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5 17장. 애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 (1)
‘여긴…’
창문의 틈새로 들어온 햇빛이 남궁소소의 눈을 비추었다.
몸을 일으키려던 남궁소소는 자신의 팔과 다리가 묶인 걸 깨닫고 급속도로 겁에 질렸다.
“아… 아아…”
금세 자신을 지키던 창천오검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 모습들이 떠오르자, 남궁소소는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아아… 아… 아무도 없어요?”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주변에 누구라도 없는가 찾기 위해 애썼지만,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혹시라도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몸을 움직이던 남궁소소는 자신의 옷을 쳐다보았다.
“으아아…”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누군가의 피가 묻어있었다.
“아… 아빠아… 할아버지이… 흑… 빨간 언니이…”
결국 남궁소소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도와줘요!! 으아앙… 꺼내줘!! 아빠아!! 할아버지이!!!”
그 때.
“크르르…”
“누… 누구 있어요…?”
갇혀있는 곳 한 구석에서 짐승이 그르렁대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찔거렸다.
“… 저기요…?”
아무런 대답이 없자 남궁소소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조금씩 기어가다 차가운 금속에 머리를 박았다.
‘철창…?’
무언가를 가두려고 한 것일까?
남궁소소가 그 철창을 쓰다듬는 순간.
“크아아아!!!”
“꺄아아아악!!!”
거무죽죽한 손이 튀어나와 철창을 붙잡고 흔들었다.
“크아아아아!!!”
“으… 으으으…”
철컹거리는 철창 소리와 대답없는 어둠 속에서 남궁소소는 홀로 숨죽여 울었다.
‘누구라도… 제발… 구해줘요…’
하지만 그녀의 바람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령 매~ 이제 그만 화 풀어, 응?”
“… 때린다?”
“아이… 어차피 나중에 관영이랑도 같이 할 텐데 미리 알아두는게…”
“캬아아악!!!”
객잔에서 나와 합비로 가는 내내 독고령은 뾰로통해있었다.
“그… 그런 걸 굳이 왜 말하고…!”
“그래도 서로 어느정도 성향을 알아놔야 좋은거지. 아, 나는 보통 위 오라버니가 뒤에서 하는 게 제일…”
“으… 음탕한 년아!”
“후훗.”
독고령이 턱을 괴고는 창 밖을 보며 툭 내뱉었다.
“… 너 때문에 화난 건 아니야.”
“위 오라버니 보고 싶어서가 당연히 더 큰 이유지?”
“아잇…”
독고령이 짜증내며 얼굴을 붉혔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고 백리소현은 되려 웃었다.
“이럴 때 보면 참 귀여운데, 우리 령 매. 언니가 한 번 안아줘야겠다.”
“아… 안지 마!!”
“후훗, 귀여워 령 매~. 위 오라버니 보고 싶어서 서운했어요?”
“캬아아악!!!”
합비로 가는 길은 보타문에서 하오문까지 오는 길보다 훨씬 편했다.
은관영 덕택에 좋은 마차도 얻었고, 마부도 따로 생겼다.
덕분에 위일청과 둘 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일청아, 너는 본녀와 같이 타자꾸나.”
“엑?!”
“왜 네가 놀라고 그러더냐? 원래 예정된 시간은 2주였고, 본녀의 절기를 이으려면 이보다 더 배워야하노라. 시간이 아까우니 가는 길 동안에라도 계속 가르쳐놔야지.”
“아… 그… 그렇긴 한데…”
독고령은 애원하듯 위일청을 쳐다봤지만, 그는 난처하게 웃으며 검후에게 말했다.
“… 그러시죠, 스승님.”
“으으…”
“이번 일만 끝나고 즐기도록 하거라. 거 어차피 평생 붙어지낼 운명일 거 같구만.”
“아… 아니이… 하다못해 저도 같이 타면…”
“주하 때문에 안 되노라.”
“…”
독고령이 도끼눈을 뜨고 주하를 노려보았지만, 아무 사정도 모르는 그녀는 그저 움츠릴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아…”
결국 독고령은 어쩔 수 없이 위일청과 떨어져 백리소현과 은관영이 탄 마차에 함께 올라탔다.
그러기를 근 3일 째.
푸드득.
이제는 익숙해진 올빼미의 날갯짓 소리가 들리자, 독고령이 창문을 열었다.
“야, 하오문. 일어나.”
“흐엑? 저 또 잤나요?”
“올빼미왔다.”
“주세요.”
은관영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서신을 받아들였다.
오는 내내 가장 바쁜 것은 은관영이었다.
독고령은 자신이 탄 마차가 마치 올빼미의 둥지로 느껴질 정도로 수없이 많은 올빼미들을 봤다.
서신 하나를 받아들 때마다 은관영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며 올빼미에게 다른 편지를 전달해주고난 뒤, 그녀는 틈만나면 내내 졸았다.
아마 다른 이들이 자는 시간에도 계속해서 무언가 일을 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으음…”
“뭐 새로운 정보라도 들어왔어?”
“아니요. 이제 합비에 거의 다 도착했으니깐 마지막 확인차 온 거네요.”
“그럼…”
“네. 합비에 들어간 뒤, 여전히 변동사항은 없을 예정이에요.”
“…”
은관영이 불철주야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작전은 좀 더 세밀해지고, 세심해졌을 뿐이지 큰 틀이 바뀌지는 않았다.
검후가 이목을 집중시키고, 그 사이 다른 이들이 남궁소소가 있으리라 추정되는 세 곳을 습격하는 것.
막상 행동으로 옮길 시기가 다가오자, 독고령은 약간의 조바심도 생겼다.
“… 진짜 그 세 곳 안에 있는 거 확실해?”
“소소 아가씨가 살아있다면, 네. 무조건 그 세 곳이에요.”
“이유는?”
“저희 정보망이 뚫을 수 없는 곳이 세 군데 뿐이니깐요.”
“…”
어찌 들으면 오만할 정도의 얘기였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 넓은 합비 땅에 오직 세 곳만 하오문의 눈과 귀가 닿지 못 한다는 얘기였다.
확실히 수상하기 그지 없었다.
“… 해당 장소에서 당가의 무인들을 목격했다는 증언도 확인했으니깐 가능성은 높아요.”
“그래, 알았다…”
“그보다 독고 소저.”
“응?”
“… 살막이 진짜 저희 돕는 거 맞아요?”
“아잇… 맞다니깐?”
“…”
은관영은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못 했다.
“아직까지 연락이 없어서요.”
“올 거야. 그 새끼 매번 딱 결정적인 순간에 튀어나온다니깐? 걱정하지 마.”
“… 그래도 합비에 도착한 뒤에 검후 님이 움직이기 시작한 뒤에는 늦어요. 그 전에는 만났으면 좋겠는데…”
“쓰읍…”
은관영의 걱정도 이해는 가지만, 답답하긴 독고령도 마찬가지였다.
‘이 새끼 못 오나?’
무조건 오리라 확신했지만, 어느새 합비에 다 왔는데도 아무 언질도 없기에 걱정되기라도 했다.
생각해보니 무명에게 먼저 연락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매번 무명이 멋대로 휙 나타나,
[동업자 양반, 당문을 조지러 가시겠소?]
라고 말하면 독고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답답해도 무명이 먼저 나타날 때까지 독고령에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오… 오지 않을까?”
“…”
“오겠…지?”
“독고 소저! 그렇게 무책임하게 말하면 어떻게 해욧!!”
“아니이… 나도 걔가 이렇게 늦을 줄은 몰랐지.”
“이익…!!”
은관영이 제대로 화를 내려는 듯 일어나는 순간, 마차가 멈춰섰다.
“소문주 후보, 도착했습니다.”
“… 알았어요. 후우… 독고 소저.”
“어.”
“살막이 안 오면 전에 말한대로 2 곳만 갈 거예요. 그리고 그 두 곳은 제가 고를 거예요.”
“… 알았어.”
마차에서 내리며, 독고령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소야…’
이 곳 어디엔가 남궁소소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독고령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이번엔 기필코 죽여주마, 당가위.’
이를 악물었다.
그 때, 독고령을 뒤따라나오던 백리소현이 조심스레 그녀의 등에 손을 올렸다.
“령 매…?”
“아, 미안.”
“… 소소가 걱정돼?”
“괜찮아. 구해낼 거니깐.”
“… 응.”
백리소현의 말을 듣고 분노를 사그라뜨린 독고령은 금세 다른 마차에서 내리는 위일청을 발견했다.
“일청!”
“령.”
재빨리 달려가 안기는 독고령을 보고 백리소현은 웃음을 참지 못 했다.
‘저렇게 못 참을거면서 왜, 크큭.’
막상 남이 얘기하면 부끄러워하면서도 또 위일청 앞에선 남의 이목도 신경 안 쓰고 일단 뛰어드는 독고령을 보고 있자 백리소현은 이걸 또 다음에 어떻게 놀릴까 신경썼다.
“안으로 들어가죠, 령.”
“네, 일청!”
위일청의 팔에 매달린 채 신이 나서 객잔의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불러서 왔소, 동업자 양… 반.”
“엑.”
객잔에 앉아 차를 마시는 무명을 발견했다.
객잔 안은 시끄러웠다.
이제 곧 은관영이 계획한 대로 움직이기 시작할 예정이었기에 마지막으로 잘못된 게 없나 다시 재확인하는 과정도 있었으며, 벌써부터 검후가 방문에 말한듯이 정말 무림맹을 꾸짖으러 갈 것이란 소문을 퍼뜨리는 등 할 일이 많았다.
하지만 그 시끄러움 속에서도 유독 조용한 탁상이 있었으니,
독고령과 무명. 그리고 다른 이들이 모인 탁상이었다.
“…”
“…”
“두 분, 아는 사이 아니었어요오? 왜 그래요?”
“… 아무 것도 아니오. 그… 잠시 둘만 얘기할 시간을 주시겠소?”
“… 그러세요.”
무명이 소리없이 일어나자, 독고령 또한 조용히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갔다.
객잔의 구석진 곳으로 가자 무명은 자신의 입을 가리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동업자 양…”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닥쳐. 제발.”
“… 여인이 되었으니 뭐… 그럴 수도 있소. 이해는 안 가지만,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보겠소.”
“… 좀 닥쳐줘, 제발.”
“그래서… 으음…”
무명이 드디어 자신을 부른 이유에 대해 묻고자 한다 생각한 독고령이 고개를 들었고,
“색마와 사귀는 것이오?”
“캬아아악!”
“혹시나 혼례를 올린다면 나는 음… 조금 그렇겠구려. 멀찍이서나마 지켜볼터이니 시기만 알려주시오.”
“아, 시발 좀!”
“그 혹시…”
무명은 독고령과 만난 이후 처음으로, 그에게 요상한 눈빛을 보냈다.
“아니라고 해주시오.”
“… 뭐가?”
“이미 애가 들어선…”
채앵!
독고령이 갑작스레 유성도를 뽑아들자, 한 순간 객잔의 안이 싸해졌다.
“와, 시발…”
“… 농지꺼리는 여기까지만 하리다. 하오문이 보유한 객잔에서 하기 좋은 농담은 아니었구려.”
“그러게, 시발. 하아…”
독고령이 다시 유성도를 집어넣자, 그제서야 무명이 물었다.
“잘 지낸… 듯 보이는군. 안부 인사는 집어치우겠소. 그래서 무슨 연유로 나를 불렀소? 당문을 조지는 일이라고 들었기에 일단 달려왔다만.”
“… 혼자 왔냐?”
“수하들이 필요하다면 혹시 몰라 조금 데리고 왔소.”
“정확히 얼마나?”
“1호부터 10호까지.”
“꽤 많이 데리고 왔네?”
“그대가 나를 먼저 부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깐 큰 일이라 생각했소. 아니오?”
“… 큰 일이긴 하지.”
“누구를 잡으려고 그러시오?”
“당가위.”
“!!”
당문의 2인자, 그것도 현재는 무림맹주의 자리에 오른 당문의 장로를 잡겠다는 말에 무명의 눈이 커졌다.
“… 제법 거물이군. 마음에 드는구려.”
“그 새끼가 무림맹주가 된 건 알고 있냐?”
“합비에 와서야 들었소. 우리가 정보조직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
“당가위 그 늙은 너구리가 전대 맹주인 검선의 딸을 납치해서 협박하고 있다.”
“… 매우 당문답군.”
“검선의 딸, 남궁소소가 있을법한 위치를 하오문이 세 개로 좁혀줬는데 우리 쪽은 움직일 수 있는 수가 한정되더라고. 그래서 널 불렀고. 이해됐냐?”
“이해했소.”
무명이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검선의 딸을 구해내는 즉시 당가위를 치겠군.”
“그래. 도와주겠냐?”
“물론이오. 오히려 동업자 양반이 드디어 날 찾아줘서 기쁘구려.”
“기쁠 거 까지야.”
독고령이 웃으며 무명의 가슴을 툭 쳤다.
“자세한 계획은 저기 조그만 애한테 들으면 돼. 쟤가 하오문 소문주 후보야.”
“저 소녀 말이오?”
“아…”
독고령이 가르킨 곳에 자그마한 소녀는 정확히 둘 있었다.
하나는 은관영이었고, 다른 하나는 검후였다.
무명이 가르킨 소녀는 하필 검후였다.
“…”
문득 자신을 놀렸던 무명을 조금 곤란하게 만들어볼까 싶어 독고령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쟤가 하오문 소문주 후보야. 너보다 어리니깐 그냥 자연스럽게 하대해도 돼.”
“알겠소, 헌데 말이오, 동업자 양반.”
“응?”
“장난이 많이 느셨구려.”
무명은 씨익 웃고 걸어가 정확히 검후에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하고, 은관영에게 자신이 할 일을 물어보았다.
‘… 새끼, 안 통하네.’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 이런 거구나 생각하며 독고령도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