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7 15장. 여인, 노인, 어린아이를 조심하라 - (5)
독고령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위일청은 그 곳에서 똑같은 광경을 목격했다.
“아… 령, 저 소녀가 바로…”
“크아악!!”
쿵!
새빨간 눈의 소녀가 기막을 깨부수려는 듯 두들기기 시작하자, 안에 있던 일행들이 흠칫 놀랐다.
“누… 누구예요오?”
“… 검후 님의 제자입니다. 보시다시피…”
“광증이네.”
독고령이 익숙한 듯 말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극양의 기운이 뇌수를 파고 들어서 눈까지 빨개졌네. 저 정도면 중증이야.”
“광증에 대해 잘 아시… 아!”
은관영이 금세 그녀가 누구의 딸인지 떠올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독고령이 위일청을 쳐다보았다.
“일청, 기막을 거둬도 될까요? 생각보다 힘이 무지막지해서 이대론 기막이 깨지겠어요.”
“조심하세요, 령.”
“조심까지야.”
독고령이 피식 웃었다.
위일청이 펼쳐둔 기막을 거둬들이자, 검후의 제자가 괴성을 지르며 독고령에게 뛰어들었다.
“키야아악!!”
“어이쿠…”
밥은 제대로 먹는지 걱정될 정도로 가는 소녀의 팔이 무지막지한 내공을 담아 독고령을 향해 덮쳐들었으나, 그녀는 가볍게 그 팔을 피하며 머리채를 붙잡았다.
“크아아아악!!!”
“엄청 날뛰네.”
검후의 제자가 손톱을 바짝 세워 독고령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으나 그녀에겐 아무 소용도 없었다.
되려 독고령이 음기를 끌어올려 그녀의 천회혈에 조금씩 흘리기 시작하자, 점차 그녀가 얌전해졌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으으…”
“정신이 드냐?”
“여… 여긴…!”
광증이 사라진 소녀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위일청과 백리소현을 바라보곤 화들짝 놀랐다.
“이… 일청 오빠! 소현 언니!”
“… 오랜만이네요, 주하.”
“괜찮아, 주하야?”
“또… 광증이…!”
검후의 제자, 주하가 스스로를 두 팔로 껴안고 두려운 듯 몸을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제가 또…”
“… 아닙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어요.”
“하지만…!!”
주하의 눈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흑…! 흐윽… 왜 나는…”
방금까지 미쳐날뛰던 소녀가 이제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으니 독고령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 미치겠네.”
주하가 진정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다.
백리소현과 위일청이 몇 번이고 괜찮다며 그녀를 토닥여준 뒤에야 주하는 조금 진정했다.
“… 정말 죄송합니다.”
무릎을 꿇고, 머리까지 조아리며 사과하는 주하를 보고 독고령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툭 내뱉었다.
“그렇게까지 사과할 필요야… 어차피 별로 힘도 안 들였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만 사과해도 되는…”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정말이지…”
“캬아아악!!”
“꺄아아아악!!”
독고령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주하가 두 귀를 꼭 틀어막고 몸을 웅크렸다.
“죄송합니다, 죄송합…”
“사과 그만하라고!! 캬아아악!!!”
“도… 독고 소저!”
“위 오라버니!”
“예.”
이제는 당연하다는듯이 독고령이 날뛰자, 백리소현은 위일청을 찾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하으응…!”
“령… 서 소저는 겁이 많으니 부디 주의를 해주세요.”
“녜… 녜헷…”
얼굴을 붉히며 얌전해진 독고령을 보고 은관영이 장난끼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독고 소저, 독고 소저.”
“… 뭐?”
“이제보니 일부러 날뛰는 거 아니에요?”
“뭔 헛소리야?”
“위 오빠한테 야한 짓을 당하고 싶어서…”
“캬아아악!!!”
“령.”
“흐읏…!”
위일청이 독고령의 가슴을 뒤에서 움켜쥐자, 그녀가 가슴을 가리며 말했다.
“이… 일청! 이번엔 하오문이 먼저 놀렸잖아요…!”
“… 그래도 조금 진정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령이 날뛰면 저희가…”
“진짜아…!”
독고령이 거친 숨을 내쉬며 은관영을 째려보았다.
“… 너 나중에 봐.”
“위 오빠 옆에 내내 붙어있을 건데요오~.”
“이익…!!”
독고령이 다시 한 번 날뛰어야하나 고민하는 순간.
“손님! 급한 용무가 있는데 잠시 안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보타문의 문도가 다급하게 외쳤다.
“들어오시죠.”
위일청의 허락이 떨어지자, 안으로 들어온 문도는 주하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지금 본문에 사고가... 주… 주하야…!
“사저…”
“설마…”
문도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무릎을 꿇는 순간, 독고령이 그녀를 멈춰세웠다.
“사과는 됐어. 얘한테 많이 받았어.”
“손님들께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하지 말라니깐.”
“주하야!”
“… 네, 사저.”
“손님들에게 아무런 해도 안 끼쳤기에 망정이지… 오늘 네 담당이 누구였느냐?”
그 말을 듣자, 안 그래도 창백한 주하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사저!”
“고하거라! 누구였느냐?!”
“포승줄이 헐거웠던 것 뿐입니다! 윤 사저에겐 아무 잘못도… 흡!”
실수로 이름을 내뱉자 주하가 당황하며 입을 틀어막았으나 이미 뱉어진 말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 윤 사매구나. 너는 일단 창고로 돌아가거라.”
“… 네. 윤 사저에겐 부디...”
“어서!”
“...”
주하가 힘 없이 일어나더니 독고령과 위일청 일행에게 다시 한 번 고개를 푹 숙이고는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나갔다.
“… 폐를 끼쳐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혹시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금 이따 하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예. 그럼 반 식경(1시간) 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문도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자, 남은 일행들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깨고 입을 연 것은 은관영이었다.
“… 생각보다 엄하네요?”
“보통은 그렇지 않은데 외부인이 들어올 때만 그렇다고들 합니다. 서 소저가…”
“아까 그 미친 년?”
“… 령, 단어를 조금…”
“광증이 있으면 미친 년이죠, 뭐. 그보다…”
독고령이 턱을 긁으며 말했다.
“창고에 가둬두면 별로 안 좋을텐데…”
“네?”
“아까 못 봤어요, 걔 팔?”
독고령이 자신의 팔을 내보이곤 그 위를 손으로 쓸며 말했다.
“… 포승줄에 오랫동안 묶여있던 흔적이 있던데요?”
“외부에서 손님들이 오실 때마다 광증 때문에 그렇게 해둔다고 들었…”
“밥도 안 먹이고요?”
“서 소저가 밥을 잘 안 먹는…”
“안 먹는다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말라요?”
위일청이 입을 다물자 독고령이 백리소현과 은관영을 보며 말했다.
“걔 팔 봤냐? 나는 뼈가 걸어다니는 줄 알았어.”
“검후님께 분명 사정이 있을…”
“사정?”
독고령이 으르렁거렸다.
“자기 제자를 굶기고, 창고에 묶어둘 사정? 광증에 절맥까지 앓는 애를?”
“… 령 매.”
“걔 손 봤어? 손톱 중에 성한 게 하나 없더군. 상처는 가득한데 그 흔한 붕대 하나 안 묶어놨다고?”
“아마 잠시 풀린 게…”
“광증에서 깨어나 사죄하는 그 아이한테는 비굴함이 가득했어.”
“…”
낮아진 독고령의 목소리를 듣고, 백리소현은 입을 다물었다.
“마음에 안 들어.”
독고령은 하나부터 열까지 보타문이 마음에 안 들었다.
태극삼검과 검후 사이엔 분명히 무언가 비밀이 있다.
검후는 나이도 까먹고 위일청에게 치근덕거리는 데다가 계속하여 신경을 건드린다.
게다가 광증에 걸린 제자를 치료해달라고 부탁했다길래 아끼는 줄 알았더니만, 창고에 가둬두고, 포승줄로 묶어 놓은데다가 밥도 제대로 안 먹이고 있었다.
“… 마음에 안 들어.”
독고령이 내뱉는 혼잣말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
화가 난 독고령은 결국 위일청과 다른 두 명을 식당에 보내고, 홀로 처소에 남아 분을 삭히고 있었다.
그녀 또한 오랜 세월 광증을 앓아봤기에 주하라 불리는 오늘 처음 보는 소녀에게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광증이라…’
독고령이 된 이후로 광증이 일었던 적은 없지만, 그녀는 오랜만에 옛날의 그 불쾌한 감각을 떠올렸다.
머리가 달아오르고, 시야가 점점 좁아지며, 온 몸이 뜨거워지는 그 기이한 상황.
그리고는 어느 순간, 스스로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정신을 차리면 피투성이에 젖어있는 손을 보고 한숨을 푹 내쉬게 되는 그 개같은 기분을 떠올리자 독고령은 또 다시 짜증이 났다.
‘… 시발.’
검후의 제자는 눈의 흰 자위 전체가 새빨갛게 변할 정도였으니 예전의 독고령보다 광증이 더 심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 근데 왜 절맥증이 있지?’
저렇게 심한 광증이라면 분명히 극양의 기운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극양지기를 몸에 품고 있다면 극음지기에 의해 얼어붙은 세맥을 뚫어버리고 아무 문제 없을 터였다.
오히려 극음지기와 맞부딪혀 중화되지도 않을까 싶었다.
‘이해가 안 되네.’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독고령은 처소의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완맥이라도 잡아 내부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봐야겠단 생각에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하늘이 노랗게 물들어 노을이 지고 있었다.
‘… 곧 해가 지겠네.’
보타문은 독고령의 생각보다 넓었기에 그녀는 일단 주변의 가장 높은 건물의 지붕 위로 올라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기이하게도 밖에 나온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그녀는 편하게 지붕과 지붕을 오가며 수색을 시작했다.
‘창고… 창고라고 했지… 창고…’
창고로 보이는 건물을 몇 개 찾은 독고령은 하나씩 그 주변으로 다가가 내부에 사람이 있나 없나를 확인했다.
그 과정이 몇 번 반복되자 어느새 하늘이 어둑어둑해졌고, 독고령이 슬슬 포기하고 처소로 돌아가려던 찰나.
‘찾았다…!’
드디어 내부에서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연약한 생기가 느껴지는 창고를 찾자, 독고령은 그 앞에 섰다.
‘… 뭐야, 이건?’
마치 귀신이라도 가둬놓은듯이 부적과 염주가 잔뜩 달려있는 창고에 도달하자, 독고령은 스산함을 느꼈다.
게다가 어지간해선 열리지 않을듯한 튼튼해보이는 검은 빛의 자물쇠가 문을 막아두고 있자, 독고령은 이를 갈았다.
‘완전 감옥이구만.’
그 안에 주하가 있을거라 확신한 독고령은 혹시나 누군가 찾아오지 않을까 주의하며 자물쇠를 부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이익…
낡은 창고의 문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열리자, 안에 있던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누… 누구세요…?”
“주하냐?”
“… 아까 본 손님?”
“놀러왔다.”
“… 네?”
“시발, 이럴 줄 알았지…”
창고의 안으로 들어오자 독고령은 얼굴을 구겼다.
악취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이 안에서 대소변마저 다 해결하는 듯 했고, 주하는 두 팔과 두 다리가 모두 단단한 포승줄로 묶여있는 상태였다.
“시발. 너 진짜 검후 제자 맞냐? 대우가 이따군데?”
“이… 이건 제가 자청한…”
“지랄 말고. 손이나 줘 봐.”
“… 네?”
“완맥 한 번 잡아보게.”
“와… 완맥을요? 남에게 완맥을 내주면…”
“콱 씨. 그냥 좀 줘 봐.”
“꺄악…!”
독고령이 주하의 반항을 무시하고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내기를 흘려넣었다.
“이… 이제 곧 달이 떠요! 빨리 나가셔야…”
“달 뜬다고 뭐가 달라지냐? 조용히 있어, 집중해야하니깐.”
“저… 정말 위험해요, 손님!”
“괜찮아.”
“정말… 윽…!”
주하가 조용해지자, 독고령은 그제서야 눈을 감고 편안히 그녀의 내부를 관조했다.
‘… 세맥은 얼어붙었는데… 뭐야, 이건?’
주하의 하단전엔 음기가, 상단전엔 양기가 가득했고, 중단전에는 이상한 기운이 가득 들어차서 음기와 양기가 이어지는 것을 막고 있었다.
‘… 완전 개판이네, 얘도.’
중단전의 요사한 기운 덕에 음기와 양기가 섞이지 않아서였을까?
그녀의 몸은 독고령의 지식으론 쉬이 이해가 가지 않는 상태였다.
음기가 한 번 대주천을 하며 대맥을 얼려버리면, 그 후에는 양기가 한 번 대주천을 이뤄 얼린 대맥을 녹이는 참으로 특이한 신체였다.
‘별 이상한… 응…?’
그녀의 내부를 살핀 독고령이 감았던 눈을 뜨자, 어느새 주하가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끝났어.”
“후후… 못 보던 분이네요?”
“… 엉?”
갑자기 주하가 돌변하자, 독고령은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뭐랄까…
어딘가 색기가 느껴지는… 요염한 눈동자였다.
방금까지의 자신감 없는 축 처진 목소리가 아닌 오묘한 목소리가 독고령으로 하여금 그녀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피부도 참 고우시고…”
“뭐… 뭐하는거야, 새끼야?!”
“마치 비단결 같네요…”
주하가 손으로 독고령의 팔뚝을 훑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름다우셔라…”
핥짝.
혀로 입술을 핥은 주하가 스멀스멀 독고령에게 기어오자, 뭔가 이상함을 느낀 독고령이 조금씩 뒷걸음질쳤다.
“… 가까이 오지 마.”
“잘 해드릴게요.”
“뭐… 뭘…?!”
“기분 좋을거랍니다? 다른 사저와 사매들도 다 좋아했어요.”
“아니… 시발,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
턱.
독고령의 등이 막다른 벽에 닿자, 주하가 웃으며 독고령을 타고 올라섰다.
“후후… 그냥 제게 다 맡기시고…”
“미… 미친 년아…! 진짜 때린다?!”
“어머, 그런 걸 좋아하시나요?”
“아… 아니익…!!”
주하의 손이 자신의 목을 타고 올라오자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당장이라도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독고령이 위기감에 몸을 움츠리는 순간…
‘이… 일청…!!’
끼이익…
“… 여기 있었구나.”
“검후?!”
“하아… 주하야, 안으로 돌아가거라.”
“칫.”
“어서!”
검후가 내공을 담아 호통치자, 주하가 아쉬운듯 다시 창고의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
서교가 독고령에게 손을 뻗자, 그녀가 엉겁결에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어… 다시 움직이네…?’
아까까지만 해도 움직이지 않던 몸이 잘만 움직이자 독고령은 얼떨떨했다.
아직도 자신이 무슨 일을 겪은지 몰라 혼란에 빠져있을 무렵, 검후가 입을 열었다.
“… 위일청이 그대를 찾더구나. 본 문은 밤에 돌아다니면 안 되느니라.”
“몰랐어요. 그보다 아까 그건…”
“… 저게 본녀가 구양신공을 원하는 이유니라. 하아…”
서교가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 낮에는 양기가 끌어올라 광증으로 날뛰고, 밤에는 음기와 요기가 끌어올라 다른 문도들을 덮치더구나.”
“… 예?”
“방금 겪지 않았느냐…”
“그… 덮친다는 게…”
“벗겨서, 물고 빨고는, 뿜어내게 만드노라.”
“…”
노골적인 검후의 말에 독고령은 멍해졌다.
그 사이에 서교가 창고의 옆에서 다른 자물쇠를 꺼내들어 문을 굳건히 걸어 잠그고는 독고령을 쳐다보았다.
“… 한 잔 하겠느냐?”
“차요?”
“… 술도 있다.”
“… 그러죠.”
어쩐지 피곤해보이는 검후의 등을 보며, 독고령은 그녀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