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13장. 보름달이 뜨기 전에 - (2)
은관영과 헤어진 뒤, 독고령은 의녀문에서 조금 떨어져 나와 심호흡을 내쉬었다.
“후우…”
조금씩 기감을 날카롭게 끌어올리며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독고령의 기감에 걸리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짜증나네…’
얼마 전에 보낸 경고 때문일까?
살수들은 전보다 확실히 존재감을 감추고 있었다.
확실한 위치를 파악하고는 덮칠 생각이었으나 아무리 기감을 끌어올려도 전혀 걸리는 게 없자 독고령은 결국 유성도를 뽑아들었다.
‘타초경사다, 이 뱀새끼들아.’
풀을 두드리면 알아서 뱀들이 놀라 튀어나올 것이라 생각하며 독고령은 마음껏 기운을 드러냈다.
“어디까지 할 수 있나 시험도 해봐야겠군.”
일단 살수를 상대하게 될 지 모르니 가장 익숙한 도를 손에 쥐고 독고령이 내공을 실었다.
‘차가운 불… 차가운 불… 차가운… 불!!’
검신이 그녀에게 일러준 대로 독고령은 음기를 양기처럼 여기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튀어… 나와!!!”
콰광!!
독고령이 내공을 가득 실어 내리치자 그녀의 도에서 쏘아진 음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쩌저적!
주변 일대가 얼어붙으며 떨어지는 나뭇잎이 눈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광경을 보며 독고령은 만족스러운듯 씨익 웃었다.
‘괜찮은데?’
그 때, 독고령의 기감에 무언가 걸렸다.
‘찾았다!’
수풀 사이에 숨어있던 살수 중 하나가 그녀가 내뿜는 한기를 견디지 못 하고 튀어나오자, 독고령이 연검을 꺼내휘둘렀다.
’후예만궁(后羿彎弓)’
사일검법의 가장 기본적인 초식 중 하나, 절초로 향하기 위한 미끼의 찌르기.
쐐애액!!
독고령의 연검이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쏘아져 살수의 목을 향해 날아가는 순간…
챙!
“엥?”
살수가 그녀의 찌르기를 피한 것도 아니고, 튕겨냈다.
“하… 좀 한다?”
독고령이 유성도를 고쳐쥐곤 건들거리며 살수에게 다가갔다.
“…”
그러자 살수가 독고령에게 손바닥을 내보이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명백한 도발의 의사였다.
“아나… 이 새끼가…”
독고령이 분노로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니 그 손모가지는 내가 반드시 가져간다, 이 개새끼야!!!”
독고령이 유성도를 휘두르며 살수에게 달려들었다.
“시발… 시발시발시발!!!”
독고령을 도발해놓고도 살수는 끝까지 그녀의 공격을 받아치지 않았다.
살수가 계속 공격을 피하며 점점 의녀문에서 멀어지는 것을 눈치 챈 독고령이 멈춰서자, 그제서야 살수가 역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살수의 무공은 위협적이긴 했으나 독고령이 목숨의 위기를 느낄 정도는 아니였다.
그녀가 손쉽게 살수의 무공을 맞받아치자 그제서야 살수는 자신이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경신술을 이용해 멀찍이 도망쳤다.
‘이 시발 진짜…’
독고령 또한 그의 뒤를 쫓아가 건방진 손모가지를 잘라버리고 싶은 마음은 한 가득이었으나 두 가지 이유로 차마 쫓아가지 못 했다.
하나는 더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살수의 동료들 때문이였고,
다른 하나는 독고령의 경신술이 다른 무공에 비해 매우 뒤떨어지는 점이었다.
‘시발… 이 놈의 경신술.’
독고령이 독고진이었던 시절 우연히 얻었던 비급서에는 도를 잘 다루기 위해, 그리고 상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보법은 담겨있었더라도 장기간 이동에 뛰어난 경신술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결국 독고령이 할 줄 아는 거라곤 그저 내공을 이용해 있는 힘껏 달리는 게 전부였고, 당연히 경신술을 전문적으로 익힌 이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뒤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개 같아서라도 이번 기회에 경신술을 익히든가 해야지 진짜…’
독고령이 짜증에 머리를 벅벅 긁어가며 의녀문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처소로 돌아온 독고령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방금 전 마주친 살수에 대해 복기하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살수의 무공이던데…’
살수들이 쓰는 무공은 초식이 그리 많지 않은 게 특징이었다.
일격필살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위협적인 공격을 위해 2초식 이상은 잘 짜지 않는다고 들었다.
더군다나 이에 대해 확신하는 이유는 독고령이 중원 제일의 살수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업자 양반, 혹시나 3초식 이상을 가진 살수를 만난다면 무조건 피하시오.]
[내가? 살수 상대로?]
[그렇소. 살수는 일격필살을 목표로 하기에 한 번의 공격으로 끝나기 마련이오.]
[어떤 식으로?]
갑자기 무명이 왼손으로 독고진의 턱 아래를 찔러들어오자 그가 무명의 왼손을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무명의 오른손이 자신의 목을 향해 들어오자 독고진이 팔을 들어 그의 손을 막았다.
모든 공격을 완전히 막았다고 확신했으나 독고진은 이마에 느껴지는 따끔함에 인상을 찌푸렸다.
[… 시발, 뭐냐 이거?]
[이렇게 해서 3초식이오. 왼손과 오른손으로 시선을 분산시키고, 마지막으로 날리는 독침이 핵심이지.]
[너 시발 나한테 독 꽂은 거냐?]
[그냥 평범한 우모침이오. 동업자께선 이 쪽이 더 이해하기 쉽지 않소이까?]
[다음엔 말하고 해라.]
[그럼 기습이 아니잖소?]
[뒤진다.]
[… 말하고 하겠소.]
무명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 뒤, 독고령은 방금 만난 살수의 움직임을 되새겨보았다.
‘… 그 새끼도 분명 3초식이었단 말이지… 그럼 특급 살수인가?’
생각을 거듭하면 할수록 독고령은 혼란에 빠졌다.
‘… 아니, 근데 특급 살수는 분명 살막에만 존재한다고 했었는데…’
혹시나 암습을 당할 수도 있다며 무명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살수에 관련된 지식을 이것저것 독고진에게 알려주곤 했다.
게다가 무명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가 허언을 쉽게하는 유형의 사내도 아니었다.
결국 독고령은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시발, 새로운 살수 집단이 생겼구만.’
그들이 노리는 대상은 명백하게 독고령, 바로 자신이었다.
무명이 그래도 동업자의 정이 있으니 지금의 거짓 신분, 독고진의 딸,을 듣고도 암살 의뢰를 받아들일만큼 퍽퍽한 자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역시 새로 생긴 살수 집단 아니겠는가?
‘무명 이 새끼야… 너랑 다시 만날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고마워해라.’
그래도 함께 지낸 정이 있었으니 경쟁 집단을 조져주겠다 홀로 다짐하며 독고령이 복기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발 진짜… 하여간 나 없이 돌아가는 게 없구만.”
하오문주는 자신이 없었으면 개방에 필적하는 거대 조직이 못 되었을 것이며,
운영은 자신이 구해다 준 영약들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뛰어난 의원이 못 되었을 것이고,
이젠 무명의 경쟁 집단인 이름 모를 살수집단마저 없애게 생겼다.
“경신술부터 어떻게 해야 그 새끼들의 다리를 조져버리는데…”
이제 와서 경신술 실력을 하루 아침에 늘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독고령이 고민하다가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모르면 배워야지.’
독고령이 처소를 나섰다.
*
“… 그래서 저한테 오신거에요오?”
“어. 경신술 좀 가르쳐주라.”
“갑자기 그렇게 말하셔도…”
은관영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독고령이 얼굴을 구겼다.
“왜?”
“아니… 그으… 경신술은 워낙 기본이니깐요오. 당연히 아실 줄 알았는데…”
“… 맞을래?”
“히이잉…”
독고령이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을 보고 은관영이 울상을 지었다.
“갑자기 경신술은 왜요오…”
“죽이고 싶은 놈이 있는데 하도 잘 도망쳐서 못 잡겠다.”
“… 괜히 또 사고치시는 거 아닌가요오?”
“내가 언제 사고를 쳤냐?”
“…”
“대답.”
“어… 없죠.”
“콱 씨. 빨리 가르쳐 줘. 대충 3일 정도 지나면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가 될 수 있게끔.”
“…”
독고령의 막무가내에 은관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저 진짜 바쁜데요오…”
“너가 바빠봤자 얼마나 바쁘다고 그러냐. 잠깐 요령만 가르쳐 줘.”
“…”
독고령의 말을 들은 은관영이 살짝 몸을 움찔거렸다.
“으으… 저 이러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에…”
“뭐?”
“하아… 밖으로 나가죠, 독고 소저.”
“…”
은관영의 분위기가 살짝 바뀐 걸 보고, 독고령이 입을 다물었다.
“… 삐졌냐?”
“삐지긴요. 짜증난거죠.”
“뭐?”
“비무 한 번 해요.”
은관영이 독고령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내공 써서, 제대로.”
“… 진심이냐? 나 봐주는 방법 잘 몰라.”
“네, 진심으로요.”
은관영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정말 한 대 때리고 싶어서요.”
“하…”
독고령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해하기는 쉽네. 나와.”
한적한 공터에 도착하자 독고령이 손목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했다.
“갑자기 왜 그러냐? 내가 뭐 했냐?”
“뭐 하신 게 하루 이틀인가요. 그냥 쌓인 게 있어서 그렇죠.”
“…”
“전부터 느꼈지만, 독고 소저는 배려가 너무 없어요.”
“그런 거 잘 몰라서.”
“게다가 재능도 뛰어나죠.”
“내가?”
“네. 독고 소저가.”
은관영이 주먹을 꽉 쥐어 내보이며 말했다.
“저 하오문에서 천재라고 불려요. 알고 계셨나요오?”
“그러니깐 소문주 후보도 하겠지.”
“아무리 절맥증이라고 해도 그렇지… 고작 몇 달 만에 제 10년보다 강해진 사람이 옆에 있네요.”
“아… 아니… 그건…”
독고령의 말문이 막혔다.
‘아니, 시발. 그럼 내가 몇 십년 구른 게 있는데 너보다 약하겠냐?’ 라고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은관영 역시 오성이 뛰어난 무인이었다.
그녀와 주먹을 한 번 주고 받았기에 독고령은 알 수 있었다.
한없이 올곧은 투로.
같은 투로를 몇 번이고 반복했을지 짐작이 갈 정도로 깨끗한 자세.
은관영의 무공이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이미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요, 뭐. 재능이 뛰어난 무인이야 그렇다쳐요. 저도 은호 사형을 볼 때마다 약간 벽을 느끼거든요. 그래서 이젠 익숙해졌어요. ‘나는 진짜 천재는 아니다’ 하고 납득도 했고요.”
“…”
“근데 이젠 위 오빠랑도 잘 지내시네요?”
“흐엑?!”
갑자기 튀어나온 위일청의 얘기에 독고령이 당황했다.
“그… 그 얘기가 갑자기 왜…!”
“말했잖아요. 저는 위 오빠 하나만 보고 살아왔어요오.”
“아…”
“소현 언니는 납득하신 듯 했지만, 저는 솔직히 벼르고 있었거든요.”
은관영이 기수식을 취하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 모습을 보자, 독고령 또한 들뜬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 미안하다.”
“으으… 사과하지 마시고요. 차라리 아까처럼 짜증나게 굴어주세요.”
“뭐?”
“독고 소저에 비하면 저는 무공도 약하고, 소저만큼 매력적이지도 못 하네요. 저한테 남은 건 하오문의 소문주란 직책 하나 뿐이에요.”
“그게 왜…”
“제가 바빠봤자 얼마나 바쁘겠어요?”
“…”
그 말을 듣자, 독고령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시발…’
겉으로는 항상 기운차보여서 눈치채지 못 했지만, 은관영 또한 나름의 고초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은관영의 고생을 말 한 마디로 가볍게 무시했으니 그녀가 화가 날 법도 했다.
“야… 미안하다. 내가 진짜…”
“됐어요. 어울리지 않게 사과는 무슨. 잠도 줄여가면서 열심히 정보를 틀어막고, 조작하고, 돌리는 건 전부 저희가 할 일이죠.”
“…”
“감사는 안 바랬는데요. 비아냥 거리지는 마셨어야죠.”
“으으…”
독고령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사람과 사귄 경험이 거의 없는 그녀에게 이런 분쟁은 매우 당혹스러웠다.
“그러니깐 비무 한 번 해요. 독고 소저가 어차피 이기긴 할 텐데, 소저가 이기면 제가 경신술 가르쳐드릴게요.”
“진짜 해야겠냐?”
“어머, 독고 소저답지 않게 왜 이러세요오?”
은관영의 발이 지면을 파고 들더니…
독고령을 향해 뛰어들었다.
“평소처럼 하세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