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14장. 세대교체 - (12)
심법을 쌓을수록, 전장에서 전투를 거듭할수록 마음은 굳건해진다.
명상과 운기조식은 부동심을 유지시켜주고, 평상시에 쌓은 평온은 평정심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독고령은 과거부터 광증에 시달렸기에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다가, 지금의 상황은 그녀의 인지를 넘어선 최악의 상황이었다.
“으아아…”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을 음탕하다 여길까 조금만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멍청아… 이 음탕한 년아…!’
순간의 쾌락에 빠져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저질러 버린 게 후회되었다.
속곳을 입고 난 뒤에도 도저히 밖으로 나가 다른 이들의 얼굴을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아 마차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계해야할까 고민하고 있던 와중.
딸칵.
마차의 문이 열리며 은관영이 들어왔다.
“… 나가.”
“음탕하셔라.”
“캬아아악!!!”
“위 오빠랑 둘이 갈 때부터 알아 봤어야하는데 말이죠오…”
“다… 닥쳐엇!!!”
“그런 취향이 있으신지는 몰랐어요오. 저는 이해한답니다?”
“아… 아니야!!”
“헤헷.”
은관영이 히죽거리며 독고령의 맞은 편에 앉았다.
“어떤 일이 있었나 궁금하긴 한데 이건 여기까지 하고. 어쩌실 거예요?”
“… 뭐가.”
“문주님이 독고 소저랑 무당이랑 만나게 되면 소저의 의견을 물어보랬거든요.”
“… 엉?”
“소저가 상관없다고 하면 옆에 두고 감시하고, 보기 싫다고 하면 잠시 일행에서 떨어져나와서라도 무당을 지켜보랬어요. 계획대로라면 내일 즈음 만날 예정이었는데 일찍 마주쳤네요오.”
그 말을 듣자, 독고령이 물었다.
“서… 설마… 냇가에서 만난 것도…”
“그걸 의도한 건 아니었고요. 원래라면 훨씬 자연스러운 만남이었을텐데… 하… 아무튼 지나간 일은 넘어가면 좋겠어요오. 결과적으로 다 괜찮잖아요?”
“난 안 괜찮아!!”
“그건 독고 소저의 업보구요, 헤헷.”
은관영이 웃어넘기자, 독고령은 머리를 감쌌다.
“으으… 시발시발시발…!”
“고민하시는 거예요?”
“어. 너를 죽이면 하오문주가 얼마나 화를 낼까 고민 중이야.”
“… 무서운 농담도 다 하시네요오.”
혹여나 진심인가 싶어서 은관영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래, 농지거리는 여기까지만 하고.”
독고령이 표정을 바로하며 물었다.
“이해가 안 가는게 있는데 하오문주가 왜 무당을 신경쓰지?”
“검후랑 무당파 사이에 은밀한 교류가 있어서요.”
“엥?”
“소저가 처음에 위 오빠랑 했던 계약 기억나요?”
“처녀랑… 아, 보타문에 구양신공…”
“네. 거기 있는 검후의 제자가 특이한 체질이더라고요.”
“응?”
“절맥인데… 양기도 많아요.”
“… 그게 가능해?”
독고령은 순간 자신이 잘못들었나 싶었다.
극음의 기운이 넘쳐 세맥을 얼려버리는 게 원인인 절맥증을 앓으면서 양기를 동시에 한 몸에 가지고 있다니.
‘… 어?’
그 얘기를 듣자, 저절로 생각나는 단어가 독고령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 무당파 개파조사인 장삼봉 진인이 음양지체랬나? 극양과 극음의 기운을 태극으로 조화한…”
“맞아요.”
은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주님께서는 보타문과 무당파가 협력하여 음양지체를 만들어내려고 할까 걱정하고 있어요.”
“… 음양지체가 그렇게 위험… 하겠네.”
독고령은 음양지체가 대단해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냐고 비웃으려고 했으나 얼마전 자신이 익힌 절기, 일영기가 떠올라 말을 바꿨다.
단순히 음과 양의 기운을 한 곳에 담아 내뿜는 것만으로도 산을 자르고, 바다를 가를 수 있었다.
물론 무공에 대한 조예가 어느정도 있어야 하겠지만, 무당이 어디인가?
천하제일 도가 검문.
남궁세가와 오랫동안 천하제일 검문을 놓고 싸운 역사와 전통이 있는 문파였으니 자질이 충분한 이를 키운다면 고수로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듯 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독고령은 당문이 떠올랐다.
“이 놈의 새끼들은 다 생각하는 게 비슷하네.”
“네?”
“당문 새끼들도 천하제일인 만들어서 떵떵거리겠다고 독인 만드는데 피를 흘리더니… 무당 새끼들도 왠지 비슷하단 느낌이 든단 말이지.”
“… 무당은 훨씬 정도에 가까운데요?”
“지랄.”
독고령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 개새끼들이 정도에 가깝다? 본산의 그… 무진이었나? 그 새끼랑 허산진인 정도라면 이해할 수 있지만, 속가 새끼들은 다 쓰레기였어.”
“아… 독고 소저의 춘부장 잡기 위해서 강호 전체의 속가 제자들이 모인거요?”
“그래, 시발.”
독고령은 그 때를 떠올리자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처음에 찾아왔던 속가 제자놈들은 그래도 싹수가 있었다.
당당하게 찾아와, 이름을 밝히고, 무슨 연유로 독고진에게 도전하는가를 떳떳히 이야기하며 1:1 대결을 신청하였다.
그런 싹수 있는 놈들을 상대로 독고진은 목숨만은 거두지 않고 살려보내줬다.
속가제자와 본산의 관계는 마치 자식과 지아비 같은 관계라고 하였기에 가족의 복수를 위해 당문을 쫓는 독고진 또한 그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했고, 본산에서 저지른 무례에 대한 벌을이렇게라도 받는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속가제자들을 격파하면 할수록… 질 나쁜 이들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아비가 호랑이라고, 그 자식 또한 호랑이일수는 없는 법이었다.
몰래 술에 독을 타두는 녀석, 일부러 목욕을 즐기거나 변소에 들리는 순간을 노려 덮쳐드는 놈들, 살수를 고용하여 대신 복수행을 요청하는 놈들, 양민들 사이에 숨어 덮치는 녀석들까지.
결국 짜증이 머리 끝까지 솟구친 독고진이 피바다를 만들고 나서야 속가 제자들의 습격이 멈췄고, 이 일을 계기로 독고진은 그냥 광마가 아닌 ‘추혈광마’가 되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길을 잘못 든 무인 정도로 평가 받았다면, 그 날 이후로는 완전히 사마외도의 무리로 판명받으며 결과적으로 당문이 독고진을 위협하는 데 정당성을 얻으며 훨씬 음침하고, 지독하게 추격을 받게 되었다.
‘시발… 결국 내 잘못이긴 한데 생각할수록 개같네.’
그 때를 다시 떠올리자 독고령은 스멀스멀 짜증이 일기 시작했다.
호쾌한 전투 따윈 없었다.
약자를 괴롭히는 취미도 없는데 밀려드는 약자들과 음침한 살수들의 습격들이 떠오르자 독고령이 유성도를 붙잡았다.
“생각해보니 빡치네, 저 개새끼들. 본산은 속가의 지아비라매, 시발. 애새끼가 잘못했으면 본산이 좀 쳐맞아도 되는 거 아니야?”
“아아아!! 참아욧!! 좀!!”
“아잇… 놔 봐. 그냥 좀만 때릴게!”
“위 오빠 부를 거예욧?!”
“…”
위일청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독고령은 끓어오르는 짜증을 잠시 억눌러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후우…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에요? 독고 소저가 결정하셔야죠.”
“…”
“소저가 싫다고 하면 제가 무당파를 뒤쫓는 감시조에 합류할 거예요. 소저가 괜찮다고 하면 이대로 태극삼검에게 목적지가 같으니 같이 가자고 권유할 거고요.”
“쓰읍…”
독고령은 잠시 은관영의 표정을 살폈다.
“… 넌 뭘 선택해도 괜찮아?”
“하오문의 소문주로서 뭐든 상관없답니다?”
“니네 문주 말투 따라하지 말고. 은관영한테 묻는 거야.”
“흐엑?!”
은관영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독고령을 쳐다보았다.
“… 저 배려해주시는 거예요?”
“배려까지야. 그냥 내 선택에 내가 아닌 남의 행동이 결정되니깐 당사자한테 묻는 거지.”
“사매…”
“지랄 말고. 내가 이 놈의 월영신공 도중에 때려치워버리든가 해야지, 진짜.”
“헤헤… 알았어요. 사매라고는 안 할게요오.”
“들러붙지 말고!”
“으히히, 독고 소저어~.”
“캬아아악!!”
은관영도 백리소현을 닮아가는건지 질척거리는 그녀를 독고령이 떼어냈다.
“빨리 말해!”
“… 제 개인적인 입장은 솔직히 소저가 그냥 승낙해주시는 게 편하죠.”
“그럼 그렇게 해.”
“지… 진짜요?!”
“그 새끼들이 헛짓거리 하는 것도 내가 옆에 있어야 조질 수 있는 거지. 어차피 다 존나 약하니깐 상관없어.”
“… 의도가 불순하긴 한데 소저가 괜찮다고 하니 다행이네요오.”
“다른 새낀 몰라도 청운 맞나? 그 막내 새끼는 내가 자주 다져놔야겠네. 노극명 사라져서 아쉬웠는데 또 팰만한 새끼가 알아서 들어오니 좋네.”
“…”
은관영이 지금이라도 그녀의 선택을 물릴까 고민되기 시작했다.
“여튼. 결정됐으니 나가자.”
“으엑… 자… 잠깐만요!”
쾅!
마차의 문을 박차고 독고령이 나오자 모닥불 주변에 모여있던 이들의 이목이 쏠렸다.
“… 소소는 어디가고?”
대답은 뒤따라 나온 은관영이 했다.
“마차 여행이 피곤했는지 자러 갔어요. 소현 언니 품에서 잠들어서 언니가 남궁세가의 마차로 갔고, 창천오검 분들이 노숙하기로 했고요.”
은관영이 옆을 가르키자, 남궁세가의 마차 근처에 있던 창천오검 중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독고령에게 인사했다.
“… 그렇구만.”
“…”
모닥불에 모인 태극삼검과 위일청은 독고령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운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는듯한 눈초리였으나, 옆에서 맏이인 현상이 도끼눈을 뜨고 그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 일청.”
“네, 령. 마음은 좀 진정됐나요?”
“… 아무 일도 없었어요.”
“예?”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쵸?”
“… 예. 아무 일도 없었죠.”
독고령이 일부러 뚝뚝 끊어서 말하자, 위일청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런 위일청의 배려에 감사하며 독고령이 말했다.
“그… 일청. 잠시 안에 들어갈래요?”
“… 태극삼검 분들과 얘기할 게 있나요?”
“네.”
“안 때리겠다고 약조하시면 들어가지요.”
“… 상황 봐서요.”
“하아… 제가 들으면 안 되는 내용입니까?”
“그건 아닌데… 들려주고 싶지도 않아요…”
“…”
위일청이 잠시 고민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독고령의 손을 붙잡았다.
“령.”
“네, 일청.”
“정 때려야겠다 싶으면 세 번 참고 난 뒤에 그래도 화가 나면 저를 불러주세요. 제가 대신 화를 풀어드릴테니깐요.”
“흐엑?! 사… 사람 많은데서 무슨 말을…!”
“저는 그런 의도는 아니였는데요?”
“아… 흐아아…”
독고령이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자, 위일청이 피식 웃었다.
“크큭, 아무튼 얘기 잘 하길 바랍니다. 령.”
“ㄴ… 네에…”
“저도 비킬까요오?”
“어, 같이 가.”
“네에.”
독고령을 지나치며 은관영과 위일청이 자리를 피해주자, 그녀가 모닥불 옆에 앉았다.
생각보다 온화한 그녀의 분위기를 보며 태극삼검의 맏이, 현상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위 공자님과 사이가 좋으십니다. 정인이십니까?”
“… 쳐.”
“예?”
웃는 낯에 침을 뱉는 인간이 있으리라 싶어 현상은 다시 한 번 웃으며 말을 건넸지만, 독고령은 기어이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닥치라고, 콱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