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광마와 색마-154화 (154/225)

EP.154 16장. 오매불망 - (11)

“살막의 수장이 우리를 도울거다.”

“…”

독고령의 말이 끝나자, 장내에 침묵이 맴돌았다.

“… 령 매, 살막이면 그…”

“전에 독고 소저 납치한 곳 아니에요오?”

“령, 살막의 수장과 무슨 일 있었습니까?”

“살막이라니… 본녀가 듣기에는 이름부터 흉흉한 자들이구나.”

“…”

각양각색의 반응이 이어졌지만, 그 모든 반응은 결국 하나로 귀결됐다.

살막을 믿지 못 한다.

“어… 맞네. 내가 말 안 했구나.”

“살막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령?”

“그 때 그으… 어…”

독고령은 적당히 그럴싸한 거짓말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민했다.

“그… 어… 살막의 수장이랑 광마… 그러니깐 내 아빠랑 친해.”

“근데 왜 납치했어요?”

“그건… 어… 애초에 내가 멋대로 나간거기도 한데… 그 때 얘기 안 하면 안 되냐?”

그 날, 의녀문을 떠올리던 날을 기억하자 독고령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지금 다시 돌아보니 청승도 그런 청승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속사정을 알지 못 하는 다른 이들은 그저 독고령을 걱정할 뿐이었다.

“령, 혹시나 살막의 수장이 또 다시 령을 노릴 확률은…”

“없어요. 절!대! 없어요. 나 오히려 걔한테 경신술도 배워왔다니깐요?”

“령 매, 그래도 살막인데? 살수들은 돈만 받으면…”

“걔는 돈 받고 살인 저지르는 애들이랑은 좀 달라. 걔는 진짜 당가 조지는데 최고라니깐?”

“독고 소저, 전에 올빼미 빌려달란 게…”

“그치. 살막의 안가에 보낸… 야, 너 적지 마. 적지 말라고, 콱 씨!”

순식간에 일행들이 살막으로 시끄러워지자, 결국 독고령이 탁상을 쾅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내가 믿는다고! 보장할게! 소소 구하는데 걔가 진짜 최고라니깐?”

“… 지금 어디 있는데요?”

“몰라. 합비에서 만나기로 했어. 합비 들어가면 걔가 알아서 찾아오겠지.”

“… 위치도 모르고, 독고 소저를 한 번 납치도 했고, 흉흉한 소문이 도는 조직의 수장인데 그냥 믿어달라고요오?”

“…”

은관영이 저렇게까지 말하자 의심하는 것도 어느정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나보다 소소 구하고 싶은 사람 여기 있어?”

“…”

“내가 보장할게. 무명, 그 놈이 나나 심지어 여기 있는 검후 할머니보다 남궁소소를 구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패야.”

독고령이 진지하게 말하자, 일행들은 여전히 미심쩍은 눈초리를 지우지는 못 했어도 고개를 끄덕였다.

“… 령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알았어, 령 매.”

“그럼 독고 소저.”

“왜?”

“살막 쪽이 한 쪽을 담당해준다고 생각하고 계획을 짜긴 할테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살막이 안 오면 기존에 제가 했던 계획대로 할 거예요.”

“어떻게?”

독고령이 묻자, 은관영이 대답했다.

“저희는 두 곳만 갈 거예요.”

“…”

“정보는 파악하지 못 했고, 그나마 가장 가능성 높은 세 곳을 고른 것 뿐이에요. 상대의 무공 수위도, 숫자도, 하나같이 불확실한 것 뿐인데다가 지원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해요. 그러니깐…”

은관영이 잠시 백리소현과 위일청을 쳐다보곤, 독고령을 쳐다보았다.

“소소 아가씨도 정말 중요하지만, 저는 더 중요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 오냐.”

“물론 가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조금이라도 더 확실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 노력하겠지만, 그 과정에도 한계가 있으리라 생각해요.”

“알았다. 출발은 언제 할 건데?”

“밥만 먹고 바로요. 시간이 늦어질수록 소소 아가씨가 위험해질 거예요.”

“합비까지는?”

“3일이요. 지금 출발하면 3일째 낮에는 도착할거고, 그 날 밤. 바로 움직이려고요.”

은관영이 검후에게 물었다.

“괜찮을까요, 검후님?”

“상관없노라. 합비에 도착한 뒤, 본녀가 어찌 행동할꼬?”

“딱히 없습니다. 그냥 당당하게 무림맹에 걸어들어 가셔서 남궁진 대협을 만나기를 청한 뒤, 그 분과 차를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시면 돼요. 그리고는…”

“남궁원청 그 놈의 손녀를 구했다는 낭보가 들어오면 진이와 같이 무림맹 내부를 정리하면 되겠구나.”

“… 대부분 장로급일텐데 괜찮으신가요?”

“크크큭, 아이야.”

검후가 미소지었다.

그 미소는 지금과 같이 인자한 미소가 아닌, 약간은 냉혹한 미소였다.

“잘못된 길을 선택한 아이들에게 매질을 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울꼬?”

“… 부탁드릴게요, 검후님.”

“오냐. 더 할말은 있더냐?”

“지금은 더 이상 없어요.”

그 말을 듣자, 검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녀는 미리 식사를 끝냈으니 바로 출발할 준비를 하도록 하마.”

“… 네. 마차가 준비되는대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러거라.”

검후가 자리를 비우자, 자리에 남은 이들을 둘러보며 은관영이 배시시 웃었다.

“그럼 뭐 드실래요? 여기 숙수가 요리를 잘 하는데요오?”

“제일 비싼 걸로 다 깔아봐. 나는 술도 추가해주고.”

“그럴까요? 술도 좀 달라고 해야겠네요.”

“응…? 왠일이냐? 나 술 못 마시게 맨날 막더니?”

“그야…”

은관영이 씨익 웃었다.

그 웃음에서 독고령은 까닭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독고 소저가 어제 얼마나 음탕했나 소현 언니랑 위 오빠한테 들으면서 술 안주로…”

“캬아아악!!!”

“어머, 왜 부끄러워하시고 그러세요오? 이제 곧 저도 끼어서 4명이서 같이…”

“아… 안 돼! 말하지 마! 일청,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욧!!”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어떻게든 입을 틀어막으려고 애쓰던 독고령이었으나 위일청은 웃으며 그녀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령.”

“왜… 왜요, 일청?”

“어차피 은 소저와도 이제 곧 할 테니깐 지금부터 익숙해지는 게 어떨까요?”

“아… 아니이…. 마… 만지지 마요! 또 만져서 제압하려고… 흐아앙!”

독고령은 위일청의 손길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를 얌전하게 만든 위일청이 백리소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백리소현은 헤실헤실 웃으며 은관영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깐 어제 너 도와주고 윗 층으로 올라갔는데…”

“말하지 말라고… 하으윽…! 이… 일처엉!!”

이후 술과 음식이 나온 뒤에도 독고령은 차마 손을 대지 못 했다.

*

맹주직에 오른 뒤, 당가위는 무림맹 내부에 이제부터 자신의 처소가 될 맹주실로 들어섰다.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당가위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있는 거라곤 고작해야 조악한 책상과 의자 하나, 그리고 다기가 전부였다.

어떠한 장식도 없고 그저 맹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잔뜩 쌓여있는 서류를 보고 당가위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맹주의 거처라 들어 기대했거늘, 생각보다 조악하구려.”

“맹주님께서 검소하셨기에…”

당가위가 뒤돌아서 맹원을 쳐다보았다.

“노부 이외에 다른 맹주가 있소?”

“… 죄송합니다. 전대 맹주님께서 검소하시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다음부턴 조심하시게.”

“… 예, 맹주님.”

“말이 나온 김에 전대 맹주는 뭘 하고 있는가? 인수인계도 없이 원…”

“전… 맹주님께서는…”

맹원이 주먹을 꽉 쥐며 이를 악물자, 그 모습을 보고 당가위가 피식 웃었다.

“지병이 도졌다고 들었거늘 여전히 상태가 안 좋나보군, 클클. 그래도 맹주였던 자가 원…”

당가위의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에 맹원이 눈을 부릅떴다.

“아무리 그래도 전대 맹주십니다…! 예우를 지켜주시지요, 장로님!”

“두 번 실수했군.”

“커헉!”

당가위가 순식간에 맹원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붙잡았다.

당가위의 손이 거무죽죽해지자, 맹원의 얼굴이 조금씩 파랗게 변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다 이윽고 입에서 거품을 토해냈다.

“끄르륵…”

이제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맹원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당가위가 창 밖을 향해 말했다.

“게 있느냐?”

그가 묻자, 살수복을 입은 당가위의 수하들이 여럿 들어왔다.

“예, 맹주님.”

당가위가 턱으로 맹원을 가르켰다.

“치워라.”

“예!”

“그리고 내 처소의 가구들을 이 곳으로 옮기거라. 이리 누추해서야 어찌 강호를 살피겠느냐?”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 그나마 의자는 마음에 드는군.”

의자에 앉은 당가위는 두 다리를 들어 탁상에 올리곤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맹주 직속 휘하의 정보대는 어찌 처리하였느냐?”

“조직 개편을 빌미로 다 흩어놓았습니다. 수하들이 붙어서 일일이 감시를 하고 있으니 수작질은 못 할겁니다.”

“남궁세가 본가는?”

“아직까지 아무 움직임이 없습니다.”

“흐음…”

지금 쯤이면 밖으로 별동대를 빼돌렸을 줄 알았는데 되려 아무 움직임이 없다고 하자 당가위는 어딘지 모를 찝찝함을 느꼈다.

“검선이 내 생각보다 딸을 많이 아끼는 모양이구나. 손가락이라도 잘라 보내려고 했거늘. 일단 감시를 늦추지 말거라.”

“존명!”

“개방 측은 어찌 되어가고 있더냐?”

“… 저희 측에서 밀고있는 후개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경쟁자가 하오문과 손을 잡아 정보전에서 우위를 점하는 듯 합니다.”

“본가에서는 뭐라고 하더냐?”

“…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쯧. 권신이 그래도 이름값을 하는구나.”

아직까지 권신에게 입은 피해를 수복하느라 정신이 없는 거라 생각하고 당가위는 잠시 고민하다 수하에게 일렀다.

“총순찰과 법개가 상대 쪽을 지지한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인근 하오문 측은 독을 풀고, 총순찰과 법개 쪽은 모용세가가 알아서 하라고 전하거라. 그 쪽도 검신을 상대하느라 바쁜지는 알지만, 너무 우리만 일하는 느낌이구나.”

“그리 전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모용세가와 연락했을 때, 검신을 만나러 간다 전하고 이후로 아무 소식도 없던 걸 떠올리자 당가위는 연신 수염을 매만졌다.

“모용벽 그 놈이 검신을 못 꺾더라도 부상 정도는 입혀주면 좋을텐데 말이지…”

“가장 좋은 건 동귀어진 아니겠습니까?”

“클클, 아직은 동맹이니 허튼 소리 말거라.”

“실언했습니다, 맹주님.”

수하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지만, 그는 실실 웃고 있었다.

“그럼 공무를 시작해볼까…”

당가위가 다리를 내리고 막 책상에 손을 얹는 순간.

“매… 맹주님!”

“무슨 일이더냐? 그리 급하게.”

“이…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무슨 일?”

당가위의 짜증 섞인 표정에도 불구하고, 새로 들이닥친 이가 그에게 종이를 하나 꺼내들었다.

“거… 검후가 나타났습니다.”

“… 검후가? 남궁진이 부른 것이냐?”

“반대입니다. 검후가 검선을 찾아나섰습니다.”

“뭐?”

종이를 낚아챈 당가위의 눈이 바삐 움직였다.

종이에 적힌 내용은 일종의 방문(榜文)이었다.

[보타문의 14대 문주, 나 서교가 오랜 벗, 검신 남궁원청의 아들이자 무림맹주 남궁진,ㄴ을 꾸짖기 위해 무림맹을 방문하니 이를 강호에 고한다.

본녀가 꾸짖을 것은 세 가지다.

첫째, 강호가 어지러운데도 행동하지 않음을 지탄하고자 하며.

둘째, 이 혼란한 시기에 책임을 지지 않고 되려 맹주직에서 도망친 것을 질책하고자 하며.

셋째, 맹의 장로들이 어린 맹주를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 했음을 질타하고자 한다.

이에 평소 뜻이 있음에도 하고 싶었던 말을 못 했던 자는 내게 찾아오라.

본녀가 그대들의 이야기를 규합해 맹주를 꾸짖고자 하노라.]

“허어…”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맹주님?”

“…”

당가위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정말 지탄하고자 찾아오는 게 아니야. 이건 시선을 끌기 위해 덫을 놓은게야.’

이목이 많아질수록 함부로 움직일 수 없어지는 건 당연지사다.

검후는 쉬이 강호에 나오지 않고, 얽히려고 하는 인물도 아니었다.

소싯적 검신과 비견될만한 무위를 보여줬던 그녀였음에도 무림 백대 고수에 이름조차 올리는 걸 꺼려하던 게 검후였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화려한 행보를 하는 것 자체가 무언가 있다는 반증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노리는게지?’

아무리 검후라 하더라도 명분없이 움직일 수는 없다.

그러니 이런 방문까지 써서 강호의 이목을 얻어 검선과의 만남을 주선한 것이다.

“남궁세가의 본가에는 정녕 아무 움직임도 없더냐? 확신하느냐?”

“… 확신합니다. 전력의 5할을 남궁세가의 본가 감시에 투입했습니다. 주변 일대의 모든 정보를 장악하고 있다 확신합니다.”

“검신은?”

“아무리 검신이 대단하다고 한들 요녕에서 예까지 오려면 열흘이 넘게 걸립니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도중에 저희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흐음…”

총력전을 펼칠 계획은 아닌 듯 하자, 당가위는 확신했다.

“딸이군.”

“예?”

“남궁진의 딸을 감시하는 병력을 좀 더 늘리거라. 양동작전이야.”

“…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속하에게 가르침을 주신다면…”

“검후는 절대 강호의 일에 끼어들길 좋아하는 이가 아니다. 헌데 굳이 남궁진을 지목하고, 장로까지 지목했다. 이렇게 되면 그들에게 이목이 집중된다.”

당가위가 품에서 비도를 꺼내들어 손 안에서 뱅글뱅글 돌렸다.

“눈과 귀가 집중되니 자연스레 장로들의 행동이 제약된다. 적어도 맹의 밖으로 쉬이 나가지는 못 하겠지. 쓸 수 없는 패가 되었군.”

“그럼…”

“검후라는 이름으로 주변을 현혹시킨 뒤, 다른 것을 노릴게야. 헌데 지금 검선이 노릴 만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딸년 밖에 없구나.”

“아…”

그제서야 수하가 이해를 하자, 당가위가 그에게 명령했다.

“남궁세가의 본가를 지키는 병력을 조금 더 빼서 남궁소소를 지켜라. 그리고 ‘놈’을 데리고 가거라.”

“… 본가의 허락없이…”

팍!

당가위의 비도가 탁상 위에 박혔다.

“지금 본가의 허락을 구할 상황이라 생각하느냐?”

“…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본가에는 나중에 노부가 따로 연락할테니 일단 ‘놈’을 쓰거라. 검선 그 놈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모르겠다만…”

당가위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노부 또한 아무런 준비도 안 한게 아니란 말이지, 클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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