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8 15장. 여인, 노인, 어린아이를 조심하라 - (6)
검후를 따라 도착한 곳은 아까 들렀던 그녀의 처소였다.
“후우…”
몸이 피곤하지는 않을텐데, 마음이 피곤했는지 긴 한숨을 내쉬며 검후는 술 잔과 술 병을 꺼내들었다.
일렁이는 촛불이 검후의 얼굴을 비추자,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는데도 피곤한 어미의 모습이 슬며시 엿보인듯한 건 독고령의 기분 탓이었을까?
검후가 건네주는 술을 받아들이며 독고령은 물었다.
“… 자.”
“… 술 맞아요?”
“소흥주는 마셔본 적이 없나보구나. 황주는 원래 이런 색이니라.”
검후가 건네준 잔의 향기를 맡자, 확실히 주향이 느껴졌다.
“… 잘 마실게요.”
독고령이 술을 입에 털어넣자, 검후도 피식 웃고는 한 잔 마셨다.
“… 맛있네요. 도수가 약한 게 제 취향은 아니지만.”
“술은 과하지 않을 때 좋은 게지.”
“… 한 잔 더 주세요.”
“그래.”
독고령이 잔을 내밀자, 검후는 다시 한 번 독고령의 잔에 술을 담아주었다.
그리고는 독고령이 손을 내밀자, 술병을 넘겨주며 검후 또한 독고령이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그렇게 몇 번의 잔이 오간 뒤, 독고령이 입을 열었다.
“… 그래서. 아까 그건 뭔가요?”
“본 그대로니라. 낮에는 광증에 시달리고, 밤에는 요기와 음기에 시달려 사형제들을 덮치지.”
“… 단순히 광증만 있는 게 아니었네요.”
“차라리 광증만 있으면 불도로 다스렸을테지.”
검후가 병을 기울이자, 어느새 안에 있던 술이 동이 나서 방울만 똑똑 떨어졌다.
그러자 또 다른 술을 꺼내오며 자신의 잔에 따르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 본녀는 음… 다른 문파라고 크게 다를 바 있겠냐마는 한 번도 보타문을 문파라고 생각한 적이 없느니라.”
“그럼요?”
“안가(安家)다.”
서교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피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자매보다 끈끈한 인연으로 엮여있고, 배 아파 낳은 적은 없더라도 다치고 돌아온 문도를 보는 날이면 내 몸이 상한 것만 같았노라.”
“…”
“본녀에게 보타문은 그런 곳이니라. 나의 어머니와 자매들이 사는 곳. 그리고 새로운 딸을 받아들이는 출산의 장소니라.”
미소짓는 서교의 등 뒤로 관음보살상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쩐지 그 둘의 미소가 참으로 닮아있어 독고령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게되었다.
“그런가요?”
“그렇노라.”
독고령이 한 잔 걸치자, 검후 또한 그녀를 따라 술을 넘겼다.
“좀 천천히 마시거라.”
“… 백주를 주시든가.”
“다음에 육지로 나가는 아이에게 얘기해놓으마. 여튼… 으음….”
검후가 팔짱을 끼고는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 그렇게 딸 아이들을 받아들이던 와중, 본녀가 주하를 발견했느니라.”
“발견이요?”
“본녀는 그냥 이 곳에서 매일 검만 휘두르고 싶으나 또 강호의 일원으로서 마냥 세상에 등을 돌리고 있을 수는 없노라. 그게 의무니깐.”
“… 그래서요?”
“마지막으로 강호에 출도했을 때는 혈교의 잔당들 때문이였다.”
“…”
혈교.
마교만큼 불길한 그 이름이 튀어나오자, 독고령은 인상을 찌푸렸다.
“… 그 새끼들 망한 지 좀 되지 않았어요? 소림에서 조졌다고 들은 거 같은데.”
“전대 방장, 혜선이 동귀어진했지.”
“그 때 다 조진 게 아니었어요?”
“아니다. 교주를 죽인 것으로 그쳤지. 허나 정녕 혈교가 무서운 이유는 쉬이 사라지지 않는 점이지.”
검후가 독고령을 쳐다보았다.
“그대는 혈교를 얼마나 아는가?”
“… 인신공양하고, 어린애 납치하고, 피 좋아하는 미친 놈들요?”
“그리고 교주가 변하지 않느니라.”
“… 예?”
“혈교가 인간임을 포기하고 금수만도 못한 버러지임은 누구나 알고 있노라. 수없이 많은 강호인이, 고수들이, 협객들이 끊임없이 혈교를 절멸코자 노력하고 있지. 허나 그럼에도 그들은 사라지지 않노라. 교주가 돌아오기 때문이지.”
“… 이해가 안 가는데요. 교주가 돌아온다니요?”
“말 그대로다.”
촛불이 갑작스런 바람에 꺼지며, 어딘지 모를 스산함이 검후의 처소에 맴돌았다.
“혈교의 교주는 초대부터 예외없이 다음 교주의 육신에 선대의 영혼이 깃드노라.”
“… 말도 안 되는…”
“이제 막 지학(15세)에 이른 아이가 소림의 방장과 동수를 이룬 것은 말이 되느냐?”
“…”
검후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꺼진 초에 불을 붙였다.
“혜선이 전대의 혈교주를 겨우 물리쳤으나 그 또한 얼마 가지 못 해 입적했지.”
“…”
“그들은 환술과 사술로 사람을 홀리고, 역천으로 당연한 이치를 무시하며 천하를 어지럽히노라. 많은 이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막연하게 혈교를 두려워하지만, 알면 알수록 그들은 무시무시한 존재니라.”
“…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그래.”
검후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주하가… 당대의 혈교주로 안배된 육신인 듯 하구나.”
“…”
독고령이 술 잔을 내려놓았다.
“… 시발.”
독고령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혈교가 얼마나 개새끼인지는 어느 정도 들어 알고 있었으나, 혈교주의 무위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가늠이 잘 안 됐다.
다만, 전대의 소림 방장과 동수를 이루었다는 말 한 마디로 그 무위가 얼마나 대단한지 대충이나마 이해했다.
“… 그럼 극양의 신공을 원하는 이유는 뭔가요?”
“음기는 요기와 상성이 좋은 대신 양기와 친하지 않노라. 먼저 극양지기를 다뤄 음기를 없애고 천천히 요기를 가라앉힐 생각이었다.”
“요기는 어떻게 없애게요?”
“보타문은 불문(佛們)이고, 무당은 제령도 할 줄 아는 도문(道們)이지.”
“아, 젠장…”
독고령은 하나씩 자신의 의문을 풀어나갔다.
“그럼 저렇게 마른 건…”
“낮에는 광증이 도져서 밥을 안 먹고, 밤에는 색광증이 도져 타인의 생기를 훔치노라.”
“손톱이 성한 곳 없는 건…”
“들끓는 성욕을 참기 위해 애쓴 흔적이지.”
“시발… ”
독고령이 머리를 벅벅 긁다가 답답함에 중얼거렸다.
“… 창고에 묶어둘 게 아니라 꽁꽁 묶어 바다에 내던졌어야 할…”
“아이야.”
“…”
독고령의 말을 듣고 검후가 나무라듯 말했다.
“자식이 아무리 못 나고 아픈 아이더라도 버릴 수 없는 것이 어미의 심정이니라. 너 또한 언젠가 자식을 낳을 터인데 본녀의 마음을 모르겠느냐?”
“…”
“타인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 치부를 숨기듯 창고에 가뒀으나 본녀 또한 그 방식이 편하지는 않노라. 너무 나무라지는 말거라.”
검후의 힘 없는 목소리에 독고령은 자세를 바로하고, 고개를 숙였다.
“… 미안합니다. 실언했습니다.”
“예를 아는 아이었구나.”
“예까지는 아니고… 그냥 사람 사는 도리만 아는 거죠.”
“그래.”
검후가 피식 웃으며 사과를 받아들이자, 독고령이 다시 편한 자세로 고쳐앉았다.
“… 그래서. 극양지기만 다루면 음기를 몰아낼 수 있어요?”
“확신할 수 없다. 그냥 되는대로 다 해보는 게지.”
“하아…”
“다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구나.”
검후가 피곤한 듯 눈을 비비적거리며 말했다.
“낮에는 다른 자매들을 덮치는데 그저 내공만 강하고 무공은 익힌 적이 없어서 아무 상관이 없다. 그 정도야 문도들이 알아서 제압할 수 있으니 말이다. 허나 밤이 문제야.”
“아까 그거 뭐였어요? 몸이 안 움직이던데…”
“요기로 발하는 사술의 일종이라 생각하는 중이니라. 파사의 기운으로 제압이 가능하지만, 그를 익히지 않은 이들은 예외없이 주하에게 끌려가 생기를 빨리지.”
“… 생기를 빨린다는 건…?”
“냄새를 맡지 않았느냐?”
“… 예?”
검후가 독고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창고 안의 악취가 오롯이 그 아이의 것은 아니다.”
“…”
독고령은 검후가 창고 앞에서 했던 [벗겨서, 물고 빨고는, 뿜어내게 만드노라]의 ‘뿜어내게 만드노라’가 무엇인지 이해했다.
“그냥 주변에 안 가면…”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에는 아예 본녀가 그 창고 앞에서 대기하는 중이니라. 게다가… 그 아이에게 한 번 당한 뒤에 쾌락을 잊지 못 하고 일부러 창고에 찾아가는 아이도 있더구나.”
“개판이네. 헙.”
독고령이 당황하여 입을 틀어막았으나 검후는 크게 게의치 않았다.
“아니다. 네 말이 맞구나. 정말이지…”
“…”
씁쓸해보이는 검후의 표정을 보며 독고령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어린아이의 모습이긴 했으나 두 번의 환골탈태를 이뤄낸, 어쩌면 무림 역사에 남을 무인이었음에도 검후의 얼굴엔 그저 자신의 아이를 걱정하는 근심 뿐이었다.
진심 어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독고령은 결국 입을 열었다.
“… 구양신공은 10성에 도달한 뒤에야 광증이 조금씩 옅어져요. 아마 무공은 검후님이 저보다 잘 알테니깐, 그 부분은 어떻게 잘 개량해보세요.”
“응?”
“… 알려드릴게요, 구양신공.”
“저… 정말이냐?”
“대신 우리 애들 무공도 좀 봐줘요.”
“무공을 봐달라고?”
“절기도 가르쳐주고, 다른 애들 무공도 좀 봐줘요. 일청도 아직은 조금 약하고, 관영이는 권각술 위주지만 검후님 정도 되면 알아서 잘 가르치겠죠. 그리고…”
독고령은 잠시 백리소현을 떠올렸다.
더 정확히는 그녀의 아랫배에 가득한 흉측한 상처를.
“… 소현이 환골탈태할 수 있을 경지로 올려놓을 수 있어요?”
“응? 소현 아가를?”
“두 번이나 했으니깐 어떻게 안 돼요? 걔가 몸이 성치 않아서…”
“아… 으음…”
환골탈태는 육체의 재구성이었다.
어쩌면 그 재구성 과정 중에서 백리소현의 상처도 치유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독고령의 머리를 스쳤다.
검후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 소현 아가도 험한 일을 당했지.”
“그… 환골탈태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건 아는데…”
“노력해보마.”
검후가 독고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 내 아이가 귀하면 남의 아이도 귀한 법이지.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음은 너 또한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검후가 동의하자, 독고령은 기쁨을 감추며 별 일 아니라는 듯 중얼거렸다.
“뭐 죽기 전에 어떻게든 된다면야…”
“마음을 표현하는 게 서툰 아이구나, 크큭.”
“왜… 왜 웃어요?!”
“예뻐서 그런다. 가보거라, 밤이 늦었으니 자야지. 위일청도 걱정하고 있겠구나.”
“아…”
그 말을 듣고 독고령이 벌떡 일어났다.
“주무세요! 가봅니다?”
“오냐.”
밖으로 뛰쳐나가는 독고령을 바라보며 검후는 웃었다.
“크큭, 재밌는 아이구나.”
검후가 작은 몸을 일으켜 촛불을 끄려다, 그 옆에 서신을 모아둔 서랍장을 열었다.
남궁원청이 보낸 서신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가 보낸 또 다른 서신을 꺼내든 검후는 생각에 잠겨들었다.
‘… 남자가 여자로 바뀌었다라…’
오랜만에 친우가 보낸 서신에는 한동안 섬 밖으로 나가보지 않아서 그런지 여러 신기한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광마라는 별호를 가지고 날뛰던 놈이 있었는데 이 놈이 여자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났더라.
조금 가르쳐보았는데 내 절기를 금세 익히더라.
음기와 양기를 동시에 다룰 줄 아는 아이이고, 성격이 포악하긴 하나 천성이 여린 아이니 주하의 문제를 같이 논하면 필시 도움을 줄 것이다.
“…”
서신을 다시 읽던 검후는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착한 아이더구나.’
주하를 보고 사람들은 거리를 두려했지, 그녀의 아픔에 공감하며 화를 내주진 않았다.
하지만 독고령은 공감하며, 되려 화를 내고는 씩씩대며 창고로 향했다.
그녀가 창고로 가는 모습을 보고 검후는 독고령의 무례함을 이미 용서한 상태였다.
‘원래 화가 많은 아이가 아니겠지. 남의 아픔을 보고 넘길 수가 없으니… 자연스레 화가 많이 쌓인 아이겠지.’
남궁원청이 보낸 서신을 다시 서랍장에 넣고, 검후는 촛불을 껐다.
이래서 사람들이, 아이들이 참으로 사랑스럽다 여기며 검후는 관음보살이 지켜보는 아래에 몸을 눕혔다.
눈을 감은 뒤,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는 보살상의 인자한 미소와 많이 닮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