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와 색마-164화 (164/225)

EP.164 17장. 애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 (10)

맹에서 객잔까지 온 힘을 다해 날아온 검후는 객잔의 앞에 서있는 괴인과 독고령을 보았다.

‘주하가 아니야…?’

기괴하게 자란 손톱이 검후로 하여금 그가 혈교주임을 알아차리게 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붙잡혀 흐린 눈으로 서있는 독고령을 보자 이미 대법이 시행되고 있음을 깨닫고 검후가 눈을 질끈 감았다.

‘본녀가 늦었구나…’

대법이 시작된 이상, 외부에서 간섭하면 독고령 또한 백치가 될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녀의 육신에 그대로 전대 교주들의 혼백이 남아 독고령을 집어삼킬 수도 있었기에 검후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 애가 탔다.

‘아이야, 제발 이겨내거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약간의 희망을 품었다.

혈교주의 대법에 대해 모든 것을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영혼을 옮길 때 일부러 안배해둔 육신에 광증을 옮겨 혼백을 지우는 작업을 하곤 했다.

그 점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원 육신의 주인이 자아가 남아있다면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독고령이 겉으론 그저 어린 소녀였으나 내면은 한없이 강함을 검후는 이미 경험했기에 지금은 그저 믿고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노부는 다섯번이면 무너지리라 생각하네.”

쿠궁!!

객잔을 울리는 진각 소리가 검후의 귓가에 들렸다.

‘일단 이 쪽부터 처리해야겠구나.’

하얗게 샌 머리, 맹주를 상징하는 용포를 입은 뒷모습을 보자 검후는 그가 당가위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잔해에 깔려죽게 만들어주지.”

쾅!!

다시 한 번 그가 내지른 진각에 객잔의 기둥이 기울기 시작하자, 검후는 몸을 날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 당가위의 발이 바닥을 찍기 직전.

탁.

“고약한 아이구나.”

“음?”

검후가 그의 발을 자신이 발로 막아섰다.

이윽고 내공을 끌어올려 그의 발을 밀어내자, 당가위가 바닥에 쓰러졌다.

“네 놈이 당가위렸다?”

바닥에 넘어진 당가위는 고개를 들어 검후를 바라보았다.

“본녀가 벌을 내릴 터이니 달게 받거라.”

“…벌? 벌이라 하였소?”

당가위가 이죽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와 똑같군. 무림의 노선배라는 작자들이 하나같이 그 행태가 똑같아. 뒤늦게 찾아와 상황을 정리하며 거들먹거리는 꼬락서니가 역겹기 짝이 없군.”

“당군악이 보면 참으로 좋아하겠구나.”

“형님의 이름을 입에 담지 마시오!!”

당가위가 이를 갈며 으르렁거렸다.

“그대가 형님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큼 불쾌한 일이 없소!”

“… 무엇이 그리 화가 나더냐?”

“전부!”

당가위가 손을 휘두르며 우모침을 쏘아냈다.

하지만 검후의 손이 한 번 허공을 휘젓자, 그녀의 소매에 막힌 침들은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여기서 끝내자꾸나. 더는 업을 쌓지 말거라. 너도, 정이 그 아이도.”

“가주의 이름도 입에 담지 마시오!!”

쿵!

당가위가 진각을 밟으며 장법을 내질렀다.

그의 두툼한 손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검후의 손이었으나 손과 손이 맞부딪히자 튕겨져 나간 것은 되려 당가위였다.

“우욱…!”

잠깐 맞닿은 손을 통해 들어온 검후의 심후한 공력 때문에 당가위가 내상을 입고 입에서 피를 주륵 흘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경쓰지 않고 당가위가 또 다시 소매에서 다른 침을 꺼내던졌다.

“… 그만하재두.”

“어림도 없는 소리!!”

평범한 우모침과 다른 형태의 장침이 검후의 미간을 향해 쏘아졌다.

그녀가 검을 들어 장침을 잘라내는 순간.

콰광!

장침이 폭발하며 일어난 연기가 그녀를 가렸다.

허나…

“… 군악이는 폭우이화침을 자주 썼지.”

검후가 손을 휘휘 저으며 먼지를 털어내고 건재함을 내보였다.

“그 가증스러운 입으로 형님의 이름을 꺼내지 마!!”

당가위는 이성을 잃은 듯 핏발선 눈으로 허리에 묶인 채찍을 풀었다.

당가의 유명한 편술, 호연십팔편이 그의 손 끝에서 펼쳐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당가위는 검후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 했다.

‘안타깝구나…’

이성을 잃고 미쳐날뛰는 당가위를 보며 검후는 마음 한 켠이 쓰라렸다.

마지막 정마대전 이후, 상처입은 자들이 너무 많았다.

예전부터 독과 암기를 주로 쓴다고 같은 백도 무림의 정파임에도 괄시받던 당문의 설움과 마교에 의해 가족을 잃은 그들의 아픔을 검후는 헤아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보듬어보려고 검후는 노력했다.

“… 군악이는 정이의 이름을 지을 때 바를 정(正)의 외자로 지었노라. 자신의 아이가 엇나가지 않고, 독과 암기를 써도 떳떳한 정파의 일원이기를 바랬기 때문이지.”

“그리 떳떳한 정파의 대선배께서 마교가 사천을 휩쓸 때 뭘 하셨소?!”

“…”

검후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마교가 정마 대전을 일으킬 당시, 곤륜을 넘어 사천에 이를 때만 해도 맹의 이름으로 몇몇 고수만 지원하면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마교의 세력은 예상보다 훨씬 강대하였고, 사천 인근의 중소 문파를 넘어 공동, 아미, 종남, 청성 등의 대문파가 무너진 후에야 맹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뒤늦게 검신이 나서 그들을 참하고자 했으나 마교는 이미 무당까지 무너뜨린 뒤, 무당산에 자리잡았다.

천마의 목을 베기까지 너무나 많은 목숨을 잃었다.

그 과정에서 이미 점령당한 사천은 특히 피해가 막심했다.

마교의 보급창고로 전락한 사천 일대는 재화도, 사람도, 터전도 모두 잃었다.

마침내 검신이 천마의 목을 베고 무당산의 일전이 신화로 남아 모든 이에게 칭송받을 때, 중원을 기준으로 우측에 위치한 당문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세가가 모두 멀쩡한 순간에도 사천은 여전히 아픔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파일방은 그래도 목숨만은 부지하고자 후환을 도모했으나 우린 그러지 않았소. 끝까지 항전했지. 사천이 우리의 터전이니깐!”

“… 알고 있다.”

“10살 먹은 아이가 한 몫 거들겠다고 밤새 독을 만들면 가문의 어른들이 그 독을 뿌리며 다음 날 싸웠소. 그 어른이 죽으면 시체를 껴안고 밤새 울던 아이가 그 다음날 아침 직접 전장으로 뛰쳐나가 독을 집어던졌지. 헌데 뭐라고?”

“…”

“모두 똑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고?”

당가위의 내공이 폭사했다.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어제까지 웃고 떠들던 딸아이가 죽어가며 아비를 위로하는 광경을 보고 어찌 똑같다고 말해!! 겪어보지도 않은 놈들이!!!”

“진정하거라! 선천지기까지 꺼내쓰면…”

“닥치시오!!”

당가위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검후를 죽일 생각이었다.

옷깃 하나, 흠집 하나 내기조차 힘드리란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분노가 당가위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움직이지 않고선 버틸 수 없었다.

“죽엇!!!”

심마에 지배당한 듯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당가위는 품 안에 있는 모든 암기를 한 번에 던졌다.

만천화우.

당가의 비전이자, 가장 아름다운 암기술.

하지만 추악하게 일그러진 당가위의 얼굴과 심마에 빠진채 이성을 잃고 던져낸 암기들은 그저 내공이 많이 실린 돌멩이와 다를 바 없었다.

‘어찌하여 이리 되었는가…’

날아드는 암기 사이로 피눈물을 흘리는 당가위의 얼굴이 보였다.

현 가주인 당정의 아비이자 그의 형제였던 전대 가주, 당군악과 참 많이 닮은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검후는 눈을 질끈 감을 수 밖에 없었다.

‘묵선이 이래서 눈을 감고, 귀를 닫았구나.’

오랜만에 나온 속세는 여전히 아픔 뿐이었다.

지탄하고, 질책하며, 질타하고자 나왔노라 밝혔으나 막상 당사자를 눈 앞에 두자 검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당가위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더는 집착하지 않고, 모든 것을 끊어내고 편해질 수 있는 안식 밖에 없었다.

검후가 검을 휘젓자, 파도 소리가 일렁였다.

“경파(鯨波)”

고래처럼 큰 파도가 휩쓸고 지나가듯, 검후의 검이 지나간 자리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모든 것을 쏟아부었음에도 여전히 검후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 하자 당가위는 허탈한듯 피눈물을 흘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 과연 검후시구려. 마교의 침공에도 보타문에 꼭꼭 숨어서 무공을 연마한 보람이 있겠소이다.”

“가위야…”

“친한 듯 이름을 부르지 마시오. 귀가 썩을듯하니.”

끝까지 이죽거리며 검후를 완강히 거부하던 당가위가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웃었다.

“그래도 내가 이겼소.”

“뭐라…?”

“교주가 대법을 마쳤군.”

그 말을 듣고 휙 고개를 돌리자, 혈교주가 원래 가지고 있던 육신이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려… 령아야…”

“클클… 광마 놈의 비통한 얼굴을 못 보고 죽는 건 참으로 아쉽지만…”

당가위가 비통한 검후의 얼굴을 보고 웃었다.

“그대의 일그러진 얼굴은 저승길 선물로 최고군.”

당가위가 고개를 푹 떨궜고, 독고령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 음음. 아아.”

자신의 목소리르 확인하듯 목을 가다듬는 독고령을 보고 검후가 떨리는 손을 내밀던 그 때.

“좋은 육신이군. 어라라?”

“…”

“검후도 여기 있고, 당가위는… 쯔쯧. 죽었네, 아이고.”

독고령이, 아니.

혈라가.

찢어질 듯 입꼬리를 올리며 검후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령아야!”

“아하… 이 몸의 이름이 령이었구나. 령… 재밌는 이름이네.”

손톱을 길게 만들며 혈라가 요사스레 혀를 핥짝였다.

“이제 영이 없는 아이가 되었으니 말이야, 으캬캬캭!!”

혈라의 비웃음을 들은 검후가 이를 악물고, 검을 고쳐잡았다.

‘늦었구나. 또 늦었어.’

이미 지나간 일은 어찌할 수 없었다.

“… 그리도 오래 살고 싶더냐, 괴물아. 죽음이 그리도 두렵더냐, 사특한 이여.”

“죽음을 왜 두려워하지? 나는 영원불멸이야, 검후.”

“부정하노라.”

검후가 검을 들며 선언했다.

“오늘 그대의 죄 많은 업보를 본녀가 잘라낼테니.”

“으캬캬캭!! 재밌네. 혜선 대사도 그렇게 말하고 나한테 죽었는데 말이야?”

혈라가 내공을 끌어올리자, 검후 또한 그에 맞춰 내공을 끌어올렸다.

두 절대고수의 어마무시한 내공이 주변 풍경을 일그러뜨렸다.

“더 이상 본교를 방해하지 않는다 약속하면 살려줄 수도 있는데 안 할 거지?”

“당연한 것을.”

“그럼 죽일 수 밖에 없네.”

혈라가 손을 휘두르는 순간,

“어딜!”

검후가 검을 휘둘렀다.

둘의 공격이 서로 맞닿는 순간.

일대가 밝아지며 굉음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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