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0 17장. 애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 (6)
철혈문주와 독고령의 싸움은 일방적이었다.
첫 합을 주고 받는 순간 이미 서로 깨달았다.
‘이 새끼, 생각보다 가볍네?’
독고령은 의기양양하게 웃었고,
‘이 년, 무슨 괴물같은…!’
철혈문주는 난색을 표했다.
독고령의 검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일단 상황을 살피고자 마음 먹은 철혈문주는 거리를 벌리고 수비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보고 독고령이 인상을 찌푸렸다.
“새끼야, 남자가 부랄 달고 도 휘두르면 무조건 공격이지 무슨 방어야?”
“만용과 용기도 구분짓지 못 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서.”
“하!”
독고령이 도를 건들거리며 철혈문주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의 눈이 자신의 오른손의 도에 집중된 것을 확인한 독고령은…
쉬익!
왼손으로 연검을 뽑아들어 그의 미간을 찔러들었다.
사일검법의 초식 중 하나, 사양무광(斜陽無光)이었다.
“윽!”
갑작스레 튀어나온 또 하나의 무기에 당황하며 급급히 독고령의 연검을 막아낸 철혈문주의 시야에 도를 크게 휘두르는 독고령이 보였다.
“검수였나?!”
“검도 쓰지!”
콰앙!
급하게 도를 휘둘러 독고령의 유성도를 막아내자, 또 다시 연검이 채찍처럼 움직이며 철혈문주의 요혈을 찔러들었다.
“요사한…!”
“아직 말할 정신머리가 남았나보네?!”
“크윽!”
또 한 번, 도와 도가 맞부딪히자 철혈문주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디서 이런 막대한 내공이…!’
철혈문주가 입 안에서 비릿한 혈향을 느끼며 또 한 번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그는 직감했다.
자신의 눈 앞에 서있는, 저 붉은 머리의 처자를 이길 수 없으리라고.
한 수를 겨룰 때마다 태산과 맞부딪히는듯 했다.
내공의 차이가 컸기에 힘 싸움에서 밀리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검이었다.
독고령의 도법이 한없이 광포한 기운을 띄고 있었다면, 그녀의 검법은 한없이 날카롭고 조용했다.
낭창낭창하게 휘어지는 연검은 마치 살아움직이는 뱀처럼 요사한 움직임을 보이다 어느순간 뛰어올라 자신의 요혈을 노리곤 했다.
게다가 왼손이라 익숙하지도 않았다.
결국 철혈문주는 자신이 밀림을 순순히 인정하고 입을 열었다.
“… 어린 처자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군. 혹시 그대가 숨겨져있던 강호사절화 중 하나, ‘적막(寂寞)’인가?”
“… 뭐?”
“아닌가보군. 하긴… 그녀라고 하기엔 너무 시끄러운 처자야.”
“뭐래는거야, 새끼가. 안 오면 내가 간다?”
“잠깐.”
철혈문주가 손바닥을 들어올려 독고령을 멈춰세웠다.
“… 또 왜, 새끼야?”
“본좌가 졌다. 인정하마.”
“엥?”
“몇 합 겨루지 않았지만, 그대와 나의 차이를 인정한다. 내가 그대를 이기긴 힘들겠군.”
“…”
철혈문주의 말을 듣고 독고령은 어이가 없었다.
‘… 저딴 새끼가 도존이라고?’
하지만 얼이 빠진 독고령을 보고도 철혈문주는 여전히 한없이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내가 졌네. 인정하지.”
“그래서 뭐? 살려달라고?”
“아니. 그건 또 별개의 얘기지. 우리 둘의 비무에선 내가 졌지만…”
그 말을 듣고, 독고령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래야지. 역시 그렇게 나와야지.”
“싸움에선 내가 이겨야겠네.”
어느새 자신을 둘러싼 철혈문도의 벽을 둘러보며 독고령이 으르렁댔다.
“아까 경고했을텐데? 나한테 덤비면 최소 어디 하나 잘릴거라고.”
“그런 허세는 소용없네. 우리 철혈문이 무엇으로 유명한지 아는가?”
“읊어봐.”
“진법일세.”
“… 뭐?”
“개진(開陳)!”
철혈문주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문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쿠구궁!!
독고령은 갑작스레 자신을 압박하는 거대한 내공을 느껴졌다.
“윽…!”
“천지삼재진(天地三才陳)일세. 인술진으로만 따지면 소림의 백팔나한진에 부족함이 없지. 게다가 말일세…”
도를 들고 진법의 한가운데로 걸어나오는 철혈문주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나한테는 이 진법이 크게 문제가 안 되거든. 되려 힘을 실어주면 모를까.”
“이런식으로… 도존자리까지 땄냐?”
“부끄럽게도 그렇네. 도존은 철혈문주인 내가 아니라, 철혈문 전체야.”
“마음에 드네…!”
“으음?”
동시에 자신을 짓누르는 백여명의 무공을 이겨내며, 독고령이 몸을 일으켜 도를 앞세웠다.
“싸움은 비등해야 재밌지…!”
“… 수라가 따로 없군.”
분명 자신이 유리하리라 생각했음에도 철혈문주는 기수식을 취한 독고령을 보고 식은 땀을 흘렸다.
‘아니다… 질 리가 없다. 우리 철혈문이, 고작 한 명한테 무너질리가 없어…!’
철혈문주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일동… 방진(放陣)!!”
“이익…!!”
한 차례 더 거세진 내공의 압박에 더해 이번엔 진법을 취한 인원들 사이사이로 공격이 파고 들었다.
“2차전, 시작함세.”
“와라!!”
철혈문주의 말대로 확실히 이 진법 내에선 그가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새끼들이…!”
진법의 중심에 철혈문주와 자신을 세워두고 사각에서 파고드는 공격들은 독고령의 신경을 분산시켰다.
그리고 그 빈틈을 정확히 파고드는 철혈문주의 공격은 하나하나가 매서웠다.
먼저 진법 그 자체를 부수고자 진을 이루고 있는 인원을 공격하려고 들면…
“어딜!!”
챙!
어김없이 철혈문주가 그녀의 투로를 틀어막았다.
조금씩 조여드는 진법과 철혈문주의 공세에 독고령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랜만이군.’
한동안 잊고 살았던, 목숨의 위기를 느끼자 온 몸에 활력이 돌았다.
더 빨리, 더 강하게.
“으음?!”
아무리 합이 잘 맞는다고 하더라도 빈 곳은 필시 있기 마련.
독고령은 공세를 막아내면서도 끊임없이 그 빈틈을 찾았다.
‘일영기를 쓸까? 아니, 아직이다. 아직은 괜찮아…!’
오랜만의 전투였다.
일영기는 너무 쉽게 끝내고 만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좀 더 즐겨보자, 개새끼들아!!”
“크윽…!”
독고령이 내지른 사자후에 한 순간, 방진의 빈틈이 생기자 그녀는 정확히 그 곳을 파고 들었다.
“커헉!”
독고령이 휘두른 연검이 빈틈을 헤집자, 당황한 철혈문주가 외쳤다.
“수진(數陣)!!”
“어딜…!”
빈틈을 메꾸기 위해 철혈문도들이 좀 더 달라붙었지만, 독고령은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다.
독고령이 연검을 회수하고, 유성도를 높게 뽑아들어 양기를 끌어올렸다.
가장 익숙하고, 손에 익은 도법.
광풍수라도법이었다.
“안 돼!!”
철혈문주가 그녀의 투로를 막기 위해 사이에 끼어들었으나 이미 늦었다.
유성도의 검신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그녀가 검을 내리치는 순간, 내력이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콰과광!
“끄아악!”
“무… 문주님!”
한 순간 깨진 진법은 다시 발동되지 않았다.
한결 약해진 압박을 확인하며 독고령이 천천히 철혈문주에게 걸어갔다.
“새끼야, 사내 새끼가 비겁하게 일 대 다수가 뭐냐. 일 대 일로 싸워야지!”
“어… 어떻게…”
독고령이 경악한 철혈문주를 보며 사납게 웃었다.
“내가 또 일 대 다수 싸움엔 도가 텄거든? 지금이라도 말해주면 목숨은 살려주마.”
“아… 아아…”
“소소 어딨어?”
넋이 나간 채 벌벌떠는 철혈문주를 보고, 독고령이 외쳤다.
“소소 어딨냐고?!!”
“모… 모릅니다!”
“뭐?”
“저… 저흰 그저… 당 맹주의 말대로 오는 사람을 막기만 하면 된다고…”
“…”
독고령이 미심쩍은 눈으로 철혈문주를 쳐다보다가, 유성도를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철혈문주는 안도했다.
“사… 살려만 주시면…”
“내가 또 거짓말을 파악하는데도 일가견이 있거든?”
“… 예?”
“보통 사람은 거짓말을 안 하지만… 개새끼들은 맞아야 진실을 토해내더라고.”
“아… 아니… 저는 진짜 아무 것도 모르는…”
“지랄 말고!”
“커헉!”
독고령의 발차기가 철혈문주의 턱에 꽂히자, 그의 몸이 공중에 휙 떠올랐다가 바닥에 내리꽂혔다.
유성도를 검집째 든 독고령이 건들대며 자신에게 다가오자, 철혈문주는 부끄러움도 잊고 무릎을 꿇은 채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했다.
“사… 살려주십쇼, 여협!!”
“안 죽여, 안 죽여. 내가 널 왜 죽여? 소소가 있는데가 어딘지 알 때까지는 절대 안 죽이지.”
“그… 그러니깐 무엇을 찾으시는지 먼저 얘기를 해주시면…”
“안 되겠네. 아직 정신 덜 차렸네.”
“아니 좀…! 뭘 찾으시는지 애기부터… 컥!”
독고령이 겁집째 철혈문주의 어깨를 후려치며 말했다.
“내가 뭘 찾는지는 이미 말했으니깐, 이제 내가 원하는 걸 네가 대답해야지?”
“저… 정말 모르는… 컥! 끄으윽…”
“쯧, 문주란 새끼가 약골이네.”
거품을 물고 뒤로 쓰러지는 철혈문주를 보고 독고령이 혀를 차곤 주변의 철혈문도들을 둘러보았다.
“어이, 문도들?”
철혈문도들 중 누구도 독고령과 눈을 마주치지 못 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고령은 자신의 할 말을 했다.
“대충 내 허리 정도 오는 키에, 웃는 게 귀여운 여자애. 본 사람?”
“…”
“없어? 아무도? 정말?”
“…”
“대답해, 새끼들아!!”
“ㅇ… 예!!”
“쓰읍… 진짜 없나?”
독고령은 여전히 철혈문을 의심했다.
‘진짜 아닌가보네? 그럼 다른 곳으로 가봐야하나?’
독고령이 턱에 손을 올리고 잠시 고민에 빠지려던 순간.
“독고 소저!!”
“… 다 뒤졌어?”
“네! 이 곳엔 없습니다, 누님!!”
“아이씨, 진짜 없네?”
은관영과 청운이 다시 돌아오자, 독고령은 머리를 긁적였다.
“어이, 철혈문주. 미안하다. 진짜 없었네?”
“…”
철혈문주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하오문, 이제 우린 어쩌냐? 다른 데 도우러 갈까?”
“그게 제일 좋겠죠. 도우러 갈거면 어디로 가는 게 제일 나을까요?”
“무조건 위일청.”
“… 독고 소저.”
“뭐, 새끼야. 그런 거 아냐.”
물론 독고령의 마음 속엔 위일청을 돕고 싶다는 흑심도 어느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믿는 것은 무명의 실력이었다.
“무명이 얼마나 센데, 새끼야. 그 새끼, 이미 일 다 끝내고 객잔에서 쉬고 있을지도 몰라.”
“… 그래요?”
“그래. 갈거면 위일청을 돕는게 제일 나아.”
“… 알았어요, 그럼 가는 길에 객잔에 들러서 혹시 누가 도착했나 확인해보죠.”
“오냐.”
“따르겠습니다, 누님!”
독고령은 잠시 주변을 한 번 쓱 훑고는 미련없이 자리를 떠났다.
철혈문은 객잔을 중심으로 남동쪽, 그리고 위일청이 향한 곳은 남서쪽.
가는 길에 충분히 들를 수 있는 곳이었다.
혹시나 이미 남궁소소를 구하고 돌아온 이가 객잔에서 쉬고 있으면 참으로 좋겠다 생각하며 객잔으로 향하는 와중.
“… 잠깐.”
“왜요, 독고 소저?”
“… 뭔가… 이상한 게…”
“네?”
독고령은 자신도 모르게 닭살이 돋은 팔을 내려다보았다.
‘… 왜 이러지?’
객잔에 가까워질수록 뭔가 이상했다.
마주치지 말아야할 것을 마주친 느낌.
꺼림칙한 예감.
육감이 먼저 반응하여 오감에 경고를 알리는 듯한 이상한 기분.
독고령의 기감이 미친듯이 경종을 울렸다.
“… 독고 소저?”
“안 좋은 예감이 들어.”
“… 네?”
“먼저 가있을테니깐 니네 둘은 천천히 따라와라.”
“그게 무슨… 독고 소저?!”
은관영이 뒤에서 자신을 힐난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쓰지 않고 독고령은 객잔을 향해 내달렸다.
객잔에 가까워질수록 예감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뭐야, 뭐가 있는거지?’
시야 멀리 객잔이 보이는 순간, 독고령의 눈이 커졌다.
‘당가위…!’
멀리서봐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
빌어먹을 늙은 너구리가 객잔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의 옆에 장발의 호리호리한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이가 하나 더 있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전부터 그렇게 쳐죽이고 싶었던 당가위가 눈 앞에 있었기에.
독고령이 발에 힘을 실어 화살처럼 당가위에게 날아가며 외쳤다.
“당가위, 이 개새끼야!!!”
“음?”
“으응~? 쟤는 또 뭐지이?”
한 번에 죽이지 않으면 또 다시 도망치리라.
독고령은 당가위를 한 번에 죽이기위해 자신의 절기인 일영기를 도에 휘감아 당가위의 머리를 쪼갤 기세로 휘둘렀고…
카앙!!
옆에 서있던 괴인이 그녀의 검을 막아섰다.
“이… 일영기를 막았어?”
“심검?!”
당황하기는 둘 다 마찬가지였다.
독고령은 무엇이든 벨 수 있으리라 확신한 자신의 절기, 일영기가 막히자 당황했고.
혈교주, 혈라는 갑작스레 나타나 심검을 쓸 수 있는 고수의 존재에 당황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독고령이었다.
“너… 너 뭐야, 새끼야?”
“큭… 크큭… 으하하핫!! 태극을 완성한 이가 이미 있구나!!”
“뭐?”
“당가위! 네가 정말 큰 일을 했어. 뭔지 모르겠지만, 새로운 육신을 찾을 필요가 따로 없구나.”
혈라가 입이 찢어질듯 광소를 터뜨리며 독고령에게 손을 뻗었다.
“네가 내 육체가 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