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14장. 세대 교체 - (1)
사천당문의 가주이자, 독선이라 불리는 사내.
당정은 핏발선 눈으로 권신 공여대사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소름이 끼치는군…’
전대 무림맹주, 검신 남궁원청이 10년마다 무림 백대고수를 발표하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관심사는 그 정점에 누가 있을 것이냐였다.
그리고 발표된 세 명의 정점을 듣고, 당연하게도 많은 호사가들이 누가 최강이냐를 두고 갑론을박을 펼쳤다.
마신이라 불리던 전대 천마를 꺾은 검신.
그 마신을 몇 십년동안 억제해온 곤륜의 투신.
그리고 마신이 중원을 침공하는 순간, 그를 막아설 마지막 보루 권신.
결국 그 셋이 모여 우열을 가리지 않으면 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였기에 사람들의 관심은 날로 커져만 갔다.
그리고 어느 날, 검신은 이 질문에 답했다.
단기결전이나 일합 승부를 본다면 자신이 가장 강할 것이며.
생사결을 놓고 벌이는 싸움이라면 투신이 마지막까지 서있을 것이며,
아래의 수하까지 전부 포함한 총력전이라면 권신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검신의 발언을 떠올리며 당정은 손 안의 비수를 만지작거렸다.
‘공격력은 검신, 내구력은 투신, 세력은 권신.’
달리 해석하면 일신의 무력은 권신이 삼신 중에서 가장 떨어진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5일동안 쉬지 않고 자신이 20년간 모은 병력을 단신으로 궤멸에 가깝게 몰아세우는 권신의 신위를 지켜보며 당정은 분노를 느꼈다.
‘강시는 고치면 된다. 허나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저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어찌하여 나서지 않았는가.
왜 마교의 침공에도 불구하고 숭산에 틀어박혀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당정은 분노가 솟아올랐다.
살을 파고드는 비도의 고통도 잊고, 당정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그 때, 그의 뒤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암~. 아직도 여기 있었어?”
“… 눈을 떼는 순간, 어찌 될 지 모르니 지켜볼 수 밖에.”
“힘들게 사네. 방장은?”
“이제야 지친 기색이 보이는군.”
당정이 턱짓하자, 혈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공여 대사를 쳐다보았다.
그의 어깨가 크게 들썩이고, 호흡이 거칠어진 것을 확인하며 혈라가 웃었다.
“크크큭… 많이 지쳐보이는데?”
“방심하지 마시오. 어제부터는 독무도 풀었지만… 여전히 소용이 없군.”
“독 따위에 당하면 오히려 실망스럽지. 오~”
권신이 내지르는 주먹에 강시의 머리가 또 하나 터져나가자, 혈라가 휘파람을 불었다.
“저건 못 고치겠는데?”
“어중간하게 부수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소.”
“골치 아프네. 20년을 걸려서 고작 권신 하나라니.”
“싸게 먹히는 장사지.”
“그렇긴 해?”
혈라가 크게 기지개를 켜더니 손과 목을 돌리며 우둑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보고 당정이 물었다.
“… 이제야 나설 셈이오?”
“그래도 은원이 있는데 마무리는 내 손으로 짓고 싶어서.”
“마음대로 하시오. 이제야 눈을 붙이겠군.”
“어머? 최후를 확인하지 않아도 돼?”
“…”
혈라의 말을 무시하고, 당정이 자리를 떴다.
그 모습을 보고 혈라가 피식 웃었다.
“꼴에 정파라고 싫은가 보네, 크큭.”
혈라의 눈이 붉게 물들고, 손톱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자신의 팔만큼 길어진 기괴한 손톱과 함께 그가 전각에서 뛰어내렸다.
"이리도 많을 줄이야...!’
능히 홀로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쓰러뜨려도, 쓰려도 다시 밀려오는 강시의 파도는 천천히 공여대사를 잠식해나갔다.
‘… 고행이로다.’
자신의 육신만큼이나, 정신 또한 튼튼하다고 공여 대사는 믿고 있었다.
허나 5일간 이어진 전투는 그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미 죽은 시체라고 하나, 사람의 육신을 가진 이들이었다.
살아있던 시절에는 다들 따스한 온기로 남을 보듬어주었을 육신으로 자신을 덮쳐드는 강시들을 바라보며 공여 대사의 마음은 조금씩 깎여나갔다.
하다못해 양강의 기운을 띈 무공을 익혀 시체를 불태웠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평생을 오롯이 권각술만을 수행하던 이였다.
자신의 손과 발로 생살을 파고드는 감각은… 그에게 지옥과도 같았다.
어제 팔을 박살낸 이가 오늘 새로운 팔을 달고 찾아오는 그 지독함에 공여 대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즈음.
“음…!”
그의 기감에 기괴한 무언가가 잡혔다.
“으캬캬캭!! 방장!!!!”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떨어지는 무언가는 사람의 형체를 했으나, 사람이 아닌 듯 느껴졌다.
‘새로운 강시인가…?!’
귀곡성을 흘리며 내려오는 괴인을 향해 공여 대사가 일권을 내질렀다.
파삭!
그의 일권에 너무나도 허망하게 곤죽이 되어 사라진 강시를 보고, 공여 대사가 이상함을 느낄 즈음.
“아프잖아~?”
“흐음?!”
그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술을…!”
파삭!
또 한 번, 곤죽이 되어버린 기이한 사내의 시체를 바라보며 공여 대사는 눈 앞에 펼친 기묘한 광경에 위화감을 느꼈다.
괴인의 시체로 만들어진 피의 비가 그의 시야를 붉게 물들이자, 공여 대사는 얼마 남지 않은 내공을 끌어올려 사자후를 내뱉었다.
“갈!!”
그의 입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려퍼지며, 세상이 다시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자 혈우(血雨)뒤에 숨어있던 장발의 기괴한 사내가 아쉬운 듯 뺨에 손을 올렸다.
“아쉽네. 시체는 깨끗하게 보존하고 싶었는데.”
“크윽…!”
현기증에 머리가 핑 돌았지만, 공여 대사가 다시 주먹을 꽉 말아쥐며 투지를 발하는 것을 보며 혈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더 할 수 있어?”
“누구냐…!”
“혈라신선(血羅神仙).”
“!!”
대대로 혈교의 교주를 칭하는 명호를 듣자, 공여 대사의 눈이 흔들렸다.
“크큭, 오랜만이야~. 혜선 대사 이후로 방장을 또 죽이게 될 줄은 몰랐네.”
“선대의 법명(法名)을 함부로 부르지 마시게.”
“미안, 크큭. 너무 화내지는 말고.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그러니깐 무섭잖아~.”
“…”
분명 남자의 육신을 하고도 여인처럼 아양을 떠는 기괴한 모습과 혈라가 입에 담은 말이 공여 대사를 혼란케했다.
“정녕… 다시 돌아온 것이요?”
“윤회전생이 우리 특기라니깐~? 선대한테 못 들었어?”
“허튼 소리!!”
“으캬캭!! 이상하네~. 너네가 믿는 부처가 모든 이는 당연히 윤회를 한다고 했는데 왜 못 믿지~? 당대의 방장은 불경한 자인가?”
부처를 입에 담는 순간, 공여 대사가 피를 토하며 일갈했다.
“어디 감히 네 놈이 불경을 입에 담아!!”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을… 혈라는 놓치지 않았다.
“아쉬워라.”
“컥…!”
눈 앞에 보이던 혈라가 허물어지듯 사라지고, 어느새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붉은 손톱을 보고 공여 대사가 허망한듯 중얼거렸다.
“환술…이었나…”
“수행이 부족했나보네~. 내세에는 덕을 많이 쌓길 바래~.”
“끄으윽…!!”
공여 대사가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아 혈라의 손톱을 부여잡았다.
“끄으으으…!!”
“손톱이라도 부수게?”
“커헉…!”
공여 대사의 가슴에 박은 손톱을 비틀자, 공여 대사가 축 늘어졌다.
“아아~, 이번 방장은 좀 약하네. 싱거워라…”
그의 숨통이 끊어진 걸 확인한 혈라가 손톱을 뽑았다.
“흐음… 이런 늙은이를 강시로 만드는 것도 처음 해보는 시도지만…”
혈라가 손톱에 묻은 공여 대사의 피를 핥으며 미소지었다.
“천하제일인의 육신으로 만드는 강시. 재밌겠네~. 으흠흠~”
기분 좋은 어린아이처럼 콧노래를 부르며, 혈라가 공여 대사의 시체를 끌고 갔다.
*
“그럼… 좀 이따 다시 봐요, 일청.”
“네, 령.”
“아… 그…”
독고령이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뒤, 그의 옷깃을 살짝 붙잡자 위일청이 피식 웃었다.
“부족했나요?”
“… 빠… 빨리요.”
위일청이 고개를 숙여주자, 그에게 입술을 살포시 맞추곤 독고령이 배시시 웃었다.
“헤헤… 이따 봐요, 일청.”
“네, 령.”
위일청과 헤어진 뒤, 달아오른 두 뺨을 손으로 식히며 독고령이 그의 처소에서 나왔다.
무명에게 배운 경신술로 재빨리 처소에 돌아와 문을 닫은 독고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흐아아…”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에 남은 위일청의 감촉을 확인하며… 독고령이 살포시 미소지었다.
‘이젠… 정말…’
“꺄아악!!”
독고령이 부끄러움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잠시 바닥을 뒹굴렀다.
눈을 뜨든, 감든 계속하여 떠오르는 위일청 때문에 도저히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으으… 음탕한 년아! 이 음탕한 년아…!!”
“누가요?”
“흐엑?!”
갑작스레 들린 익숙한 목소리에 독고령이 고개를 들자, 은관영이 안에서 나왔다.
“너… 너너너가 왜…”
“… 전해드릴 편지가 있어서 왔는데, 사매가 멋대로…”
“뒤… 뒤진다?!”
“오빠랑 했어요?”
“흐앗?!”
질문에 당황한 독고령이 머리를 분홍빛으로 물들이자, 은관영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헤에~. 그쵸. 저도 초야를 치르고 난 뒤에는 엄청 들떴…”
“나… 나가앗!!”
“히힛. 출발은 하루 이따가 할게요. 처녀를 잃고 바로 덜컹이는 마차에 타면 아파서…”
“나… 나가라고!!!”
독고령이 당장 날뛸 기세를 보이자, 은관영이 여전히 미소 지으며 그녀를 지나갔다.
“네에~, 아직 여운을 즐기시고 싶으실테니…”
“캬아아악!!!”
“히힛, 알았어요오. 탁상에 편지를 놔뒀으니깐 기분을 좀 가라앉히고 읽어주세요오.”
탁.
은관영이 문을 닫고 나가자, 독고령은 조심스레 문 틈을 열고 밖을 확인했다.
그도 모자라 기감을 끌어올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부끄러움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은관영의 말대로 독고령은 들떠있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자신의 처소에 다른 이가 들어와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 할 정도로 느슨해진 지금의 상태가 설명되지 않았다.
‘이… 일단 진정하고…’
독고령은 당장이라도 심마에 빠져들 것 같은 부끄러움을 견뎌내며 자연스레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명상에 빠진 독고령이 자신의 내부를 돌아보자, 이미 예상한 결과가 그녀를 기다렸다.
‘… 결국 대맥까지 뚫렸네.’
위일청과 한 번 야한 짓을 할 때마다 맥이 살아나는 것은 알고 있었고, 이번에도 역시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미 뚫려있던 양유맥, 양교맥, 음유맥, 음교맥, 충맥에 이어 대맥까지 뚫리자 독고령은 자신이 독고진이던 시절의 내공… 아니, 그 이상의 내공을 가졌음을 확신했다.
이제는 생사현관이라 불리는 임독양맥만을 남겨두자, 독고령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 그러고보니 이번엔 어떻게 되는거지?’
생사현관을 타통하면 환골탈태를 이루며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이른다.
이미 한 번 환골탈태를 경험했지만, 독고령은 조금 고민에 빠졌다.
지난 번에 환골탈태를 할 때는 여성이 되었는데, 이번에 환골탈태를 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혹시나 남자의 몸으로 돌아갈 지 모른다고 생각이 들자, 독고령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 이젠 옛날보다 더 강한 거 같은데…’
근골을 포함한 외공의 영역에선 여전히 독고진의 육체가 더 강인할 것이다.
하지만 내공과 얼마 전에 깨달은 심검의 단초를 생각하면 독고령의 육체가 독고진의 시절보다 월등했다.
‘싸우는 방식을 조금 바꾸긴 해야겠네…’
과거와 달라진 지금의 육체에 대해 조금 더 익숙해져야겠다 고민하며 독고령은 천천히 눈을 떴다.
‘… 참 신기한 심법이란 말이지.’
위일청과 하룻밤을 보낸 것만으로 음기가 두터워지고, 양기마저 생겼다.
월영신공의 운공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음에도 성취가 또 한 단계 올라 7성의 경지에 이르른 것도 신기했고, 생각보다 양기의 량이 많은 것도 놀랐다.
“어...?”
위일청을 통해 받아들인 양기를 떠올리자, 독고령은 자연스레 자신의 절기가 떠올랐다.
남궁원청의 가르침에서 시작된 그 절기는 음기와 양기를 적절히 조합해야한다.
내면에 넘치는 음기는 상관없지만, 양기는 외부에서 공급받아야한다.
그리고… 독고령이 양기를 얻을 방법은 5개 밖에 남지 않은 태양화리의 영단을 먹거나 위일청을 통해서 얻는 방법 뿐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독고령의 머리가 조금씩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걸 쓰려면… 위일청과 반드시…’
얼굴이 화끈거리자, 독고령이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뺨을 식혔다.
“흐아아…”
이래서야 ‘음란검’이란 칭호가 당연한 거 아닌가란 생각이 머리에 가득차자, 독고령은 어떻게든 신경을 돌리기 위해 다른 일에 눈을 돌렸다.
‘펴… 편지!’
은관영이 왔던 목적이 편지였음을 떠올리자 독고령은 재빨리 탁상으로 향했다.
그녀가 남긴 서신의 첫 줄은 은약벽에게서 온 거였다.
‘… 오랜만이네.’
편지를 읽는 순간, 첫 줄부터 독고령은 또 다시 심마가 찾아올 것만 같았다.
[잘 지내나요, 손님? 지금 쯤이면 초야를 치렀으려나요?]
“미… 미친년아!!”
독고령이 편지에 대고 빼액 소리를 지르며 재빨리 다음 줄로 넘기자…
“어?”
방금까지 들떠있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강호는 혼란하기 그지 없답니다. 권신이 사천에 찾아간 건 알고 계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