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4 16장. 오매불망 - (1)
독고령과 헤어진 남궁소소, 창천오검 일행은 부지런히 남궁세가의 본가로 향하고 있었다.
마차의 주변을 호위하는 다른 사제들과 마차 안에서 남궁소소를 바로 옆에서 돌보고 있던 창천오검의 맏이는 갑작스런 남궁소소의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 무사님.”
“네, 아가씨.”
“꽃이 빨리 피게 하는 방법은 없나요?”
“꽃이요?”
갑작스런 남궁소소의 질문에 창천오검의 맏이는 머리를 감쌌다.
“혹시 꽃이 보고 싶으신 겁니까?”
“… 아뇨. 빨간 언니가 노란 꽃이 두 번째로 다시 피면 보러 오겠다고 했어요.”
“아…”
그 말을 듣자, 맏이는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네.”
“독고 소저께서는 약속을 지킬 줄 아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이렇게 아가씨가 울적한 모습으로 지내고 계신다면 소저께서 슬퍼하시지 않을까요?”
“아… 맞아요. 빨간 언니는 눈을 감고도 다 본다고 했어요.”
“...?”
뜻 모를 남궁소소의 말을 듣고 창천오검의 맏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표정을 바로 하고는 웃으며 그녀를 위로해주었다.
“이제 곧 본가에 돌아가면 어머님도 만나실거고, 얼마 가지 않아 맹주님과 전 가주님도 돌아오실 겁니다. 그 분들에게 검을 배우다보면 금방 독고 소저가 아가씨를 찾아오시지 않을까요?”
“그… 런가요?”
“예, 분명 그럴 겁니다. 검을 휘두르다보면 시간이 금세 흐르니 열심히 수련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 하지만 수련은 힘들잖아요.”
“음…”
다시 또 남궁소소의 반박에 가로막힌 창천오검은 고민하다 명쾌한 답변을 내놓았다.
“소소 아가씨가 수련을 열심히한 보상으로 독고 소저께 아가씨와 함께 강호유람을 요청하는 건 어떨까요?”
“… 네?”
“독고 소저는 중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시지 않습니까? 다음에 독고 소저를 만날 때까지 아가씨께서 열심히 수련을 한 다음에 그 성과를 보여드리는 거죠.”
“그럼요?”
“그리고는 같이 강호를 돌아다니자고 독고 소저에게 부탁드리는 겁니다.”
“아…!”
그 말을 듣자, 남궁소소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나중에 무당산에 가보고 싶어요! 화산에도 가보고 싶고, 오악을 다 둘러보고 싶어요!”
금세 울적함을 떨쳐내 독고령과 함께 가고 싶은 장소를 쏟아내는 남궁소소를 보며 창천오검은 미소지었다.
‘… 독고 소저, 잘 부탁합니다.’
아무튼 독고령이 어떻게 해주리라 생각하며 그녀에게 남궁소소를 떠넘긴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즈음.
“… 으음?”
마차가 멈춰섰다.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던 그의 눈에 굳은 표정의 사제가 눈에 들어왔다.
“사제, 무슨 일이냐?”
“… 사형.”
“…”
사제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쳐다보자, 그 곳에는 녹색의 장삼을 입은 한 노인이 서있었다.
노인의 가슴 팍에 금으로 수놓아진 독(毒)이란 글자를 보자, 맏이는 표정을 굳히며 마차에서 내렸다.
“… 당문.”
“창천오검, 맞나?”
“… 이런 으슥한 산길에는 무슨 일이오?”
“고얀지고. 당가의 장로를 보고 예를 갖추지도 않는구나.”
“손에 숨긴 우모침부터 내려놓는다면 예를 취하겠소.”
“호오…”
그 말을 듣자 당가의 장로, 당가위는 눈을 빛내며 창천오검을 쳐다보았다.
“그저 그런 떨거지들은 아닌가보구나.”
“… 무슨 일로 우리를 찾아오셨는지 모르겠으나 예로 대한다면 우리 또한 예로 대할 것이오.”
“네 놈들을 찾는 게 아니야.”
당가위의 시선이 마차로 향했다.
“남궁세가의 금지옥엽을 찾아온게지.”
“… 전원, 발검!”
챙!
창천오검의 전원이 마치 한 몸이라도 된 듯, 동시에 검을 뽑아들고는 검진을 형성했다.
검진의 선두에 선 창천오검의 맏이가 당가위를 보고 이를 갈았다.
“감당치 못 할 일은 하지 마시오.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가주께서 소림의 방장을 꺾었지. 전 맹주는 모용세가의 가주와 붙고 있겠군.”
“!!”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겠는가?”
“소매에 손을 넣지 마시오, 장로.”
그의 말을 무시하고 당가위는 소매 깊숙히 손을 집어넣었다.
“투신은 곤륜을 벗어나지 않으니 본가를 방해할 자는 이제 무림맹주 하나 뿐이야. 그의 딸만 확보하면 본가가 무림맹을 장악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구만.”
“… 전쟁이라도 일으킬 생각이오?”
“글쎄…”
당가위의 손이 소매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창천오검이 그를 향해 검기를 쏟아냈다.
허나…
채채챙!!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작은 침과 맞부딪히며 자신이 쏘아낸 검기가 막히자, 단번에 격차를 깨달은 그는 이를 악물고 창천오검의 막내에게 소리쳤다.
“아가씨를 데리고 피신해라!! 당장!!”
“예, 사형!”
“꺄아악!!”
마차의 문을 벌컥 열어재끼고는 남궁소소를 안아들고 달아나는 창천오검의 막내를 보고 당가위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었다.
“크크큭, 괜히 힘 빼지 말게. 어차피 다 부질없는 짓이거늘.”
휘익-.
당가위가 휘파람을 불자 야행복을 입은 몇 명의 살수들이 나타났다.
“네 놈들은 남궁진의 딸을 쫓아라. 놓치면 본가의 실험체로 보내겠다.”
“존명!”
“이익…!!”
남아있던 창천오검이 남궁소소를 쫓기위해 흩어지는 야행복의 무인들을 막아서려했으나, 당가위의 손이 번쩍이더니 그의 손 끝에서 우모침들이 쏟아졌다.
“크윽…!”
달 하나 뜨지 않은 어두운 밤에 얇기 그지없는 우모침을 날려대자 창천오검은 살수들을 쫓지 못 하고 당가위의 침을 막아내는 데 급급했다.
“본좌가 바쁘니 빨리빨리 하자꾸나.”
당가위가 흉흉한 살기를 내뿜으며 창천오검에게 다가갔다.
“전원… 동귀어진을 각오하라.”
“예!!”
“크하하핫!!”
당가위가 광소와 함께 창천오검을 향해 뛰어들었다.
“끄윽…!”
“사제…!!”
털썩.
독에 중독되어 입에 거품을 물고 괴로운 듯 쓰러지는 사제를 보고, 홀로 남은 맏이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당가위!!!”
“짖지 마라.”
“커억…!”
“곧 따라갈 것을 뭘 그리 슬퍼하느냐?”
“끄윽…!”
자신의 가슴을 뚫은 팔을 보며, 창천오검의 맏이가 당가위를 노려보았다.
“가… 가주님께서 반드시… 복수를…”
“기대하지.”
“커헉!”
깊숙히 박힌 팔을 빼자 그의 가슴에서 울컥이며 피가 쏟아져나왔다.
팔에 묻은 피를 보고 얼굴을 찌푸린 당가위는 몇 차례 손을 털어냈다.
“쯔쯔… 옷이 더럽혀졌구나.”
그 때, 어린아이를 둘러메고 수하들이 돌아왔다.
“… 장로님. 맹주의 딸을 데리고 왔습니다.”
“놔… 놔요!!”
시끄럽게 울어대는 남궁소소를 보고 당가위가 얼굴을 찌푸렸다.
“도망친 한 놈은?”
“죽인 뒤 화골산으로 시체를 없애버렸습니다.”
“수고했다. 여기도 치우도록.”
“존명!”
“흐윽…! 언니이… 빨간 언니이…”
“… 시끄럽군.”
수혈을 짚어 남궁소소를 조용하게 만든 당가위는 부지런히 움직이는 자신의 수하들을 보며 웃기 시작했다.
“드디어… 드디어 시작이구나.”
백도무림을 지탱하던 세력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삼신 중에서 검신은 곧 죽을 것이고, 투신은 곤륜을 떠났고, 권신은 당문의 가주에 의해 명을 달리했다.
도선은 모용세가의 진격을 막기 위해 묵여있을 테고, 소림의 권선은 갑작스레 방장의 자리를 이어받았으니 내부를 다스리기 바쁠 것이다.
그리고 이 혼란의 시기를 틈타, 당가위는 무림맹을 장악할 생각이었다.
“크크큭, 맹주. 무위가 뛰어나도 뭘 어쩌겠소?”
자신의 손에 들린 검선 남궁진의 약점을 보고 웃으며 당가위는 피에 젖은 손으로 준비해 둔 서신을 꺼내 전서구를 날렸다.
서신의 수취인은 무림맹주, 남궁진이었다.
당가위는 모든 게 착착 잘 진행되는 줄로만 믿고 있었다.
남궁소소가 잠들기 전에 말했던 ‘빨간 언니’가 누구를 뜻하는지,
그는 몰랐다.
*
쾅!
독고령이 거친 숨을 내쉬며 처소로 돌아오자, 백리소현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캬아아악!!!”
“… 또 졌어, 령 매?”
“안 졌거든!!!”
“그런 걸로 하자.”
“위일청 보고 싶다고!!!!!”
“…”
그녀의 광기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백리소현은 지난 일주일을 돌아보았다.
검후와 매일 세 번의 비무를 하기로 약속하고 6일 째.
위일청이 나오기로 약속한 기일의 반이 흘렀으나, 독고령은 검후에게 연전연패 중이었다.
2일째 되던 날, 검후가 발을 움직이게 만들 때까지만 해도 금방 위일청을 만날거라 독고령은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다르게 갑자기 검후의 검술이 휙 돌변하였다.
“유검(柔劍)을 뚫었으니 이젠 환검(幻劍)으로 해보자꾸나.”
“엑?!!”
검후가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그녀의 검이 어지럽게 흔들리며 독고령을 현혹했다.
한 번의 내려치기가 5번의 내려치기로 늘어나자 갑작스레 변한 검술에 당황한 독고령은 결국 패배했다.
“니네 사형 불러와!!!!”
“… 예, 누님.”
더 이상 독고령과의 비무를 청운 혼자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주하의 요기를 막기 위해 제령의 의식을 지내고 있던 현진, 현상까지 불러와 검후의 비무를 대비했다.
어디 그 뿐이랴?
“거기 보타문도.”
“… 네?”
“너, 손목을 보아하니 환검을 잘 쓰겠구나. 나랑 비무하자.”
“무… 무슨 말씀을…”
“이리 와!!”
“꺄아아악!!”
독고령은 조금이라도 강해지기 위해, 검후의 검을 뚫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상대의 무공 수위와 관계없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 싶으면 죄다 강제로 불러내 비무를 벌이며 검후와의 일전을 준비했다.
4일째 되던 날, 검후의 검술에서 진짜와 허상을 구분할 수 있게 되자 이번엔 그녀의 검이 무거워졌다.
“이번엔 중검(重劍)이니라.”
“그냥 좀 져욧!!”
“어림도 없는 소리.”
중검은 독고령 또한 자신 있는 분야라 힘 싸움으로 맞부딪혔지만, 검후는 그 자그마한 몸이 무색하게 독고령보다 묵직한 한 방, 한 방을 담아내 그녀를 패퇴시켰다.
“이익…!!”
“배운 건 어따 써먹고 맞부딪히느냐? 중검은 더 무거운 검에 필패하기 마련. 무작정 맞부딪히려 들지 말고, 생각이란 걸 좀 하거라. 무식한 고로…”
“캬아아악!!”
검후가 머리를 두들기며 독고령을 비웃고 떠나자 그녀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금세 그것이 조언임을 깨달았다.
“야, 무당파.”
“… 독고 소저, 오늘은 진짜 제령을 해야…”
“닥치고. 중검으로 후려칠 때 유검으로 흘리는 방법 좀 말해봐.”
“그… 이화접목의 묘리로…”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깐 칼로 얘기하자.”
“… 거절하면 어떻게 됩니까?”
독고령이 현상에게 유성도를 흔들어보이며 말했다.
“주하보다 네가 먼저 제령당하지 않을까?”
“… 짧게 해주세요, 제발.”
“네가 잘 하면 짧게할 수 있어.”
“…”
그렇게 아주 빠르게, 착실히.
독고령은 강해지고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 독고령의 성장속도는 무서울 정도로 빨랐다.
검에 대한 끝없는 집념.
강해지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호승심.
강자에게 끊임없이 덤비는 용기까지.
처음에는 갑자기 비무를 하자고 붙잡는 독고령이 예의가 없다고 불쾌하게 여겼으나, 그녀와 한 번 검을 섞은 이들은 하나같이 검술에 크나큰 발전이 있던 데다가, 검을 익히는 그녀의 자세가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어 보타문도들의 마음을 바꿔놓았다.
게다가…
“들었어요, 사저?”
“응?”
“독고 소저 있잖아요. 위 공자의 정인이래요.”
“그야 알지.”
“문주님과 비무를 하는 이유가 위 공자와 장래를 허락받기 위해서래요.”
“응? 진짜?”
“아냐. 내가 들었는데 문주님한테 위 공자를 뺏기 위해서래.”
“와… 위 공자를 사이에 두고 문주님과 다투는 거예요? 대단하네요.”
“멋지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그렇게 애쓰다니…”
어디서 시작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소문이 조금씩 변질되며 독고령이 검후에게 위일청을 빼앗기 위해 매일같이 비무를 벌이는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그 이야기들은 아직 어린 소녀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한 이야기였고, 결국…
“독고 소저!! 힘내욧!!”
“언니, 응원할게요!!”
“안 되면 저라도 받아주세욧!!”
독고령과 검후의 비무마다 그녀를 응원하는 무리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 쟤네는 뭐냐?”
독고령이 당황스러운 듯 자신을 응원하는 보타문도들을 가르키며 은관영에게 묻자, 진실을 알고 있는 그녀는 모르는 척 배시시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검후님의 업보가 깊으신가보죠.”
“… 그 할매가 조금 지랄맞긴 하지.”
“다 들린다, 이 년아.”
검후가 작은 몸을 이끌고 아장아장 걸어나오자, 독고령이 그녀를 보며 씨익 웃었다.
“격장지계 모르세요?”
“허튼 소리. 하아… 빨리 하자꾸나. 네 년이 본문을 어지럽히는지, 아니면 바른 방향으로 끌고 나가는지 본녀도 판단이 안 서는구나.”
“무조건 어지럽히는 쪽이죠.”
“응?”
독고령은 유성도를 고쳐잡으며 외쳤다.
“오늘은 꼭 이길 테니깐!!!”
“캬아아악!!!”
“… 또 졌어, 령 매?”
“안 졌거든! 그냥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서로 물러난 거 뿐이거든!!”
“… 그런걸로 하자.”
“위일청!!!!! 캬아아아악!!!!!!! 위일청 보고싶다고!!!!!”
이젠 남의 이목도 신경 안 쓰고 넋 놓아 위일청의 이름을 부르는 독고령을 보며, 지난 일주일의 회상을 끝낸 백리소현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 앞으로 일주일만 더 참으면…”
“일주일?!!”
휙 돌아본 독고령의 눈에서 번들거리는 광기를 본 백리소현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 아냐.”
“망할 할매가…! 으갸아아악!!!!!”
고래고래 괴성을 내지르는 독고령을 보며 백리소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 위 오라버니. 령 매의 광증이 심해지고 있어… 빨리 돌아와…’
애꿎은 백리소현만 어떻게 독고령을 위로해줘야할지 고민하며 남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