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3 15장. 여인, 노인, 어린아이를 조심하라 - (1)
독고령이 한창 남궁소소를 껴안고 울적해져있을 무렵.
“음…?”
“왜 그러십니까, 어르신?”
“… 아닐세. 영 쎄한 느낌이 들어서 말일세.”
“크큭, 오해시겠죠.”
남궁원청은 괜히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툴툴거렸다.
“괜히 광마에게 손녀를 맡겼나 싶기도 하고…”
“그도 분별이 있는 자이니 괜찮을 겁니다.”
“분별은 무슨. 그 년이랑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이 분별일세.”
“으하핫! 그렇기도 하네요.”
운영이 크게 웃는 순간, 그의 뒤에 수풀이 들썩이며 누군가 나왔다.
“기분이 좋아보이십니다, 신의 어르신?”
“아, 고생이 많습니다, 극명.”
“고생은요, 무슨. 근처에서 토끼를 몇 마리 잡아왔습니다. 금방 손질해 오겠습니다.”
“고맙네.”
노극명이 싱긋 웃으며 토끼를 들고 냇가로 향했다.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몇 개 더 집어넣으며 남궁원청이 말했다.
“… 생각보다 싹싹한 친구구만.”
“그렇지요?”
“… 어떤 기분인가? 딸 아이 시집 보내는 기분은? 노부는 아들 놈 밖에 없어서 말일세.”
“그냥 뭐 그렇지요.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고요.”
“하긴…”
“… 제가 최선을 다 해봐야죠.”
운영이 괜히 모닥불의 나뭇더미를 뒤적거리며 씁쓸한 듯 말했다.
“… 그저 딸 아이 혼삿길 막는 아비만 안 됐으면 좋겠습니다.”
“예끼, 이 사람아. 불길한 소리 하지 말게.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자네는 살아서 돌아가야지.”
“저야 뭐, 무공도 못 배운 놈이니깐 가장 살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에잉… 쯔쯔… 자네도 나이를 먹었구만. 그런 소리도 다 하고 말일세.”
“나이 먹었죠. 제가 공자님 앞에서 문자 쓰는 일이긴 한데 말입니다, 어르신. 이번에 소홍이한테 의원을 물려주고 난 뒤로 내내 어깨가 가볍습니다.”
“다 그런 법이지 않겠나? 노부 또한 자식 놈한테 그 놈의 가주 자리를 넘겨놓으니 속이 편하더구만, 클클.”
“… 세대교체가 이렇게 이뤄지나 봅니다.”
“늙은이는 그저 젊은 나무가 부러지지 않도록 풍랑을 막아주는 정도로 멈춰야겠지.”
남궁원청이 나뭇가지를 하나 더 집어들더니 모닥불을 뒤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백련휘.”
“… 딸 아이가 궁주의 자리에 오르기엔 아직 미숙해서 말이오.”
“으음?!”
운영이 당황하여 뒤를 돌자, 그 곳엔 흰 백발과 흰 수염의 중년의 무인이 서있었다.
북해빙궁의 주인, 북해빙제 백련휘였다.
그의 거대한 체구 뒤로 손질을 하지 못한 토끼를 들고 있는 노극명이 보였다.
“흐음… 빙궁도 모용세가에 붙었는가?”
“그저 새로운 흐름에 몸을 실었을 뿐입니다. 검신께서는 어떠십니까?”
그가 빙공을 사용하자, 따스한 숲 속에서도 흰 김을 토해내며 말했다.
“검신이란 이름을 새로운 시대에 물려주기 위해 오셨습니까?”
“크… 크하핫!!”
남궁원청이 눈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웃어재끼고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아… 참. 자네도 재밌는 친구였구만, 그래. 우리가 이제 두 번째로 보는 건가?”
“예.”
“그래서 고개가 그렇게 빳빳했구만.”
“음...?”
백련휘는 그저 멍하니 남궁원청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모닥불에 앉아 나뭇가지로 장작을 들쑤시다가 손을 툭툭 털고는 일어서는 그 순간까지,
남구원청은 백련휘의 눈에 그저 평범한 한 명의 노인네로 보였다.
하지만 그가 나뭇가지를 들어올리는 순간…
가공할 기운이 백련휘를 덮쳤다.
“크윽…!”
“저 먼 북해에 틀어박혀 있었기에 노부의 이름이 가볍게 여겨졌는가?”
“끄윽…!!”
“예의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으나 하다못해 고개라도 숙였어야지, 이 사람아.”
“우웨엑…!!”
결국 그의 기운을 버텨내지 못한 백련휘가 내상을 입고는 거무죽죽한 피를 토하며 바닥에 무릎 꿇고 주저앉자, 그제서야 남궁원청은 기운을 거둬들였다.
“자네한테 빙제라는 칭호를 내려준 게 노부였네. 기억도 못 하고 이를 드러내기엔 너무 건방지지 않았나?”
“… 사죄드리오.”
“이제 좀 눈높이가 맞구만, 클클.”
사과를 들은 남궁원청이 뒷짐을 지고는, 나뭇가지를 까닥거리며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허나 백련휘에게 그 미소는 언제든 사냥할 수 있는 먹잇감을 두고 장난을 치는듯한 범의 여유처럼 느껴졌다.
‘내일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몰골을 한 늙은이가 이리도 강한가…!!’
노극명이 신의와 검신과 함께 모용세가로 귀환한다는 편지를 받고, 모용벽은 백련휘를 길잡이로 보냈다.
그래도 검신과 신의가 오는 중이니 그 정도 대우는 해줘야 격이 맞을 거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막상 도착한 결과, 백련휘의 눈에는 검신이라 불리는 인간이 너무나 남루해보였다.
그렇기에 잠시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덤벼들려고 했으나 결과는 이 꼬락서니였다.
백련휘가 이마를 바닥에 붙이며 용서를 구했다.
“… 본 모가 큰 결례를 범하였소.”
“한 집단의 수장 정도 되는 이가 그런 실례를 범하는 일 또한 드물지. 모용벽 그 친구가 아무래도 노부를 기다리느라 속이 타는 듯 하구만. 흐음…”
“…”
남궁원청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다 노극명을 가르켰다.
“이보게, 극명.”
“예, 어르신.”
“서신을 하나 더 보내게.”
“… 뭐라고 보낼까요?”
“가주 보고 예까지 노부를 마중나오라고 하세. 그렇지 않는다면… 음…”
남궁원청은 어떻게 해야 모용벽에게 모욕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모용세가에 가장 큰 피해를 줬던 이를 떠올렸다.
“노부가 현판에 오줌을 싸지를 것이라 전하게.”
“… 정말이십니까?”
“예끼, 이 놈아. 노부가 진짜 그러겠는가?”
“아… 아닙니다.”
“어서 써서 보내게. 아, 혼자 오라고도 전하고.”
“호… 혼자요?”
“그래. 혼자서, 걸어서 오라고 전하게나. 아… 노순평도 같이 오라고 전하게. 자네의 혼삿길을 막을 순 없겠구만.”
“… 예. 잠시 마을에 다녀오겠습니다.”
전서구를 보내기 위해 마을로 향한 노극명을 보며, 백련휘가 입을 열었다.
“본 모가 큰 죄를…”
“됐네. 큰 죄야 무슨.”
남궁원청이 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는 백련휘를 보며 말했다.
“자네는 관전자가 되어야겠구만.”
“… 예?”
“검신과 소검신. 둘의 대결에 관전자가 없어야 쓰겠나…”
그 말을 듣고 운영이 걱정스레 물었다.
“어… 어르신…”
“괜찮네. 어차피 무림은 이런 곳일세. 끓는 피를 주체하지 못 하는 젊은이가 전설을 쌓은 노목을 꺾고 새로운 명성을 얻는 곳. 그게 무림 아니겠는가?”
“…”
“허나 기왕 싸울거면 말일세… 노부는 이기고 싶네. 적의 소굴에 들어가는 짓 또한 멍청한 짓이지.”
남궁원청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냈다.
“광마 그 아이에겐 미안한 일이네만, 노부의 행보에 그 아이가 이견을 낼 순 없겠지. 이를 먼저 드러낸 놈을 용서해 줄만큼 노부도 녹록치는 않으니 말일세.”
“그렇다고 해도 그런 도발을…”
남궁원청은 손에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장작에 던져넣으며 말했다.
“지 까짓게 화가 나봐야 뭘 어쩌겠다고, 클클. 이보게, 빙제.”
“… 예, 어르신.”
“와서 어깨나 좀 주물러보게.”
“… 예?”
“콱… 한창 젊은 놈이 귀가 먹었는가?”
“아… 아닙니다…!!”
남궁원청이 또 다시 나뭇가지를 쥐려들자, 백련휘가 잽싸게 일어나 그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 시원하십니까, 어르신?”
“거 빙공도 조금 섞어서 해보게.”
“… 예.”
얌전히 남궁원청의 어깨를 안마하는 백련휘를 쳐다보며, 운영은 웃음을 꾹 참았다.
‘… 광마. 자네가 사람 하나 배려놨구만.’
하지만 남궁원청의 저 격식 없는 모습이 운영에겐 참으로 보기 좋았다.
*
“… 빨간 언니, 자요?”
“언니 안 잔다.”
“방금 코 골지 않았어요?”
“… 아냐.”
“언니, 눈 감고 있는데…”
“나는 눈 감고도 다 보여.”
“진짜요?!”
“그럼… 너도 무공 열심히 배우면 이런 거 할 수 있어.”
“네!”
“이리 와.”
“꺄아악! 간지러워요.”
독고령이 자신의 품에서 버둥대는 남궁소소를 꼭 끌어안으며 편한 자세를 찾았다.
위일청과 같이 못 자는 것은 아쉬웠지만, 남궁소소와 같이 자는 것 또한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위일청과는 오늘 한 번 했으니깐, 어느정도 만족감도 있었고.
독고령은 남궁소소의 몸을 이리저리 조물거리면서 물었다.
“야, 너는 왜 이렇게 부드럽냐?”
“네?”
“살이 야들야들해. 계속 만지고 싶네…”
“이상해요, 언니.”
“그런가? 다들 만지고 싶어할 걸. 니네 아빠는 잘 안 만지더냐?”
“… 아빠는 맨날 볼을 조물거리세요.”
“그치? 나만 그런 거 아니라니깐.”
말이 나온 김에 독고령은 남궁소소의 볼을 조물조물거렸다.
“음… 역시 남궁진. 뭘 좀 아는 놈이구만.”
“우리 아빠 아세요?”
“… 옛날에 잠깐 만났지.”
“진짜요?”
“어. 너네 아빠한테는 대신 비밀이다?”
“왜요?”
“음… 그 때 아빠가 나한테 혼났거든.”
“언니한테요?!”
“그럼그럼. 언니가 얼마나 센데.”
“… 우리 아빠가 더 센데…”
“응?”
조금은 토라진 듯한 남궁소소의 말을 듣고, 독고령은 재빨리 말을 바꿨다.
“물론 그 때 잠깐이였고, 요즘은 니네 아빠가 더 세.”
“진짜요?”
“그럼그럼. 니네 아빠가 누구냐? 무림맹주잖아. 백도에서 최고란 얘기지.”
“… 할아버지도 있잖아요?”
“어… 니네 할아버지 다음으로 세지.”
“히힛, 그럼 됐어요. 우리 아빠가 제일 세니깐요!”
“그래그래.”
독고령이 남궁소소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다시 잠을 청했다.
“… 소소야.”
“네, 언니.”
“… 자고 일어난 뒤에 헤어질 때 울지 마.”
“안 울 거예요!”
“혹시나 싶어서 하는 말이지. 괜히 나 마음 약해질까 봐.”
“… 꼭 참아볼게요.”
“그래그래. 대신 소소가 안 울고 잘 지내고 있으면 나중에 언니가 또 소소 보러 갈게.”
“진짜요?”
“응, 그럼.”
“얼마나 있다가요?”
“으음…”
독고령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한 300 밤?”
“… 손가락으로 못 세요.”
“그렇네. 음… 마당에 노란 꽃 본 적 있어?”
“네.”
“300일 보다 조금 길어지긴 했는데… 노란 꽃이 두 번 다시 필 때 언니가 만나러 갈게. 그 때까지는 언니가 우리 소소 보러 갈게.”
“약속이에요?”
“…”
“언니?”
재촉하는 남궁소소를 보고 독고령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에게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할 무언가였으니깐.
‘… 이제 곧 겨울이 찾아오고, 봄이 오고, 또 그 다음 해의 봄이라…’
그 때까지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당문과 모용을 상대하고도, 다시 남궁소소를 보러 갈 수 있을까?
독고령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눈을 뜨고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응, 약속하자. 언니가 꼭 보러갈게.”
“네!”
“… 꼭.”
독고령이 다시 한 번 남궁소소를 꼭 끌어안으며 스스로 다짐했다.
‘반드시… 살아남아야지…’
약속은 남궁소소에게만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하는 것이였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