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13장. 보름달이 뜨기 전에 - (9)
“힘으로 듣게 만들던가.”
독고령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무명이 움직였다.
시작은 아주 작은,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자연체의 축 늘어뜨린 손 끝에서 시작하는, 손가락이 까딱거리는 미세한 움직임.
하지만 독고령은 그 움직임을 명확히 인식했다.
‘오는군.’
무명이 어기충천(御氣衝天)의 묘리를 이용해 무릎을 굽히지 않고도 자신에게 날아오는 기이한 광경을 지켜보며 독고령은 천천히 칼을 들어올렸다.
무명은 언제나와 같이 똑같은, 동시에 그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초식으로 덤벼들었다.
왼손과 오른손, 그리고 마지막의 절초.
3개의 행동을 마치 동시에 펼치는 것만 같은 그 초식.
‘3번은 안 당하지…!’
언제나와 똑같이 시작은 그의 왼손이었다.
무명의 왼손이 독고령의 턱 아래를 향해 찔러들어오자, 그녀는 여유롭게 턱을 젖히며 칼을 완전히 들어올렸다.
동시에 무명의 오른손이 독고령의 목을 향해 들어오자, 그녀는 들어올린 팔꿈치를 이용해 그의 팔을 막아섰다.
그리고 마지막.
독고령과 무명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무명이 입에서 무언가를 내뱉는 것보다 더 빨리…
쉬이익!
“흐읍!”
독고령이 유성도를 내려쳤다.
무명은 자신의 정수리를 향해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그녀의 유성도를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드디어… 이 기나긴 고통이 끝나는군.’
저 검에 베이는 순간, 살이 갈라지고, 두개골이 으깨짐과 동시에 더 이상 이 고통 뿐인 삶을 이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무명을 지배했다.
하지만…
빠악!
“커헉…!”
“눈 감고 맞으면 덜 아프냐, 새끼야?”
“끄윽… 이… 이게… 으윽…”
무명이 머리에 느껴지는 격통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분명 날이 선 방향으로 내려치는 것을 확인했음에도 자신이 베이지 않았다는 혼란과 머리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무명은 정신을 차리지 못 했다.
“으이구, 이 등신 새끼야. 내가 널 죽이기라도 할 줄 알았냐?”
“…”
독고령이 유성도를 어깨에 짊어지며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무명을 내려다봤다.
“내가 얼마 전에 괴물 영감탱이를 만났거든? 그 영감탱이가 그러더라. 마음만 먹는다면 뭘로도 벨 수 있다고. 그래서 역으로도 해봤다. 안 베는 것도 되네.”
“어… 언제 이런 고강한 무리를…”
“고강한 무리는 무슨. 그냥 한 번 해봤는데 되더라.”
“…”
“아프냐, 새끼야?”
독고령이 웃으며 되물었다.
“아프냐고? 나 여러번 되묻는 거 존나 싫어하는 거 알지?”
“… 많이 아프오.”
“그럼 됐다. 용서해주마.”
“… 무슨 소리요?”
“네가 어제 건방 떨면서 했던 개소리들. 용서해주마.”
“…”
무명이 침묵을 지키자 독고령이 쪼그려앉아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존나 세면 다 가능하겠더라고.”
“뭐가 말이오?”
“복수도, 사랑도. 그리고 또 깨달은건데… 일단 세지려면 마음부터 먹어야하더라.”
“…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너도 복수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것에도 눈 돌리라고.”
독고령이 턱짓한 곳을 쳐다보자, 그 곳엔 청년이 얼빠진 모습으로 독고령과 무명을 쳐다보고 있었다.
“쟤… 너한테 복수를 의뢰한 영감의 손자라매.”
“얘기하고 싶지않소.”
“왜 옆에 뒀냐? 나한테는 소중한 것을 만들었다고 지랄지랄하더니 정작 너도 그런 사람이 하나 있네?”
“… 그런 거 아니오.”
“그냥 인정하면 편해, 새끼야.”
독고령이 무명을 바라보았다.
무명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지 못 하고 고개를 돌렸다.
“용서받고 싶지 않냐?”
“아니오.”
“편히 잠을 자고 싶지 않나?”
“… 아니오.”
“안 지치냐?”
“아니…”
“한 대 더 맞으면 정신이 들 거 같냐?”
“…”
독고령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너도 어제 나한테 좆 같은 짓 했으니깐, 나도 좆 같은 짓 하나 한다?”
“음?”
독고령이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고함을 내질렀다.
“살막주가 니네 할아버지 죽였다!!!”
“미… 미쳤소?!!”
무명이 벌떡 일어나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미 내뱉어진 소리는 주워담을 수 없었다.
무명이 등 뒤에서 들리는 발소리를 듣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 아니…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
“저도 바보는 아니라서요, 음… 이런 식으로 듣고 싶진 않았습니다만…”
청년이 언제나처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무명에게 말했다.
“막주가 직접 얘기해주시겠습니까?”
“…”
무명이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고개를 떨구고 있자, 독고령이 옆에서 끼어들었다.
“술 갖다줄까?”
“그래주시겠습니까? 저 쪽 창고 안에 있습니다.”
“… 오냐.”
이후.
독고령은 멀리서 둘이 얘기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무명은 대화 내내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마지막에 이르러 청년이 그를 안고는 토닥이자, 그제서야 그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이 쳐먹은 놈이 청승맞게…’
하지만 그 모습이 딱히 기분 나쁘진 않았다.
무명이 사람다워 보였기에.
*
“아, 시발.”
무명과 청년의 얘기가 얼마나 길었는지 졸다가 화들짝 일어난 독고령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하늘엔 차오르기 슬그머니 차오르기 시작한 반달이 보였다.
“뭔 놈의 얘기를 이렇게 오래…”
“이젠 끝났소.”
“아잇, 시발! 깜짝이야.”
갑작스레 자신의 사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독고령이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 좀 내라, 새끼야.”
“미안하오. 습관이라.”
“… 얘기는 끝냈냐?”
“덕분에.”
무명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독고령에게 포권하였다.
“… 등을 떠밀어줘서 감사하오.”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지.”
“음?”
“너 때문에 나도 등을 떠밀렸거든.”
“… 그렇소?”
“그렇지, 크큭.”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실없이 웃은 뒤, 독고령이 말했다.
“그래서… 음… 여긴 어디냐?”
“돌아가려고 하시오?”
“그래야지. 그… 약속도 있어서.”
“약속?”
“보름까지는… 돌아가야 하거든.”
“그럼 조금 아슬아슬 하겠군.”
“응?”
“의녀문에서 여기까지 내 경신술로 하루 정도 걸렸소.”
“으엑?!”
독고령은 당황했다.
무명이 가진 무공 중 가장 대단한 것이 있다면 축지술에 가까운 신묘한 경신술이었다.
아무리 먼 거리라도 순식간에 이동하는 그 특유의 경신술은 적어도 독고령이 아는 범위 내에서 따라 잡을 이가 없었다.
그런 그의 경신술로 하루 정도 걸리는 거리라면… 지금 자신의 경신술 기준으로는 쉬지않고 죽어라 달려야 5일 정도 걸릴 거리였다.
그만큼 무명의 경신술이 뛰어나기도 했고, 독고령의 경신술이 모자라기도 했다.
“아… 아니… 개새끼야!!”
“… 미안하오.”
“아니, 시발!! 가까운 근처 동굴에서 봐도 될 걸 뭐 시발 이런 먼 곳까지 와서…”
“… 할 말이 없소. 내 잘못이오.”
“캬아아악!!!”
독고령이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아니, 시발… 5일 뒤면…’
하늘을 쳐다보자 벌써 차오르기 시작한 달이 보였다.
‘지금부터 죽어라 달려도… 아슬아슬하겠는데?’
게다가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혹시나 위일청이 이미 의녀문을 떠났다면…
“야, 너 아직도 의녀문 감시하냐?”
“… 하고 있소.”
“그나마 다행이네, 시발. 위일청은 어딨어?”
“… 의녀문을 기점으로 계속하여 동업자를 찾고 있소.”
“…”
안도의 감정과 함께 독고령이 미안함을 느꼈다.
‘… 괜히 나 때문에 고생하네.’
위치도 알았겠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독고령이 일어나는 순간, 무명이 물었다.
“갈거요?”
“가야지. 보름까지 지금 당장 달려도 빡빡해. 어디로 가면 되냐?”
“… 가끔은 돌아가는 길이 더 빠르기도 하오.”
“엉?”
“그대가 내게 베푼 은혜가 너무나 크게 느껴지니… 보답을 하게 해주시오.”
“됐어. 나중에 당문이나 잘 조져주면…”
“경신술이 모자라지 않소?”
“응?”
무명의 말이 독고령의 발목을 붙잡았다.
“동업자 양반은 항상 경신술이 모자랐소. 그래서 노순평 같은 약자도 놓치지 않았소?”
“… 가르쳐주게?”
“그대의 무리가 높으니 금세 배울 수 있을 듯 하오. 어떻소?”
“… 배우면 시간 줄일 수 있냐?”
“무재도 뛰어나시니… 하루 배워서 3일을 단축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가르쳐 줘. 지금 당장.”
독고령이 눈을 반짝이며 무명을 쳐다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정말 중요한 약속인가 보오?”
“흐엑?!”
“… 그 반응은 정말이지 익숙해지기 힘들군.”
“다… 닥쳐! 아무튼 빨리 경신술! 경신술!!”
“알았소. 음… 자리를 좀 옮기지.”
“그래, 가자.”
무명이 앞서 걷기 시작하자, 독고령이 그의 뒤를 따라걸었다.
‘급하긴 하지만… 정말 급하니깐.’
독고령에게 한 달을 더 참을 용기는 차마 없었다.
위일청과의 약속을 깨기도 싫었다.
그리고 가능한 일찍 도착해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 조금만 더 기다려줘요, 일청.’
금방 갈테니깐.
독고령이 자른 절벽의 공터에 도착하자, 무명이 발걸음을 멈춰섰다.
그가 허리를 숙여 돌멩이를 하나 주워들고는 독고령에게 보였다.
“동업자 양반.”
“어.”
“잘 보시오.”
“…”
무명이 돌멩이를 놓자 바닥에 부딪힌 돌멩이가 몇 번 구르고는 멈춰섰다.
“… 아시겠소?”
“뒤질래?”
“… 창천을 유영하는 새 또한 추락하오.”
“근데?”
“모든 것은 결국 땅에 이끌려…”
쉬이잉.
서늘한 소리와 함께 독고령이 유성도를 뽑아들었다.
“쉽게 말 안 하면 난 못 알아먹는다?”
“… 칼은 집어넣으시오.”
“콱 씨…”
독고령이 다시 유성도를 집어넣는 것을 보고 무명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게 고강한 무리도 깨우치면서 왜 이런 말은 못 알아들으시오?”
“못 배워쳐먹어서 그렇다, 새끼야.”
“… 동업자 양반을 보고 있으면 오성이 뛰어난건지, 운이 좋은건지 모르겠소.”
“진짜 한 대 더 맞을래?”
“… 쉽게 말하도록 노력해보겠소.”
무명이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러니깐… 음… 왜 그런 적 없으시오? 정말 지칠 때 몸이 무거워진다는 느낌 있잖소.”
“아… 뭔지 알지.”
“그럼 몸이 어떻게 되오?”
“바닥으로… 기울지?”
“그거요. 항상 누군가가 마치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느낌을 인지하는 게 핵심이오.”
“응?”
“활력이 넘칠 때는 쉽게 인지하기 힘들지. 허나 그 끌어당기는 감각을 이해했다면 나머지는 쉽소. 내공으로 몸을 반대로 끌어올리시오.”
“어… 어?”
“잠시 실례하겠소.”
무명이 독고령의 뒷덜미를 잡아 살짝 잡아올렸다.
“이러면 조금 몸이 가벼워진 것 같지 않소?”
“그렇지?”
“이걸 내 손이 아닌 동업자의 내공으로 하면 되오. 몸 전체에 퍼뜨려서.”
“오?”
무명의 설명을 들은 독고령은 무언가 알아차릴 것만 같은 실마리를 붙잡았다.
“이해했다.”
“다행이군.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소.”
“엉? 이게 끝이 아니야?”
“… 당연히 아니오. 그래도 내가 그대에게 가르치는 건데 답설무흔(踏雪無痕) 따위로 만족하겠소?”
“엑?!”
무명의 눈에 기이한 열의가 깃들었다.
“시간만 있다면 천상제(天上梯)의 경지까지 끌어올릴 터인데 시간이 없으니 어기충천(御氣衝天)정도까지만 가르치겠소.”
도약이나 돌진을 위한 준비자세없이 바로 몸을 움직이는 ‘어기충천’과 허공에 보이지 않는 계단이라도 있듯이 밟아움직이는 경신술의 최고 경지, ‘천상제’를 언급하자 독고령은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아… 아니… 그냥 빨리 달리기만 하면 괜찮은데…”
“괜찮소. 충분히 가능할 것이오.”
“아니… 지… 진짜로…”
“그대가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소?”
독고령은 무명과 보낸 기나긴 시간 중 그의 가장 상쾌한 미소를 보게 되었다.
그 멋드러진 미소는 살막의 안가를 지키는 청년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다 마음먹기 달렸소.”
그 미소를 보고 독고령은 스스로를 원망했다.
‘조졌네,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