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13장. 보름달이 뜨기 전에 - (6)
무명의 질문을 들은 독고령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복수를 잊었냐고?”
“아니오?”
“미쳤냐…?”
독고령의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며 온 몸에 피가 돌았다.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그녀의 살기에 반응해 자연스레 내공이 들끓었다.
“내가 복수를 잊어?!”
으르렁대는 독고령의 목소리가 공동에 울려퍼졌다.
그 모습을 보고 무명이 피식 웃었다.
“… 이제야 익숙한 동업자 양반의 모습이 되었구려.”
“뭐?”
“사죄하겠소.”
무명이 독고령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그대가 남긴 편지를 보고 말았소.”
“흐엑?!”
“… 흐엑?”
독고령의 괴상한 반응에 무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런 행동거지는 안 해주셨으면 좋겠소. 내가 다 혼란스럽소이다.”
“펴… 펴펴펴… 편지를 봤다고?”
“그 눈물 젖은 편지를 보고 그대가 여인이 되어 이별을 아쉬워하는 줄 알았소.”
“흐아아…”
독고령이 부끄러움에 뺨을 붉히자 무명이 얼굴을 찌푸렸다.
“… 뭐하자는 거요?”
“ㅁ… 뭐, 새끼야?!”
“마치 부끄러워하는 꼬락서니군. 정녕 광마가 맞소?”
“아니, 시발 아까부터 왜 계속 지랄이야?!”
“쉬이 믿기 힘든 얘기지 않소? 남자가 여자가 되었다는 것도 못 믿을 일이고…”
무명이 손가락을 들어 독고령을 가리켰다.
“그 동업자 양반이 이런 꼬락서니가 된 것도 그렇고.”
“… 내 꼬락서니가 뭐?”
“여인이 되셨소.”
“내가?”
“그렇소. 몸만 여인이 된 게 아니라… 마음마저 여인이 된 것만 같소이다.”
“허튼 소…”
“앉는 법이 달라지셨구려.”
“뭐?”
무명의 손가락이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
“무릎을 꿇고 앉아계시구려. 항상 다리를 벌리고 앉은 걸로 기억하오.”
“이게 뭐가…”
“더 이상 눈을 치켜뜨지 않으시는구려. 상대를 노려다보지도 않고. 항상 날 선 기세로 주변을 압도하던 분위기도 사라지셨소.”
“…”
“그대가 아까 말했지. 빙궁의 신물을 훔쳤다가 과도한 음기로 여성이 되었다고. 그래서 극양의 신물을 통해 다시 남성으로 돌아가겠다 하셨소.”
“그래.”
“아직도 천축에 도달하지 못한 연유가 이해가지 않소.”
“… 이제 곧 가려고 했다.”
“색마와 우연히 만났다고 하셨지?”
“… 그래.”
“혹시 색마와 잤소?”
“너…!!”
독고령이 발끈하는 것보다 더 빨리 무명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화는 내가 내야할 상황이지. 어차피 남자로 돌아갈건데 남색이라도 탐할 생각이였소?”
“네가 화를 왜 내? 오늘따라 말이 많다?”
“많을 수 밖에.”
무명이 으르렁댔다.
“독고진은 어디 갔소?”
“내가 독고…!”
“너는 아니야!!!”
쿠구궁!!
무명이 내지른 사자후에 동굴이 흔들렸다.
“지음을 만났다 생각했다! 어차피 홀로 해야할 복수행이지만, 그 길을 함께할 수 있는 동행자를…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줄 수 있는 친우를 만났다 여겼어!”
독고령이 반박하려고 했으나 무명의 강렬한 내공에 짓눌려 입을 열지 못 했다.
“한 때는 그대를 존경하기도 했다!! 나는…!! 나는…!!”
무명의 온 몸에 핏줄이 울긋불긋 솟아올랐다.
그리고 갑자기…
“쿠헉…!”
“무… 무명?!”
갑자기 무명이 검은 피를 토해냈다.
그를 보고 당황한 독고령이 일어나 그를 부축하려고 했으나… 무명이 그녀를 쳐냈다.
팡!
“가까이 오지 마시오!!”
“크윽…!”
무명이 격공장으로 독고령을 멀찍이 날려보내고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후욱…! 후욱…! 크윽…!”
무명이 뱉어낸 피가 부글부글 거품을 일으키며 돌바닥을 파고 들었다.
매캐한 연기가 올라오자 무명이 독고령에게 말했다.
“호흡을 멈추시오. 들이키면 죽소.”
“너… 뭐… 뭐야, 이거…”
“뭐긴 뭐겠소…”
무명이 씁쓸히 중얼거렸다.
“고독이지.”
*
매캐한 연기를 피해 무명이 독고령을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이동하는 와중, 둘은 서로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무명을 따라 동굴의 밖으로 나서자 제법 운취있는 정자와 함께 숙소처럼 보이는 건물이 나타났다.
그 때, 건물에서 한 청년이 튀어나와 무명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막주님.”
“술 좀 가져다주겠나?”
“어떤 걸로 드리면 되겠습니까?”
“…”
무명이 독고령을 쳐다보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거나.”
“백주로 가져다주게.”
“예, 막주.”
정자에 앉은 뒤, 청년이 술 상을 내오자 무명이 독고령에게 잔을 건넸다.
“… 받으시겠소?”
“그러지.”
“…”
묵묵히 무명이 건넨 술을 들이킨 뒤, 독고령이 물었다.
“… 여긴 살막의 안가(安家)냐?”
“그렇소.”
“중원 곳곳에 있다고는 들었지만… 생각보다 잘 해놨군.”
“살수는 오랫동안 험난한 곳에서 머무는 일이 많으니깐, 안가라도 조금 신경써놨소.”
“그렇군.”
독고령이 술병을 집어들어 까닥이자, 무명이 잔을 건넸다.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면서 독고령이 물었다.
“… 아까 그건 뭐냐?”
“말했잖소. 고독이라고.”
“그걸 묻는 게 아닌 줄 알 텐데?”
“…”
무명이 대답없이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대답을 기다리는 독고령을 묵묵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먼저 무례를 사과하겠소. 아까는 혼란스러워 무례를 범했…”
“됐고. 얼마 남았냐?”
“… 그리 길지 않다는 것만 알고 있소.”
“내가 아는 사람 중 의원이 있으니 그에게…”
“그가 당문보다 독을 더 잘 알지는 않을 것이오.”
“… 그렇게 심각하냐?”
독고령의 질문에 무명이 자신의 소매를 젖혀보였다.
드러난 팔은 살이 곪아 뼈까지 훤히 보이고 있었다.
이미 썩어 문드러진 그의 팔을 보고 독고령이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부터 그랬냐?”
“한 달 전부터 썩어들어가기 시작하더군. 근래 들어 가슴도 문드러지기 시작했소.”
“그동안 괜찮던 거 아니였냐?”
“몸에 독을 품고 있었는데 그동안 괜찮았던 게 이상했지.”
“…시발.”
답답함에 독고령이 술을 들이켰다.
“동업자.”
“왜?”
“… 미안하오.”
“뭐가?”
“나는 그대에게 내 복수를 떠넘겼소.”
“갑자기 뭔 헛소리야, 또?”
무명이 술 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가려다 멈칫하고는 내려놓았다.
“그 날… 그대와 만난 뒤. 나는 부끄럽게도 안심하고 있었소.”
“…”
“혹여나 내가 어느 날 객사하더라도… 그대가 내 복수를 대신 끝내주리라 멋대로 믿고 있었소.”
“네 복수는 네가 하는 거야. 나는 내 복수를 하는 거고.”
“… 그게 맞지. 허나 그 날, 나는 그대에게 복수를 허락받았소. 그대가 먼저 말했지.”
무명이 독고령의 눈을 쳐다보았다.
“강호에 존재하는 모든 당문의 목숨은 그대가 취할 거라고.”
“어. 너한테 떼 준 3할 빼고는 아직도 그래.”
“그 날 나는… 안심했소. 내가 죽더라도 그대가 언젠가 강호에 존재하는 모든 당문을 다 죽일 것이고, 나 또한 영면에 들 수 있으리라 여겼소이다.”
“…”
“그래서 더욱 화가 났소.”
무명이 거칠게 술을 들이키고는 소리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대가 변치 않으리라 생각했소.”
“… 내가 변했냐?”
“변했소.”
“어디가?”
독고령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여전히 당문을 생각하면 온 몸에 피가 돌고, 그 개새끼들을 죽이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리는데 도대체 네가 뭐라고 내가 변했다 판단하지?”
“왜 소중한 것을 만드셨소?”
“내가?”
“잃을 게 없는 자만큼 두려운 게 없지. 그대를 믿은 가장 큰 이유는 소중한 게 단 하나도 없다는 연유 때문이었소.”
무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하게 말해주시오.”
무명이 독고령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눈을 피하지 말고, 고민없이 즉답해주시오.”
“그러지.”
“색마를 사랑하오?”
“윽…!”
“대답하지 못 하는군. 답변 감사하오.”
“나는…!”
“충분히 들었소.”
무명이 독고령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술 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따랐다.
“이해는 하지만, 믿고 싶진 않군.”
“난 위일청과…”
“입으로는 거짓을 내뱉기가 참으로 쉽소. 허나 눈은 거짓말을 못 하지.”
“…”
“더는 아무 것도 묻지 않겠소. 그대에게 멋대로 기댄 내 잘못이지.”
독고령은 연거푸 술을 들이키는 무명을 보며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 무명은 위태로워 보였다.
말 한 마디에 당장이라도 꺾일 듯, 처량해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묵묵히 있다가… 독고령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 내가 따라줄까?”
“괜찮소.”
“… 나는 복수를 포기하지 않았어.”
“허나 이전과는 다를 것이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쾅!
독고령이 술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그래, 시발!! 내가 위일청을 좋아한다!”
“… 알고 있소.”
“그거랑 복수랑 무슨 상관이지?! 시발, 내가 도중에 멈춰설 병신으로 보이냐?”
“허나 이전보다는 허술해지겠지.”
“그럼 시발 어쩌라고!!!!”
무명의 말에 답답함을 느낀 독고령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시발 당장 가서 당 가주의 목이라도 따오리?!”
“이것 보시오. 변명을 다 하는군.”
“뭐?”
무명이 눈을 들어 독고령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앞뒤 재면서 행동하셨소, 동업자 양반? 죽이고 싶은 놈이 있다면 당당히 정문으로 쳐들어가 어떤 술수도 힘으로 깨부수고 광기 어린 웃음과 함께 목을 들고 돌아왔지. 그게 내가 알던 동업자였소.”
“힘만 되찾으면…!”
“처음 그대가 낫을 들고 사파의 도박장에 뛰어들던 날은 힘이 있었소?”
“!!”
무명의 일침에 독고령은 말문이 막혔다.
“보시오. 동업자께서는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 할 정도로 변해버렸소.”
“나… 나는…”
“한 때는 그대가 내가 짊어진 487명을 함께 짊어져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소.”
“나는…!!”
“헌데 아니였군.”
무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갑게 식은 눈으로 독고령을 내려봤다.
“그대는 이제 내게 ‘488번째 짐’이 되어버렸소.”
“아니야!! 나는…”
“잠시 얘기를 나눠 즐거웠소, 독고령.”
이제는 더 이상 ‘동업자’라고 부르지 않는 무명을 보며 독고령은 고개를 떨궜다.
“당문이 그대를 생포해달라며 의뢰를 요청했소. 그 쪽은 내가 알아서하지. 앞으로 쥐 죽은 듯 조용히 살아주시오.”
떠나는 무명을 독고령은 붙잡지 못 했다.
무명이 정자에서 내려오자,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청년이 무명에게 다가왔다.
“… 막주. 얘기는 끝나셨습니까?”
“그래. 저 자에겐 술이나 더 가져다주거라. 안주도 챙겨주고.”
“예. 백주면 되겠습니까?”
“독한 걸 원할 것이다.”
“… 알겠습니다.”
무명의 말에 따라 청년은 창고에서 독한 백주와 안주를 집어든 뒤, 정자로 다가갔다.
붉은 머리의 손님은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없었기에 청년이 입을 열었다.
“… 손님. 술을 더 가져왔습니다.”
“물어볼 게 있어.”
“예?”
독고령이 청년에게 물었다.
“내가 남자로 보이냐, 여자로 보이냐?”
“ㅇ… 예?”
“내가 남자야, 여자야?”
“다… 당연히 여자시죠.”
“그래, 크큭… 시발…”
독고령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청년이 가져다 준 백주를 집어들었다.
마개를 열고 병 째로 들이키는 그녀를 보며 청년이 고개를 숙였다.
“… 안주를 더 들고 오겠습니다. 속이 상하시겠군요.”
“…”
독고령은 대답없이 술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에 비친 반달이 유독 선명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