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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화 〉14장. 세대교체 - (13) (127/225)



〈 127화 〉14장. 세대교체 - (13)

독고령이 분홍빛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위일청과 다투는 모습을 보며 현상은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그녀의 모습이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귀여운 소녀였기 때문에.


귀여운 것을 보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길을 가다 사람을 좋아하는 어린 강아지를 본 것처럼 자연스레 현상의 마음 또한 풀렸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독고령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인에게만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였고, 타인에겐 매우 사나운 맹견, 또는 광견에 가까운 여인이었음을.


“닥치라고,  씨.”
“…”


모닥불이 따스한 온기를 제공해주고 있었음에도 순식간에 주변이 싸늘해졌다.

독고령은 허리에 찬 유성도를 무릎 위에 올리고는 손잡이를 매만지며 말을 이어나갔다.


마치 수틀리면 당장이라도 출수하여 목을 딸 기세였다.

“나는 지금 고민 중이다.”
“…”
“대답 안 해?”
“무… 무엇을 말입니까, 소저?”
“네들의 목을 치고  기분이 후련해져야 할 지, 아니면 그냥 한 번 더 믿어볼지.”

독고령이 손가락을 춤추듯 움직이며 손잡이를 두들겨댔다.

“… 너네 장문인, 허산진인이랬나? 그 분이 보여주신 도량은 감명깊었지만, 속가의 제자라 일컫는 새끼들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어.”
“… 소저가 독고진 대협의 여식임은 일행분을 통해 들었습니다.”


현상이 혹여나 말실수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심히 말을 이어나갔다.

“속가의 일에 대해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본산은 봉문 중이였기에 속가에서 저희를 먼저 찾지 않는 이상, 저희가 속가를 찾는  또한 없었고, 속가는 어디까지나 본산을 위해 나선 것 뿐입니다. 다 저희가 불민한 탓이니 입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

현상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독고령은 또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대화를 나눠보고 조금이라도 싹수가 노란 놈이라면 그 즉시 싹을 뽑아버리려고 마음 먹었으나 현상은 예의를 아는 자였다.

“소저께서 원하는 바를 말하신다면 주어진 재량 내에서 해결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그 재량에는 장문인께 청을 하는 것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허산진인은 됐어.”
“… 선대 장문인을 일컫는 것이라면 이미 등선하셨습니다.”
“뭐?”
“몇 년 전에 병에 걸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 괜히 독고령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

고작 한  뿐이었지만, 털털하게 웃는 모습이 사람 좋아보이는 인상의 늙은이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불청객에게도 차를 권하는 그 노인의 도량이 떠오르자 독고령의 가슴이 술렁였다.


“… 많이 괴로워하셨냐?”
“편히 가시도록 노력했다 생각합니다.”
“… 다행이군.”


현상은 독고진이 선대 장문인과 무슨 일을 가졌는지 자세히 모른다.


다만 독고진이 봉문중이던 본산에 들이닥친 것을 보았던 기억과 그가 떠난 뒤, 장문인이 나와 ‘목이 마른 객에게 차를 나눠줬을 뿐이니 다들 괘념치 말거라.’라고 했던 것만 알고 있었다.

그 때는 몰랐으나 한참이 지나서야 독고진과 선대 장문인이 무슨 일이 있었으리라 짐작하는 지금.

그의 여식, 독고령이 왜 저리 착잡한 표정으로 모닥불을 바라보는지, 현상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야 독고령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너희들은 불청객에게 차를 나눠줄 수 있는 도인이냐?”
“… 그리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쉬운 일이지. 하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긴  없이 어려운 일이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상이 독고령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리 배우고, 그런 것을 보며 자라왔습니다.”
“하아…”

현상의 올곧은 눈을 보고, 독고령은 그제서야 왜 자신의 마음이 술렁이는지 알아차렸다.

그녀는 믿고 싶었다.

허산진인이 보여준 예의와 그를 보고 자랐을 이들을.


“… 지금 장문인은 누구냐?”
“무 자, 진 자를 쓰십니다.”
“전대 태극삼검이군.”

무공도 약하고, 검법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정신 하나는 제대로 박힌 놈이었다.

해검지에서 일전을 벌인 후, 그가 무릎을 꿇으며 본산의 어린 제자만은 살려달라고 말했던 것이 떠오르자 독고령은 괜히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 제법 괜찮은 놈이었지.’

그런 놈이 장문인이 되었다면, 그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무당을 한   믿어도 되지 않을까?

마음을 정한 독고령이 유성도를 다시 허리 뒤로 돌리는 것을 보고, 현상이  시름 놓았다.

아까보다는 한결 편해진 분위기 속에서 독고령이 입을 열었다.


“… 보타문에 간다고 들었다.”
“예. 헌데 어찌…”
“같이 가.”
“… 예?”
“같이 가자고, 콱 씨. 젊은 놈이 벌써부터 귀가 먹었나…”
“저… 저흰 그냥… 저희들끼리 가려고…”
“가는 길이 맞으니깐 같이 갈 수도 있지, 새끼야.”
“…”
“어차피 우리도 한동안 보타문에서 머무를 건데 같이  가면  되냐? 엉?  돼? 싫어?”

독고령의 눈이 모닥불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수 없는 무언가 때문인지 번들거렸다.


 모습을 보고 현상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 그…”
“새끼야,  강호초출이지?”
“맞습니다. 허나…”
“원래 강호란 이런 거야, 새끼야. 이제 막 새로 강호에 나온 친구가 있으면 어?! 네가  가다 운 나쁘게 산적 새끼를 만나서 칼맞고 뒤질 수도 있잖아. 안 그래?”
“저희 그래도 무당…”
“그런 때를 대비해서 서로 딱! 이렇게, 어? 등을 맡길 수 있는 동행을 구해서 같이 다니는 거야, 새끼야. 내가 먼저 강호에 나온 선배로서 이런 조언을 해주는 거라고.”
“…”
“싫어?”


독고령이 슬그머니 유성도를 앞으로 끌어당기자, 현상이 현천과 청운을 쳐다보았다.

“…”

과묵하기 그지 없는 현천은 고개를 끄덕였고,

“맞습니다, 사형. 이 참에 창천오검 분들과 함께 하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듯 합니다!”

세상 모르는 청운은 독고령의 궤변을 철썩같이 믿었다.


결국…

“… 그렇게 하시지요.”
“크으… 역시 도사는 다르네. 세상 볼 줄 알아, 마음에 들어.”
“…”
“그럼 일단 서열부터 다시 짜고 갈까?”
“… 예?”

스릉.


독고령이 유성도를 꺼내들며 씨익 웃었다.


“네가 강호초출이라서 잘 모를텐데, 원래 일행끼리 분쟁이 생기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법이거든? 그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잖아. 알지?”
“그… 아는 말이긴 한데…”
“무림의 영원불변한 법칙이 뭐냐? ‘강자존’ 아니겠냐?”
“…”
“그러니깐 서열부터 딱 정하고, 이제 서열이 낮은 새끼는 무조건 말 따르는 걸로 하자. 알았지?”
“그건 흐… 흑도의… ”
“삼 수 양보없이 바로 간다!!”
“흐억?!”


닥쳐드는 독고령을 보며 현상은 당황하며 송문검에 손을 올렸으나…


빠악!


“그래도 검날로 안 벴다.”
“끄억…”

정신을 잃었다.


*

일정하게 흔들리는 자신의 몸을 느끼며, 현상은 두통과 함께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말만 한다매요!! 사고 안 친다매욧!!”
“… 아니, 저렇게 약할 줄은…”
“하루라도 사고를 안 치면 어딘가 덧나시나욧!!!”
“… 조진다고 먼저 말은 했었…”
“두 분께서는 상당히 친하시군요.”
“친해? 내가 진짜 친한  뭔지 보여줘?”
“… 죄송합니다. 제가  말 실수를…”
“괜히 청운 도사한테 말 돌리지 말고욧!!!”
“으윽…”

그 때, 현상이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끄러운 대화가 멈췄다.


“사… 사형! 괜찮으십니까?”
“… 괜찮다. 그보다 이게 어찌된…”

현상이 멍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자신이 정신을 잃기  무슨 일이 있었나 떠올리며 독고령을 보는 순간.


“허억…!”
“사람 얼굴을 보고 귀신을 쳐다본 표정을 짓네. 니네 귀신 제령도 하지 않냐?”
“얼마나 후려팼으면 저런 반응을 보이겠어욧!!”
“아니, 진짜 한 대만 쳤다니깐?!”
“으갸아아악!!!


은관영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을 구르자, 마차가 흔들렸다.

그러자 마부석이 열리며 위일청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령, 너무 난동을 피우지 마세요. 말들이 놀랍니다.”
“나… 나 아니에요!! 하오문이 멋대로 날뛴 거예요!!”
“… 은 소저였습니까? 미안합니다 령.”
“새끼야, 너 때문에 괜히 나만…”
“업보거든요!!”
“…”


은관영이 거친 숨을 진정시키며 현상을 쳐다보았다.


“… 일어나셨어요, 도사님? 괜찮으신가요?”
“예, 괜찮습니다. 그보다…”


현상이 슬그머니 독고령의 눈치를 살폈다.

“뭐, 새끼야?”
“… 어제 그…”
“너만 패고 끝났어, 새끼야. 벙어리는 무릎 꿇고, 눈치없는 느그 막내는 목숨 걸린 일엔 눈치가 빠르더군. 진즉에 덤비지 말았어야지,  씨.”
“맞습니다, 누님.”
“누… 누님?”

청운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현상이 당황하자, 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예! 제가 읽은 서책에선 보통 이런 분을 보고 ‘누님’이라고 부르더군요.”

현상이 독고령을 의심하며 쳐다보자, 오히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저 새끼 어떻게 좀 해 봐라. 어디를 어떻게 건드려야할 지 감이  오더라.”
“… 세상을 책으로만 배운 아인지라…”
“시발, 하아…”
“그… 일단…”
“물부터 좀 드세요오. 정신차리시고요.”
“예, 감사합니다…”

은관영이 건네준 물을 마신 뒤, 현상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상황파악에 나섰다.

“저희는 지금…”
“보타문 가는 중.”
“아, 예… 그…”
“뭐, 새끼야?”
“… 제가 사문이 따로 있기에 함부로 독고 소저를 모시기엔 좀…”
“엉?”
“어제 서열 얘기를 하셔서…”
“아.”

독고령이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건 농담이고, 그냥 서로 격차를 알아둬야 앞으로 편하겠다 싶어서. 어제 보여준  진짜 내 힘의 절반이다?”
“약자를 패고 아주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꼴이 흑도 못지 않네요오.”
“뒤질래?”
“…”


은관영과 투닥거리는 독고령을 보며 현상이 무언가 마음을 먹은 듯, 이를 악물고 그녀에게 말했다.

“… 소저.”
“어?”
“정말 송구하지만, 저희는 따로 가야할 거 같습니다.”
“왜?”
“…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현상이 무릎에 올린 손을 꾹 쥐며 괴로운  말했다.

 모습을 보고 독고령이 툭 내뱉었다.

“보타문만 가면 끝 아니야? 니네 어차피 거기 검후 제자 보러가는 거잖아.”
“…예?”
“독고 소저!”

현상 뿐만 아니라 은관영마저 당황하여 옆에서 독고령을 질책하자, 그녀가 당황했다.

“… 뭐야, 말한 거 아니었어?”
“아… 알고 계셨습니까?”
“아이, 진짜… 좀!”
“뭐, 어때. 어차피 그냥 터놓고 가는  편하지 않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는 독고령을 은관영이 도끼눈을 치뜨고 바라보며 전음을 보냈다.


[정보문파가 당당하게 ‘너네 뒤 캐고 있소!’하고 말하고 다녀욧?!!]
[아… 미안하다.]
[진짜, 좀…! 난 몰라욧!!]


은관영이 등을 돌리자, 독고령이 멋쩍은  현상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그… 뭐냐. 어…”

독고령이 변명을 급조해냈다.


“거… 위일청이 검후 제자를 살펴주기로 했는데… 걔가 그 뭐냐. 절맥도 있고, 양기도 있다매? 음, 양의 기운을  가진  하면 또 무당이니깐 당연히 그럴 줄 알았지.”
“아… 역시. 경험이 남다르십니다, 독고 소저.”
“근데 오히려 내가 궁금한데 니네  애를 어쩌려고 그러냐?”
“예?”

독고령이 슬그머니 몸을 앞으로 들이밀며 물었다.


“… 음양지체, 만들려고?”
“예?”
“…”

독고령이 현상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현상은 눈을 피하지 않고, 정말 모르는 듯한 눈치였다.


‘… 뭐지, 이게 아닌가?’


무당 또한 천하제일인 하나 만들어서 팔자 좀 펴보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그럼 너네는 보타문에  가는거냐?”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엉?”

독고령이 인상을 일그러뜨리자, 현상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상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 정말입니다. 장문인께서 그 아이를 불쌍히 여겨 용태를 살피라고  것이 다입니다.”
“가서 뭘 보고 오라고 하디?”
“그냥 용태를 살피고 오라고  게 전부입니다.”
“쓰읍…”


독고령이 입 맛을 다셨다.


‘아이씨… 뭔가 찝찝하네.’

어딘가 해소되지 않은 애매함이 독고령을 짜증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현상을 두들겨도 더 이상 아무 것도 안 나올 듯 하자, 독고령은 결국 포기했다.

‘… 가보면 알겠지.’


그녀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을듯 하자, 현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 청운.”
“예, 누님!”
“누님 소리는 좀 빼자.”
“예!”

독고령이 다리를 건들거리자, 청운이 알아서 엎드리고는 그녀에게 등을 건넸다.

자연스레 청운의 등 위에 다리를 올리는 독고령을 보고 현상의 입이 벌어졌다.

“그… 무… 무슨…”
“다리가 불편해서. 한동안 이거 대신 해주는 애가 있었는데 이번에 갔거든.”
“아니…”
“뭐?”
“…”

현상이 독고령 몰래 청운에게 전음을 보냈다.

[미안하구나, 사제. 내가 힘이 없어서 네가…]
[아닙니다, 사형. 그리고 이거…]

현상은 순간 보면  될 무언가를 보고 말았다.


[… 은근히 좋습니다. 뭔가 중독될 것만 같습니다. 으헤헤…]

“무량수불… 무량수불…”

현상이 깊은 한숨과 함께 도호를 나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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