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14장. 세대교체 - (8)
갑자기 민망한 신음소리가 튀어나오자, 무당의 도사는 얼굴을 붉혔다.
“허… 거 참… 이런 곳에서 다…”
“귀… 귀 막아, 새끼… 하으읏!”
“령, 말을 조금만 더 곱게하고, 일단 진정하시죠.”
“녜… 녜헷…”
독고령이 다리가 풀려 자리에 주저앉자, 위일청이 싱긋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시만 얌전히 계세요.”
“…”
위일청이 냇가에 다가가 무당파의 도사를 쳐다보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도사님? 초면에 조금 민망한 일이 있었네요. 저는 위일청이라 합니다.”
“아… 강호에 이름이 높은 색마 시주셨구려.”
“저…!”
독고령이 발끈하여 달려드려던 순간, 위일청이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가 다시 얌전해지자, 위일청은 도사에게 손짓했다.
“… 계속 얘기하세요.”
독고령이 수그러들자, 위일청이 가식적인 웃음은 지우고 얼굴을 굳혔다.
“이런 사람이 다니지 않는 산골에서 민망한 짓을 한 것은 이해하고 있으나 그를 훔쳐보는 일 또한 도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훔쳐보진 않았소.”
“그럼 왜 기척을 숨기신겁니까?”
“수련 중이요.”
덤덤하게 말하는 무당파의 도사를 보고 독고령은 화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저 싸가지 없는 말코 새끼가…!’
독고령은 위일청의 허락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그를 조져놓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 수련이라 하심은 무슨 뜻인가요?”
“우리 무당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오? 태극의 조화, 더 나아가서 만물과의 조화요. 그러니 항상 어디에도 동화되고자 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기척을 숨겨버렸소.”
“그렇군요. 일상에서도 도를 찾는 모습이 참으로 도인답습니다.”
“별 말씀을.”
개짓거리를 해놓고도 여전히 사과를 하지 않고 나 몰라라 하는 모습이 참으로 무당파답다 생각하며 독고령이 위일청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조질까? 일청한테 미움받긴 싫은데…’
말코 도사 하나 조지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나 그 후폭풍이 두려워 독고령은 망설이고 있었다.
저런 아무 것도 아닌 놈 하나 때문에 일청에게 미움받긴 싫었다.
하지만 그 때, 도사가 입을 열었다.
“헌데 말이오…”
“예.”
“내가 이 곳까지 오면서 기이한 소문을 들었는데 혹시 두 분이 그 소문의 주인공이오?”
“… 무슨 소린지 잘…”
“화화공자와 함께 다니는 복숭아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산적들을 소탕했다 들었소. 헌데 그 검술이 사이하기 짝이 없어 ‘음란검’이란 명호를…”
도사의 말이 튀어나오는 순간, 위일청은 기겁하며 독고령을 쳐다보았다.
“려… 령!! 잠깐 진정하고…”
“캬아아악!!!”
쏜살같이 튀어나간 독고령을 위일청은 막을 수 없었다.
무당파의 도사에게 달려드는 독고령을 보며 위일청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아…”
빠악-.
조용한 냇가에 타격음이 울려퍼졌다.
“령…”
“… 네, 일청.”
“… 저도 멸칭으로 불려봐서 이해합니다. 들으면 화나죠.”
“…”
“하지만 상대를 조금 살피고 나서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산적을 잡으면 영웅이라 칭송받지만, 무당파를 공격하면…”
“이… 일청…!”
당황한 독고령이 그의 말을 끊고 변명을 쏟아냈다.
“이… 이 새끼, 무당 아닐수도 있어요!”
“… 송문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천하에 송문검을 지니고 다니는 도문은 무당파 뿐입니다.”
“보… 봉문 중이잖아요!”
“외유 중이거나 속가제자겠죠.”
“자기 소개를 안 했어요!”
“… 그걸 하기도 전에 먼저 후려치지 않았습니까, 령?”
“…”
더 이상 변명할 거리가 궁하자, 독고령이 고개를 떨궜다.
“… 미안해요, 일청.”
“하아…”
그의 한숨이 독고령의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혹여나 미움받지 않을까?
왜 자신의 성정은 이따구일까?
후회가 물씬 올라오며 독고령이 답답함을 느낄 무렵, 위일청의 손이 그녀의 머리에 올라왔다.
“…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요. 일단 돌아가서 은 소저한테 사정을 설명하고 잠시 마차를 세워둡시다.”
“… 미안해요.”
“괜찮… 지는 않지만, 어쩔 수 있습니까?”
위일청이 풀이 죽은 독고령을 위로하듯 웃음을 내비쳤다.
“령이 그런 줄 알면서도 사랑하니깐요.”
“하으으…”
위일청의 위로를 듣자, 독고령의 가슴이 쿵 하고 뛰었다.
무심결에 그의 품에 독고령이 와락 뛰어들자, 위일청이 웃으며 그녀를 받아주었다.
“크큭… 돌아갈까요?”
“… 네.”
위일청이 왔던 길을 돌아가자, 독고령이 쓰러진 도사의 발을 붙잡고 질질 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위일청이 그녀를 멈춰세웠다.
“… 저 도사는 제가 업겠습니다.”
“괘…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 그 문제가 아니라 그렇습니다.”
“… 네.”
위일청이 도사를 어깨에 들춰매자, 독고령은 이를 갈았다.
‘쓸모없이 허약한 말코새끼.’
괜히 기절해서 위일청을 고생시키고, 그의 팔을 붙잡기도 애매하게 만들자 독고령이 가진 원한이 조금은 더 깊어졌다.
“…”
“…”
마차로 돌아온 위일청이 기절한 도사를 업고오자 은관영과 백리소현이 자연스레 독고령을 쳐다보았다.
“뭐?! 왜?! 그래! 내가 했다! 어쩔래?!”
“… 소현 언니.”
“응.”
“소소 아가씨를 데리고 창천오검 분들이랑 같이 계셔요오. 괜히 공범으로 인식되면 남궁세가가 곤란해질테니깐요오.”
“그래.”
“하아… 진짜…”
백리소현이 남궁소소를 데리고 뒤따라오던 창천오검의 마차로 향하자, 은관영이 한숨과 함께 위일청에게 물었다.
“… 위 오빠.”
“네, 은 소저.”
“말리셨죠?”
“… 예.”
“하아…”
은관영이 쓰러진 무당파의 도사를 살펴봤다.
“… 독고 소저.”
“왜?”
“… 무당파는 아시죠?”
“알지.”
“알고 때리셨어요?”
“내가 언제 사람 가리디?”
“…”
은관영이 고개를 푹 떨구고는,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무당이 어디 그저 그런 소형 문파도 아니고!! 어쩌려고 그러셨어요?!!!”
“… 귀 따가워.”
“아잇, 진짜아…!! 왜 일을 더 만들어 오고 그러세욧!!”
“…”
“이러다 아주 그냥 소림도 건드리시죠!! 그냥 구파일방이랑 오대세가 다 순회돌면서 전부 난리도 치고, 깽판도 치고, 현판도 부수고 하세욧!! 으갸아아악!!!”
은관영이 이성을 잃고 날뛰자, 독고령이 조심스레 그녀를 달랬다.
“… 야야. 잘 생각해봐. 이 새끼 무당 아닐수도…”
“송문검 안 보여욧?!!”
“… 그냥 삼대제자일 가능성도…”
“이 사람, 태극삼검이란 말이에욧!!”
“으엑?!”
쓰러진 도사 놈이 무당파의 미래라고 불리는 검수들만 받을 수 있다는 태극삼검의 칭호를 가진 무인이라는 얘기를 듣자, 독고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어? 얘가? 진짜?”
“그래욧!! 태극삼검의 막내란 말이에욧!!”
“아… 아니이… 진짜? 얘가? 이 허약한 놈이 태극삼검이라고?!”
“그아아악!!! 독고 소저가 태극삼검을 어떻게 아는데욧! 저 하오문이라고요!!”
“아… 아닐텐데…”
독고령이 머리를 긁적였다.
“이… 이렇게 약할 리가 없는… 데…”
*
독고진이 한창 그 무명을 떨치고 있을 무렵.
여느 때처럼 무림 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고수를 꺾은 뒤, 호북의 하오문에 들르자 은약벽이 그를 맞이했다.
“오랜만이네요, 손님.”
“… 너는 강호 어디에든 있냐?”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게 제 매력이죠. 후훗.”
갑자기 등장한 은약벽을 보고 독고진이 습관적으로 인상을 구겼지만, 그녀가 꺼내든 술 병을 보자 금세 기분이 풀렸다.
“일단 술 한 잔 드시겠어요?”
“좋지.”
독고진이 자리에 앉아 술 잔을 붙잡자, 은약벽이 그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은약벽이 술을 잘 안 마시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독고진이 바로 술을 들이키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크으으… 그래서. 이번엔 무슨 일인데?”
“무당파를 아시나요?”
“알지. 머리에 이상한 거 쓰고 다니는 말코 새끼들. 크크큭.”
무당의 도사들은 관을 머리에 쓴 모양새가 꼭 말의 주둥아리처럼 생겼기에 ‘말코’라는 멸칭으로 불리고는 했다.
독고진 또한 처음 그 멸칭을 들었을 때 누가 부르기 시작한지는 몰랐으나 참으로 기가 막힌 작명이라며 감탄하고는 했다.
“그래서? 이번엔 걔네 조지면 되냐?”
“음… 손님의 선택에 따라 달라요.”
“엉?”
독고진의 한 쪽 눈썹이 휙 올라갔다.
“웬일이냐?”
“뭐가요?”
“맨날 딱딱. ‘가서 누굴 조지고 오세요.’, ‘가서 뭐를 훔쳐오세요.’ 식으로 명확히 말하더니 이번엔 좀 두루뭉실하다?”
“…”
독고진의 말을 들은 은약벽이 뺨에 손을 얹고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게요. 이번엔 저도 참 애매하네요.”
“뭐가 애매한데?”
“정보가 없으니깐요. 무당은 마교 침공 이후 내내 봉문중이거든요.”
“봉문?”
“집에 틀어박혀서 안 나온단 얘기랍니다.”
은약벽이 빈 서책을 꺼내들었다.
그녀가 서책을 꺼내들자, 이제는 은약벽에게 익숙해진 독고진이 금세 서책을 들여다봤다.
은약벽이 붓을 들곤 서책을 써내려가며 말하기 시작했다.
“흔히들 백도 무림의 태산북두, 소림이 마교 침공을 대비하는 최후의 보루라고들 하죠.”
“그러더군.”
“그럼 제 1 보루는 어디일까요?”
은약벽의 붓이 그려낸 것은 중원의 지도였다.
지도의 가장 왼쪽 상단, 마교가 있을 곳에 동그라미를 치자 독고진은 그 옆을 손가락으로 찍으며 말했다.
“곤륜.”
“맞아요. 그 다음에 제 2의 보루가 되는 곳은요?”
독고진의 손이 조금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며 씹어먹듯이 내뱉었다.
“사천이겠지. 아니면 섬서의 화산이나 종남이거나.”
“그렇죠. 대부분 마교가 거기까지는 어떻게 뚫고 들어가요. 하지만…”
은약벽이 섬서와 사천 옆에 두 개의 동그라미를 그렸다.
“중원으로 가는 곳에 거대한 백도 문파 두 곳이 항상 마교를 막아세우죠.”
“하남의 소림, 호북의 무당이냐?”
“네. 결국 마교는 단 한 번도 중원을 뚫어내진 못 했지만…”
은약벽의 손이 지도의 아래쪽, 호북이 있는 곳에 X자를 그렸다.
“지난 번의 정마대전 때, 무당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죠.”
“무당산에서 검신이 천마를 죽이지 않았나?”
“하지만 무당파는 장문인이었던 ‘태극검선’을 잃고, 그 밑의 장로들도 한 명 빼곤 다 죽었죠. 전쟁에 참가한 일대제자도 몰살당했고, 살아남은 제자 중에 가장 배분이 높은 이가 고작해야 이대제자였죠.”
은약벽이 서책에 살아남은 장로의 이름을 써내렸다.
“살아남은 장로는 ‘허산진인’ 하나 뿐인데… 이 사람은 무인으로서 이름이 드높기보다는 도인으로서 이름이 드높은 사람이에요. 자연스레 허산진인이 장문인의 자리에 올랐죠.”
“그래서, 이 긴 설명을 왜 하는거냐?”
“이게 무당이 기나긴 봉문을 시작한 이유니깐요. 지금 무당은 무림맹과 속가제자들 외에는 전혀 교류가 없어요.”
“봉문이면 그냥 조용히 살겠다는건데 무시해도 되지 않냐?”
“균형을 잡아야해서요.”
“균형?”
“제가 꾸미는 일은 세력 간의 균형이 참 중요하거든요.”
은약벽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근데… 지금 무당파의 무위가 가늠이 안 되네요.”
“그럼 그냥 내가 가서 확인하고 오면 되잖아?”
“잘못해서 손님이 죽기라도 하면 곤란하거든요.”
“내가?”
독고진이 으르렁거렸다.
“당가와 모용의 개새끼들을 죽일 때까지 내가 죽을 거 같냐?”
“상대는 무당이니깐요.”
은약벽이 독고진에게 고개를 가까이하며 속삭였다.
“손님, 대형 문파가 왜 대형 문파인지 아시나요?”
“돈이 많아서?”
“사람이 많아서요. 역사가 길수록, 그 문파와 관련된 사람이 많아지고, 그게 곧 강호의 영향력이 되는 거랍니다. 그리고 무당은… 곤륜, 소림과 함께 강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문파예요. 이게 뭘 뜻할까요?”
“쳐죽일 놈이 존나 많다?”
“…”
“됐어. 복잡한 고민따윈 하나도 쓸모없지.”
독고진이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장문인, 장로들, 일대제자까지 다 죽었다며? 그럼 군소문파랑 비슷한 거 아니야?”
“그걸 모르겠어요. ‘허산진인’의 무위는 아무도 몰라요. 외유한 적이 없으니깐요.”
“결국 내가 가면 해결될 문제군.”
독고진이 팔짱을 끼며, 거세게 콧김을 내뿜었다.
“언제나랑 똑같지 않냐? 가서 들쑤시면 네가 알아서 정보를 줍고, 뿌린다.”
“… 그렇긴 하죠.”
자신의 고민거리를 이해하지 못 하고 언제나처럼 당당하게 헤집고 오겠다고 선언하는 그를 보며 은약벽은 피식 웃었다.
“왜 웃냐?”
“손님은 참 한결 같으셔서요.”
“… 여튼. 가서 무당을 헤집고 나오면 되냐?”
“네. 가능한 화려하면 좋고요.”
“목표로 할 놈은 누구냐?”
“태극삼검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을 거예요. 차기 장문인이 될 가장 유력한 후보들이기에 장로들이 직접 선정하거든요. 그리고… ‘허산진인’과도 대면할 수 있으면 좋고요.”
“장문인이라…”
독고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허산진인이 만약 어지간한 구파일방 장문인의 무력과 같다면 그 말은 즉슨… 드디어 당정, 모용벽 그 두 개새끼들과 같은 급에 올라섰다는 말이었다.
‘조만간이군… 개새끼들…’
흥분한 독고진의 내공이 일렁거리자, 은약벽이 그를 제지했다.
“손님, 조금 진정하시죠.”
“진정? 진정은 무슨!!”
독고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헤집고 오지! 아… 술은 내버려둬.”
독고진이 씨익 웃었다.
“남은 건 돌아와서 마시지.”
“… 그러시죠.”
“크하하핫!!”
무엇이 그리도 기분이 좋은지, 독고진이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밖으로 나갔다.
“…”
내실에 홀로 남은 은약벽은 그의 웃음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다 낡은 서책을 하나 꺼내들었다.
서책을 펼쳐들자 그 곳엔 중원의 지도와 함께 여러 세력과 각 세력의 숫자들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혈교는 당문으로…”
사천에는 혈(血)과 독(毒)이 같이 쓰여있었다.
“마교는 모용으로…”
요녕에는 마(魔)와 벽(壁)이 함께 했다.
“… 만약 무당만 확인된다면…”
은약벽의 눈이 천하를 오시했다.
복잡하게 널려있는 숫자들과 화살표들 너머로 그녀는 무림이 사라진 천하를 꿈꾸며 포근하게 미소지었다.
“때를 기다리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