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14장. 세대교체 - (14)
독고령과 위일청 때문에 잠시 출발이 늦어졌지만, 막상 출발한 뒤에는 큰 문제 없이 마차는 보타문으로 향했다.
남궁세가의 일행, 남궁소소와 창천오검과는 헤어지기로 도중에 결정했다.
가장 큰 이유는 독고령 때문이었다.
독고령 또한 남궁소소와 지내는 게 나름 즐겁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안휘까지 들렸다 보타문 가도 되잖아요?”
“가는 길에 합비 들려야하잖아. 무림맹을 내가 왜 가냐?”
“… 그렇게 싫으세요?”
“내가 좋아할 거 같냐?”
“…”
결국 보타문과 남궁세가의 안휘성 사이에 위치한 성주에서 헤어지기로 정해진 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남궁소소는 독고령과 붙어있고 싶어했다.
그렇다보니 검신이 가장 우려하던 사단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언니언니.”
“… 왜?”
“이 오빠는 왜 여기 있어요?”
“…”
아무 것도 모른 채, 순수하게 눈을 빛내며 묻는 남궁소소를 보고 독고령은 자신이 발을 올리고 있던 청운을 툭툭 건드렸다.
“야.”
“예, 누님!”
“… 자리로 돌아가.”
“예!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르십쇼!”
“…”
청운이 맞은 편에 앉자 과묵한 현천은 그의 얼굴을 툭툭 쳐줬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현상은 또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도호를 나직였다.
“하아… 원시천존이시여…”
이대제자 중에서 가장 오성이 뛰어나다 평가받아 사형들과 함께 태극삼검에 뽑힌 청운이었다.
대기만성의 절학인 무당의 무공 특성상, 연배가 높을수록 강한 것은 자명한 일이었음에도 청운은 사형제를 뛰어넘을 정도의 무공 또한 가지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만 지나면 무당을 대표할 검수가 될 이, 무당의 얼굴이 될 도인이 바로 청운이리라 현상은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님.”
“… 뭐, 새끼야?”
“다음엔 맨발을 올리시는 건 어떠십니까? 왠지 모르겠지만, 그 쪽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
독고령이 ‘저 새끼, 뭐냐?’ 라는 식으로 현상을 쳐다보자, 그는 눈을 피했다.
그 또한 모르는 것을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현상이 대답할 기색이 없자, 독고령이 남궁소소를 뒤에서 껴안으며 말했다.
“저 놈은… 음… 그냥 그런 거야.”
“그런 거예요?”
“어, 그런 거야.”
“왜 그런데요?”
“타고 나길 그런 거란다.”
“어려워요…”
“원래 천하엔 모르는 게 더 많은 법이야.”
독고령이 손을 뻗어 남궁소소를 꼭 껴안자, 그녀가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가… 간지러워요, 언니!”
“잠시만 있어 봐. 야… 너 어떻게 움직이냐?”
“네?”
“이렇게 자그마한데… 참 신기하단 말이지.”
독고령은 남궁소소와 같이 지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일단 오랜만에 느껴보는 어린아이의 감촉은 매우 부드럽고, 참으로 기분좋았다.
머리에 턱을 올려두면 왠지 모르게 기분 좋고, 껴안으면 기분 좋고, 아무튼 기분이 좋았다.
자연스레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이 새삼스레 백리소현이 왜 그리 남을 껴안는걸 좋아하는 지 이해가 갔다.
‘어린애라…’
문득 독고령은 남궁소소의 머리에 턱을 올리고는 그녀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손가락 참 작네…’
작고, 말랑말랑하지만 만지면 반응이 돌아온다.
살아있는 생명체란 증거였다.
독고령은 새삼스레 이 작은 아이가 움직여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 복수가 끝나면… 모든 게 다 끝나면…’
은약벽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달거리를 한다는 것은, 아기를 임신할 수 있다는 증거라고.
음양교합이 아기를 만드는 과정임을 독고령은 진즉에 이해했다.
그렇다면…
‘으으…’
독고령의 머리가 천천히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이 신기하여 남궁소소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것도 모르고, 독고령은 망상에 빠져들었다.
‘나중에 위일청이랑…’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고 했으니 혹시나 자신이 아이를 낳게 되면 어떻게 될까?
자기처럼 붉은 머리면 괜히 시비가 걸리진 않을까?
‘… 남자 아이도 괜찮은데.’
아들을 낳는다면 위일청과 닮을 것이다.
그럼 위일청과 닮은 사람이 둘이나 있으니 보는 재미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 한 두, 세 명 낳을까? 애기 낳기 많이 힘든가?’
자신만 즐거우면 좀 그러니깐 위일청을 배려해서 딸 아이도 같이 낳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이면 아이들이 많은 것도 괜찮다 싶었다.
맏이는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무공에 힘을 써서 동생들을 지켜줬으면 했다.
오성이 뛰어나지 않아 무공이 모자라도 백리소현처럼 다른 이를 감싸안을 줄 아는 아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이에 몇 명의 아이가 더 있을지 모르겠지만, 막내는 왠지 은관영 같은 아이면 좋을 것만 같았다.
조금 장난끼가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주는 아이.
그런 애가 좋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처음엔 아이가 어떻게 자라면 좋겠다를 떠올리다가 점차 독고령은 아이를 만드는 과정으로 생각이 쏠렸다.
자연스레 그녀의 머리가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이윽고 머리 끝까지 분홍빛으로 물들 즈음.
“… 독고 소저.”
“으… 응?!”
“소소 아가씨를 껴안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오~?”
“흐엑?!”
은관영이 실실 웃으며 독고령을 옆에서 툭툭 찔러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소소 아가씨를 껴안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좀…”
“아… 아니야, 미친 년아!!”
“응? 저 왜요?”
“소소는 듣지 마. 지지야, 지지.”
“네?”
“글쎄요오~, 소소 아가씨가 못된 것만 배워 가는 거 아닌가 싶네요오. 헤헷.”
“다… 닥쳐!!”
새삼스레 독고령은 남궁소소가 자신의 무릎 위에 앉아있는게 원망스러웠다.
소소만 없었다면 진즉에 은관영을 가만히 안 뒀을텐데 생각하며, 독고령은 방금까지 하던 생각들을 금세 마음 한 구석으로 치워뒀다.
마차 안이 독고령과 은관영의 말싸움으로 시끌시끌해지자, 마부석에 앉아있던 위일청이 웃으며 백리소현에게 말했다.
“마차 안이 시끌시끌하네요.”
“그러게. 위 오라버니도 들어갈래? 나도 말 몰아보고 싶은데.”
“오늘은 말고요. 나중에 관도에서 조금씩 해보죠.”
“응.”
위일청에게 어깨를 기대고 있던 백리소현이 그의 팔을 껴안으며 말했다.
“그래도 령 매랑 관영이가 많이 친해져서 다행이네.”
“그러게 말입니다. 전처럼 또 치고박을 걱정은 없겠네요.”
“그래서 위 오라버니는 어때?”
“뭐가 말입니까?”
“둘이 친하게 지내는 게 더 좋아?”
“당연히 좋죠.”
“그럼 언제쯤 같이 동침할까?”
“음… 글쎄요… 령이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 다르겠죠. 아직은 조금 부끄러워하는 게 많아서요.”
“…”
“백리 소저?”
백리소현이 갑자기 말을 멈추자, 위일청이 의아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언제나처럼 멍한 표정이었으나 오랫동안 같이 지낸만큼, 위일청은 그녀의 얼굴에서 약간의 불만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냥~.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위 오라버니 옆에 있었는데 령 매는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이름으로 부르는 게 부러워서.”
“…”
“위 오라버니 마음 속에 정실은 이미 령 매가 되버렸네. 첩인 나는 얌전히…”
“소현.”
위일청이 한 손을 뻗어 백리소현의 어깨를 끌어안고는 더욱 더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전부터 부를까말까 고민했었는데, 소현이 원한다면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 령 매보다 늦었어.”
“… 미안합니다.”
“령 매한테 조금 질투심이 생기네~. 나도 못된 첩이 될 수 있는데에~.”
“…”
“위 오라버니.”
“네, 소현.”
백리소현이 슬머시 고개를 들고 위일청을 바라보았다.
“존댓말 안 하고 말하는 건 어색해?”
“… 그냥 습관 같은 겁니다. 어릴 때부터 항상 이렇게 말했으니깐요.”
“응?”
그의 말 속에서 주변에 존댓말이 아닌 반말을 할 상대가 없었다는 뜻이 내포되어있자, 백리소현이 물었다.
“근처에 친구는 없었어? 그러고보니깐 위 오라버니 어린 시절 얘기는 많이 못 들어봤네.”
“… 나중에요.”
멋쩍게 웃는 위일청의 입가에서 약간의 씁쓸함을 발견한 백리소현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의 팔을 꼬옥 껴안았다.
“응, 나중에.”
“…예.”
백리소현은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저 위일청과 온기를 나눴다.
*
성주에 가까워지자 백리소현이 마부석의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령 매, 령 매.”
“크어… 엉?”
“… 침 닦아. 소소 아가씨한테 묻겠다.”
“쓰읍…”
남궁소소를 껴안고 잠에 빠져든 독고령을 깨우며 백리소현이 웃었다.
“이제 곧 성주야. 슬슬 정신차려.”
“… 어.”
“관영아, 객잔은 어디로 가면 돼?”
“제가 마부석으로 갈게요오.”
“응.”
은관영과 교대하듯 마차 안으로 들어온 백리소현이 자연스레 자고 있는 남궁소소를 껴안으려고 하자, 독고령이 거절했다.
“내가 데리고 있을게.”
“아니면 나도 같이 껴안아도 되는데?”
“… 싫거든.”
독고령이 백리소현에게 숨기듯이 남궁소소를 뒤로 빼자, 그 모습을 보고 청운이 입을 열었다.
“안을 게 필요하시면 저라도…”
“닥치거라, 청운.”
“예, 사형.”
“… 죄송합니다, 소저.”
현상이 도대체 몇 번째 사과를 하는지 모를 즈음이 되자, 독고령은 이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됐다. 저 새끼가 저 꼬라지인걸 어쩌겠냐.”
“… 넓은 아량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숙소에 도착하면 저 새끼부터 어떻게 좀 해 봐. 아… 너네 돈 있지?”
“예, 있습니다. 여비로 조금 가지고 있죠.”
현상이 품에서 돈이 든 전낭을 꺼냄과 동시에 품에서 편지가 하나 같이 튀어나왔다.
“어이쿠.”
독고령이 그걸 주으려고 하던 순간.
‘… 음?’
현상이 기겁하며 편지를 낚아채곤 품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아… 하하… 하하하… 이게 왜…”
“뭐냐?”
“ㅇ… 예?”
“편지 아니였냐?”
“… 아닙니다. 잘못보셨겠죠.”
“누굴 장님으로 아나…”
독고령이 슬며시 기운을 끌어올려 제대로 협박을 하려던 순간…
“으응…”
“아…”
남궁소소가 일어났다.
눈을 부비적거리며 독고령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남궁소소를 보며 독고령이 현상을 향해 입을 뻥긋였다.
‘이.따.보.자.’
마지막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는 목을 휙 긋는 행동까지 취하며 확실한 의사를 전달한 뒤, 독고령은 남궁소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깨웠다.
“일어나, 슬슬 성주야.”
“… 벌써요?”
“어. 집에 가야지.”
“… 언니랑 더 있고 싶은데…”
“…”
“안 돼요?”
졸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남궁소소를 보고는 독고령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
독고령과 눈을 마주친 백리소현이 어깨를 으쓱거렸고, 그녀의 등 너머로 어느새 어둑해진 밤하늘이 보이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남궁소소에게 말했다.
“… 하루 자고, 내일 점심 먹고 가.”
“네, 헤헷. 그럼 오늘 언니랑 같이 자도 돼요?”
“… 나랑?”
“안 돼…요?”
“…”
독고령은 잠시 위일청과 남궁소소 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오늘만 날이 아니니깐…’
객잔에서 느긋하게 위일청과 즐길 생각에 가득차 있었지만, 이번은 남궁소소의 어리광을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위일청과는 앞으로도 시간이 많을 테니깐.
“… 그래, 같이 자자.”
“네, 헤헷.”
자신의 품을 파고드는 남궁소소를 느끼며 독고령은 피식 웃었다.
‘… 어차피 내일 헤어질건데 참 좋아하네.’
피식 웃으며 남궁소소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는 와중, 청운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마치 기다렸다는듯이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로 독고령에게 물었다.
“… 엎드릴까요?”
“너는… 하아… 아니다.”
독고령은 문득 허산진인이 떠올라 하늘을 쳐다보며 용서를 빌었다.
‘… 미안하오. 근데 이거 진짜 내 잘못 아니오.’
왠지 무당의 봉문을 깨고 침입한 것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