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3 15장. 여인, 노인, 어린아이를 조심하라 - (11)
독고령이 이제 막 서책을 읽으며 검후와의 비무를 복기하고 있을 무렵.
검후는 처소로 들어가 위일청과 마주 앉았다.
“… 오셨습니까, 스승님? 밖에 소란이 일던데…”
“아무 일도 아니였다.”
“예.”
행여나 위일청의 마음을 흔들까 펼쳐두었던 기막을 거둬들인 뒤, 검후가 물었다.
“… 어떻드냐?”
“어떤 걸 얘기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루동안 정인과 떨어져 지낸 것 말이다.”
“… 글쎄요. 아직까지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그럴테지. 이제 하루거늘.”
검후가 피식 웃으며 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본녀가 왜 너보고 여인과 멀리하라 했는지 알겠느냐?”
“… 불교의 가르침이라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 불가의 가르침은 비움, 공(空)에서 시작되니라. 승려가 절에 들어갈 때, 머리를 깎는 것은 속세의 번뇌와 잡생각을 끊어내는 것이지.”
“…”
“이렇듯 모든 것을 버리고 시작해야만 비로소 불가의 가르침이 시작되노라. 허나 본녀 또한 불도를 논할만큼 제대로 된 수양을 쌓은 적이 없거니와 너에게 그런 가르침을 내릴 정도로 낯짝이 두껍지도 못 하다.”
검후가 건네주는 차를 마시며 위일청은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비워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 또한 있노라.”
“어떤…”
“그리움은 누군가에 대한 애착으로 시작되는 것이지. 먼저 사랑하지 않고서야, 그리움이 존재하겠느냐?”
“아…”
검후의 말을 듣고, 위일청은 독고령이 사라졌을 때 느꼈던 그 괴로움이 떠올랐다.
“… 이해됩니다.”
“그런 과정이라 생각하거라. 허나 2주동안 단순히 면벽 수련을 하게 놔둘 생각은 없으니 오늘은 검에 대해 얘기해보자꾸나.”
검후가 웃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검술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자, 위일청은 금세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그녀와의 대화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대화 속에서도, 자꾸만 독고령이 떠오르는 것은 그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
“허억…! 허억…! 누님…!”
“벌써 지쳤냐?”
“예… 좀… 조금만… 쉬죠…!”
온 몸이 땀으로 푹 절어 지친 청운이 바닥에 풀썩 주저앉자, 독고령은 한심하다는 듯 어깨에 칼을 얹었다.
“약해가지고… 으이구…”
“제가… 허억… 약한 게 아니라…”
“시끄러, 새끼야.”
“… 예.”
독고령과 청운의 비무는 느렸으나, 강렬했다.
천천히 다가오는 검을 끊임없이 막아내며 다음 동작으로, 천천히, 심력을 기울여 집중하는 일은 청운의 생각보다 훨씬 힘든 작업이었다.
단순히 빠르게 내려치는 것만이라면 청운 또한 자신 있었으나, 천천히, 정확히,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검로를 유지하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이자 청운은 급속도로 피로해졌다.
고개를 들자 이제 막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기 시작한 독고령을 보며
“이… 이런 수련을 매번 하십니까?”
“응? 이번이 처음인데?”
“예?”
“검후 할매랑 직접 비무하면서 얘기나누는 게 최고일 거 같은데 안 되니깐 너라는 열화판으로 재현해보는거지, 임마.”
“어… 예? 제가 검후님의 검술을 썼나요?”
“달라, 새끼야. 검로도 올바르지 못 하고, 똑바로 받아치지도 못 하는 게 어딜… 쯧. 그냥 비무의 양상만 재현한거야.”
독고령이 혀를 차는 소리를 듣자 청운의 거친 숨소리 사이로 이상한 신음이 튀어나왔지만, 그녀는 그를 무시하고 검후의 검을 떠올렸다.
‘… 강한 자의 검은 다 거기서 거기인가…’
남궁원청을 처음 보고 하늘로 한없이 높게 뻗은 거목이 떠올랐다면,
검후 서교를 보고 있자면 한없이 넓게 뿌리를 뻗은 또 다른 느낌의 거목이 생각났다.
어떻게 공격해도 쓰러지지 않을 거목.
“쓰읍…”
“왜 그러십니까, 누님?”
“조금만 더 하면 따라잡을 거 같긴한데, 그 조금이 엄청 커서.”
“… 조금이라니요?”
“한 합. 딱 한 합만 제대로 들어가면 확실히 승기를 잡을 거 같은데… 빈틈이 없네.”
독고령이 짜증난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자 청운이 물었다.
“… 한 합이면 금세 따라잡는 거 아닙니까? 큰 차이는 아닌 거 같은데요.”
“쯔쯔쯧. 새끼야, 그 한 합이 네 목을 자르는 한 합이면 크지.”
“아…”
“여튼 고생했다. 가 봐라.”
“… 네.”
청운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지탱하며 일어난 뒤, 고개를 푹 숙였다.
멀어지는 청운을 보고 독고령은 홀로 자리에 남아 다시 한 번 검후와 벌였던 일전과 청운과 나누었던 비무를 떠올렸다.
‘… 가르치는건가?’
검후의 검법을 본 적은 없지만, 오늘의 비무에서 검후는 분명 수비일변도였다.
내내 수비만 반복하다가 가끔씩 독고령의 빈틈을 찔러대는 그 검은 ‘이 곳이 비었구나’라며 가르쳐주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아니면 그냥 원래 검법을 안 끌어내도 이길 수 있다는건가…?’
독고령이 처소에 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특정 영역을 정해두고 그 안에서만 싸우는 듯 보였기에 청운을 데리고 비슷한 일을 했지만, 검후의 검술이 그게 오늘 보여준 게 다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으으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독고령은 답답함에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걍 냅다 들이박아서 깨질 때로 깨지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자, 독고령은 검후의 말을 무시하고 그녀의 처소로 향했다.
어차피 살수를 쓰는 것도 아니니 이 참에 마음껏 부딪혀보는 게 더 도움이 된다 생각하여 처소로 향한 독고령이지만,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는 멈춰섰다.
“그럼 스승님, 제 검법을 먼저 돌아봐야 할까요?”
위일청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에 독고령은 귀를 바짝 붙여 엿듣기 시작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느니라. 단순한 찌르기든, 단순한 베기든 완성도만 높다면 누구도 막기 힘든 일검이 되고, 그 일검을 쌓아나가는 게 검술의 지향점이노라. 굳이 바꿀 필요는 없지만, 너는 스승이 없었기에 완성의 기준점이 존재하지 않았노라.”
“흐음…”
“그러니 본녀가 너의 기준점이 되어주마.”
“… 예?”
“본녀가 기준을 제시할테니, 너는 그 기준을 넘기 위해 부단히 애쓰도록 해라. 스승의 존재란 이런 일을 하는 것이니라. 기준과 과제를 부여하고, 목표를 제시해서 제자에게 길을 밝혀주는 것이지.”
“… 감사합니다.”
“됐다. 본녀 또한 감사해야할 일이지. 오랜만에 재미도 있거니와, 주하의 병을 치료하는데 도움을 받는 일이니.”
“…”
“그럼 검을 휘두르기 전에 잠시 밖에 나갔다오마.”
“...? 어디 가십니까?”
“고양이가 엿듣고 있구나.”
“… 예?”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한 위일청과 달리 독고령은 재빨리 붙이고 있던 귀를 떼고 도망치려던 순간.
“군자는 못 되겠구나, 령아야.”
“… 그런 거 되고 싶지도 않거든요.”
검후가 밖으로 나왔다.
혹시나 위일청이 독고령의 목소리를 들을까봐 기막을 펼친 뒤, 검후가 입을 열었다.
“하아… 그새를 못 참았느냐?”
“이… 일청 보러온 거 아니거든요?! 할머니랑 한 판 더 붙으려고…”
“… 다음에 남궁원청 그 놈을 만나면 가만히 놔두지 말아야겠다. 네 년 하나 때문에 본녀의 마음 속에 평정심이 깨지는구나.”
“… 할머니 맞잖아요.”
“시끄럽다, 이 년아!”
“씨이…”
검후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독고령을 올려다보았다.
“고작 2주도 못 참겠느냐?”
“아니이… 2주가 문제가 아니라 그… 으으… 그냥 지내던 대로 지내면서 수련하면…”
“듣자하니 서로의 연심을 자각한 지 얼마 안 되었다 들었다. 본녀가 두 남녀의 연애사에 끼어든 점에 대해선 미안하게도 생각하니라.”
“으엑?! 누… 누가…”
“소현 아가가 말하더구나.”
“아니이… 으으…”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독고령을 보고 검후가 피식 웃었다.
“네 년의 얼굴에 꽃이 피었구나. 새빨간 꽃이야.”
“…”
“그 정성이 갸륵하니 이렇게 하자꾸나.”
검후가 세 개의 손가락을 펼쳐들었다.
“하루 세 번의 도전을 받아주마. 하루에 딱 세 번. 이것마저 어기면 본녀는 위일청을 가르치는 것마저 포기할게야.”
“… 눼.”
“본녀는 위일청의 스승이긴 하지만, 원래는 네 년에게 절기를 가르치려고 했으니 너에게도 목표를 제시해주마. 엿들었으니 알겠지?”
“…”
“네 년이 본녀를 이기면 굳이 14일의 제약을 두지 않고, 언제든 위일청을 볼 수 있게 해주마.”
“!!”
그 말을 듣고 독고령이 눈을 부릅 떴다.
“… 진짜죠?”
“굳이 거짓말을 하겠느냐?”
“약속했습니다?”
“오냐. 약속하마. 그리고 착각하지 말거라, 령아야.”
검후가 슬그머니 기운을 드러내며 자신만만하게 도발 섞인 미소를 날렸다.
“고작 14일 만에 네 년에게 질 정도로 본녀는 나약하지도 않노라.”
“… 그거야 해봐야 알죠.”
“호오?”
자신의 도발에 되려 이를 드러내며 승부욕을 불태우는 독고령을 보고, 검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 그럼 오늘 두 번 했으니 지금…”
“오늘만 제외하자꾸나. 내일부터 하루 세 번으로.”
“… 내일부터 하루 세 번… 후우…”
목표를 되뇌인 후, 독고령이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내일 찾아올게요.”
“오냐.”
전의를 불태우며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검후는 홀로 웃음을 터뜨렸다.
“클클클… 참 가르치는 재미가 있는 아이야.”
불가의 가르침은 비움에서 시작되지만, 독고령의 시작은 애착에서 시작했다.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 누군가와 함께 지내고 싶다는 집착.
고작 하루 떨어져 지냈다고 벌써부터 안절부절하는 모습이나 하루라도 일찍 만날 방법을 제시해줬다고 바로 전의를 불태우며 떠나는 모습이나 참…
“… 바른 길을 제시해주면 곧게 살았을 아이구나.”
늦게 만났음을 아쉬워하며, 그리고 이제라도 만났음에 안도하며.
검후는 다시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돌아온 검후를 본 위일청이 곤란한 듯 웃으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 고양이는 쫓아내셨습니까, 스승님?”
“자기가 알아서 돌아가더구나.”
“영민한 고양이인가 보네요.”
“사랑스럽기도 하더구나.”
“… 그렇지요. 조금 시끄럽기도 할 텐데요.”
“…”
대답하는 위일청이 고양이의 정체를 알아차린듯 하자, 검후가 그에게 물었다.
“보고 싶지 않더냐?”
“보고 싶습니다. 보고 싶습니다만…”
위일청이 결의를 다지고 검후를 쳐다보았다.
“스승님과 약속했잖습니까. 저는 약속을 어겨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서요.”
“… 고양이한테 사랑받을만 하구나.”
“사랑받기 위해서 저도 노력해야겠지요.”
“클클클, 참으로 어여쁜 한 쌍이니라. 나가자꾸나.”
“예.”
검후가 웃으며 앞서나가자, 위일청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 길은 하나가 아니지.’
무작정 비운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였다.
때로는 애착이 누군가에겐 더 큰 동기가 되고, 가르침이 되기도 했다.
서로 다른 시작점이었지만, 같은 끝을 지향하는 그들을 보며 검후는 중얼거렸다.
“만류귀종이구나.”
은근슬쩍 독고령에게 져줄까 하는 생각이 검후의 마음 속에 살짝 피어났다.
너무 빠르게는 말고, 대충 하루 정도 남았을 때.
그 쯤이 좋겠다 생각하며 검후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