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13장. 보름달이 뜨기 전에 - (8)
손에 일렁이는 분홍빛의 덩어리를 확인한 후, 독고령은 햇살의 눈부심에 얼굴을 찡그렸다.
‘… 그새 밤이 다 지났네.’
오랫동안 앉아 있어 뭉쳐있던 몸을 풀어주고는 독고령이 일어났다.
“…”
바뀐 건 아무 것도 없었다.
깨달음을 얻으면 무언가 큰 변화가 있을 줄 알았지만, 신체의 변화도, 혈도의 변화도, 내공의 상승도 없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독고령은 세상이 조금은 작아진 듯 느껴졌다.
‘무명을 한 대 쥐어박고는… 위일청을 만나러 가자.’
속으로 되뇌이며 독고령이 주먹을 꾸욱 쥐었다.
‘일단 시험부터 해봐야겠군.’
독고령이 밖으로 나오자 마침 마당을 쓸고 있던 청년이 그녀를 보고는 웃으며 인사했다.
“일어나셨습니까, 소저?”
“어. 좋은 아침이네.”
“해장할 만한 걸 준비해드릴까요?”
“아냐, 됐어. 그보다 근처에 칼 휘두르기 좋은 장소 없냐? 수련장 같은 곳.”
“어… 저 쪽으로 가보시죠. 동굴 옆에 널찍한 공터가 있습니다.”
“그래, 고맙다. 밥은… 어…”
독고령이 소매를 뒤적거렸지만, 잡히는 것은 태양화리의 내단 외엔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청년이 웃었다.
“괜찮습니다. 막주님이 알아서 하시겠죠.”
“… 그래. 납치는 그 새끼가 했으니깐 신세 좀 지마.”
“예, 크큭. 다녀오십쇼.”
청년이 다시 마당을 쓰는 것을 보고 독고령은 그가 가르쳐 준 공터로 향했다.
공터에 도착하자 옆에는 깎아지르는 듯한 바위 절벽이 있었고, 그 절벽 끝에 태양이 걸려있었다.
“음…”
허리에 매달린 유성도를 뽑아든 뒤, 독고령은 아까와 똑같이 ‘차가운 불’을 검에 입혔다.
도신을 따라 분홍색의 기운이 반 쯤 입혀지자, 갑자기 기운이 끊겼다.
‘생각보다 내공의 소모량이 많군.’
음기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양기가 문제였다.
이 양기를 어디서 수급해야할까 고민하자 가장 먼저 위일청이 떠올랐다.
‘… 그 쪽은 안 되고.’
어디서 양기를 수급해야할까 고민하던 와중, 그녀가 아까 소매를 뒤적거리며 발견했던 태양화리의 내단이 떠올랐다.
내단을 꺼내든 독고령은 잠시 고민했다.
‘쓰읍… 아까운데…’
은관영이 태양화리의 내단은 구명용 환약으로 최상급이라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잠시 망설여졌지만, 이내 독고령은 눈 딱 감고 환약을 입에 털어넣었다.
‘시발… 이럴 때 써먹는 거지. 어차피 먹어도 5개가 남으니깐…’
환약을 삼킨 뒤, 독고령은 양기가 끌어오르길 기다렸다.
“… 뭐야, 시발?”
혹시나 운영에게 사기라도 당했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몸 내부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극양의 기운이 샘솟았다.
“윽…!!”
생각보다 강력한 양기에 화들짝 놀란 독고령이 재빨리 음기를 끌어올려 두 기운을 섞기 시작했다.
한 번 만들어냈던 분홍색의 기운은 금세 익숙해져 생각보다 쉽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일단 칼에 실어낸 분홍색의 기운을 보고 독고령은 고민했다.
“어…”
차갑게 타오르는 분홍빛 불을 보며 독고령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은 고요하지만, 휘두르는 순간 무언가 벌어질 거라고.
독고령이 주변을 몇 번 살펴보고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서야 도를 고쳐잡았다.
“일단 휘둘러봐야 뭘 알지.”
도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독고령이 자세를 취했다.
‘… 괜히 나무나 자르긴 그렇고…’
주변을 둘러봐도 딱히 뭔가 벨만한 게 보이지 않자 독고령은 일단 한 번 가볍게 휘둘러보자는 마음으로 절벽을 향해 도를 내리그었다.
휭!
“오…”
그냥 한 번 칼을 내리그은 것 뿐인데도 손에 전해지는 감각이 전혀 달랐다.
바람마저 갈라버리는 듯한 상쾌한 감각에 독고령이 기분 좋아하고 있을 즈음.
“… 어?”
그녀의 감각이 이변을 감지했다.
“어… 어어…”
시야 멀리 보이던 바위 절벽이 어딘가 비스듬해 보였다.
쿠구구궁.
조금씩 미끄러져 내리는 거대한 바위 절벽을 보고 독고령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콰과광!!
이윽고 잘린 바위 절벽이 떨어지며 거대한 굉음을 내며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보며 독고령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 뭘 가르쳐 준거야, 미친 영감탱이…”
이 기술은 무명에게 쓰면 큰일나겠다 생각하며 독고령은 남궁원청을 책망했다.
새로운 기술의 위력을 확인한 뒤, 독고령은 다시 안가로 돌아왔다.
그 때, 그녀의 모습을 본 청년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소… 소저!”
“어, 왜?”
“바… 방금! 사… 산이 갈라졌습니다!”
“…”
자신이 했다고 말해도 미친 놈으로 취급 받을 거 같아서 독고령은 그냥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오래되어 보이던데 그냥 낙석이겠지.”
“가… 갑자기 세상이 갈라진 것 같았…”
“정신차려, 새끼야. 젊은 나이에 벌써 미친 거냐?”
“아… 아니… 진짠데…”
청년이 혼란에 빠져있자, 독고령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됐고. 밥이나 좀 줘. 먹고난 뒤에 무명이나 만나야겠다. 걔는 아직 동굴 안이야?”
“아… 막주님은 출타하셨습니다.”
“엑?!”
“… 이따 해가 지고 나서야 돌아오지 않을까 싶은데요.”
“아잇, 시발 진짜…”
돌아갈 시간이 조금 늦어졌다 생각하며 독고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밥이나 줘.”
“… 네. 근데 진짜 산이 갈라졌…”
“맞으면 정신차릴래?”
“… 금방 가져다 드리지요.”
청년이 조용히 물러나는 것을 보고 독고령이 하늘을 쳐다봤다.
‘… 해 떨어지려면 한참이겠구만.’
밥 먹고 어떻게 시간을 때워야할지 고민하며 독고령은 청년을 기다렸다.
*
“… 진짜 밤에 돌아오는 거 맞아?”
“저도 모르죠. 어디 가신다고 말씀하시고 가는 건 아니니깐요.”
“시발.”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음에도 무명은 커녕 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자 독고령은 점점 짜증이 일었다.
탁탁탁탁.
독고령이 다리를 떨며 바닥을 계속 차고 있자, 청년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 전서구라도 보내볼까요?”
“그럼 바로 오냐?”
“… 그건 아니고요.”
“시발.”
탁탁탁탁.
독고령의 다리 떨림이 아까보다 조금 더 빨라진 것을 보고 청년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안에 들어가계시면 온 뒤에 제가…”
그 때.
독고령의 발이 멈췄다.
“왔다.”
“예?”
그녀의 말과 동시에 그림자가 일렁거리더니 풍경 속에 갑자기 무명이 나타났다.
“아, 막주. 오셨습니까?”
청년이 그에게 살갑게 인사하며 다가갔다.
하지만 무명이 손을 들어 그를 막아세웠다.
“막주?”
“물러나 있거라. 둘이서 할 얘기가 있으니.”
“… 예.”
청년이 멀어지자, 무명이 독고령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동업자 양반 맞소?”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하루 만에 분위기가 바뀌었군.”
“그냥. 이런저런 일.”
“… 방금 눈으로 나를 쫓았던 거 같소. 내 말이 맞소?”
“보이더라고.”
독고령이 손가락을 들어 그가 이동한 궤적을 그리며 말했다.
“이렇게 움직이면 안 불편하냐?”
“… 깨달음을 얻었나보오.”
“덕분에.”
독고령이 그에게 포권으로 감사를 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 좀 할까?”
“즐거운 얘기는 아닌 듯 하오.”
“그렇지. 일단… 음…”
독고령이 턱을 긁적이다,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한 판 붙자.”
“그 상태로 말이오?”
“저거.”
독고령이 손으로 절벽을 가르켰다.
“내가 했다.”
“…무슨 소리를…”
무명이 독고령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며 절벽을 보자, 그의 눈에 깔끔하게 잘린 단면이 보이자 당황했다.
‘… 자연적으로 생긴 낙석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녕…!’
무명의 무덤덤한 얼굴에 파문이 일자 그 모습을 보고 독고령이 웃었다.
“크큭. 쫄지 마, 쫄지 마. 내가 저걸로 너를 베면 너 진짜 죽을 거 같아서 그거까진 좀 그렇고…”
그녀가 유성도의 손잡이를 툭툭치며 말했다.
“가볍게. 비무 정도로 하자.”
“무슨 연유로 그러시오?”
“그냥 널 한 대 패고 싶어서.”
“…”
“어제 네 말을 듣고 기분이 조금… 개 같더라고.”
“어제의 그대는 그런 소리를 들을만했소.”
“그치? 내가 생각해도 그렇긴 하더라.”
독고령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깐 너도 한 소리 들어라.”
“음?”
“내가 말 주변이 영 없기도 하고, 길게 말하기도 귀찮으니깐.”
챙!
독고령이 유성도를 뽑아들었다.
“이걸로 얘기하자.”
“… 아무리 동업자 양반이라 하더라도 지금 내게 덤비는 것은 무리일 듯 하오.”
“너야말로 착각하는 거지, 새끼야.”
독고령이 자세를 잡고, 당장이라도 뛰어들 기세로 내공을 뿜어댔다.
“내가 언제 앞뒤 재고 덤비디?!!”
파앗!
독고령이 땅을 박참과 동시에 칼을 내려쳤다.
“음…!!”
자신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는 칼을 절정에 다다른 신묘한 보법으로 피하며 무명이 손을 들었다.
‘아무리 동업자 양반이라 해도 지금 그 나약한 몸뚱아리론…!’
도를 내려치며 텅 비어버린 그녀의 등에 일격을 가하려던 순간.
무명의 기감이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
독고령이 무명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무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내 모습을…!’
무명이 당황하며 거리를 벌리며 물었다.
“… 어떻게 꿰뚫었소?”
“뭐가?”
“방금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았소?”
“그래. 잘 보이더라.”
“방금 그대가 파훼한 것이 뭔지 아시오?”
“파훼까지야. 그냥 보이니깐 본 거지.”
“이형환위(移形換位)요.”
“그거 다 개지랄이야.”
독고령이 유성도를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아무튼 존나 빨리 피하는 거잖아? 그거면 됐지.”
“그리 단순히 치부할 것이 아니라 훨씬 고강한…”
“혀가 길다?”
독고령이 피식 웃으며 한 손을 들어올리곤, 도발하듯 까닥거렸다.
“쫄았냐?”
“…”
“아무튼 니 비장의 수가 나한테 막혔으니깐 지금 쫄리는거지? 그치?”
“아니오.”
“에이~, 맞잖아.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그리고 저게 네 전부는 아니잖아.”
독고령이 유성도를 고쳐잡으며 수비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번엔 네가 들어와라.”
“나는 살초 밖에 쓸 줄 모르오.”
“그러니깐. 네 절기 있잖아, 그거. 삼 초식짜리.”
“… 비무라고 하셨잖소?”
“기왕 하는 거 당연히 생사결로 해야지, 새끼야. 눈치가 없어.”
“…”
무명은 하루 만에 급변한 독고령의 태도에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그냥. 마음을 정했다.”
“뭘 정한 것이오?”
“둘 다 하려고. 복수도 하고, 사랑도 하고. 아, 그래. 새끼야, 내가 시발 위일청 좋아한다. 어제 말했나?”
“… 허튼 소리!!!”
무명의 기운이 폭사했다.
“두 개 다 하겠다고?!”
“왜 네가 화내냐? 아~”
독고령이 피식 웃었다.
“쟤 때문이지? 너한테 복수를 의뢰한 영감님의 손자.”
“… 닥치시오.”
“어휴… 무섭게 왜 그러냐? 거친 말도 쓰고.”
“더는 나를 도발하지 마시오.”
“왜? 못 할 거라 생각했냐? 그냥 둘 다 하면 되는 거 아냐?”
“그게 말처럼 쉽소?!”
“해보지 않고 징징대는 것보단 어렵긴 하지.”
“… 선을 넘는구려.”
무명이 두 팔을 축 늘어뜨리며 전신의 힘을 뺐다.
자연체.
어떤 자세로도 이어질 수 있는, 살수에게 있어 가장 위협적인 자세.
무명이 제대로 해 볼 생각인 듯 보이자, 독고령 또한 집중했다.
“무명.”
“…”
“저 놈한테 사실을 말하고, 용서를 받아라. 그게 너도 더 편할거야.”
“상관없는 일에 끼어들지 마시오.”
“그럼 내기로 하자.”
“진심이오?”
“어, 진심으로.”
꾸욱.
독고령은 저도 모르게 유성도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이기면 너는 저 청년한테 사실대로 말하고, 사과를 받아라.”
“불가하오.”
“정 불안하면 나중에 해도 돼. 내가 먼저 앞서서 보여주마.”
“무엇을?”
“양립할 수 있음을.”
조금씩 주변의 소리가 사라졌다.
독고령의 날카로워진 기감은 오롯이 무명에게 집중되었다.
“먼저 내가 보여주마. 복수도, 사랑도. 모두 쟁취하는 것을.”
“그것이 무슨 상관이오?”
“너도 용서 받은 채, 복수를 하며 살아갈 수 있다. 편히 죽을 수 있어.”
“나는 그대와 다르오.”
“다르지 않아.”
한없이 좁아진 세상에서 독고령은 오직 자신과 무명만을 남겨놓았다.
이 처음 느껴보는 신기한 감각 속에서 독고령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전능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너 또한 나처럼 병신 같은 고민으로 앓고 있으니깐.”
“헛소리.”
“꼬우면 알지?”
독고령이 무명을 비웃었다.
“힘으로 듣게 만들던가.”
무명이 독고령에게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