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14장. 세대교체 - (3)
다시 의녀문에 도착하는 순간, 독고령은 자그마한 무언가에 붙잡혔다.
“언니! 저도 어부바 해주세요!”
“소소냐?”
독고령이 그녀에게 손을 뻗는 순간, 남궁원청이 재빨리 나뭇가지로 손을 쳐냈다.
“… 손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게.”
“영감님, 진짜…”
“입도 열지 말게!”
“… 소소를 남궁세가까지 바래다주라고 영감님이…”
“어허!”
“…”
독고령이 입을 꾹 다물자, 남궁원청이 그녀의 등에서 내리며 남궁소소를 안아주었다.
“어이구, 소소야. 이 할애비가 대신 업어주마.”
“헤헤, 네!”
검신이 손녀를 안고 놀아주는 것을 보고 독고령은 자리를 뜨기로 마음먹었다.
“… 저 갑니다?”
“오냐, 가거라. 운영과는 인사 안 해도 되겠느냐?”
“이미 했어요.”
남궁원청이 잠시 소소를 바라보다 독고령에게 전음을 보냈다.
[소소에게 이상한 말을 가르쳤다간 가만히 두지 않을테야.]
[… 눼.]
독고령이 툴툴대며 자리를 떴다.
‘영감탱이 아주 그냥…’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썩 점잖은 노인네인줄 알았거늘, 알면 알수록 성격이 더럽다.
‘… 저러니깐 검신 자리 해먹고 남들 싸움 순위 같은 것도 정해주고 그러나 보군.’
독고령은 혹여나 남궁원청이 들을까 속으로만 툴툴거리며 백리소현에게 향했다.
“… 나 왔어.”
“금방 다녀왔네.”
“… 뭐 하냐?”
“짐 챙기고 있어. 우리도 이제 슬슬 출발해야지.”
“아… 그렇네.”
“령 매도 미리 챙겨둬. 위 오라버니는 운영 아저씨 가는 것만 보고 바로 출발하자던데?”
“… 그래.”
“혹시나 두고 가는 거 잊지 말고, 령 매.”
“내가 애냐? 너도 잘 챙겨.”
“응.”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독고령은 할 일이 없었다.
짐을 챙기라고는 했으나 살막에 붙잡히기 전에 이미 혼자 여행할 준비를 끝내놔서 독고령은 시간이 붕 떴다.
‘… 뭐 하지?’
괜히 창천오검한테 찾아가 비무나 한 번 할까 싶다가 그 생각을 금세 접었다.
이미 창천오검과는 격차가 많이 벌어졌다.
은관영에게 찾아가기엔 안 그래도 바쁜 애한테 부담을 많이 주는 것만 같았다.
백리소현은 방금 만났고, 운영과는 굳이 다시 만날 이유가 없었다.
‘어쩔 수 없네!’
시간을 보내기 위해 결국 어쩔 수 없이 위일청을 만나러 갈 수 밖에 없었다.
‘아니면 일청이 짐 싸는 걸 도와주는 것도 괜찮고.’
생각해보니 위일청이 짐이 좀 많았던 것만 같단 생각이 들자, 독고령의 발걸음이 그의 처소로 향했다.
‘짐이 많으니깐! 어쩔 수 없네! 도와줘야겠네.’
스스로 합리화를 끝낸 독고령이 위일청의 처소로 향하는 와중, 그녀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 여… 여기서 이러시면… 소저…”
“응?”
질척하고 음탕한 소리가 들리자, 독고령은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소리가 나는 방향은 약재 창고였다.
독고령이 발 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레 문 틈을 통해 그 안을 엿보자 그 곳엔…
노극명과 운소홍이 혀를 섞고 있었다.
‘이… 저…! 저저…!!’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들어가 깽판을 놓고 싶었으나 독고령은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운소홍이 노극명을 붙잡는 모양새였기에.
마치 노극명을 덮치듯이 운소홍이 그를 벽에 밀어넣고 격하게 혀를 섞다가… 그녀가 입을 뗐다.
“하아… 노 가가.”
‘가가???’
호칭을 듣고 당황한 독고령이 더욱 집중해 그들의 대화를 훔쳐들었다.
노극명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점잔 떨며 말하기 시작했다.
“소홍…”
“정말 가셔야 하나요?”
“… 어쩔 수 없소.”
“검신께서 함께 가시는데요?”
“… 아버님에게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게 옳지 않겠소?”
“그럼 저도…!”
“소홍.”
운소홍의 말을 노극명이 끊으며 말했다.
“이제 장인 어른이 모든 걸 소저께 물려주시지 않았소? 나 때문에 괜히 자리를 비울 필요는 없소.”
“하지만… 전 아직…”
“나도 헤어지고 싶지 않소. 허나…”
노극명이 운소홍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 각자 맡은 소임이 있지 않소?”
“꼭… 돌아오실거죠?”
“어제의 약조로 부족했소이까?”
“네… 부족했어요.”
운소홍이 조금씩 자신의 옷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그러니 한 번 더…”
“크흠! 크흠!”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독고령이 일부러 헛기침을 크게 내자, 당황한 운소홍과 노극명이 황급히 떨어졌다.
운소홍을 자신의 뒤로 숨기고, 노극명이 멋쩍게 물었다.
“거… 누구 밖에 있소?”
“나와, 새끼야. 얘기 좀 하자.”
“… 독고 소저?”
“빨리!”
“…”
독고령이 화끈해진 얼굴을 식히며 노극명이 나오길 기다렸다.
‘저… 저저저…!’
독고령은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아니… 둘이 사귀는 건 사귀는 거니깐 자신이 관여할 문제는 아니기도 했다.
하지만 ‘하필’ 노극명이, ‘하필’ 소홍이와 저런 상태가 된 걸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자 마음이 심란했다.
‘아, 시발…’
괜히 낳아본 적도 없는 자식을 떠나보내는 느낌을 체험하며 독고령이 노극명을 쳐다봤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소저?”
“따라 와.”
“여기서 하시면…”
“빨리, 새끼야!”
그 때,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운소홍이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세요, 독고 소저?”
“… 잠시 할 얘기가 있어서.”
“저도 같이 들어도 되나요?”
“안 돼.”
“그럼 곤란한데요?”
“…”
독고령이 조금은 까칠한 운소홍의 말투에 살짝 충격을 받았다..
‘그… 그 소홍이가… 아니… 하…’
괜히 짜증이 솟구쳐 노극명을 노려보자, 운소홍이 독고령의 눈길을 막아섰다.
“독고 소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노 가가와 단 둘이 얘기한다는 게 좀 불편하네요.”
“흐엑?!”
“우… 운 소저!”
강경하게 나오는 운소홍을 보고 노극명이 더 당황했다.
“게다가 다른 이유도 있고요. 전에도 독고 소저랑 둘이 만나고 온 뒤에 약재를 받아가셨는데… 때리기라도 하실 생각인가요?”
“아… 아니, 내가…”
“광마 아저씨는 약자에게 함부로 손찌검을 하진 않았던 거 같은데, 독고 소저는 조금 다르신가 보군요?”
“아니… 으…”
자신의 편이 되어줄거라 생각했던 운소홍이 저리 나오자 오히려 독고령이 더 당황하는 와중, 노극명이 나서서 운소홍을 말렸다.
“소홍, 금방 다녀올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허나 가가…”
“정말 괜찮습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 네.”
노극명이 설득하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운소홍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갔다온 뒤에 마저…”
“…”
노극명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서야 운소홍이 그를 놓아주었다.
“독고 소저.”
“어… 어?!”
“가가를 너무 험하게만 뭐라고 하지 마세요. 그리고…”
운소홍의 눈이 조금은 새초롬해졌다.
“… 저는 위공자랑 독고소저를 배려해드렸는데 말이죠. 조금 실망이네요.”
“엥?”
“몰라요!”
심통이 난 운소홍이 멀어지자, 그녀의 말을 몇 번 곱씹은 뒤 독고령은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 미안한 짓을 해버렸네.’
도중에 행위가 끊겼으니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어쩔 수 없었다, 소홍아. 미안하다.’
그대로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 또한 독고령에겐 고역이었다.
독고령은 미안함과 분노를 담아 이 모든 사단의 주범을 노려보았다.
“… 따라와. 길게 얘기 안 할테니깐.”
“… 예.”
독고령이 앞서 걷자, 노극명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축 처져 그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
한적한 공터에 도착하자 독고령이 대충 바위에 걸터앉고는 유성도를 뽑았다.
챙!
유성도의 날이 잘 서있는 것을 손으로 확인한 뒤, 어깨에 걸치고는 독고령이 노극명에게 물어봤다.
“야.”
“…네, 독고 소저.”
“그래, 시발. 솔직히 내가 네 연애에 관여하는 것도 존나 웃긴 일이지.”
“… 아닙니다. 독고 소저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시죠.”
“그래? 네가 맞다고 했으니 그럼 물어보자.”
독고령이 칼로 노극명을 가르키며 물었다.
“… 너 소홍이랑 혼례까지 치를 생각이냐?”
“예. 신의 어르신께는 엊그제 허락을 받았습니다.”
“엑?!”
“이번에 모용세가에 돌아가면… 아버지에게도 허락을 구하고자 합니다.”
“지… 진짜?!”
“예, 소저. 아직 확정된 얘기가 아니라 주변에는 말하지 않고 있었지만… 진지합니다.”
노극명이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죽음을 각오한 사내처럼 의연한 눈빛으로 독고령을 쳐다보았다.
“소저께서 운 소저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그간의 일들로 미루어 짐작하고 있습니다.”
“무… 무릎은 왜…”
“제가 죽을 죄를 지은 것이 맞습니다. 허나… 만난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확신이 생겼습니다. 저는 운 소저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
진지함이 뚝뚝 묻어나오는 그의 말에 독고령 또한 괜히 덩달아 진지해졌다.
“솔직하게 말하지, 노극명.”
“… 예, 소저.”
“모용벽 그 미친 놈을 치료해주는 거야 그렇다쳐도 운영이 몸 성히 돌아올 수 있으리라 믿냐?”
“제가 그리되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뭐라고?”
모용벽이 보여준 모습들을 떠올리자 독고령의 머리가 조금씩 뜨거워졌다.
“모용벽은 사람의 출신을 신경쓰는 자다. 운영은 내가 알기로 평범한 약초꾼의 자식인데 그래도 자신과 친척 사이가 될 인물로 받아들일까?”
“… 필요하면 가족의 연을 끊을 생각도 있습니다.”
“진심이냐?”
“예.”
노극명이 고개를 들어 독고령과 눈을 마주쳤다.
“의원과 혼인을 하는데 무예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가에서 원한다면 받은 모든 것을 돌려드리고 이 곳에서 약초 캐는 법이라도 배울 생각입니다.”
“…”
가문에서 받은 무공을 돌려주고 오겠다는 말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단전을 폐하고, 쌓아둔 내공을 다 버리고는 평범한 양민의 삶으로 돌아가겠단 말이었다.
“… 쉽게 입에 담을 말이 아니란 건 알겠지?”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운 소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
일이 이렇게 되자, 독고령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였구나.’
노극명은 생각보다 운소홍과 진지한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당당하게 자신에게 ‘운소홍을 사랑하노라,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었노라.’라고 말하는 그가…
독고령은 조금 부럽기까지 했다.
“하아…”
“…”
독고령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노극명은 자신이 정말 싫어하는 모용세가의 인물이고, 노순평의 아들이었다.
첫 만남에 그에게 발길질을 얻어맞았던 것은 아직도 기억이 나서 가끔씩 화가 솟아오르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도, 그가 허튼 소리 하나라도 했다면 소홍이에게 조금 미움을 받더라도 자신이 직접 사람으로 만들어놓을 셈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생각이 독고령의 한숨과 함께 사라졌다.
“운영은 어차피 검신 영감님과 함께 가니깐 큰 해를 입진 않을 가능성이 높다. 혹시나, 만에 하나. 니네 가주가 미쳐서 검신 영감님을 합공하는 게 아닌 이상, 상관없어.”
“…그게 무슨…”
“허나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니네 가주가 미쳐서 검신 영감님을 합공한다면…”
독고령이 바위에서 일어났다.
“운영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네가 목숨걸고 지켜내라.”
“… 예.”
“어떻게든 숨만 붙어서 도망치는데 성공하면… 나를 찾아와라. 내가 지켜주마.”
“예?”
“이상. 가 봐라, 내가 더 뭘 얘기하겠냐.”
“소… 소저…”
“아, 꺼지라고. 걷어차일래?”
“아… 아닙니다!!”
노극명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 예전에 범한 실례는 정말…”
“캬아아악!!”
“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소저!!”
멀어지는 노극명의 등을 보며, 독고령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견부 밑에 호자도 나오는건가…’
개 같은 노순평 밑에서 용케도 올곧은 마음을 지니고 컸다 생각하며 독고령이 유성도를 다시 칼집에 집어넣었다.
‘… 혼례라.’
독고령은 자연스레 위일청이 떠올랐다.
‘모든 복수를 마치고 나면… 그러고도 내가 살아남는다면…’
그 때 자신과 위일청은 어떻게 될까?
독고령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복수를 마치고 난 뒤의 일을 고민했다.
홀로 바위에 걸터앉아서 고민을 하는 동안, 독고령의 머리색이 여러 번 바뀌었다.
생각보다… 그녀의 고민은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