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2 15장. 여인, 노인, 어린아이를 조심하라 - (10)
2주가 지난 뒤 나타난 위일청의 모습을 보고, 독고령은 반가움에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일청!!”
타인의 이목 따위 신경쓰지 않았다.
무려 2주, 칠주야를 2번이나 반복하는 괴로운 시간이었다.
드디어 위일청과 다시 만난다는 생각에 부푼 가슴을 끌어안고 그의 품에 뛰어드는 순간…
“독고 소저.”
“… 어?”
위일청이 독고령의 팔을 붙잡고, 그녀가 안기지 못 하도록 막아세웠다.
“일청…?”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자, 파르라니 깎인 머리가 태양에 비쳐 빛나고 있었다.
“일청… 머리는 왜…”
“저는 불가에 귀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네?”
“불가의 가르침은 참으로 깊어 배우면 배울수록 새롭습니다. 그동안 제가 집착하던 것이 다 무용하다는 것을 깨닫자, 자연스레 속세의 모든 것을 놓게 되더군요.”
“이… 일청… 그게 무슨 소리예요?”
“독고 소저.”
붙잡은 팔을 내려놓으며, 위일청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스님이 되겠습니다.”
“아… 아아…”
독고령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아… 안 돼에에엑!!!!”
독고령이 소리치며 벌떡 일어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내쉬며 흔들리는 눈으로 주변을 확인하자, 이상하다는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은관영과 눈이 마주쳤다.
“독고 소저, 괜찮아요…?”
“와, 시발. 꿈이었구나… 와… 나 물 좀 주라, 하오문.”
“… 여기요.”
냉수를 몇 차례 들이키고 나서야 일어난 정신이 든 독고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 위 오빠가 스님이 되는 악몽이라도 꿨어요?”
“흐엑?!”
“… 진짜였나보네요.”
“아… 아니거든!!”
“음탕하셔라, 크큭.”
“닥치라곳!”
독고령이 그녀가 건네준 물주머니를 내던지자, 은관영이 붙잡아 바닥에 얌전히 내려놓고는 배실배실 웃었다.
“이제 고작 하루 지났는데 앞으로 남은 기간은 어떻게 버티려고 벌써부터 악몽을 꾸세요오?”
“… 아무 일 없었거든.”
“그런 분이 어제 넋이 나가서 ‘2주라니… 2주라니…!’ 그러면서 중얼거리다 잠에 드셨나요오?”
“맞을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오~.”
“…”
땀에 흠뻑 젖은 이불을 쳐다보며 독고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씻어야겠네. 둔치는?”
“아침부터 검을 휘두르러 갔어요. 검후님이 그 때만 시간이 빈다고 하셔서요.”
“… 그래?”
창 밖을 바라보니 아직 푸르스름한 게 새벽이었는데 벌써부터 밖에 나가 검을 휘두르고 있다니 백리소현도 참 부지런하다 생각하며 독고령은 이불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독고 소저, 아침은 이따 같이 먹어요오.”
“… 그래.”
밖으로 나오자 아직은 조금 쌀쌀한 찬 바람이 독고령을 반겼다.
추위에 살짝 몸을 떨며, 독고령은 품에 안은 이불을 꼭 끌어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춥네.’
위일청과 떨어진지… 이제 고작 하루째 되던 날의 새벽이었다.
*
“아, 왜!”
“이 년이 이제는 존대도 까먹었구나?!”
“그냥 좀 들여보내줘요. 얼굴만 보고 간다니깐요?!”
“견물생심(見物生心)이니라! 네 년을 보면 위일청이 또 다시 음심이 솟을 터인데 본녀가 왜 들여보내겠느냐?!”
“이익…! 그냥 잠깐 얼굴 보는 거 보고 누가 뭐라고 그래욧?!”
“이 년이 이제 보니 아주 제 남편을 잡아먹을 년이였구나!”
“아악! 남편 아니라고옷!!”
검후와 독고령이 처소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것을 보고 지나가던 청운이 그 모습을 관망중인 은관영에게 물었다.
“… 무슨 일입니까, 은 소저?”
“아, 청운 도사. 오랜만이네요.”
은관영이 푹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독고 소저가 위 오빠 보겠다고 저러고 있어요.”
“위 공자를요? 그냥 보고 싶으면 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위 오빠가 검후님의 가르침을 받는다고 폐관수련 비스무리하게 하고 있는데 그걸 못 참겠다고 독고 소저가 몰래 훔쳐보려다가 검후님에게 걸린 거예요.”
“…”
청운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길길이 날뛰는 독고령을 바라보았다.
마침 독고령이 말리는 검후를 무시하며 처소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일청!! 일청!!!! 안에 있죠?! 잠시만 나와… 켁.”
독고령의 말을 검후가 그녀의 목젖을 치며 막아섰다.
“이 년이...?”
“쳤죠? 먼저 친 거지? 아나, 내가 그래도 참으려고 했는데…”
독고령이 이글거리는 눈과 함께 칼을 뽑아들자, 청운이 불안한듯 말했다.
“어… 어어…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침에도 이미 한 판 했어요. 검후님이 적당히 봐주시겠죠, 뭐.”
“…”
은관영은 허둥대는 청운을 무시하고 빈 서책을 꺼내들어 눈을 빛내고 있었다.
검후가 칼까지 뽑아든 독고령을 보고 기수식을 취했다.
“허어… 오냐. 본녀가 오늘 네 년을 계도해주마.”
“계도는 무슨! 내가 할머니 쓰러뜨리고 위일청 보고야 만다!!”
“할머니라 부르지 말라 했거늘!!”
“캬아아악!!”
괴성을 내지르며 검후에게 뛰어드는 독고령을 보며 청운은 절로 도호를 중얼거렸다.
“원시천존… 원시천존…”
쓸데없이 하늘이 참 푸르렀다.
검후와 독고령의 결투는 얼핏 보기엔 비등해보였으나, 무공이 뛰어난 이일수록 독고령이 조금 불리함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익…!!”
거친 파도처럼 쉼없이 검후를 몰아치는 독고령이었으나, 받아내는 검후는 제 자리에 서서 잘만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처음엔 독고령이 우세해 보였으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검후가 방어의 사이사이 빈 틈을 찔러대며 독고령의 자세를 무너뜨렸고, 결국…
“켁!”
검후의 검집이 그녀의 목을 찌르자, 독고령이 바닥에 엎어졌다.
“후우…”
검후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스윽 닦아내고는 독고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녁에는 하오문의 아이를 봐주기로 했으니 찾아오지 말거라. 쓰잘데기 없는 생각말고 명상이나 하면서 네 년도 좀 더 스스로를 비우도록 노력하거라.”
“더 할 수 있… 악!”
독고령이 몸을 일으키려하자, 검후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그녀의 머리를 검집으로 때렸다.
독고령이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비비적거리자 그 모습을 보고 검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더 하면 살수도 써야할텐데?”
“… 안 다치게 쓰면…”
“살수가 아니지. 활발한 것도 보기 좋으나 괜히 위일청의 수행을 방해하지 말고 제발 좀 얌전히 있거라, 이 년아!.”
“씨이…”
독고령이 툴툴대며 일어나 고개를 푹 숙이고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은관영과 청운에게 다가왔다.
“… 너는 언제 왔냐?”
“대단하십니다, 누님! 검후님과 잠시라도 동수를 이루시다니…!”
“동수는 개뿔. 네가 눈이 낮아서 그런거야. 하오문, 책.”
“여기요.”
은관영이 넘겨준 서책을 받아든 독고령은 순식간에 진지해져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 비무를 기록중이셨습니까, 은 소저?”
“네. 독고 소저는 검후님을 이기기 위해 복기를 할 소재가 생겨서 좋고, 저는 정보도 수집해서 좋고. 일석이조죠, 뭐.”
“… 검후님에게 실례가 아닐까요?”
“비무를 기록한 사본을 넘겨드리고, 나중에 중원에 보타문의 문도들이 하오문을 찾으면 처소를 빌려주기로 해서요, 히힛. 독고 소저와 검후님의 비무는 다른 문도들에게도 도움이 될 테니깐요.”
“아하…”
서책을 다 읽고 덮은 독고령은 잠시 눈을 감고 무언가를 고민하다 번쩍 눈을 떴다.
“아이씨… 아까 거기서 발을 노리지 말걸.”
“좀 더 진정하고 덤비는 건 어때요오?”
“그것도 다음에 해보긴 할 텐데 별로일 거 같아. 저 할머니, 버티고 서는 걸 너무 잘 하더라. 같이 버티면 끝까지 서로 한 걸음도 안 움직이다가 내가 졌다고 고개 숙여야 할 걸?”
“그래요오?”
“쓰읍… 그래도 살수는 안 쓰니깐 할 만한데…”
독고령이 턱을 매만지다 청운을 휙 쳐다보았다.
“야, 무당.”
“… 청운입니다, 누님.”
“너 무당 아니야?”
“… 맞습니다, 무당.”
“따라와. 비무 한 판 하자.”
“지… 지금요? 제가 누님과 비무를 하기는 조금…”
“아이씨, 당연히 내가 봐주면서 하는거지. 빨리 와.”
“…”
“안 와?”
“가… 가겠습니다, 누님!”
독고령을 뒤따라 걷는 청운을 바라보며 은관영은 피식 웃었다.
“고작 하루 못 만났다고 벌써부터 안달내는 게 참 귀엽네요, 독고 소저.”
다음에 문주님을 만나면 이 얘기도 전해야겠다 생각하며 은관영은 서책을 옮겨적기 위해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적당히 한적한, 비무장으로 쓰기 괜찮은 공터를 발견하자 독고령이 멈춰서고는 청운을 돌아봤다.
“칼 뽑아.”
“… 그저 비무만 하면 되는 겁니까?”
“응?”
“제가 독고 소저에 비해 훨씬 떨어지는데 뭔가 원하시는 게 있으신 거 아닙니까?”
“호오…”
더럽게 눈치없는 놈이라고 여겼는데 또 이런 곳에는 묘하게 눈치가 있었다.
‘… 그게 더 화나네?’
독고령이 씨익 웃으며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당연히 그렇지, 새끼야.”
“음… 욕을 듣는 것도 좋네요.”
“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더 욕해주세요.”
“… 미친 놈인가?”
“으음… 좋네요.”
“…”
눈을 감고 몸을 부르르 떠는 청운을 보고 독고령은 괜히 소름이 끼쳤지만, 다시 마음을 바로하고 중단세를 취했다.
“내가 네 수준에 맞게 약하게 검술을 펼칠거야. 그럼 너는…”
독고령이 연검을 뽑아들어 가볍게 손을 움직이자 청운의 주변에 원이 생겨났다.
“그 원 안에서 버티고 있어라.”
“본산에서 하던 수행과 비슷하네요.”
“응? 그래?”
“무당하면 또 후발제인이 유명하지 않습니까? 상대의 선공을 받기 위해 이런 한정된 공간에서 맞받아치는 수행도 있었지요.”
“잘 됐네. 도중도중에 멈춰서 뭐 좀 물어볼테니 성실하게 답해라.”
“예. 욕하면서 말해주시면 더 힘이 날 거 같습니다!”
“… 미친 놈인가?”
“예, 그렇게요!!”
“… 한다?”
“네!”
독고령이 유성도를 뽑아들고 중단세를 취하자 청운은 침을 꿀꺽 삼켰다.
‘… 검을 잡는 것만으로도 기세가 바뀌다니…’
방금까지만해도 그저 털털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던 독고령은 온데간데 없었다.
지금 청운의 눈 앞에 있는 것은 한없이 날카롭게 벼려진 하나의 칼날 뿐이었다.
“나는 상단세에서 시작되는 내려치기를 할 거야.”
“… 예.”
“그럼 너는 무당의 검으로 내 공격을 막아. 내가 원하는 건 그게 다다.”
“알겠습니다.”
“간다?”
“예!”
독고령이 천천히 검을 올리고는…
한없이 천천히, 하지만 똑바로.
청운의 머리를 향해 검을 느릿느릿하게 내렸다.
“… 어?”
“뭐 해? 너도 속도 맞춰.”
“아… 예.”
청운은 갑자기 독고령이 이런 행동을 하자 이해를 하지 못 했음에도 아주 천천히, 그녀와 똑같은 속도로 느릿느릿 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 어라?’
배운데로 손목을 이용해 그녀의 검을 흘리려고 했으나 느리게 재현하려고 하자 손발이 꼬였다.
‘어… 내가 어떻게 했었지?’
당황하는 청운을 보고 독고령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검을 뗐다.
“하아… 이거까진 못 하냐? 그래도 천재라고 하더니.”
“어… 아니… 할 수 있습니다, 누님!”
“됐고. 니네 사형 불러 와.”
“… 다… 다시 한 번…”
“자기 검술 하나 제대로 못 펼치는 놈이랑 시간 낭비할 수는 없어. 빨리.”
“…”
차갑게 돌아온 독고령의 말을 듣고, 청운은 기쁠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그녀에게 욕을 먹는 것을 좋아하는 청운이었으나 이번은 달랐다.
이번에 독고령이 내뱉은 말은 매도가 아닌, 청운이란 무인에 대한 명확한 평가였다.
청운이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 조금만 더 속도를 높여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응?”
“기껏 잡은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습니다, 누님.”
“…”
독고령이 미심쩍은 눈으로 청운을 쳐다보다가 다시 검을 고쳐잡았다.
“안 맞으면 바로 쫓아낸다?”
“… 예. 아까보다 조금만 더 빠르게 해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그래. 간다?”
“예!”
독고령은 청운의 말대로 아까보다 조금 더 빠르게 검을 내리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청운이 똑바로 검술을 펼쳐내며 독고령의 검을 흘려냈다.
“잘 하네. 다음엔 밑에서 위로 올려친다?”
“… 예! 욕도 같이 섞어주세요!”
“미친 놈, 욕 먹는 걸 좋아하냐?”
“네!”
“…”
뭐가 그리 좋은건지 싱글벙글 웃으며, 청운은 독고령의 검을 받아냈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었던 청운은 몰랐다.
독고령이 하는 일이 검후와 나눴던 128합을 그대로 재현하는 중이란 것을.
그는 알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