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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화 〉13장. 보름달이 뜨기 전에 - (7) (106/225)



〈 106화 〉13장. 보름달이 뜨기 전에 - (7)

홀로 남은 독고령은 술을 들이키며 무명의 말들을 되뇌였다.

[변명을  하는군.]
[그대는 이제 내게 ‘488번째 짐’이 되어버렸소.]
[얘기를 나눠 즐거웠소, 독고령.]

“시발…”

 하나의 술병을 집어들고는 입으로 가져갔다.

‘내가 변했다고?’

이미 몇 번이고 들은 얘기다.

하오문주도, 신의도, 검신도.

자신을 아는 모든 이들은  똑같이 말해왔다.

자신이 변했다고.

어느정도 자각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생각보다 싫지는 않았음을 독고령은 이제서야 깨달았다.

무명의 차가운 말투에, 이제는 더 이상 자신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다는 말투에 화가 난 뒤에야 독고령은 깨달았다.

스스로가 이 변화를 즐거워하고 있었음을.

그렇기에 무명이란, 어찌 보면 자신과 가장 닮은 이가,그 변화를 매도한 것이 조금은 화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독고령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아니… 시발, 뭐지?’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혼자 천축으로 나서고자 제 발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막상 위일청과 백리소현, 그리고 은관영과 떨어지자 독고령은 알 수 없는 감각을 느꼈다.

외로움.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산 감정이었다.

“… 보고 싶네, 다들.”
“누구 말입니까?”
“꺄악, 시발!!”
“…”

갑자기 옆에서 타인의 목소리가 들리자 독고령이 화들짝 놀랬다.

“너… 너 시발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아까부터 계속 여기 있었습니다.”

무명의 명에 따라 백주와 안주를 가지고 온 청년이 옆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너… 거기서 뭐 하냐?”
“소저께서 술을 많이 드시길래 취하면 옮겨 드리려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놀래켰다면 사죄드립니다.”
“…”

청년이 고개를 푹 숙였다.

“… 너도 살수냐?”
“제가요? 어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안가를 지키는 역할에 불과합니다.”
“살막에 그런 놈도 있었구만.”
“저는 살막 소속도 아닙니다.”
“… 그럼 넌 도대체 뭐냐?”
“음… 그러게요.”

청년이 실없이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 소저께서는 보아하니 막주님과 좀 친해보이십니다?”
“… 이젠 아니지.”
“혹시 막주님의 얘기를 좀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남 얘기를 하는 취미는 없어.”
“아쉽군요. 할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 응?”
“아,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흐음…”

청년이 빙긋 웃으며 독고령을 쳐다보았다.

“뭐라고 설명해야할 지 모르겠네요. 남 얘기는  줄 모르니 제 얘기나 들어주시겠습니까?”
“…”

독고령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그가 싱긋 웃으며 독고령의 맞은 편에 앉았다.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까요…”

그가 실실 웃으며 잔을 만지작거리자 독고령이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 감사합니다. 음… 저는 할아버지를 찾고 있습니다.”
“언제 없어졌는데?”
“한 10년 됐습니다.”
“…”

그가 말한 시기가 무명이 동굴에 갇혔던 시기와 비슷하자, 독고령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냥 어릴 때라서 할아버지가 음… 객사라도 하신 줄 알았습니다. 근데 어느 날, 막주께서 저를 찾아오시더군요. 할아버지에게… 빚을 졌다고요.”
“뭐라고 하디?”
“… 복수를 원하냐고 물으시더라고요. 크큭, 어린아이한테 그게 무슨 말인지 원.”
“그래서?”
“그냥 일자리나 하나 구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어딨는지 알려달라 얘기했죠.”
“…”

청년의 잔이 바닥을 보이려하자 독고령이 그의 잔을 채워줬다.

“감사합니다. 허나 제가 술을 잘 못 해서요.”
“… 그러냐?”
“예. 뭐  후로 여기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냥 가끔 오는 분들의 뒷처리를 해주는… 음… 저는 스스로를 점소이라 생각하고 지내고 있죠, 크큭.”
“… 할아버지는 찾으면 어쩌려고?”
“묻어드려야죠.”

청년의 대답은 그가 어느 정도 진실을 알아차렸음을 의미했다.

“… 저도 바보는 아닌지라  곳을 들리는 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차린 뒤엔… 막주께서 할아버지와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겠더군요.”
“그런데도 여기 있나?”
“뭐, 어쩌겠습니까. 은혜를 입었는데. 그리고… 음…”

술을 잘 못 마신다고 말했으면서 청년이 술 잔을 불끈 쥐고는 또   들이켰다.

“크으… 이리 독한 걸 어찌 드시는지…”
“익숙해지면  넘어가더라.”
“그렇습니까? 저는 힘들겠네요.”

입가를 소매로 훔치고 청년이 말을 이어나갔다.

“… 막주를 옆에서 보다보니 아무 말도  하겠더군요.”
“…”
“그거 아십니까? 저희 막주님, 잠을 못 주무십니다.”
“알아.”
“아시는군요? 살막 내에서도 아는 이가  없는데요, 크큭. 역시 친하신 분이 맞군요.”
“실없는 소리는 됐어. 그래서?”

독고령은 스스로 살짝 취기가 올라왔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번잡하게 말을 골라서 하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았다.

“너는 아무 감정도 없냐?”
“네?”
“너가 말한 걸 들어보니 대충 눈치는 챈 거 같은데 아무 감정도 없어?”
“그치만… 얼마나 힘들어 하시는지 봤으니깐요.”
“뭐?”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밤에 잠도 제대로  주무시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막주님을 알고 있기에… 저는 그냥 기다리고 있습니다.”

청년이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 때가 되면 말해주시겠죠.”
“안 말하면?”
“안 말하면 어쩔 수 없죠.”
“…”

그의 대답을 들은 독고령은 답답했다.

“아니… 그… 하… 아니다.”
“모든 이가 반드시 은원을 갚는 건 아니죠.”
“응?”

청년이 독고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살면서 입은 은혜를 모두 다 갚아보셨습니까?”
“… 몇 개는 놓쳤겠지.”
“근데 원한에는 왜 집착하십니까?”
“속이 뒤집히니깐.”
“그렇습니까? 용서를 생각해  적은 없으신가요?”
“없어. 단 한 번도.”
“그렇군요.”

청년이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는 원한을 지고 살아갈만큼 용기는 없습니다. 헌데 원한을 용서할 용기는 있습니다.”
“… 뭐?”
“언젠가 막주께서 제게 진실을 말하는 날이 혹여나 찾아온다면… 저는 막주를 용서해줄겁니다.”
“…”
“그리고는 대가로 막주님께 점소이나 하나  붙여달라고 해야겠군요. 이 안가, 혼자서 관리하기 너무 큽니다. 외롭기도 하고요.”

청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이… 독고령에겐 너무나 눈부시고, 멋졌다.

그렇기에 독고령은 자연스레 그에게 궁금증이 생겼다.

“너는… 대단한 놈이군.”
“예?”
“존경스럽다고.”
“크큭… 감사합니다.”
“뭐, 하나만 물어보자.”

독고령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어봤다.

“… 내 얘기는 아닌데 말이야.”
“예.”
“… 미칠듯이 복수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 복수 때문에 미치기도 했어.”
“네.”
“근데… 동시에 미칠듯이 사랑하는 사람도 있어.”
“그런데요?”
“… 복수를 계속 행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지도 몰라.”
“슬프군요. 복수를 멈출 수는 없나요?”
“없어. 절대 없어. 그 사람이 살아온 일생이 복수를 위해서 살아왔고, 그 사람이 복수를 못 마치고 눈을 감으면 원령이 되어서라도 원수를 갚을 거야.”
“음… 그럼 답이 하나 뿐이네요.”

청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둘 다 해야겠네요.”
“뭐?”
“복수를 포기하고는 못 산다고 하셨잖습니까? 그러면 사랑도 하고, 복수도 해야죠.”
“아… 아니…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니깐?”
“안 죽게끔 노력해야죠. 아니면… 같이 죽어달라 부탁하는 것도 괜찮겠군요.”
“새끼야, 남의 얘기라고…!”
“그쵸. 남 얘기죠.”

청년이 독고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깐 당사자가 마음 가는대로 해야되지 않을까요?”
“응?”
“세상에 ‘절대’라는 것은 없더라고요. 결국 마음은 바뀌기 마련이고, 그 때마다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면 후회는 안 하더라고요.”

청년의 말을 듣는 순간, 독고령은 남궁원청과 나눴던 선문답이 떠올랐다.

‘아…!’

[베고자 마음 먹으면 다 벨 수 있다네. 무엇으로, 어떤 걸 벨지 고르기만 하면 된다네.]
[정 선택지가 보이지 않을 때는 마음 가는대로 선택하게]
[정하기 전까지는 뭐든지  수 있다네.]
[결국 사람은 마음 먹기 따라 달라지는 법이니.]

갑자기 멍하니 입을 벌리고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는 독고령을 보고 청년이 물었다.

“소… 소저?”
“혹시 무명은 어딨냐?”
“예?”
“아니. 막주.”
“아… 보통 동굴에서만 지내셔요. 안가를 별로  좋아하시더라고요.”
“고맙다.”

독고령이 고개를 들어 달을 쳐다보았다.

이제  차오르기 시작한 반달을 보고 아직 시간이 남아있음을 확인한 그녀는 청년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잠시 머물 수 있냐?”
“있기야 한데… 머물다 가시려고요?”
“내가 뒤가 찝찝한 건 못 참아서.”
“예?”
“니네 막주, 한 대만 패고 가려고.”

슬쩍 주먹을 내보이는 독고령을 보며, 청년이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정말요?”
“새꺄, 내가 살면서 또 거짓말은 안 해본 사람이야.”
“그러시군요, 크큭. 그럼… 너무 아프게만 때리지 말아주십쇼.”
“오냐.”


*

청년에게 안내받아 방으로 들어온 후, 독고령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병신같은 고민을 했군.’

위일청과 당문.

사랑과 복수.

따스함과 차가움.

굳이 두 개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

내내 머릿 속을 가리고 있던 뿌연 안개가 걷힌 느낌이었다.

무명의 실망 가득한 소리를 듣고 난 뒤, 자신도 모르게 분노하여 그의 말에 반박하는 스스로를 깨닫고 독고령은 알아차렸다.

‘나는…  따스함이 좋다.’

백리소현의 따스한 포옹이,

은관영의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위일청의 온기가 좋았다.

동시에… 여전히 당문이 싫었다.

모용이 싫었고,

무림이 싫었다.

‘둘 다 택한다.’

남궁원청과 나눴던 선문답을… 지금에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듯 했다.

‘결국 필요한 건 옳은 선택 말고, 원하는 선택…’

당문의 복수도, 위일청을 향한 마음도 둘 다 포기할 수 없었다.

평생을 함께해온 복수심도, 한 순간의 따스함도 둘 다 자신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독고진이고, 독고령이다.’

그녀가 천천히 내공을 끌어올렸다.

상상하는 것은 언제나와 똑같았다.

차가운 불.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불가능의 상징.

하지만 남궁원청은 말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하단전의 회음혈에 위치한 음기를 끌어올림과 동시에 상단전의 천회혈에 위치한 양기를 끌어내려 중단전에서 둘을 뒤섞기 시작했다.

독고령이 독고진이던 시절부터 간직해온 한 줌에 불과한 미세한 양의 극양지기.

독고진이 독고령이 되면서부터 간직해온 막대한 양의 극음지기.

양립할 수 없는 두 기운이었지만, 독고령은 천천히 자신의 내면에 간직해  심상을 구현해나갔다.

‘양기는 불, 음기는 물.’

물처럼 흐르는 불을 상상했고,

‘양기는 태양, 음기는 달.’

태양과 달이 함께 공존하는 하늘을 상상하며,

‘양기는 뜨거움, 불은 차가움.’

차가운 불을 만들어냈다.

“…”

이윽고 눈을  그녀는 자신의 손에 깃든 분홍빛의 덩어리를 보고 씨익 웃었다.

“차가운 불.  거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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