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와 색마-159화 (159/225)

EP.159 17장. 애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 (5)

맹의 장로들과 함께 남궁진, 당가위를 기다리던 검후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처음엔 어린 소녀가 자신이 검후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당황하였으나 막상 그녀가 가진 가공할 만한 내공을 느끼는 순간, 장로들은 모두 그녀가 검후임을 인정했다.

“… 아직도 안 오더냐?”

“사람을 다시 한 번 보내보겠습니다.”

“내가 질책하러 온 자리라고 밝혔거늘. 남궁원청의 아이가 이렇게 무례한 줄 몰랐구나.”

“… 죄송합니다. 필시 무슨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어린 소녀가 한숨을 내쉬며 화를 내더라도 대개는 그저 귀엽게 보이기 마련이었으나 검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맹의 장로들은 식은 땀을 흘렸다.

‘맹주와 전 맹주 둘 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게야…!’

눈 앞에 있는 소녀는 그냥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검후였다.

검신, 전대 무림맹주, 살아있는 신.

그 검신과 같은 배분인 무림계의 가장 큰 어른 중 하나였다.

게다가 단순히 배분만 높은 게 아니라 그에 걸맞는 무시무시한 내공마저 가지고 있었으니 장로들은 그녀의 겉모습은 신경쓰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외형이 아닌, 그녀가 누구이고,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였으니.

그 때,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청성파의 장로가 입을 열었다.

“그… 제가 직접 가볼까요? 아무래도 두 분 모두 무슨 사정이 있는듯한데…”

“…”

“검후님?”

서교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래는 질책하는 척만 하려고 했다. 진심으로 질책할 생각은 없었노라.”

“… 예?”

“헌데 본녀의 눈으로 직접 보고 있자니 이 처참한 꼬락서니에 입을 안 열 수가 없더구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검후의 눈길이 청성파의 장로에게 향했다.

“아이야.”

“… 예, 검후님.”

“청성파가 어떤 문파더냐?”

“예?”

“대답해보거라. 청성이 어떤 문파더냐?”

“도교 문파입니다…”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검후는 장로의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듯 보였다.

“너희들이 본산으로 삼고있는 청성산이 어디더냐? 도교의 3대 종파 중 하나인 천사도의 대종사, 장도릉 선생께서 기거하며 도를 설파하던 곳이다. 그러니 너희 청성의 개파조사께서 청성산에 문파를 세웠겠지.”

“…”

“그런 곳에서 장로란 자리까지 오른 놈이 맹의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를 정도로 눈이 멀었구나.”

“일이라곤 하나도…”

“정녕 없더냐?”

청성파의 장로는 한없이 투명하고, 깊은 검후의 눈을 마주볼 수 없었다.

계속 지켜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죄를 낱낱이 토해내고 용서를 구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너무 늦었음을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한 번 즐거움을 알아버렸기에 이미 돌아갈 수 없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여체의 즐거움, 마약이 가져다주는 몽롱함.

그는 이미 속세의 즐거움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없습…”

“없다고 하지 말거라. 네 눈의 탁기가 이미 너를 증명하고 있노라.”

“검후께서 뭘 아신다고 그러십니까?!”

“부끄러움을 큰 소리로 가리려고 들더냐?”

“저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지. 잘못을 다시 되돌리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야. 허나…”

검후의 목소리가 조금은 누그러졌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먼저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 게 가장 힘든 일이니라.”

“…”

“아이야, 자랑스러운 청성의 아이야. 촉지사절과 삼대도교의 성지에서 나고 자란 아이야.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도인들을 배출하고, 마교의 준동에 가장 분노하며 앞서 들고 일어난 곳이 너의 문파니라.”

“그만 얘기하십쇼…!”

“정녕 너의 사문에 맹세코,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더냐?”

“저… 저는…”

“말해보거라. 본녀가 들어주마. 잘못된 게 있으면 꾸짖고, 함께 고쳐나가도록 거들어주마. 누가 너의 눈을 가렸더냐?”

“…”

청성파의 장로는 어느새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 눈물은 지나간 과거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었다.

“… 당문입니다. 당문의 당가위입니다…”

“청운 장로!!”

청성파의 장로, 청운을 다그치듯이 옆에 앉아있던 공동파의 장로가 그를 책망했다.

하지만 한 번 열린 청운의 입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다 끝났습니다… 이젠 다 끝났어요. 검후께서 다 말하시지 않았습니까?”

“무엇을 말이요! 어찌 함께 일을 도모하기로 한 이가 이제 와서…!”

“더 이상은 안 되겠습니다. 그대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당가위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했습니다. 그저 눈을 닫고, 귀를 덮고 모른 척 넘기기만 했지만 이젠 너무 늦었어요.”

“이익…! 이제와서 없던 일로 돌리잔 말이오?!”

“이미 벌어진 일을 어찌 없애겠느냐, 아이야? 허나 죄를 뉘우칠 방법은 있겠지.”

“검후…! 그대는 맹의 인사가 아니오! 무슨 이유로 맹의 행사에 참견하시오!!”

공동파의 장로는 끝까지 당문과 함께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자신에게 대놓고 반감을 드러내는 공동파의 장로를 보고, 검후는 씁쓸하게 웃었다.

“공동은 청성보다 사천에서 더 멀리 떨어져있지. 그래서 더더욱 모르는가 보구나.”

“내가 무엇을 모르오?”

“당문이 강시를 만들고 있노라. 정녕 몰랐더냐?”

“!!”

죽은 시체를 욕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무림인들은 유독 강시에 대해 혐오했다.

그리고 강호에서 강시를 만들 수 있는 문파는 오직 한 곳 뿐이었다.

“혈교와 손을 잡았다고?! 무슨 근거로…!”

그 때,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내가 증거를 가져왔소.”

“검선…!”

“그으으…!”

검선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악취가 퍼졌다.

“윽…!”

“이게 무슨…”

“천비개 장로가 없는 게 아쉽군. 보시오. 시체가 조금 훼손되긴 했으나… 묵선 어르신이오.”

“뭐라?!”

장로들은 그 말을 듣고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고, 누군가는 정말 묵선의 시체로 강시를 만들었나 확인하려 들었다.

그리고 검후는…

“… 넘지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구나.”

슬픈 기색이 역력했다.

마음 속에 한 줄기 희망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혹시나 은관영이, 독고령이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직접 강시의 존재를 확인하자 검후가 검선에게 물었다.

“… 당가위가 저지른게냐?”

“예, 검후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안이 시급하니 인사는 나중에 따로 올리겠습니다.”

“그러거라. 당가위는 지금 어딨느냐?”

“… 모르겠습니다.”

검선의 대답을 듣는 순간, 검후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당문이 결국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구나. 무엇 때문에? 왜 이제와서 맹의 한복판에서… 아무리 장로들이 썩었다고는 하나 혈교와 손을 잡았다는 게 알려지면 좋을 게 없는데 도대체 왜…’

검후는 조금씩 당문이 무엇을 노리는지에 대해 유추해나갔다.

‘다른 게 목적이겠구나. 처음부터 무림맹은 그저 이목을 가리기위해 장악했을 뿐이구나.’

당문이, 그리고 당문과 손을 잡은 혈교가 맹의 이목을 가리고 무슨 짓을 꾸미려고 한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검후는 왜 굳이 자신을 지목했는가에 대해 의문이 떠올랐고 금세 결론에 도달했다.

‘주하구나! 본녀를 일부러 지목했어! 검선은 어디까지나 본녀의 시선을 돌리는 게 목적이였어…!’

검후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검선이 물었다.

“검후님...?”

“주하다! 혈교주가 본신을 찾으러왔어!”

“예?”

“너는 이 곳을 지키고 있거라! 나는 급히 돌아가봐야겠다!”

“검후님…!”

검선이 그를 붙잡기도 전에 검후가 회의실을 열고 나가 급히 어딘가로 향했다.

홀로 회의실에 남겨진 검선은 묵선의 강시를 둘러싸고 혼란에 빠진 장로들을 보며 진각을 밟았다.

쿵!

“장로들.”

“… 검선.”

“저희끼리도 할 얘기가 참 많은 거 같소. 그렇지 않소?”

“…”

“지금이라도 말한다면 과거는 묻어드릴 수도 있소.”

검선이 내공을 끌어올리며 장로들을 압박했다.

“내 딸 아이는 어디 있소?”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

우드득!

마지막으로 한 마리 남은 범강시의 목을 부러뜨린 뒤, 무명은 손을 흔들어 피를 털어냈다.

“… 끝인가?”

더 이상 덤벼드는 범강시는 없었다.

고요해진 산장의 지하를 둘러보며 무명이 가볍게 호흡을 정리하고 있자,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막주, 정리를 끝냈습니다.”

“다 처리했느냐?”

“예.”

“보고하도록.”

수하들은 모두 살아있었고 큰 부상도 없는듯 했다.

보고를 다 들은 뒤, 무명은 아쉬워했다.

“이 곳에는 목표가 없는 모양이군.”

“… 그런 듯 합니다. 그보다 이 곳은…”

“병기창고인듯하다. 적의 요충지임은 확실하니 모두 불태워버리는 게 낫겠군..”

“존명!”

“이 곳에는 6호부터 10호까지가 남아서 책임지고 뒷처리를 끝내버리고, 1호부터 5호까지는 나를 따라 다른 이들을 도우러간다.”

“어디로 향합니까?”

“남서쪽의 위공자를 지원한다.”

무명은 일체의 고민도 없이 위일청이 있는 곳을 선택했다.

그 천하의 동업자 양반이 곤란을 겪는 일 따위, 무명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

“알겠습니다.”

무명이 수하 중 하나가 화섭자를 꺼내 불을 일으키려는 순간.

“… 음?”

“무슨 일이십니까, 막주?”

“… 방금 무언가 보였다.”

“확인해볼까요?”

“화섭자를… 아니, 횃불을.”

“예, 막주.”

부하에게 횃불을 건네받은 무명은 방금 시야 멀리 자신이 보았던 무언가를 확인하고자 멀찍이 내던졌다.

툭, 드르륵…

무명이 던진 횃불이 멀어지며 굴러가다가… 벽에 닿았다.

“… 잘못 본 건가?”

무명이 안심하며 한숨 놓는 순간.

벽이 움직였다.

“으음…?”

“그르르…”

거대한 벽이 움직이자 지하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 막주…”

“… 잘못본 게 아니었군.”

벽인 줄 알았던 무언가는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아주 거대한 인간의 형체.

얼마나 큰 지 그 몸을 다 일으키지도 못 하고 어정쩡하게 허리를 숙여 일어난 거대한 무언가는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신체가 전부 자그마한 강시로 이루어져있었다.

그리고는…

“그아아아악!!!!”

“으윽…!!”

마치 잠을 깨운 것을 화내듯 입을 벌려 소리를 내지르며 거인이 무명과 수하들에게 기어오기 시작했다.

“흩어져라! 밖으로 나가!!”

“예!!”

무명은 뒤쳐지는 수하가 없이 조심하면서 지하의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가 나온 직후…

콰과광!!

“그어어어어!!!!!”

거대한 강시가 산장을 부수며 몸을 일으켰다.

지하에선 자세히 그 형체를 확인할 수 없었으나 밖에 나와보자 강시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강시로 거인을 만들다니…”

거인 강시는 어림잡아 30장(100m) 정도 되는 크기였다.

그 크기를 확인한 무명은 금세 생각을 바꿨다.

“남동쪽으로, 광마가 있는 쪽으로 간다!”

“예!”

“가능한 산길로 유인하며 서서히 도망쳐라!!”

“존명!”

무명에겐 저렇게 거대한 무언가를 상대할 무공이 없었다.

그의 무공은 어디까지나 인간을 상대로, 암살을 목적으로 갈고 닦은 무공이었지 저런 자연재해급의 무언가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허나 독고령이라면, 산을 가른 그녀의 절기라면 분명 저 거대한 강시를 한 번에 벨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어어어!!!!”

거인이 산장의 파편을 잡아 마구잡이로 던져대기 시작하자, 무명이 잔해를 피하며 외쳤다.

“모두 전력으로 도망쳐라!!”

“예!”

거인이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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