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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화 〉13장. 보름달이 뜨기 전에 - (3) (102/225)



〈 102화 〉13장. 보름달이 뜨기 전에 - (3)

은관영은 아직도 그 날을 기억한다.

어머니에게 화대를 못 주겠다던 사내의 다리를 잡고 늘어지다가 걷어차인 고통을 기억한다.

자신을 비웃으며 어머니의 화대를 화로에 집어던진 사내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리고 화로에 손을 넣어 은자를 집는 순간, 뜨거워서 떨어뜨린 은자를 대신 주워준 은인의 모습을 기억한다.

“조금만 식힌 뒤에 잡으세요. 불에 잔뜩 달궈져 뜨겁습니다.”
“아…”

은인은 달궈진 은자를 자신이 마시던 술 잔에 넣어 식히며 뒤돌아섰다.

“쓰레기 같은 분이군요.”
“뭐?”
“무공을 익힌 자가 한낱 어린아이를 핍박합니까?”
“넌 뭐야, 새끼야?”
“이름을 묻는다면 위일청이라 하고, 행동거지를 묻는다면 참견꾼이라 칭하겠습니다.”
“앙?”

험상궃은 사내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위일청의 주먹이 그의 명치에 꽂히자 사내는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커헉…!”

쓰러진 사내를 뒤로 하고, 위일청이  잔에 식혀둔 은자를 자신의 소매로 닦으며 은관영에게 건네주었다.

“괜찮은가요?”
“아… 네.”
“아닌  한데요?”
“아흣…!”

위일청이 화로에 집어넣었던 은관영의 손을 붙잡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 화상을 입으셨군요. 근처에 의원이라도…”
“의… 의원은 안 돼요!!”
“네?”

은관영이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돈이… 많이 들어서  돼요…”
“…”

바닥을 쳐다봤기에 은관영은 위일청이 어떤 표정으로 그 말을 내뱉었나 모른다.

“… 그럼 돈이 안 드는 방식은 어떻습니까?”
“네?”
“제가 아는 분이 있는데 그 분에게 찾아가 보시겠습니까?”
“그…”
“싫으면 싫다고 해도 됩니다.”
“…”

아직은 어렸던 은관영은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저… 저 아이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은공?”
“하오문에 맡길까 합니다. 제가 연이 있어서요.”
“저… 정말요?”
“다음에도 제가 도와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몸을 지킬 힘 정도는 키워두는 게 좋지 않을까요?”
“…어차피 창녀로 클 바엔… 하오문도가 더 나을테죠…”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은관영이 다시 위일청을 쳐다보았다.

“가… 갈래요.”

은관영의 대답을 들은 위일청이 무릎을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저는 소저의 의견을 묻는 겁니다.”
“… 네?”
“힘들 수도 있어요. 도중에 도망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가시겠어요?”
“엄마를 지킬수만 있다면… 괜찮아요.”
“…”

위일청이 은관영을 꼭 끌어안았다.

“착하군요.”
“흐앗?!”
“이름이 뭡니까?”
“… 없어요.”
“그럼 관영(琯玲)이라고 할까요?”
“무… 무슨 뜻인가요?”
“정성스럽고(款), 영리하다(怜)는 뜻입니다.”
“아…”

자신의 이름을 몇 번이나 되뇌이는 관영을 보며 위일청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 밤은 어머니랑 같이 지내세요. 그리고 내일 아침에 다시 봅시다.”
“… 네.”

다음 날, 은관영은 어머니의 곁을 떠나고 하오문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새로운 어머니를 만났다.

“이 아이를 하오문에 입문시키고 싶다고요?”
“예, 하오문주.”
“음…”

은약벽이 가까이 다가와 그녀를 쳐다보았다.

익숙한 눈빛이었다.

상품을 품평하듯 쳐다보는, 그런 눈빛.

하지만 조금은 더 따스한 눈빛이었다.

“그래요. 받아들이죠.”
“괜찮습니까?”
“문도는 많을수록 좋으니깐요. 이름이 뭔가요?”
“과… 관영이에요.”
“관영…”

은약벽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웃었다.

“일단 옷 입는 법부터 배울까요?”
“… 네?”
“옷은 권력이랍니다, 관영.”

은약벽이 박수를 치자, 밖에서 다른 여인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부터는 창녀의  ‘관영’이 아닌, 하오문도 ‘관영’이잖아요? 옷부터 하오문도답게 입죠.”

은관영은 그 날, 은약벽의 말을 잊지 않았다.

얼마 뒤, 위일청은 다시 길을 나섰다.

그가 떠나는 날. 은관영은 물었다.

“저…!”
“네?”
“다… 다시 보러 오실건가요?”
“음…”

위일청이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며 싱긋 웃었다.

“나중에  더 나이를 먹으면 다시 만납시다.”
“지… 진짜요?”
“네.”

위일청은 은관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무언가 대가를 바라고 도와드린  아닙니다만, 혹여나 제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느낀다면 나중에 다시 찾아오세요.”
“어… 언제요?”
“성인식이 지나고요. 자세한 건 문주님에게 물어보세요. 제가 이런 걸로는 잘 설명을 못 해서…”
“네!”

그 날, 은관영은 하오문주를 통해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하오문에 입문한 뒤, 은관영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수련했다.

다행히도 은관영은 재능이 있었다.

배우는 족족 빠르게 익숙해졌고,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음에도 나날이 성장해나갔다.

칭찬은 힘든 일을 잊게 해주었고, 조금씩 발전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뿌듯함도 느꼈다.

가끔씩 어머니를 만나는 날이면  동안의 노력이 모두 보상받는 듯 했다.

하지만 딱 하나, 지울 수 없는 괴로움은 타인이 자신을 ‘천재’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녀는 항상 ‘진짜’ 천재의 옆에서 붙어 살았기에.

“윽…!”

은호의 주먹에 나가떨어지자, 그가 당황하며 은관영에게 다가왔다.

“사매… 괜찮아?”
“… 신경쓰지 마세요, 사형.”
“미안…”
“사과도 좀…!”
“내가 조금 살살할 걸 그랬나…?”
“이익…!!”

은관영의 사형인 은호는 진짜 천재였다.

적어도 무공에 한정해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벽을 처음으로 깨달은 날, 그녀는 결국 폭발했다.

“문주님!”
“응? 무슨 일인가요, 관영?”
“저… 저는 더 이상… 못 하겠어요…”
“천천히 말해보세요. 그게 무슨…”
“으아앙…”
“하아…”

그 날, 은약벽은 밤새 은관영을 껴안고 그녀를 위로해주었다.

“… 관영.”
“네, 문주님…”
“은호가 싫은가요?”
“… 네.”
“왜 싫은가요?”
“… 제가 다시 창녀의 딸이 된  같아서요.”

은관영은 몸을 움츠리며 진심을 토해냈다.

“하오문에 입문하고 모두 잘 한다, 잘 한다 얘기만 해줬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정말 잘 하는 줄 알았어요. 달라진  알았어요.”
“그런데요?”
“노력만 하면 다 바뀔 줄 알았는데… 은호 사형을 보고 있으면… 자신감이 없어져요. 제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른이 되었군요, 관영.”
“… 네?”

은약벽이 은관영을 꼬옥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관영. 어른이 되는 조건이 뭔지 아나요?”
“… 잘 모르겠어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현실을 마주하는 거랍니다.”
“네?”
“아무리 무공에 뛰어난 재능이 있는 자라도 장강을 둘로 갈라내진 못 해요. 사람은 결국 한계가 있답니다?”
“…”
“하지만 한계를 마주하고도 살아야하기 때문에 다시 일어서서 걷는 순간. 그 때,  사람은 어른이 되는 거예요.”
“그런가요?”
“네. 관영은 지금 어른이 되는 과정이랍니다.”
“…”

은약벽의 말들은 항상 따스했다.

그녀의 가슴에 안겨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걱정은 잊혀지는 듯 했다.

“관영은 모르나본데, 은호도 관영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어요.”
“사형이요?!”
“그럼요. 은호가 정보를 잘 관리하던가요? 은잠술이 뛰어나던가요? 축골공도 관영보다 늦게 익혔잖아요.”
“그… 그치만… 성도 먼저 받았잖아요…”
“그건 은호가 밖에 나갈 일이 많아서 먼저 준 거죠.”

은약벽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람은 다 각자의 재능이 있는 법이랍니다. 자격지심에 매몰되지 말고 자신의 장점에 좀  집중해보세요, 관영.”
“…네.”

은약벽이 몸을 일으키더니 싱긋 웃었다.

“관영.”
“네.”
“오늘부로 관영은 소문주 후보랍니다.”
“제… 제가요?!”
“전부터 자격은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오늘에서야 확신이 들어서요.”

은약벽이 은관영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젠 창녀의 딸, 관영이 아니에요.”
“네?”
“하오문의 소문주 후보, 은관영이랍니다.”
“…”

그 날, 은관영은 은약벽에게 성을 받았다.

소문주 후보가 된 이후, 은관영은 자격지심을 이겨냈다.

더는 은호를 만나더라도 이전의 음습한 감정이 아닌 경쟁심이 솟아올랐다.

“사형. 어깨 좀 펴고 다녀요.”
“그… 그치만…”
“어휴. 사형도 이제 소문주 후보잖아요오?”
“…”
“밖에서는 사형 보고 ‘하오문의 파수꾼’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음침한 모습을 보이면 저희 평판이 깎여나가요오.”
“… 미안.”
“아잇, 참. 사과도 하지 마시고요.”
“응.”

은관영이 지적을 하고 나서야 어깨를 펴는 은호를 보며,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저 하오문주가 되고 싶어요.”
“… 사매라면 충분히 가능할거야.”
“아뇨, 단순히 그런 얘기가 아니라요. 사형을 꺾고 올라서고 싶어요.”
“으으… 굳이?”
“혹시나 사형이 하오문주가 되더라도 열심히 보필해 드릴테니깐, 서로 힘내요오.”
“으… 응…”

은호는 여전히 소심했지만, 은관영은  이상 그를 신경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소문주 후보가 모두 정해지면서 드디어 과업이 시작되었기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다.

“다들 모였네요.”
“네, 문주님.”

은약벽이 나타나자 하오문의 소문주 후보들이 다들 자세를 바로 했다.

“우리 하오문은 정보 집단입니다. 문주가 되기 위해선 많은 게 필요해요. 무림인이니 무공도 강해야 하고, 아랫 사람을  다루고, 정보도 파악할 줄 알아야하죠.”
“”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동행자입니다.”

은약벽이 소문주 후보들을 하나씩 쳐다보며 말했다.

“믿을 이 하나 없는 강호에서 등을 맡길 수 있는 친우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그렇기에 차기 문주는 여러분의 동행자가 누구냐에 따라 결정될 거예요.”
“네, 문주님!”

대부분의 소문주 후보들은 동행자를 누구로 할 지, 아직 결정도 못 지은 상태였다.

하지만 은관영은 처음 하오문에 입문하는 순간부터 이미 동행자를 결정해두었다.

“그럼 다들 기대하고 있을게요.”

은약벽이 웃으며 내실을 나서자, 은관영은 즉시 움직였다.

“사… 사매?!”
“나중에 봐요, 사형!”
“버… 벌써 정한 거야?”
“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거든요!”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 하고 은관영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래…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그리고 10여 년 가까이 지나 다시 위일청을 만난 뒤, 은관영은 여인이 되었다.

위일청의 옆에는 이미 다른 여인이 있었으나 은관영은 신경쓰지 않았다.

마음이 잘 맞는 언니가 생긴 느낌이기도 했고, 그저 위일청의 도움이 되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하오문에게 입은 은혜 또한 컸지만,  이전에 위일청이 없었으면 은관영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항상 위일청을 하오문보다 조금, 아주 조금 앞서 생각했다.

모든  완벽했다.

이대로 하오문주가 되고, 언젠가는 위일청의 정인이 되리라 생각하며 은관영은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

앞으로도 아무 문제 없으리라 생각하며.

“이 소저는 누구예요오?”
“광마 어르신의 따님입니다.”
“으엑?! 진짜요?”

독고령이 나타나기 전까지.

*

은관영의 발이 지면을 박차며 독고령을 향해 뛰어들었다.

“평소처럼 하세욧!!”
“야… 진짜!”

노리는 곳은 그 밉살맞은 주둥이였다.

쉬익!

섬뜩한 파공성이 코 앞을 스쳐지나가자 독고령이 당황하며 외쳤다.

“진심으로 하게?!”
“말했잖아요! 내공 쓰고 제대로 하자고!!”
“아, 진짜… 좀!!”

또 다시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은관영을 보며 독고령이 손을 넓게 펼쳤다.

탕!

독고령의 손바닥이 허공을 때리자 은관영에게 닿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몸이 뒤로 날아갔다.

“으윽…!”
“그 좀… 진정하고 말하자. 내가 말 실수한 건  뭐냐…”
“벌써 격공장도 익히셨네요… 진짜 밉살맞은 재능덩어리 같으니라고!”
“아니… 이건…”
“한 대만 좀 맞아요!”

은관영이 크게 발을 휘두르며  다시 뛰어들었다.

이번엔 후발선제의 묘리를 이용해 그녀의 발을 붙잡아 반대로 날려버렸다.

나가떨어진 은관영이 금세 몸을 일으켜 다시 자세를 취했다.

“너 나 못 이기니깐 좀…”
“독고 소저는 못 이긴다고 가만히 있을 건가요?!”
“아니, 그…”
“이익!!”

은관영이 또 한 번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녀의 주변이 내공으로 조금씩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독고령이 당황했다.

“야… 그… 그렇게까지…”
“독고 소저가 미워요!”
“어?”
“나는… 10년 가까이 위 오빠를 위해서 기다리고, 노력하고, 계속 위 오빠만 바라봤는데…! 고작 몇달 만에…!”
“아니… 그…”
“무공도 뛰어나고! 밤일도 재능 있는  보니깐 금방 제치겠죠?!”
“흐엑?!”
“가슴도  크고!!”
“아… 너… 너도 곧…”

대답할 말이 궁해지자 독고령의 눈이 뱅글뱅글 돌아갔다.

그 때.

“나는 아직 먼저 고백도 못 받아봤는데!!”
“아…”

은관영이 끌어올린 내공이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훨씬 먼저 좋아했는데!!”
“…”

그녀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고 독고령이 멈춰섰다.

“갑자기 들어와서는… 맨날… 흑… 밉살 맞은 말만 하고… 짜증나게…”
“… 미안하다.”

독고령이 고개를 떨구고 사과하자, 은관영은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흐아아앙!!!”
“…”

대성통곡하기 시작한 은관영을 보고 독고령은 어쩔 줄 몰라하다가 그녀를 껴안아줬다.

“… 미안. 그러니깐 그만 울자, 응? 뚝…”
“흐아아앙!!”
“…”

그 후로 한참을.

독고령은 은관영을 껴안고 위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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