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14장. 세대교체 - (9)
한참 뒤, 술 동이를 반절 이상 비운 뒤에서야 독고진은 은약벽을 불렀다.
“… 하오문주.”
“예, 손님.”
“허산진인은 일반인이다. 무공을 배운 적이 없어.”
“그렇군요.”
“태극삼검은 셋이서 남궁진 맞나? 그 새끼를 못 이길거다. 약해.”
“셋 다 제압하셨나요?”
“반시진(1시간)만에 그 중 가장 뛰어난 이가 내게 무릎을 꿇더군.”
“그렇군요.”
“…”
“…”
둘 사이의 대화가 끊겼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던 와중,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독고진이었다.
“… 하오문주.”
“예, 손님.”
“차를 내어주더군.”
“예?”
“… 들어가서 깽판을 쳐놓았는데, 그 새끼들은 내게 차를 내줬어.”
“… 그런 일이 있었나요?”
“그래. 나는 그게 전혀 이해가 가질 않아.”
“어째서요?”
쾅!
독고진이 주먹을 내리치며 말했다.
“뺨을 맞으면, 그 손을 자르고! 지랄을 하면, 그 혀를 뽑고! 그게 무림 아니였나?!”
“…”
“근데 그 개새끼들은 그러질 않았다고!!”
“그게 불편하신가요?”
“불편해.”
독고진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존나, 미친듯이, 좆 같고, 불편해.”
“…”
뚝뚝 끊어서 힘주어 말하는 그를 보고, 은약벽이 말했다.
“어린 제자가 있었나요?”
“… 뭐?”
“어린 제자가 있었냐고요.”
“… 있었다. 어떻게 알지? 지켜봤냐?”
“아니요. 하지만 무당의 아픔은 알고 있죠.”
은약벽이 술 잔을 들어올리더니, 독고진에게 뻗었다.
“저도 한 잔 주시겠어요?”
“…”
독고진이 그녀의 술 잔을 받아, 동이에서 술을 떠다 건네주었다.
은약벽이 술을 들이키고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으으… 이런 걸 뭐가 좋다고 마시는지 참.”
“네가 파는 거 아니냐?”
“파는 사람이 꼭 술 맛을 알아야할 필요는 없지요. 저는 역시 과일주가 좋네요. 백주는 도저히 익숙하지가 않아요.”
은약벽이 술잔을 내려놓고는 독고진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무당이 마교에게 당했다는 얘기는 했었죠?”
“…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들었다.”
“아마 지금의 태극삼검과 허산진인은 그 겁난을 모두 지켜보았겠죠.”
“…”
“저도 직접 본 적은 없고 어디까지나 전해들은 얘기지만… 마교의 침공은 무시무시했다네요.”
은약벽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식었다.
“일대제자들은 강하니깐… 마교는 집요하게 어린 삼대제자들을 노렸다더군요.”
“… 쓰레기 놈들이군.”
“붙잡은 삼대제자들의 다리 힘줄만 자르고는 다시 풀어줬대요.”
“… 뭐?”
“그럼 짐이 되니깐요. 일대제자들은 삼대제자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버틸 수 밖에 없으니깐… 그러니깐 그렇게 했다더군요.”
“…”
그 말을 듣자 독고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건드리면 멀쩡한 다리까지 부러질테니깐.]
[시주. 이 곳이 어딘지 모르고 하는 말이오?]
무진과 나눈 대화가 그의 가슴을 쿡쿡 찔러댔다.
“마교는 길만 비켜주면 살려주겠다고 했는데 무당은 백도 무림의 자존심이니깐… 끝까지 무당산을 사수했다더군요. 그 결과…”
은약벽이 허탈한 듯 피식 웃었다.
“무공을 배우지 못한 장문인이라… 도문으로서 무당파는 유지되겠지만, 검문으로서 무당파는 죽었군요.”
“…”
독고진은 문득 그 격전지가 해검지란 생각이 들었다.
수없이 많이 꽂혀있던 그 송문검들은 정녕 무덤이었다.
검의 무덤이자, 무당파를 사수하던 도사들의 무덤이었다.
“… 시발.”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자, 독고진은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괜히 술에서 깰 것만 같아 독고진이 다시 동이에 고개를 쳐박고 술을 들이켰다.
“크으… 시발!”
“… 그렇게 괴로우신가요?”
“괴로워? 내가?”
“아닌가요? 마치 스스로 벌주를 들이키시는 것만 같은데요?”
“…”
독고진이 손으로 마른 세수를 몇 번 하고는 입가의 술을 닦아내며 말했다.
“차라리 무당이 다른 좆같은 새끼들과 같았으면 이렇게 찝찝하진 않았겠지.”
“…”
“시발. 좆 같은 새끼…”
은약벽은 그의 욕이 누구에게 향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욕을 하라고…”
독고진이 조금씩 흐느끼듯 어깨를 떨었다.
“시발…”
쿵.
결국 술기운을 이기지 못 한 독고진이 바닥에 엎어지자, 은약벽은 그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복수를 하고자 하는 이가 이렇게 여려서야… 보는 제가 다 안타깝네요.”
은약벽은 괴로운 듯 거친 숨을 내쉬며 바닥에 쓰러진 독고진을 보고 안타까웠다.
“… 무림이 모두 똑같지는 않겠지요. 그걸 뒤늦게 알아차리셨나요?”
대답없는 독고진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며 은약벽은 또 한 번.
독한 백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하지만… 손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편하게 만들어 드릴게요.”
독고진의 퍼석퍼석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은 뒤, 은약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총관.”
“예, 문주님.”
“무당의 속가제자들에게 정보를 파세요. 광마가 무당의 본산을 습격했다고.”
“… 속가제자 중엔 강한 이들도 있습니다.”
“상관없어요.”
은약벽이 쓰러진 독고진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손님이 그걸로 편해질 수 있다면… 그 또한 필요한 일이겠죠.”
“… 존명.”
총관이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은약벽은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그래요. 거짓말 한 번 했어요. 용서해주실래요?”
“…”
“힐난도 없네요. 천지신명은 무슨.”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기에 은약벽은 하늘을 비웃으며 내실을 나섰다.
*
쓰러진 태극삼검의 막내를 쳐다보며 독고령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 이렇게 약할 리가 없는… 데…”
“몰라욧! 독고 소저가 강한 거겠죠!!”
“… 얘 이름이 뭐야?”
“청운이요.”
“…”
허, 무, 현, 청 순으로 배분이 돌아가니 어느새 독고진이 상대했던 무진의 뒤로 현자 배와 청자 배가 지나간 셈이었다.
사실상 무진의 사손 격에 해당하는 이였으니 이리 약한 것도 이해가 갔다.
무당의 무학은 대기만성의 무학.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강해지는 것인데 배분도 낮고, 나이도 어리니 아직 약한 게 당연했다.
‘근데 이 새끼가 배분도 딸리면서 어디 일청한테 싸가지 없이…’
그의 배분을 따지기 시작하자 독고령은 아까 청운이 보여준 거만함이 떠올랐다.
괜히 한 대 때려서라도 깨워버릴까 고민하던 와중, 그녀의 기감에 무언가 잡혔다.
“… 두 명.”
“네?”
은관영이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묻자, 독고령이 말했다.
“진짜 태극삼검 맞나보다. 두 명 더 오네.”
“그게 무슨…”
은관영 또한 다가오는 두 명의 기척을 느꼈는지 도중에 말을 멈추고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잠시 후, 두 명의 도사가 나타났다.
“… 만나서 반갑소, 강호의 동도분들. 본 도는 무당파에서 나온 현상이라고 하오.”
“얘는 좀 싸가지가 있네. 그치?”
“좀 닥쳐욧, 독고 소저!!”
은관영이 독고령의 입을 틀어막자, 위일청이 앞으로 나서 인사를 받았다.
“…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위일청이라고 합니다.”
“아… 옥면공자셨구려. 만나서 반갑습니다.”
현상이 자신과 함께 온 이를 소개했다.
“이 쪽은 제 사제인 현천이라고 합니다. 과묵한 이라 입을 잘 열지 않으니 너무 괘념치 않으셨으면 합니다.”
“… 만나서 반갑소.”
현상이 웃으며 위일청의 인사를 받자, 분위기가 조금은 가벼워진 듯 했다.
“그리고 거기 쓰러져 있는 놈까지 합쳐서 태극삼검이라 불린다오. 옥면공자께서는 무슨 연유로 우리 막내를 데리고 있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 오해가 있었습니다.”
“하아…”
어떤 오해인지 따져 물으리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현상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인지 말하기 전에 일단 사죄하오. 저 놈도 그렇고, 본 도도 그렇고 강호를 돌아다닌 경험이 일천하여 예를 잘 모르오. 특히나 청운은 그… 자존심이 높은 지라 가끔 엇나간 말을 하는 경우도 있소.”
“…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저희 쪽에도 성정이 불 같은 일행이 있다보니 별 거 아닌 이유로 괜한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위일청이 웃으며 독고령을 쳐다보았다.
“령.”
“…”
“령, 나와서 사과하시죠.”
“… 저 새끼가 먼저 색마라고 일청을 욕했잖아요…”
“그리고 저 쪽도 그 무례를 사과했죠. 이따 청운 도사가 깨어나면 따로 사과를 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사과하시죠, 령.”
“싫어요.”
독고령이 위일청의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나는 애초에 일청이 왜 이러나 이해가 안 가요.”
“예?”
“저 새끼들 앞으로는 다 사과니 뭐니 해놓고 뒤로는 개지랄을 떠는 새끼들이라고요. 그냥 이 참에 죄다 반 쯤 죽여…”
“… 은 소저.”
“넵!”
뒤에서 은관영이 독고령을 붙잡으려하자, 역으로 독고령이 그녀를 제압하곤 현상에게 다가갔다.
“내가 저 새끼들을 그냥…”
하지만 그 때, 위일청이 독고령을 막아섰다.
“나와봐요, 일청. 내가... 하으윽!”
위일청이 자신의 등으로 현천과 현상의 시선을 가리고는 독고령의 젖꼭지를 꼬집었다.
“… 도사님들을 부탁합니다. 제가 잠시 타이르고 오겠습니다.”
“네에.”
“령, 잠시 마차 안으로 들어갑시다.”
“시… 싫어요!”
독고령이 가슴을 가리며 반항하자, 위일청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여기서 계속 할까요?”
“아… 아니이…!! 진짜아…! 잘못한 건 저 새끼들인데…!!”
“알았습니다.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죠.”
“…”
독고령이 투덜대며 마차 안으로 들어가던 와중, 현천과 현상을 쳐다보며 으르렁댔다.
“튀기만 해 봐. 내가 지옥 끝까지 쫓아가… 흐윽!”
“빨리 올라가세요.”
“ㄴ… 녜헷…”
마차 안에 들어간 두 명을 보며 현천이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 못 하고 도호를 연신 되뇌였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 차라도 드실래요?”
“주시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네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은관영이 화섭자를 이용해 재빨리 모닥불을 만들고는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독고령과 위일청이 들어간 마차 안은 참으로 고요하기 그지 없었다.
위일청이 기막을 펼쳐둔 덕에 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으나 가끔씩 마차가 들썩이자 말들이 투레질을 하곤 했다.
그러기를 한 다경 정도 지난 이후, 마차의 문이 열리고 위일청이 나왔다.
마차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어딘가 후끈한 열기와 야릇한 향기가 현천과 현상을 자극했으나 위일청의 입가에 걸린 시원한 미소에 둘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도사분들. 여기 독고 소저가 할 말이 있다고 하네요.”
위일청의 뒤를 따라 독고령이 밍기적밍기적 밖으로 걸어나왔다.
흐트러진 분홍머리와 옷 매무새.
어딘가 불편한 듯 팔자 다리를 하고, 가끔씩 간헐적으로 어깨를 떨며 독고령이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흐읏…!”
땅에 발이 닿는 순간, 독고령이 흘리는 야릇한 신음소리에 현천과 현상은 얼굴을 붉혔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가에 약간의 물기까지 머금은 채 독고령이 부들거리며 말했다.
“죄… 죄송…”
“령?”
“헤흐윽…!”
“목소리가 너무 작네요.”
“ㄴ… 녜헷…”
위일청의 손이 독고령의 엉덩이 뒤로 향하자, 그녀가 야릇한 미소와 함께 다시 말했다.
“뎨… 뎨송합니다앗…”
“크흠… 크흠… 아무것도 아니오…”
그녀의 사과에도 현천과 현상은 차마 독고령과 눈을 못 마주치고 연신 헛기침만 해대며 속으로 도호를 되뇌였다.
‘무량수불… 무량수불…’
그러면서 동시에 위일청의 또 다른 이름을 떠올렸다.
색마.
참으로 어울리는 별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