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2 17장. 애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 (8)
먼저 달려나간 독고령을 뒤쫓아 은관영과 청운이 객잔 근처에 도착하는 순간.
챙!
독고령의 연검이 괴인에게 사로막히고 그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은관영이 멈춰섰다.
“누ㄴ… 읍!”
“가만히 있어요, 도사님!”
뛰쳐나가려는 청운의 입을 틀어막고, 은관영이 그를 진정시켰다.
“… 잠시만 가만히 있어요. 상황 파악 좀 하게.”
“네?”
“…”
괴인이 독고령의 얼굴을 손으로 붙잡는 순간, 은관영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갈뻔 했지만 꾹 참고 주변을 살폈다.
괴인과 독고령이 멍하니 멈춰서자 은관영은 무언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 도사님.”
“네, 은 소저.”
“안 되겠어요. 아무래도 다른 쪽에 도움을 요청해야겠어요.”
“… 어디로요?”
“도사님은 북쪽의 막주에게 가보세요. 제가 위 오빠한테 찾아갈게요.”
“지금 누님이 위험한데 저희끼리 구하면…”
“상황파악이 안 되나요?”
“…”
“독고 소저가 우리 중에 가장 강해요. 그리고 괴인이 독고 소저에게 뭔가를 하고, 제압했죠. 그 옆에 서있는 자가 누군지 알아요? 현 무림맹주이자 당문의 2인자 ,당가위예요. 둘 다 엄청난 강자라고요.”
“… 그럼 검후님을 불러야하지 않나요?
“검후님은 지금 맹에 계실테니깐 차라리 소소 아가씨의 위치를 파악하고…”
거기까지 말하는 순간, 은관영은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 당가위가 왜 여기 있지? 게다가 옆에 저 자는…’
그 때, 당가위가 은관영을 바라보았다.
“나오시게.”
“윽…!”
거리가 떨어져있음에도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자 은관영은 그가 자신과 청운 도사의 존재를 눈치 챘음을 깨달았다.
“청운 도사님.”
“네, 은 소저.”
“얘기했던데로 해요, 알았죠? 막주에게 찾아가 독고 소저가 위험하다고 얘기하세요.”
“지금 바로요?”
쉬익!
당가위의 손에서 사출된 우모침이 내공을 싣고 나무를 궤뚫자, 은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튀어나갔다.
“도사님!!”
“네!!”
은관영이 위일청이 간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가장 우려했던 당가위의 추적은 없는듯 했으나 얼마 가지 못 해 자신을 뒤쫓는 몇몇의 인영을 확인하고 은관영이 이를 악물었다.
‘추적자는 당연히 붙네요오…!’
어둠 사이로 암기가 날아드는 것을 피하며 은관영은 죽을 힘을 다해 경신술을 펼쳤다.
‘부디… 위 오빠쪽은 상황이 좋기를…!’
*
위일청이 한 번 칼을 휘두를 때마다 강시들의 목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어어!!”
“끼에에엑!!!”
하지만 그럼에도 몰려드는 강시의 수는 줄어들 기세조차 없었다.
‘난처하군…’
끊임없이 밀려오는 강시떼는 마치 보타문에서 보던 파도처럼 느껴졌다.
“그어어어!!”
어둠 속으로 사라진 당가의 곱추, 조련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점도 위일청의 불안감을 조금씩 크게 만들었다.
‘다른 두 분 쪽은 괜찮을지…!’
조금씩 백리소현이 향한 방향으로 몸을 빼며 강시들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죽여도 죽여도 다시 튀어나오는 강시들의 무리에 위일청이 이를 악물었다.
‘지금이라도 절기를 써야할까…?’
검후의 절기를 아직 다 전수받지는 못 했지만, 그 곳까지 이르는 과정을 어느정도 완성해두긴 했다.
그녀가 위일청에게 당부했듯 적의 수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라면 절기를 쓰고 도망치라는 말도 했지만…
[누군가 너를 지켜줄 이가 있다면 절기를 쓰거라.]
보타문을 떠나기 전, 절기를 사용했을 때는 그 자리에서 탈진했다.
독고령과 백리소현 덕에 다시 쌓은 내공도 많았으나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르기에 위일청이 망설이고 있는 와중…
‘음?’
강시 떼의 흐름이 바뀌었다.
“크워어어어!!!”
위일청과 대치한 강시들의 정 반대편으로 강시들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듯 느껴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위 공자!!!!”
“현진 도사님!!!”
현진 도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우러 왔습니다!!”
“예!!”
정 반대의 위치에서 강시들을 날리며 쿵쿵 걸어오는 현진 도사를 보고 위일청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현진 도사는 무당파의 도사답게 태극을 그리며, 위일청에겐 마치 폭풍처럼 보이는, 검을 휘두르며 조금씩 위일청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를 보고 위일청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길을 터줄테니 합류하시죠, 도사님!”
“예!!”
위일청이 훌쩍 몸을 날려 지붕 위로 올라간 뒤, 연검을 크게 휘두르며 중얼거렸다.
“호접비상(胡蝶飛上).”
엄청난 수의 나비들을 한 번에 베고자 마음 먹고 만든 그의 독문무공이 손 끝에서 펼쳐졌다.
“만섬(萬閃)”
서걱.
단번에 강시 무리의 일각을 무너뜨리자, 그 틈 사이로 현진 도사가 보였다.
“이 쪽으로!”
“예!”
“끼에에엑!!!”
갑작스레 생긴 틈을 메꾸려는듯이 강시의 물결이 틈을 막아서려 했으나 현진 도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어딜!”
콰직!
그의 거구에 걸맞게 다른 두 도사보다 더 큰 송문검이 태극을 그리며 조금씩 위일청과 가까워졌다.
청운의 태극이 그저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태극이라면, 현진의 태극은 마치 태풍의 눈.
주변의 강시들을 끌어들이며 시산혈해를 만들며 나아가는 모습이 이성을 잃은 강시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강시들을 쳐내면서 현진은 위일청에게 물었다.
“후우… 위 공자, 이 많은 강시들을 홀로 상대하고 있었습니까?”
“예. 도사님 쪽에는 강시가 없었나요?”
“없었습니다. 아까부터 사기가 느껴지더라니…”
“소소 아가씨는요?”
“못 찾았습니다. 제가 있는 구역은 싹 다 뒤졌는데도 없더군요.”
“… 알겠습니다. 일단 백리소저와 합류하죠.”
“그렇다면 이 곳은 잠시 제게 맡기시죠, 위 공자. 백리소저와 만나 소소 아가씨가 있는지만 확인되면 바로 이 곳을 빠져나가죠.”
“… 괜찮겠습니까, 현진 도사?”
“백리 소저가 걱정되시겠죠. 그리고 제가 누구입니까? ”
강시와 위일청의 사이를 막듯이 현진이 든든히 버티고 섰다.
“천하제일도가검문, 무당의 제자 현진입니다. 돌아온 뒤에 강시가 없을 수도 있겠군요.”
듬직한 그의 등을 보고, 위일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 금방 오겠습니다, 현진 도사.”
“예!”
현진의 무위가 능히 강시들을 붙잡아둘 수 있다 믿었기에 위일청은 즉시 백리소현에게 향했다.
홀로 남은 현진은 좁은 길목을 막아서며 마음 속에 장문인이 보여준 태극혜검을 떠올렸다.
방금까지는 위일청과 합류하기 위해 먼저 치고 나가는 검법인 태청검법을 선보였으나 기본적으로 무당의 검법은 그 뿌리를 후발제인에 두고 있었다.
상대의 직선적인 공격을 태극, 곡선의 묘리로 받아치는 검법.
지키고 서는데 최적화된 검법이었으며, 이성을 잃고 직선적인 공격 밖에 펼치지 못 하는 강시들과 상성에서도 우위에 있었다.
“오라!!”
크어어어!!!”
현진 도사의 외침과 함께 강시들이 또 다시 몰려들었다.
*
위일청과 헤어진 뒤, 백리소현은 기녀들을 찾았다.
‘… 이 곳에 숙소가 있을 거 같은데…’
잠시 하늘을 밝힌 신호탄이 신경쓰였으나 그 쪽은 위일청이 있는 방향이었고, 남궁소소를 구하는 게 주 목적이었기에 백리소현은 수색을 좀 더 앞당겼다.
하지만 아무리 건물들을 뒤져도 사람 하나 없었다.
“아무도 없나요?”
도중도중 몇 번이고 소리치며 사람을 찾았으나 조용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곳처럼.
그 때.
“… 손님.”
채앵!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백리소현이 놀라 검을 뽑아들자, 말을 건 이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쳤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여협. 용서해주시지요…”
“… 누구시죠?”
말을 건 자는 등이 굽은 곱추였다.
“… 하인입니다. 그 이쪽으로는 왜…”
“아… 그…”
백리소현이 어찌 변명해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와중, 곱추의 손이 소매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응?’
다음 순간, 그의 손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움직이며 우모침을 뿌렸다.
“당문…!”
백리소현이 급하게 검을 몸 앞으로 당기며 침을 막아냈으나 어두운 밤, 머리카락만큼 얇은 우모침들을 다 튕겨내지는 못 했다.
왼팔에 침이 몇 개 꽂히자, 백리소현이 따끔한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윽…!”
“호오, 꽤나 한 수가 있는 년이었어.”
“누구야…!”
“네 년이 말하지 않았느냐? 당문이라고.”
“…”
백리소현이 다시 검을 들어올리려는 순간,
“… 어?”
그녀의 왼팔이 힘없이 덜컥 떨어졌다.
“중독된 것도 모르는 아둔한 년이구나, 크큭.”
“아직 손은 움직여…”
“한 손으로 상대할 수 있겠느냐?”
곱추가 소매에서 거무죽죽한 장갑을 손에 끼고는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그래도 색마가 확실히 눈이 높구나. 네 년 같이 아름다운 년을 데리고 다니고 있으니 부럽구나.”
“… 쓸데없는 소리!”
백리소현이 검을 잡아 활을 쏘듯이 당긴 뒤, 화살처럼 찔러나갔다.
“어이쿠, 이런! 크큭… 움직이면 중독이 더 빨라질텐데?”
“윽…!”
조롱하듯 자신을 비웃으며 검을 피해대는 곱추를 보며 백리소현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어떻게해야…’
곱추의 말대로 조금씩 독이 올라오는지 백리소현의 머리가 핑 돌며 현기증이 일었다.
어떻게든 쓰러지지 않으려고 그녀가 버티고 섰지만, 곱추는 그녀를 가만둘 생각이 없었다.
그가 손에 내공을 듬뿍 담아 장력을 내지르는 순간, 백리소현이 뒤늦게 그의 공격을 막아내며 튕겨져 날아갔다.
“흐윽…!”
“순순히 포기하면 다치진 않게 해주마.”
곱추의 눈이 성욕으로 번들거렸다.
“크흐흑, 강시로 만들기는 참으로 아까운 년이구나. 어떠냐? 내 노리개가 될 생각은 없더냐?”
“개소리하지… 마.”
“크하핫! 색마는 이미 죽었을텐데 아직 상황파악을 못 하는 년이구나.”
“… 뭐?”
“이 곳에 내가 키우던 강시의 수가 3천구야! 무려 3천이라고!! 그 많은 강시를 색마 혼자서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
백리소현은 검을 바닥에 꽂고 비틀대며 일어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모습을 보고 곱추가 기분 나쁘다는듯 눈을 찌푸렸다.
“… 멍청한 년이군. 알아서 봉사하면 봐 줄 생각도 있었거늘.”
“내가 포기란 걸 잘 몰라서. 그리고… 위 오라버니를 너무 만만하게 본 거 아니야?”
“입만 살았구나. 차라리 남궁세가의 손녀처럼 울기라도 했으면 그 쪽도 귀여웠을… 아니지. 이렇게 도도한 매력도 나쁘지 않구나.”
곱추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음심을 드러냈다.
곱추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백리소현은 어떻게 이 상황을 타계해야할지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독이 퍼져 왼손엔 감각도 없었고,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검술 또한 매번 재능이 없다고 검신에게도, 검후에게도, 독고령에게도 들었다.
하지만… 그 세 명 모두 같은 이야기를 했다.
[포기하지 않는 이상 길은 있다.] 라고.
그래, 누군가는 검 한 두 번 휘둘러보는 것으로도 금세 깨달음을 얻고 더 고강한 검법을 깨우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백리소현은 그렇지 않다.
대신 천재라 불리는 이보다 몇 배 더 노력해서 같은 초식을 연마하고, 또 연마했다.
사일검법의 시작이 되는 가장 기본적인 초식.
일수초현(日輸初現).
원을 그리듯 검을 찔러들어가며 다음 초식으로 잇는 기반이 되는 초식, 단 하나.
모든 사일검법이 그러하듯, 활의 시위를 당기듯 백리소현이 검을 들어 어깨 뒤로 넘기자 그 모습을 보고 곱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한 번 더 해보려고 그러느냐?”
“… 시끄러워. 네 말을 듣는 것만으로 귀가 썩는 거 같아.”
“그래그래, 도도한 맛도 있는게 좋지. 좀 이따 내 밑에서 앙앙대고 있을 네 년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하초가 벌떡 서는구나.”
실실 웃으며 다가오는 곱추를 보지 않고, 백리소현은 먼저 검 끝을 바라보았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곧게 서있는 검 끝을 바라본 뒤, 그녀의 시선이 곱추에게 향했다.
노리는 것은 단 하나, 곱추의 머리.
“부디 죽지 말거라!!”
곱추가 장력을 앞세우며 날아오는 것을 보고, 백리소현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허공을 향해 몇 천 번 내지른 초식.
그 몇 천 번에 하나를 더하며, 백리소현이 앞으로 발을 뻗었다.
“일수초현.”
해가 막 떠오른 신화를 떠올리며 백리소현의 검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갔고.
서걱.
“끄아악!!”
앞으로 내민 곱추의 팔이 떨어져나갔다.
“윽…!”
마지막 순간, 곱추의 목을 베어내려 했으나 현기증이 그녀의 검 끝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곱추를 스쳐지나듯이 가로지른 백리소현은 갑자기 바닥이 자신과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깨달았다.
‘아… 나, 쓰러지는구나.’
독을 무시하고 격하게 움직여서 그럴까?
그녀의 시야가 크게 기울어지며 바닥과 맞닿는 순간,
“… 소현.”
“위 오라버니…”
위일청이 나타나 백리소현을 붙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