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14장. 세대교체 - (6)
백리소현과 은관영이 돌아오기까지는 조금 오래 걸렸다.
짐이 많은 것보다는 독고령과 위일청, 둘이서 가질 시간을 배려해주기 위해서였다.
“… 이제 슬슬 들어가면 되겠죠오?”
“그렇겠지?”
이 정도면 충분한 시간을 줬으리라 믿고 백리소현이 문을 열자, 기대와는 전혀 다른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깐 그게 아니라 좀 더 이렇게… 그… 차가운 불이요!”
“…차가운 불이 도대체 뭡니까?”
“아니이… 그… 차가운 불이요! 불이 차갑다니깐요?”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위일청과 독고령이 서로 마주앉아 무언가에 대해 열렬히 토론 중이었다.
백리소현과 은관영이 돌아온 것도 모를 정도로 열중하고 있던 중이었는지 뒤늦게서야 그 둘을 발견한 위일청이 인사를 건넸다.
“다녀왔습니까?”
“… 응. 근데 둘이서 뭐하고 있었던거야?”
“무공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응? 지금?”
“지금 아니면 안 돼.”
독고령이 백리소현을 가르키며 말했다.
“이 참에 니네 둘도 이리 와 봐.”
“…”
사뭇 진지해보이는 표정의 독고령을 보고 백리소현과 은관영이 가져온 짐들을 대충 내려두고는 그녀를 보고 앉았다.
“아까 했던 얘기 기억나?”
“어떤 거…?”
“무슨 얘기요오?”
“… 위일청 담당하는 거.”
“그게 왜 무공이랑 이어지는 건데?”
“검후 때문에.”
“응?”
“검후께서 왜요오?”
백리소현과 은관영이 이해를 못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독고령이 답답한 듯 말했다.
“… 둘 다 검후 만나본 적 없어?”
“나는 전에 위 오라버니랑 같이 만나봤어. 푸근하고, 좋은 분이던데?”
“저도 한 번 만나기도 했고, 이런저런 얘기도 많이 들어봤어요오. 갑자기 검후님은 왜요?”
둘의 반응을 듣고 독고령이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니들은 검후가 어떤 년인지 모르는구나.”
“… 응?”
“검후는 기준이 정말 명확한 사람이야.”
독고령이 바닥에 손가락을 대고는 선을 그으며 말했다.
“어떤 자기 안의 선이 있는데… 이걸 넘으면 철저히 사람을 개무시하거든?”
“아…”
독고령의 말을 들은 세 명은 검후와 황보세가의 가주, 뇌력권존 황보기의 일화가 떠올랐다.
뇌력권존이 한 번 보타문에 들렀던 적이 있었는데 검후가 지금은 만나기 곤란하다고 말했음에도 끝끝내 그 문턱을 밟고 넘는 것을 보고 분노한 그녀가 이후 단 한 번도 권존과 만나지 않은 것은 강호에서 유명한 일화였다.
그 얘기가 떠오르자, 은관영이 물었다.
“… 그럼 그 선만 안 넘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오?”
“하아… 이해를 못 하냐, 왜?”
“…”
“검후의 선이 뭔지 정확히 알아?”
“… 아니요.”
“모르지.”
“그래, 다 몰라. 친하지 않은 이상 잘 모르지. 그런데 선을 넘으면 검후가 어떤 행동을 할 지는 명확하잖아.”
독고령이 주먹을 불끈쥐며 말했다.
“말 안 들으면 힘으로라도 말을 듣게 한다니깐?”
“아…”
“그러고보니깐… 검후 님의 무력은 유명한데 무림 백대고수에도 포함이 안 되어있네요오.”
“검신 영감탱이한테 개지랄했다매. 그런 거 관심 없으니 빼달라고. 그 영감한테 개길 수 있는 사람이 천하에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
“…”
남궁원청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새삼스레 그녀의 고집이 얼마나 강한 지 알 수 있었다.
사뭇 무거워진 장내의 분위기를 환기시키고자 위일청이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전에 그녀와 만났을 때, 저는 전혀 그런 걸 느끼지 못 했습니다.”
“… 전에 언제 만났는데요?”
“… 제자 분을 만나뵈러요.”
“제자만 만났어요?”
“…”
독고령이 위일청을 째려보자, 그가 눈을 피했다.
“… 미안합니다, 령.”
“캬아아아악!!!!”
독고령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광했다.
“이거 봐!! 만약 검후가 이번에도 일청이랑 자겠다고 개지랄떨면 니들은 막을 수 있어?!!”
“… 못 막지.”
“못 막죠오…”
“난 그 개 같은 꼬라지 절대 못 보겠다고!!”
독고령이 주먹을 불끈쥐며 선언했다.
“더 이상 다른 여자가 일청한테 들러붙는 꼴은 못 보겠으니깐, 나도 똑같이 나설거야. 힘으로라도 입 닥치게 만들어야지!”
“… 그래서 위 오라버니랑 무공 얘기하고 있었던거야?”
“어. 니네도 배워볼래, 심검?”
“시… 심검?!”
“그… 그게 실존했어요오?!”
전설에나 나올법한 절기를 당당하게 꺼내자, 백리소현과 은관영이 당황했다.
그 모습을 보며 독고령이 덤덤하게 말했다.
“생각보다 별 거 없어. 진짜로.”
“…”
“일단 양기랑 음기를 딱 모아서… 차가운 불을 만들면 되는데, 일청이 그걸 이해 못 해서…”
“여기까지 하죠. 알고는 있었는데 령은 그냥저냥한 천재가 아니라 천 년에 한 번 나올 기재인듯 합니다. 저 설명을 듣고도 무언가 깨달음을 얻기는 커녕 심마를 얻을 뻔 했습니다.”
“아니, 진짜 쉬운… 하으읏!!”
위일청이 독고령의 옷 위로도 젖꼭지를 정확히 꼬집아 비틀자, 그녀가 흐느적거리며 쓰러졌다.
“… 천천히 합시다, 령. 너무 흥분하지도 말고요.”
“녜… 녜헷…”
다리가 풀린 독고령을 보고 백리소현이 피식 웃었다.
‘… 령 매는 무공은 일류인데 밤일은 삼류인건지, 일류인건지 구분이 안 가네, 크큭.’
괜히 말했다가 그녀가 또 날뛸까 싶어서 속으로만 웃으며.
*
출발할 시기가 임박하자, 일행들은 조금 분주해졌다.
‘… 하오문이 확실히 일을 많이 하네.’
그 중에서도 유독 바쁜 것은 은관영이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빼먹은 짐이 있는지 살펴보고, 보타문까지 찾아가는 길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마차를 빌려오는 일까지 모두 다 은관영이 도맡아서 하는 것을 보자 독고령은 새삼스레 그녀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 저 정도는 해야 하오문의 소문주 하는건가?’
백리소현과 위일청 또한 그런 은관영을 보고 자극을 받았는지 뭐라도 할 거리를 찾아 분주히 움직였다.
백리소현은 주로 다른 일행의 건강을 신경쓰며 약재를 다시 확인하였고, 위일청은 두 여인 사이에서 혹시나 도울 일이 있다면 바로바로 나섰다.
그 모든 광경을 옆에서 가만히 앉아 지켜보고 있자니 괜히 죄책감이 느껴져 독고령이 밖으로 나서려던 차,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며 그녀를 막아섰다.
“음…? 어디 가던 참이였나?”
“영감님. 무슨 일이세요?”
검신, 남궁원청이었다.
“으하핫, 저도 왔습니다. 광마.”
“아… 이제 가냐?”
“예. 가기 전에 얼굴이라도 한 번 비추고 가려고요.”
“… 그렇냐.”
분주하게 출발 준비를 하던 다른 일행들도 나와 서로 인사를 나눈 뒤, 마지막으로 독고령의 차례가 다가왔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운영이었다.
“광마. 전에 인사는 했으니 짧게 하죠, 크큭. 다음에 또 봅시다.”
“오냐. 약속했으니깐.”
“예.”
운영은 언제나처럼 실없이 웃었다.
그 뒤에 나온 노극명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잔뜩 있는 것처럼 보였다.
“… 독고 소저.”
“말한 것들 다 기억하냐?”
“예.”
“그럼 됐다. 다음에 또 보자.”
“… 예.”
노극명이 고개를 숙이며 포권하자, 독고령이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검신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 잘 부탁함세.”
“예. 영감님 등에 태우는 것도 생각보다 재밌었으니 다음에 또 만나요.”
“크큭, 고얀 놈. 소소나 잘 부탁하마.”
“… 안휘성까지요?”
“안휘성까지 갈 필요도 없고, 가는 길에 헤어져도 된다. 내가 네 년을 못 믿어서 본가에 연통을 넣어놨으니 마중을 나올게야.”
“꼭 말을 하셔도…”
“쓰읍!”
검신이 손을 벌떡 들어올리자, 독고령이 또 다시 머리를 맞을까 싶어서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검신의 손에 나뭇가진 없었다.
그의 늙고 주름진 손이 부드럽게 독고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오래 버텼구나.”
“예?”
“노부가 미안하네.”
“… 영감님이 미안할 거 까지야.”
“얼마 전에 말했던 건 잊길 바라네.”
“뭐요?”
“후인이 어쩌고 했던 거 말일세.”
“…”
“괜히 사제의 연이니 그런 것은 신경쓰지 말고, 그대가 마음가는대로 살길 바라네.”
“사제의 연은 무슨… 그냥 잠깐 가르침 받은 건데 스승 노릇하려고 하셨어요?”
“큭… 크큭…”
남궁원청이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몇 번 토닥이다 손을 뗐다.
“괜한 걱정이였나 보구만.”
“정 스승 소리 듣고 싶으면 다음에 찾아오셔서 구배지례 받으시던가요.”
“…”
“오늘 말고, 나중에요.”
독고령의 대답을 들은 남궁원청이 살짝 눈이 커졌다가, 이내 푸근한 미소로 바뀌었다.
“… 예끼, 이 년아. 노인네 좀 그만 괴롭혀라.”
“제가 뭐 괴롭힌다고 했나요?”
“그래. 네 년이 계속 노부를 괴롭히는구나.”
“…”
“소소나 잘 부탁허이. 괜히 이상한 말이나 가르치지 말고.”
“… 눼.”
남궁원청이 남궁소소를 보며 말했다.
“소소야.”
“네, 할아버지.”
“… 저 빨간 언니랑 같이 가면 금방 집에 도착할거다. 가는 동안, 얌전히 지내거라.”
“네.”
남궁소소가 쪼르르 달려와 독고령의 다리에 안겼다.
그 모습을 보고 독고령이 피식 웃으며 남궁소소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가는 길에 또 검 가르쳐줄까?”
“네, 언니!”
“하아… 저저저…”
그 모습을 보고 남궁원청이 걱정섞인 한숨을 내쉬자, 위일청이 웃으며 말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어르신. 제가 사이에 끼어 아무 일 없도록 잘 감시하겠습니다.”
“… 부탁허이.”
“예.”
“그리고 위 공자, 전에 보여줬던 거 말일세.”
“심검 말씀이십니까?”
“… 독고령 저 년이 쓸 줄 아니 잘 배워보게. 정 안 되면 보여달라고도 하고. 자네도 오성이 부족한 것은 아니니 옆에서 지켜보다보면 얻는 게 있을게야.”
“…”
그 말을 듣고 위일청이 곤란한 듯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르신. 가르침을 베풀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뭘 그런 것 가지고. 여튼 소소 좀 잘 부탁하겠네.”
“예.”
남궁원청이 위일청의 어깨를 두들기고는 백리소현을 쳐다보았다.
“소현아.”
“예, 어르신.”
“… 힘내거라.”
“예.”
남궁원청과 백리소현의 대화는 짧았지만, 그 짧은 대화 속에 많은 감정이 담겨있는 듯 보였다.
살짝 눈시울이 붉어진 백리소현을 보며 독고령은 슬며시 미소지었다.
‘… 배운 게 많은가보네.’
남궁원청과 지내면서 다들 많은 것을 배웠다는 생각이 들자, 독고령은 새삼스레 자신 또한 어찌해야하나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 세 명 다 아직은 약해.’
위일청은 가진 내공이 많으니 검술만 해결되면 금세 강호에 무명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다.
은관영 또한 하오문에서 내로라하는 천재 중 하나였으니 시간만 충분하다면 앞날이 밝았다.
백리소현은… 조금 애매했지만, 가진 바 내공도 정순했고 적어도 어중간한 놈들보다는 싹수가 좋았다.
‘… 이 참에 나도 세 명한테 이것저것 가르쳐볼까?’
위일청에게 같이 죽어달라고 자신의 복수에 끌어들인 이상, 나머지 두 명 또한 복수와 무관하다 말하긴 힘들었다.
위일청이 가는 곳엔 결국 백리소현과 은관영 또한 따라올 것이니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독고령은 책임감을 느꼈다.
‘영감님한테 참 많은 걸 배우네.’
강호는 결국 이렇게 이어지는구나 하고 독고령은 생각했다.
선배가 후배에게, 윗 세대가 아랫 세대에게 전달하다보니 어느새 그 수가 늘어 무림이 생긴 게 아닐까 싶었다.
떠나는 검신과 운영, 노극명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독고령이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곤 다른 세 명을 쳐다봤다.
“내일부터 나랑 비무할 사람?”
“네?”
“응?”
“무슨 소리에요오?”
독고령이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 이왕 무림인 할 거면 강한 게 좋잖아? 내가 가르쳐주겠다고.”
“진짜요오?”
“… 왜 그렇게 쳐다보냐?”
은관영이 독고령의 말꼬리를 붙잡곤 늘어지며 히죽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독고령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은관영이 말했다.
“일청~, 여기선 손목을 이렇게 쓰는 거예요. 하면서 위 오빠랑 시시덕거리려는 건 아니구요오?”
“… 정했다. 너는 지금 당장 나랑 비무하자. 생사결로.”
“… 생사결은 비무가 아닌데요?”
“이리 와, 이 년아!! 캬아아악!!”
“꺄아악!!”
독고령이 은관영을 향해 달려들자, 백리소현이 남궁소소의 눈을 조심스레 가렸다.
“소소야, 우린 잠깐 다른 데 가있을까?”
“… 네.”
“위 오라버니, 잘 부탁해.”
“하아… 예.”
남궁소소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후, 위일청은 손목을 돌리며 독고령의 뒤로 접근했다.
잠시 후, 어린 남궁소소에게 들려주기 매우 민망하고, 음탕한 목소리가 처소에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