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13장. 보름달이 뜨기 전에 - (5)
위일청은 마지막으로 밤을 함께 보냈을 때, 독고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알았어요. 대신… 하루에 한 번은 나 만나러 와주세요.]
그녀의 말이 떠오르자, 위일청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
‘령이 먼저 말한 거니 한 번 찾아가야겠군요.’
그래도 밤에 령이 찾아오게 만드는 것보다 자신이 낮에 찾아가는 게 더 나으리라 생각하며 위일청은 독고령의 처소로 향했다.
그녀의 처소에 도착하고 문 앞에 멈춰선 위일청이 독고령을 불렀다.
“안에 있습니까, 독고 소저?”
“…”
인기척은 들리지만, 대답이 없자 위일청이 문고리를 붙잡았다.
“들어갑니다?”
“흐엑?! 자… 잠깐만!!”
“안에 계셨군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은 이상하게 느껴졌다.
살짝 젖은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위일청이 멈칫했다.
“왜… 왜 왔어요?!”
“점심이나 같이 먹자 싶어서요. 그보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목소리가…”
“아… 아무 일도 없어요!!”
다시 듣자 확실히, 독고령은 울고 있었다.
“… 무슨 일입니까, 소저?”
“아무 일도 아니에요.”
“아닌 거 같은데요?”
“제발… 그냥 가주세요…”
그녀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자, 위일청의 가슴이 아렸다.
“령. 고민거리가 있다면 얘기해주시겠습니까?”
문 하나 너머에서 독고령이 숨 죽여 우는 소리가 들렸다.
“…”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위일청은 답답했다.
‘… 무슨 고민이길래 우는 겁니까? 왜 저한테 얘기할 수 없는 건가요?’
“령. 듣고 있나요?”
“… 네.”
“왜 울고 있나요?”
“… 아니라고요…”
“…”
누가 들어도 울고 있으면서 아니라고 하는 거짓말을, 위일청은 눈 감아주었다.
그저 그녀가 먼저 말해주길 바라며, 위일청은 문 앞에 앉았다.
“무슨 고민인지 제게 얘기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함께 지내면서 독고령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에, 위일청은 그저 기다렸다.
“다만… 식사는 꼭 저랑 같이 하죠.”
그녀는 속내를 잘 털어놓지 못 하니깐.
“기다리겠습니다. 천천히 나오세요.”
하지만 시간이 주어진다면… 언제나처럼 부끄러움에 붉게 물들인 얼굴과 함께 조심스레 자신의 속내를 꺼내줄 것이라 믿고 있었기에.
“…”
그렇게 한참을, 위일청은 독고령을 기다렸다.
점심 시간이 한참 지나고, 해가 기울기 시작할 즈음.
위일청이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령. 괜찮나요?”
이렇게 오랜 시간 아무 답이 없으니 슬슬 그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 령?”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위일청의 가슴이 술렁였다.
게다가 언제부턴가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 설마…’
쾅!
문을 열고 독고령의 처소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편지였다.
“이… 이건…”
편지엔 두 문장만이 적혀있었다.
[사랑하지 않아요.]
[천축으로 혼자 먼저 떠날게요.]
“이… 무슨…”
위일청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말도 안 된다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독고령의 옷가지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위일청은 처소의 밖으로 나왔다.
그 때, 위일청의 머리를 관통하는 한 단어가 떠올랐다.
‘살막!!’
독고령이 쉬이 떠날 리가 없다며 위일청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때. 우연히 그 앞을 지나던 운소홍을 마주치자 위일청이 물었다.
“아… 위 공자.”
“운 소저! 혹시 령을 봤습니까?!”
“네…?”
“독고 소저요!”
“아… 아까 약재랑 먹을 걸 좀 챙겨달라고…”
“!!”
운소홍의 말을 들은 위일청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녕… 정녕 떠나신 겁니까? 도대체 왜…!’
“위 공자?”
“나… 나중에 뵙겠습니다! 혹시 검신께선 어디에 계신 지 아십니까?!”
“의약방에…”
“감사합니다!”
운소홍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약방으로 달려간 위일청은 벌컥 문을 열어재꼈다.
“검신 어르신! 안에 계십…”
“무슨 일입니까, 위 공자?”
“무슨 일인가, 위일청?”
“… 신의께서 함께 계셨군요.”
“보다시피 치료를 위해 왔네, 클클.”
남궁원청의 가슴에 새겨진 무시무시한 상처를 보고 잠시 당황했으나, 위일청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얘기했다.
“호… 혹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지 못 하셨습니까?!”
“무슨 말인가?”
“의녀문에 침입자가 있진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검신 어르신의 기감을 피할 이가 천하에…”
“그거라면 도움이 안 될 것 같구만.”
“…예?”
“보다시피 이 상태라서 말일세.”
검신이 가슴의 흉흉한 상처를 가르켜보였다.
“천마 놈이 남기고 간 저주지, 클클. 요즘 따라 상처가 심해져서 말일세. 예전만큼 기감이 예민치를 못 하다네.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구만.”
“…”
위일청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운영이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위 공자?”
“… 독고 소저가 사라졌습니다.”
“예?”
“음?”
“… 홀로 천축에 가겠다는 서신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허나… 시기가 시기인지라 믿기 힘듭니다. 소저와 나눈 약속도 있었고, 살수가 그녀를 노린다는 정보도 있었습니다.”
“흐음… 요 근래 주변에 혈향이 나더라니 그녀 때문인가?”
“예…”
심각해보이는 둘의 표정을 보고 운영이 물었다.
“아니… 그렇게나 강한 적입니까? 독고 소저라면 역으로 한 방 먹이고 돌아올 텐데요.”
“… 쉽지 않을걸세. 기감이 예전만 못 하다고는 하지만, 노부의 눈을 속일 정도면 꽤 실력이 있는 자일테지.”
“그… 그런…”
남궁원청이 위일청에게 물었다.
“그래서 자네는 어찌 할 셈인가?”
“찾아야죠.”
“혹여나 그녀가 서신에 적힌 대로 홀로 떠나고자 마음 먹었다면?”
“… 예?”
남궁원청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노부가 당사자가 아니라 쉬이 얘기할 수 없는 게 있다네. 허나, 노부가 알기론 그녀에겐 혼자서라도 천축으로 떠날 충분한 이유가 있다네.”
“…”
그의 말을 들은 위일청은 잠시 멈칫했다.
‘… 만약 독고 소저가 정말로 홀로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면…’
위일청의 머릿 속에서 만감이 교차하다… 이내 독고령으로 가득 찼다.
걸걸한 말을 내뱉는 독고령.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는 독고령.
자신에게 ‘당신을 좋아한다.’고 수줍게 고백하던 독고령.
그리고… 문 하나 너머로 울먹이던 독고령이 떠올랐다.
“그게 마지막이라 기억하긴 싫습니다.”
“음?”
위일청이 남궁원청을 직시하며 말했다.
“독고 소저가 제게 무엇을 숨기든 신경쓰지 않습니다. 허나, 제 곁을 떠날거라면 그녀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싶습니다.”
“서신을 썼다고 자네가 말했지.”
“필체를 위조했을 수도 있죠.”
“만약 정말로 그게 독고령의 진심이라면? 자네를 떠나고자 마음 먹은 게 그녀의 진심이라면 어쩔텐가?”
“그 때가서 생각하겠습니다.”
“…”
위일청이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남궁원청은 피식 웃었다.
“밖에 나가면 노부가 본가에서 데리고 온 아이들이 있다네.”
“예?”
“창천오검이라고 제법 한 수가 있는 놈들일세. 사람을 찾는 일이라면 머릿수가 많은 게 좋겠구만.”
“가… 감사합니다!”
“바빠보이니 어서 가보시게. 노부는 아직 치료가 덜 끝나서.”
“예, 어르신!”
위일청이 감사를 표하고는 밖으로 나섰다.
그가 떠나자 운영이 남궁원청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검신 어르신.”
“자네는 또 왜 그러나?”
“광마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셔서요.”
“음?”
운영의 말을 이해하지 못 한 남궁원청이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인가?”
“혹여나 광마가 정녕 납치되었다면 위기일테고, 자의로 길을 나섰다면… 외롭겠죠.”
“…”
“광마가 또 보기보다 여린 부분이 있는 친구라서요.”
“그 망나니 놈이?”
“예.”
운영이 옅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찾으면 좋겠네요.”
“… 그러게 말일세.”
“침 계속 놓겠습니다?”
“그래. 부탁하지.”
남궁원청이 다시 자세를 바로하자, 운영이 다시 침을 놓기 시작했다.
‘다시 보자 약속했잖습니까, 광마.’
약속을 어기기 싫어하는 친우가 이번에도 약속을 지키길 바라며.
*
똑. 똑.
“윽…”
물방울이 독고령의 이마에 떨어지며 그녀를 깨웠다.
‘머리 아파 뒤지겠네…’
차가운 돌바닥을 짚고 고개를 든 독고령은 주변을 확인하며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의식을 잃기 직전에 봤던 광경이 떠오르자 독고령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 무명!!’
분명 자신을 납치한 것은 무명이었다.
살막의 막주이자 중원 제일의 살수.
‘그 새끼가 왜…’
그 때.
독고령의 눈 앞이 일렁였다.
“… 깨어났나?”
쇠를 긁는 듯한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그림자에서 들렸다.
분명 걷고 있음에도 발소리와 인기척조차 없는 기이한 현상과 함께 독고령의 눈 앞에 무명이 나타났다.
“어…”
무명을 보는 순간 독고령은 상반되는 두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얼굴이라 약간의 반가움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정체를 쉬이 밝힐 수 없기에 찾아오는 답답함이 독고령의 입을 틀어막았다.
무명이 독고령의 맞은 편에 위치한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아혈은 막아두지 않았을텐데?”
“… 왜 나한테 이러는거지?”
“흐음…”
무명이 자그마한 비도를 꺼내들어 날을 갈기 시작했다.
“…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많다.”
“…”
“일단 가장 먼저… 검수인가, 아니면 도객인가?”
“뭐?”
무명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 한 독고령이 되묻자, 그가 비도를 역수로 고쳐잡으며 말했다.
“주로 쓰는 손가락을 잘라두고 얘기하는 게 편할 거 같아서 말일세.”
“미… 미친 놈아!”
“무례한 것은 그를 닮았는데 말이지…”
독고령이 눈을 깜빡이는 순간, 무명의 신형이 사라졌다.
“윽…!”
어느새 자신의 목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을 느낀 독고령이 식은 땀을 흘렸다.
“독고진은 어디 있나?”
“아니… 그…”
“그대는 도대체 누구인가?”
“으…”
독고령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무명의 칼이 그녀의 목에서 떨어졌다.
“오른손부터 시작해야겠군.”
무명이 독고령의 오른손을 향해 비도를 내리치는 순간.
“자… 잠깐!!”
“음?”
“이… 아… 그… 시발, 진짜…”
“시간 끌기라면…”
“487명.”
무명이 멈춰섰다.
“나는 6명. 너는 487명.”
“무… 무슨…”
“… 이런 꼬락서니로 다시 만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독고령이 긴 한숨과 함게 씁쓸하게 내뱉었다.
“하아… 오랜만이야, 동업자 양반.”
그녀의 말을 들은 무명의 눈이 커졌다.
“어… 어떻게…”
“… 얘기가 좀 길다. 듣겠냐?”
“…”
무명이 침묵으로 긍정하자, 독고령은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 정말 동업자가 맞소?”
“맞다니깐.”
“… 맙소사.”
무명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듣고도 믿지 못 할 얘기요.”
“… 나도 안 믿긴다.”
“무공은 어찌 되었소?”
“맥들이 틀어막혔다가… 이제 다시 복구하는 중이지.”
“…”
무명은 여전히 독고령의 이야기를 믿지 못 하는 눈치였다.
“… 그대와 나, 둘만이 알 법한 얘기들을 해보시오.”
“6명, 487명으로 부족했나?”
“다른 것 말이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대가 함정이라 생각했소.”
“함정?”
“그대가 외간 자식인 척 연기하여 끌어들이는 함정일 확률이 7할, 진짜 딸일 확률이 3할 정도라 생각했소.”
“콱 씨, 미쳤냐?!”
“… 그런 행동은 소름끼치게 동업자 양반과 똑같구려.”
“내가 독고진이라니깐?!”
“…”
답답해하는 독고령을 보며 무명이 물었다.
“당문을 습격할 때 쓰던 전략을 얘기해보시오.”
“그런 게 어딨어. 내가 깽판쳐서 이목을 끌면 네가 좀 하는 새끼들 목을 땄지.”
“우리가 매번 만나던 약속 장소는 어디였소?”
“그런 게 있었냐…? 그냥 네가 알아서 찾아왔잖아.”
“마지막에 만났을 때 나눴던 대화를 기억하시오?”
“그냥 평소처럼 ‘누구 목 땄다.’, ‘그러냐? 나도 같이 가자.’ 아니였냐…?”
독고령의 대화를 다 들은 무명이 몸을 떨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정녕 동업자 양반이였구려…”
“나 맞다고 새끼야.”
무명이 독고령을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헌데 왜… 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오?”
“… 뭐?”
“색마와 함께 한다고 들었소.”
“!!”
“… 여인이 되기로 작정한 것이오?”
무명이 독고령을 책망했다.
“복수를 잊은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