 떼를 물리치러 간 사이 은관영은 그에게 건네 받은 두 개의 약병 중 해독제를 찾아내 조심스레 백리소현의 입에 몇 방울 흘렸다.
“언니, 조금만 있으면 약효가 돌 거예요.”
“응…”
다행히도 어디까지나 상대를 제압하는데 그치는 독이었는지 백리소현은 금세 털고 일어났다.
두어번 팔을 휘휘 돌리며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한 백리소현이 은관영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 고마워, 관영아.”
“아니에요오. 그보다 소소 아가씨 수색은 아직 덜 끝났다고 했죠?”
“응. 이 근처까진 다 뒤져봤는데 사람도 없고, 건물 안은 다 살펴봤어.”
“건물이라…”
은관영이 몸을 낮춰 땅에 귀를 가져다댔다.
그리고는 눈을 감고 집중하자, 그녀의 귓가에 미세한 바람소리가 들렸다.
“… 지하에 뭔가 있어요.”
“진짜?”
“아마 지하에 동굴이나 공동 같은 게 있는 거 같아요. 언니, 건물 안에 비밀통로 같은 게 있을 거예요. 발견하면 들어가지 마시고 저한테 얘기해주세요. 기관이 설치되어 있을 수도 있으니깐.”
“응, 알았어.”
“저랑 너무 멀리 떨어지시는 말고요. 아직 체내에 독이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깐요.”
“그래.”
은관영은 미리 머리에 넣어둔 겨냥도를 떠올리며 지하와 이어져있을만한 곳을 뒤졌다.
하지만… 아무리 건물을 뒤져도 비밀통로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 분명 아래에 거대한 공동이 있는데 도대체 어디에…’
그 때, 은관영은 문득 위일청과 현진이 막고 있던 엄청난 수의 강시 떼가 떠올랐다.
“소현 언니!!!”
“찾았어?!”
백리소현이 다급히 은관영에게 다가오자 그녀가 물었다.
“강시 떼가 튀어나온 곳! 그렇게 많은 강시가 쏟아져나오는 곳이라면 입구도 찾기 쉬울 거예요.”
“그럼…”
“일단 위 오빠한테 가죠.”
“응, 빨리 가자.”
은관영과 백리소현이 위일청이 향한 곳에 도착하자 마침 바닥에서 일어나고 있는 위일청과 얼마 안 남은 강시의 목을 하나씩 손수 쳐내고 있는 현진 도사.
그리고…
“… 이걸 위 오빠가 했어요?”
“관영, 일찍 왔군요. 소현도 괜찮나요?”
“어… 근데 이건 다…”
시산혈해를 발견했다.
강시들로 이루어진 산과 대지를 적시는 피의 바다에 은관영과 백리소현은 안색이 파래졌다.
“… 보고 있다가 정신이 나갈 거 같네요오.”
“너무 쳐다보지 마세요, 관영. 저도 비슷한 생각이니깐요.”
은관영이 그 끔찍한 광경에서 눈을 돌리고 위일청에게 물었다.
“그… 위 오빠.”
“네, 관영.”
“이 곳 지하에 동굴이나 공동 비슷한 게 있어요오. 아마 강시들이 튀어나온 곳을 역으로 추적하다보면 그 곳에 도달할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거든요?”
“… 소소 아가씨가 그 곳에 있으리라 생각하는 겁니까?”
“네. 북쪽으로 향한 막주도 소소 아가씨를 발견하지 못 했다면 거기 뿐이라고 생각해요.”
“잠시만요, 관영. 저도 짚이는 데가 있습니다.”
“네?”
위일청은 아까 조련사를 뒤지다 발견한 열쇠꾸러미를 건넸다.
“이 곳을 지키고 있던 당문의 일원에게 빼앗은 물건입니다.”
“… 아마 이 열쇠가 맞는 곳이 있겠네요.”
“다행이군요. 현진 도사님!!”
“예, 위 공자!”
현진은 어느새 그 새하얀 도복이 핏빛으로 물든 채 피에 쩔어 찰박찰박 걸어왔다.
“… 미안합니다, 은 소저, 백리 소저. 꼴이 이런 모양새라 영…”
“아니에요. 어쩔 수 없죠.”
“괜찮아… 웁…”
백리소현은 어찌저찌 버텨냈으나 은관영이 잠시 헛구역질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십분 이해한다는듯 현진이 고개를 끄덕이곤 위일청에게 물었다.
“…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위 공자?”
“관영이 말하기를 이 곳의 지하에 거대한 동굴이나 공동이 있을 거라 생각된다고 합니다. 아마 이 강시 떼를 보관했던 곳이겠죠.”
“그렇군요.”
“혹시 그 곳의 수색을 맡겨도 되겠습니까? 두 소저와 함께요.”
“위 공자는요?”
“… 독고 소저가 위험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서 그 곳으로…”
그 때, 객잔 방향에서 거대한 빛과 함께 엄청난 내공이 느껴졌다.
‘스승님이다!’
객잔 방향에서 검후의 내공을 느낀 위일청이 현진에게 부탁했다.
“현진 도사님, 부디 이 곳의 수색을 부탁합니다. 저는 객잔으로 돌아가봐야겠어요.”
“… 위 공자. 방금 그 내공을 느끼고도…”
“그래도 가봐야합니다.”
“…”
위일청이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보이자, 현진이 입을 꾹 다물고 포권을 취했다.
“… 무운을 빌겠소, 위 공자.”
“잘 부탁드립니다, 현진 도사님.”
위일청이 똑같이 포권하며 그에게 인사를 한 뒤, 손으로 코를 틀어막은 은관영과 백리소현을 바라보았다.
“관영, 소현의 독은 완전히 해독된 겁니까?”
“아직 몰라요. 제가 잘 보살필게요.”
“… 고맙습니다. 부디 이 곳의 남은 수색을 부탁할게요.”
“… 다치지 마, 오라버니.”
“소현도요. 아직 강시 무리가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 무리하지 말고요.”
“응.”
“관영, 잘 부탁합니다.”
“다녀와요, 오빠. 이따 객잔에서 다시 만나요. 가능한 소소 아가씨랑 함께요. 그리고…”
은관영이 걱정스레 객잔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 독고 소저도 함께요.”
“그러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요.”
“이따 봐요.”
“네. 그럼…”
위일청이 객잔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확인한 뒤, 남은 두 소저가 피칠갑을 한 현진 도사를 바라보았다.
그가 씨익 웃으며 손짓했다.
“그럼 가실까요, 소저들?”
“으으… 피는 안 익숙한데…”
“달마다 보지 않으시던가요?”
“…”
순간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었나싶어 은관영이 고개를 들자, 현진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며 은관영이 시산혈해에 발을 내딛었다.
“… 청운 도사님의 사형, 맞네요.”
“그러게. 과묵하실 때는 멀쩡한 사람인 줄 알았어.”
“… 가시죠, 소저들. 앞장서겠습니다.”
그렇게 두 명의 여인과 한 명의 도사가 피바다 사이로 찰박찰박 걸어나갔다.
*
“으캬캬캭!!!”
“요사스런 웃음 소리…! 듣기 거북하구나!”
검후는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고민에 빠졌다.
눈 앞에 있는 자가 혈교주임은 알고 있었다.
그가 보여주는 무공, 그의 행동거지.
모든 게 자신이 어릴 적 보았던 전대 소림 방장, 혜선 대사와 일전을 벌이던 소년과 똑같았다.
하지만…
“이거 운철로 만든 도네? 도법은 안 익숙한데 말이지이~”
“남의 육신도 모자라 물건까지 탐내는게야?”
“이미 내 육신이니 내 물건 아닐까?”
그 외형이 독고령임을 보자, 검후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와 그리 오랜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으나 말년에 이르러서야 받은 제자, 위일청의 정인이란 점과 자신의 오랜 친우, 남궁원청의 절기를 이어받은 제자란 점이 검후의 검에서 조금씩 살기를 앗아갔다.
‘칼 끝이 흔들리는구나…’
단번에 베어버리겠다고 마음 먹으며 몇 번이고 필살의 각오로 검을 휘두르고 있다 여겼으나 그렇지 않았다.
막상 빈틈이 보이는 순간, 그 곳을 찔러들면서도 마지막 한 순간 마음이 약해져 검을 뒤로 빼게 되었다.
‘아직 대법이 끝난지 얼마 안 돼서 운신이 미숙하다… 충분히 죽일 수 있어… 헌데…!’
답답함에 검후의 속이 타들어갔다.
독고령은 그래도 정신력이 강한 아이니 혹여나 혈교주의 자아를 억누르고 본신의 자아가 다시 튀어나오지 않을까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아보기도 했으나…
“검이 흔들리네?”
“윽…!”
“마음이 약해졌나 봐? 으캬캬캭!!”
독고령의 육신으로 혈라의 행동거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깎여나갔다.
‘이 또한 본녀의 업인가…’
검후가 검을 두 손으로 고쳐잡고, 정녕 베겠노라 다시 한 번 마음을 고쳐먹는 순간.
“스승님…!”
위일청의 목소리가 들리자, 검후가 그를 쳐다보며 애타게 외쳤다.
“일청아! 안 된다, 오면 안 돼!!”
“령이 왜…”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가는듯 위일청이 우두커니 멈춰서자, 검후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불길한 예감에 독고령의 육신을 한 혈라를 뒤돌아보는 순간,
“제자를 받았구나?”
“안 돼!!!”
혈라를 막고자 검을 휘둘렀으나 독고령의 육체가 한 순간 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환술…!’
마음의 빈틈을 노려 파고든 혈라의 악랄한 수법에 이를 갈며 위일청이 있는 곳을 보자, 어느새 그의 눈 앞에 나타난 혈라가 피처럼 붉고, 긴 손톱을 들어올이고 있었다.
“제자를 잃은 검후의 얼굴은 어떨까아?”
“이 무슨…”
“죽어!”
“멈춰!!!!”
혈라의 손톱이 위일청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순간, 검후가 비통하게 외쳤고, 위일청이 뒤늦게 칼을 들어올렸다.
이대로 위일청의 몸이 산산조각나며 찢기리라 생각하고 검후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려던 순간.
“일청은 건들지 마, 씹새야!”
“응?”
“음?”
독고령이 자신의 왼손으로 내리치던 오른손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