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14장. 세대교체 - (2)
‘권신이 사천에 찾아갔다고?’
소림의 방장 대사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의 위명을 독고령이 모를 수가 없다.
백도 무림의 정점.
권신 공여.
그가 그저 바람을 쐬기 위해 사천에 갔다면 하오문주가 굳이 따로 독고령에게 편지까지 보냈을 리는 없다.
독고령은 이를 갈며 편지의 다음 줄을 읽어나갔다.
[후계를 정해놓고 홀로 사천으로 향했으니 아마도 당문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서라 생각해요. 이기든, 지든 손님에겐 그리 기쁜 소식이 아니겠지요.]
“미친 땡중이…!”
[요녕도 혼란스럽기 그지 없답니다. 개방은 내분으로 흩어지고, 모용세가가 본격적으로 행동을 나서서 요녕 인근의 세력을 흡수하고 있어요. 이 쪽은 위 공자에게 듣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네요. 그의 넓은 가슴에 안긴 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한 번 물어보시…]
“캬아아악!!!”
독고령이 편지를 허공에 집어던졌다.
‘은관영인가? 은관영이겠지?!’
도대체 은약벽이 어디까지 아는 지 모르겠다.
그저 놀리기 위해 적은 것인지, 진심으로 이러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허공에 던진 편지가 펄럭이며 다시 내려오자 독고령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음 문장을 읽어나갔다.
[한 번 물어보시길. 위 공자에게도 민감한 문제니 미움받기 싫다면 조심스레 물어보셔요. 그리고 보타문에 가시는 길은 조금 서두르시는 게 좋을 듯 해요. 무당파에서 한 무리의 도사들이 보타문으로 떠났으니 운이 나쁘면 마주칠 수도 있겠네요.]
“… 그 말코 새끼들이?”
무당파의 이름이 나오자 독고령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 짜증나네.’
어차피 칼이나 휘두르는 새끼들이 무슨 도를 깨우친다고 지랄 염병을 하는 꼬락서니가 독고령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자주 다져주고는 했는데 그 새끼들이 쓰는 검법이 또 독고진과 상성이 별로였다.
쾌와 중을 주로 삼는 독고진의 도법에 정반대되는 무당의 유검은 그의 공격을 자주 흘리곤 했다.
시원하게 맞부딪치는 맛이 있어야하는데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피해다니는 무당의 검법은 독고진의 광증을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주 요인 중 하나였다.
‘그 놈의 얼어죽을 후발제인.’
덕분에 유검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독고진은 무당이 싫었다.
자고로 사내라면 서로 죽을 때까지 검을 휘두르는 호쾌함이 있어야하거늘, 무당놈들에겐 그런 점이 부족했다.
“쓰읍… 그 새끼들이 보타문에는 또 왜 가지?”
편지를 접은 독고령은 잠시 은약벽의 정보를 곱씹어보다가… 포기했다.
‘거슬리면 패고, 안 거슬리면 덜 패고.’
마음을 정한 뒤, 독고령이 유성도를 붙잡고 처소를 나섰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결심하고, 일단은 먼저 처리할 수 있는 일부터 처리하고자 함이였다.
권신.
그 엉덩이 무겁기로 유명한 방장이 움직였으면 분명 그의 오랜 친우인 검신이 몰랐을 리가 없었다.
‘이 영감탱이가…’
분명 사냥감을 뺏어가지 않겠다고 말해놓고 자신을 기만한 영감탱이가 괘씸해서라도 수련의 성과를 보여주겠노라 말하며 괴롭혀주겠다 마음 먹고 그의 처소에 찾아갔다.
쾅!
“영감님! 저랑 얘기… 좀… 크헥.”
갑자기 머리에 부딪힌 무언가에 독고령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문은 발로 차는 게 아니라 열고 들어오는 걸세, 광마.”
“…”
독고령이 맞은 부위를 문지르며 검신을 노려보았다.
“한 대 더 맞을텐가?”
“… 아니요.”
“무슨 일로 이리 급하게 찾아왔는가?”
“권신 때문에 왔어요.”
독고령이 남궁원청의 맞은 편에 앉자,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나는 모르는 일이네.”
“거짓말이겠죠. 영감님이랑 친하잖아요?”
“자네는 위일청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아는가?”
“… 진짜 모르는 일 맞아요?”
“…”
남궁원청이 독고령의 눈을 직시했다.
질 수 없다는 듯이 독고령이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노려보자, 남궁원청이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 어딜!’
독고령이 왼손으로 그의 나뭇가지를 막았다고 확신하는 순간…
빠악!
“아으…”
“어딜.”
“… 나이 먹고 그러고 싶어요?”
“네 년이 계속 노부를 젊게 만든다, 이 놈아!!”
“아잇, 진짜!”
남궁원청이 몇 차례 더 나뭇가지를 휘두르자, 독고령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 거 참! 나도 나이 먹을대로 먹었소!”
“… 아직도 덜 섞였구만.”
“무슨 소리요?”
“아닐세.”
말투가 오락가락하는 독고령을 보며 남궁원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업어라.”
“예?”
“업으라고. 성취가 있지 않는가. 노부의 가르침으로 깨달았다고 했으니 노부가 확인하는 것도 안 되는가?”
“… 그냥 걸어가셔도 될 것을…”
“콱!”
남궁원청이 나뭇가지를 들어올리자, 독고령이 재빨리 엎드렸다.
“업히시죠, 어르신. 풍경 좋은데로 모시겠습니다.”
“… 진즉에 그럴 것이지.”
독고령이 등을 내주자, 남궁원청이 그녀의 등에 업혔다.
“남 시선은 신경 안 쓰세요? 다 늙은 영감님이 저 같은 여인의 등에 타고 있으면…”
“네 년이 그런 소릴하니깐 내 속이 뒤집히는구나. 천근추 수련이나 좀 해볼까?”
“…가시죠. 남 시선에도 안 들어오게끔 빨리 움직일게요.”
“오냐.”
묘하게 들떠있는 남궁원청을 보며 독고령이 툴툴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 꽉 잡으세요, 영감님.”
“오냐.”
“아… 가기 전에 어디 들렀다 가도 돼요?”
“왜?”
“… 잠시 나갔다 온다 정도는 얘기해야할 거 같아서요.”
“…”
독고령의 말을 듣자, 남궁원청의 눈이 휘둥그레해졌다.
“클클클, 천하의 망나니가 사람이 되어가는구나. 다녀오거라.”
“꼭 말을 하셔도…”
“한 대 더 맞아볼테야?”
“… 다녀오겠습니다.”
독고령이 궁시렁대면서도 발을 옮기자, 그 모습을 보고 남궁원청이 피식 웃었다.
*
백리소현에게 잠시 검신과 산책을 나갔다 오겠다고 알린 뒤, 독고령은 그를 업고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 내리시죠, 영감님.”
“아직 경공술은 모자라구만, 자네.”
“… 태워줘도 뭐라하고 진짜…”
빠악!
남궁원청의 손이 벼락같이 움직였다.
“…”
독고령이 이를 악물고 노려봤으나 그 눈빛을 무시하고 남궁원청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좋은 곳이구나. 언제 이런 곳을 알았는고?”
“… 돌아오는 길에 잠시 봤어요.”
“그렇구만.”
남궁원청을 데리고 온 곳은 폭포가 내리치는 강의 상류 지점이었다.
주변이 탁 트여있는 것이 보고 있다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좋은 풍경을 가진 곳이었기에 독고령은 이 곳을 기억하고 있었다.
남궁원청이 주변에 적당한 바위를 골라잡아 앉으며 손짓했다.
“이리 와서 앉게.”
“… 눼.”
“주둥이는 집어넣게.”
“…”
독고령이 입술을 입 안으로 폭 숙이자, 그 모습을 보고 남궁원청이 웃었다.
“겉모습만 보면 귀여운 소녀거늘, 속에 들어찬 게 망나니 놈이라 영 찝찝하구만.”
“… 거 그만 놀리시고 이거나 좀 보시죠.”
“음?”
“차가운 불. 성공했어요.”
“!!”
그 말을 듣자, 남궁원청이 당황했다.
“어… 정말인가?”
“…? 그럼 뭐라고 생각하셨는데요?”
“아니… 그… 단초 정도만 잡았으리라 생각했네만…”
“… 한 번 보세요. 근데 이거 위력이 정신나가서 저도 아직 제어가 안 됩니다.”
“그럼 굳이 펼치지 말고 보여주기만 하게.”
“… 예.”
독고령이 자연스레 몸 안에 깃든 양기와 음기를 끌어올려 두 손에 모았다.
그녀의 손 안에 깃든 분홍빛의 기운을 보고 남궁원청이 탄식을 흘렸다.
“허어…”
“이거 맞죠?”
“조금 다르지만… 맞네. 정말 심검에 발을 디뎠구만.”
독고령이 손 안에 모은 기운을 다시 흐트리자, 남궁원청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노부의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맞네. 보고도 못 믿겠구만…”
“… 왜요?”
“너무 빨리 익혀서 놀랐네. 자네, 생각보다 오성이 뛰어나구만.”
남궁원청이 잠시 수염을 쓰다듬다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수중무검 심중유검(手中無劍 心中有劍).”
“… 저 칼 들고 있는데요?”
“산통 좀 깨지 말고 가만히 있거라.”
“… 눼.”
손에는 검이 없으나, 마음 속엔 검이 있다는 말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독고령이 가만히 남궁원청을 쳐다보자, 그가 물었다.
“자네는 저 말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
“… 그냥 뜬 구름 잡는 소리죠.”
“하아… 내가 지금 뭘 들고 있나?”
남궁원청이 손의 나뭇가지를 흔들어보이자, 독고령이 탄성을 내질렀다.
“아… 전에 그거요? 마음 먹는대로 다 벨 수 있다?”
“그걸세. 나는 이게 심검의 초입이라 생각하네. 마음 먹는대로 다 베는 경지.”
“… 초입이요? 뒤에 더 있어요?”
“원래 그 뒤가 물극필반(物極必反)인데… 그것도 이미 자네가 같이 해냈구만.”
“…”
모든 사물은 극에 달하면 반대에 도달한다.
독고령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남궁원청이 또 다시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 차가운 불 말일세.”
“아!”
“어디 가서 누가 그 절기의 원리를 묻거든 그냥 점잖은 체 저렇게 답해주게. 하아… 어쩌다 이런 후인을 뒀을고.”
“… 저 영감님 제자 아닌… 맞습니다!”
독고령의 말이 끝나기 전에 남궁원청이 나뭇가지를 다시 들어올리자, 그녀가 말을 바꿨다.
“… 광마.”
“예, 영감님.”
“전에 본 상처 기억하고 있는가?”
“그… 천마가 남기고 간 상처요?”
“그래. 그 상처는 천마가 남기고 간 것이지만, 나는 그에게 베인 적이 없다네.”
“예?”
“그게 내가 생각하는 심검의 마지막 단계일세. 심즉살(心卽殺), 마음이 그 곳으로 향하는 순간 이미 상대가 베이는 경지.”
“… 그게 돼요?”
“그냥 그러리라 생각하는 것이야. 실제로 내 몸이 그러하니 말일세.”
“…”
독고령은 물끄러미 남궁원청의 상처가 있는 부분을 쳐다보았다.
“… 아직은 못 깨달은 거 같네요.”
“그러냐?”
“예. 그 정도면 이미 독선이랑 검존 그 개새끼들이 뒤졌어야 하거든요.”
“… 하긴.”
남궁원청이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떠날 것이냐?”
“어디를요?”
“보타문에 간다더니 한동안 여기에 붙들려 있지 않았는가. 노부는 오늘 내로 출발할 예정일세.”
“… 모용세가요?”
“그래.”
“… 미리 말해두지만… 아, 좀!”
남궁원청이 또 다시 나뭇가지를 휘둘렀지만, 이번엔 독고령이 막아냈다.
“그만 좀 때리세요!”
“매를 아끼면 애를 망친다는 격언도 모르느냐?”
“저는 애가 아니잖… 애 맞습니다. 어르신에 비하면 애죠.”
남궁원청이 또 다시 나뭇가지를 들어올리자, 독고령이 재빨리 말을 바꾸고 고개를 숙였다.
‘아이씨… 이 영감탱이, 진짜…’
“노부가 네 년에게 물들었구나. 말년에 어린아이처럼 지내니 마음마저 어려지는 기분이로다.”
“…”
“모용 가주는 내가 건들지 않으마. 어디까지나 운영의 호위만 해 줄 생각이니 눈에 힘이나 좀 풀어라.”
“… 약속하셨습니다?”
“오냐.”
“…”
독고령은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실 건가요?”
“그러지. 아, 그 전에… 이름은 지어놨는가?”
“무슨 이름이요?”
“그 절기 말일세. 그래도 뭐라고 불러야할지는 정해놔야하지 않겠나?”
“어… 음… 그냥 별 생각 없었는데요?”
“쯔쯔쯔… 무재는 뛰어나거늘, 무학은 영 모르는구만.”
남궁원청이 말했다.
“무공의 이름이 왜 중요한지 아는가?”
“… 글쎄요.”
“그 무공이 추구하는 바를 담고 있기 때문이네. 그래서 후인들은 그 무공의 이름으로 선조의 뜻을 헤아리는 법이지.”
“… 저 아무한테도 안 가르칠 건데요.”
“그럼 매번 차가운 불이라고 부를 셈인가?”
“…”
남궁원청이 대답을 안 하면 안 보내줄 것만 같아서 독고령은 대충 머릿 속에 떠오르는 말을 내뱉었다.
“… 일영기로 하죠.”
“해(日)와 그림자(影), 양과 음을 다 담은 기운이라… 좋은 이름이도다.”
“그럼 이제 가시죠.”
사실 그런 뜻으로 지은 건 아니였는데, 독고령은 굳이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위[일]청과 독고[령]이 함께여야지만 쓸 수 있는 거라 일영기라 지은 건데…’
남궁원청이 다시 독고령의 등에 엎히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자네 무당이랑 사이가 별로 안 좋지 않았는가?”
“… 그렇죠. 강호에 저랑 사이 좋은 놈들 찾기가 더 힘들걸요? 그건 왜요?”
“허가 놈이 자네를 보면 어찌할 지 궁금해서 그렇네, 클클.”
“예? 그 새끼가 왜요?”
“무당이 가장 원하는 게 뭔가?”
남궁원청이 손가락을 말아 동그라미를 만들더니 피식 웃었다.
“태극, 음양의 조화 아닌가?”
“아…”
일영기 자체가 음양의 조화를 이뤄낸 결과물이기에 그의 말을 들은 독고령은 피식 웃었다.
“저도 금세 익힌건데 몇 백년간 못 익힌 그 새끼들이 병신이죠,뭐.”
“크하하핫!”
남궁원청이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크게 웃었다.
독고령은 그 웃음이 딱히 기분 나쁘지 않아, 자신도 같이 웃었다.
“크큭, 가겠습니다.”
“오냐. 돌아갈 때는 조금 덜 흔들리게 움직여보거라.”
“… 눼.”
일부러 돌부리에라도 걸려 넘어져야겠다 생각하며, 독고령이 몸을 날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독고령은 자신이 애가 맞는 거 같아서, 괜히 또 한 번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