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12장.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 - (7)
남궁원청의 허락도 받았겠다, 독고령은 당당하게 검신과 함께 온 남궁세가의 무인들에게 다가갔다.
“어이.”
“… 우리를 부른 것이 맞소?”
“응?”
독고령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다시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쳐다봤다.
“여기 다른 사람은 없는데?”
“… 어처구니가 없군.”
“내가 예의를 잘 몰라서.”
독고령이 대충 손을 흔들며 사과를 하고는 도발섞인 웃음을 날렸다.
“근데 적당히 화가 난 상태가 좀 해볼만 하지 않겠나 싶네?”
“뭐?”
“칼 든 놈들끼리 길게 얘기해서 뭐 하냐.”
챙!
독고령이 팔에 묶여있던 연검을 길게 늘어뜨렸다.
“검신 영감님한테 허락도 받았으니깐… 덤벼.”
“하! 무명도 없는 아녀자를 함부로 건드릴만큼 우린 한가하지 않다네. 아…”
남궁세가의 무인이 독고령의 도발을 돌려주며 비웃었다.
“있긴 있군. 음란검. 크하하핫!!”
“크하핫! 무명이 어떻게 음란검인가… 크큭.”
“… 결정했다.”
“뭘 말인가?”
독고령을 비웃던 두 무인을 가르키며 독고령이 으르렁거렸다.
“니네 두 놈은 어디 하나 부러뜨려 놓으마.”
“해보게나, 음란검.”
“… 뒤져엇!!”
독고령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남궁원청과 함께 온 무인들은 ‘창천오검(蒼天五劍)’이라 불리는 중견급의 고수들이었다.
무림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으나 언제든지 마음막 먹으면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무인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독고령을 우습게 봤다.
‘아무리 광마의 여식이라 하여도 아직은 어려보이는군.’
도발부터 던지고,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단계.
전형적인 무림초출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창천오검은 그녀에게 오늘 강호의 지엄함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 와라!”
“캬아악!!”
기묘한 괴성을 내지르며 독고령이 채찍처럼 늘어진 연검을 휘둘렀다.
‘독문무공인가?’
광마는 도객이라고 들었는데 그 딸인 독고령이 연검과 같은 기이한 검을 쓰자 무인은 일단 검을 막아내고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다.
하지만…
쾅!
“크윽…!”
검과 검이 맞닿는 순간, 그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강력한 내력이 덮쳐들었다.
‘이… 이 무슨…!’
손 끝이 다 얼얼해지는 느낌에 당황한 그를 보며 독고령이 웃었다.
“너 이 새끼, 뒤졌어. 내가 임마! 어?! 느그 가주도… 어휴, 말을 말자. 일단 맞아.”
“제… 제법 한 수가 있는…”
“시발, 그 얘기는 무림맹에서 따로 배포하냐?”
“예?”
독고령이 또 다시 칼을 휘두르며 외쳤다.
“너무 많이 들었어, 새끼야!!”
“커헉…!”
“너는 오른손잡이니깐 왼쪽 다리를 부러뜨려주마!”
“아…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려고 했으나 말보다 빠른 독고령의 주먹에 그는 정신을 잃었다.
쓰러진 그를 보고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다른 창천오검에게 독고령이 손을 까닥거렸다.
“다음.”
“내가 나서지.”
“귀찮으니깐 그냥 한 번에 덤비지?”
“그래도 무인의 자존심이 있는데 후배에게 합격술을 펼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그 자존심만큼의 실력이 있길 기대하마.”
“크… 크큭…!”
“응?”
두 번째로 나온 창천오검이 웃음을 꾹 참았다.
“네가 쓰러뜨린 자는 우리 창천오검의 막내. 가장 약한 자였지만, 나는…”
“그냥 좀 싸워, 새끼들아!!”
독고령이 또 다시 검을 휘둘렀다.
결국 첫 날, 독고령은 창천오검 중 세 명을 꺾었다.
하지만…
“허억… 허억…”
“여기까지 하는 게 어떻겠소, 소저?”
“… 너 좀 친다?”
정말 약한 순서대로 나온 것인지 4번째로 나온 자는 독고령에게 조금 버겁게 느껴졌다.
게다가 앞서 세 명을 상대했기에 힘이 빠진 것도 큰 요소로 작용했다.
결국 지친 독고령이 칼을 내던지며 바닥에 주저앉자, 4번째로 나온 자가 검을 거두며 말했다.
“소저가 이미 앞서 세 명이나 상대했기에 내가 이겼다 생각하오. 처음부터 나와 붙었다면 근소한 차로 소저가 이겼을 듯 하군.”
“당연하지, 새끼야.”
“… 아무튼. 좋은 비무였소.”
“나도 땀 한 번 잘 흘렸다.”
독고령이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그럼 내일 다시 보자.”
“… 무슨 소리요?”
“뭐긴 뭐야. 오늘은 힘 빠졌으니깐 내일 다시 붙자고.”
“내일도 또 하겠다고?”
“당연하지. 너희 5 명을 하나씩 다 꺾은 다음, 니네 합격진도 꺾는 게 목표니깐 계속 좀 어울려주라. 이거 검신 영감님도 허락한거다?”
“…”
“수고해라. 아, 그래도 뼈는 안 부러뜨렸다. 운영한테 가서 치료 잘 받고 내일 보자.”
내일도 같이 놀자는 식으로 가볍게 얘기하고 떠나는 독고령을 쳐다보며 창천오검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 저 소저의 말이 사실일까요?”
“글쎄… 아마 허세가 아닐까 싶네.”
“역시 그렇겠지요?”
“마지막엔 검도 제대로 못 쥘 정도로 지쳐있었으니 내일은 다시 오지 않을걸세. 후우… 그나저나 강호는 정말 무섭구만.”
“장강의 뒷물이 앞 물을 밀어낸다더니… 어느새 저희도 앞 물이 되었나봅니다.”
창천오검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게다가 음란검이란 명호 또한 허명이 아니더군.”
“예… 참으로 요사스러운 검술이었습니다. 사일검법도 조금 보이더군요.”
“음. 거기에 도법을 검으로 펼쳐내는 것 또한 신묘하더군.”
“가치가 있는 비무였습니다.”
“동의하네. 슬슬 해가 저무는데 식사나 하며 마저 얘기하지.”
“예!”
그렇게 창천오검은 독고령이 그 다음 날, 다시 돌아오리라 생각하지 않고 식당으로 향했다.
*
잠에서 깨어난 독고령은 온 몸에 느껴지는 기분 좋은 고통과 함께 눈을 떴다.
‘… 새끼들, 생각보다 괜찮네.’
온 몸에 느껴지는 찌르르한 근육통과 함께 몸을 일으킨 독고령은 어제의 전투를 한 번 더 복기한 뒤, 운기조식을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조지러 가볼까?”
그 날부터 독고령의 일정은 매일 똑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창천오검을 찾아가 비무를 벌이고, 점심을 먹는다.
“… 정말 다시 찾아왔군.”
“내가 어제 생각해봤는데 너희를 순서대로 일, 이, 삼, 사, 오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무슨 말이오?”
“너희 이름 들어봤자 내가 일일이 다 기억도 못 할 거 같아서. 아무튼 아침은 먹었지? 한 판 붙자. 일번부터 순서대로 나와.”
“…”
창천오검이 질린 표정으로 독고령을 쳐다보자, 그녀는 씨익 웃으며 이를 드러냈다.
“안 와? 그럼 그냥 내가 간다? 오늘은 좀 멀쩡한 오 번부터 시작할까?”
“… 그러지.”
“형님!”
“아닐세. 음란검 소저의 투쟁심을 보고 있자니 나 또한 피가 끓어올라 가만히 못 있겠군.”
창천오검의 수장격으로 보이는 인물이 앞으로 나와 검을 뽑아들었다.
“내 이름은…”
“필요없고. 넌 그냥 나한테 오 번이다. 그리고 새끼야…”
독고령이 연검을 뽑아들으며 말했다.
“음란검이라고 부르면 진짜 뒤진다…”
그녀의 경고를 듣고, 사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선공을 양보하지. 음란검 여협.”
“…”
독고령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올랐다.
“너… 너는… 뒤졌어. 캬아아아악!!”
둘째 날, 독고령은 창천오검의 다섯 번째를 꺾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독고령은 검신에게 찾아가 알아들을 수 없는 여러 가르침들을 받았다.
“그러니깐 무공은 심상일세.”
“… 심상이요?”
“개파조사분들께서는 전부 하나 같이 어떤 걸 이루고자하여 무공을 창시한걸세. 예를 들어 남궁의 창천무애검법은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푸른 하늘을 검으로 녹여낸걸세. 개파조사께서 그러길 원하셨거든.”
“이해가 안 되네요.”
“… 자네의 도법을 예시로 들어보지. 수라나찰도법이랬나?”
“네.”
“그 도법을 사용하는 도객으로서, 개파조사가 무슨 생각으로 그 무공을 창시했나 생각해본 적 없나?”
“아…”
독고령이 잠시 고민하고는 말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쓰레기들을 다 조지고 싶다?”
“… 직설적이긴 하다만 자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런 거겠지.”
“이게 왜요?”
“결국 모든 무공은 각자 특징이 있으니 개파조사가 어디에 뜻을 두고 창시했는가를 염두해두면 좀 더 이해하기 쉽단걸세.”
“아아… 무슨 뜻인지 알겠네요.”
“자네는 지금 사일검법에 수라나찰도법을 섞어 쓰는 중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두 무공을 누가, 무슨 연유로, 왜 만들었는가를 생각해보게.”
“근데요… 이게 전에 말한 ‘차가운 불’이랑 무슨 상관인가요?”
“그건 그 다음 단계일세.”
“…”
독고령이 입을 삐죽 내밀자, 남궁원청이 나뭇가지를 들어올렸다.
“그 놈의 주둥이는 맞고 싶어서 내민게지. 맞나?”
“아… 아니거든요! 거 좀 체통을 지키세요.”
“망나니 같으니라고… 괜히 노부를 괴롭히지 말고 썩 나가게.”
“… 눼.”
“끝까지…!”
“아… 알았어요! 갈게요… 좀!”
독고령이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가자, 남궁원청은 피식 웃었다.
‘… 손녀가 하나 늘어난 것만 같구만.’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이 말을 밖으로 꺼내는 순간, 또 독고령이 얼마나 자신의 속을 뒤집어놓을지 짐작이 갔기에.
그리고는 저녁이 되면 독고령은 그 날 하루를 복기한 뒤, 월영신공을 운기하다가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매일매일 똑같은 시간을 보내며 그녀는 빠르게 성장해나갔다.
셋째 날이 되자 창천오검을 첫번째부터 네번째까지 꺾었다.
넷째 날이 되는 날, 창천오검을 모두 꺾었다.
다섯째 날이 되는 날, 창천오검의 합격진을 처음으로 맞이하고 또 한 번 패배했다.
그리고 여섯째 날… 결국 독고령은 창천오검의 합격술마저 꺾었다.
점심 때마다 검신과 나눈 아리송한 대화에도 슬슬 감이 잡혔다.
처음에는 차가운 불이 도무지 무얼 뜻하는지 몰랐지만, 독고령은 남궁원청의 딱 들어맞는 가르침들을 들으며 조금씩 그게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 결국 음기도 양기처럼 굴리면 된단 얘기지.’
음기라 한들 어차피 양기와 똑같은 내공.
가진 성질이 정 반대로 다르지만, 양기를 다루듯이 쓰다보니 조금씩 독고령은 음기를 다루는 데 익숙해졌다.
극양의 기운으로 다루던 수라나찰도법을 조금씩 검에 맞게, 그리고 음기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바꿔나갔다.
그리고 밤이 되면 매일 똑같이 창천오검과의 비무들을 복기하고, 월영신공을 운기하고, 잠을 청하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보내기를 어섯째되는 날, 독고령은 쉬이 잠에 들 수 없었다.
평소처럼 잠을 청하기 위해 베개를 배고 누었으나, 그녀의 눈은 또렷하게 뜨여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일청이 보고 싶어…’
일단 주변의 걸리적거리는 놈들을 먼저 모두 처리하고자 마음을 먹고 행동에 옮겼지만, 그 모든 과정 중에 단 한 번도.
위일청은 먼저 독고령을 찾아온 적이 없었다.
처음 3일까지는 독고령 또한 바빴기에 이해했다.
4일 째가 되자, 밤마다 조금씩 불안감이 찾아왔다.
‘어… 혹시 내가 먼저 찾아가야하나? 나를 기다리는 건가?’
다섯째 날은 창천오검의 합격진에 패배하여 분한 마음에 잠시 잊고 지냈지만, 오늘 그 합격진마저 깨버리자 독고령은 더더욱 많은 생각이 들었다.
‘… 창천오검 놈들은 다 조져놨으니깐 내일 아침은 시간이 비네… 그럼 조금 늦게 자도 되려나…?’
조금씩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며 독고령은 슬금슬금 몸을 일으켰다.
‘위일청도… 나를 보고 싶을까?’
자신은 밤에 달을 볼 때마다 위일청을 떠올리는데, 그는 과연 어떨지 궁금했다.
‘한 번 쯤은 먼저 찾아와도 괜찮을텐데…’
이 쯤되자 약간의 섭섭함도 들었다.
솔직히 한번은 ‘밤에 몰래 찾아와 자신을 깨우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하며 잠에 든 적도 있었다.
하지만 벌써 6일이나 그가 자신을 찾지 않자, 독고령은 조금 심통이 나기도 했다.
‘… 하오문이랑 둔치가 있어서 그런가?’
생각해보니 다른 여인이 있으니 굳이 먼저 안 찾아오는가 싶기도 했다.
“으으…”
독고령이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하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 진짜아… 먼저 좀 찾아와주면 어디가 덧나냐’
자신의 처소에서 나온 독고령은 먼저 은관영과 백리소현의 처소로 향했다.
“…”
둘 다 잘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독고령은 위일청의 처소로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조금씩 심장이 빨리 뛰는 게 느껴졌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괜히 하단전이 조금씩 욱씬거렸다.
“으으…”
막상 위일청의 처소 앞에 서자, 독고령은 긴장감에 멈춰섰다.
‘어… 어떻게 하지…’
그의 문을 두드리고, ‘저 왔어요.’라고 간단히 말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고, 문을 두드리기 위해 든 손은 여느 때보다 무거웠다.
‘… 혹시 그 사이에 나한테 정이 떨어졌나?’
그렇게 좋아한다고 말해놓고 정작 얼굴을 한 번도 비추지 않았다.
마음이 멀어진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자, 독고령은 문을 두들기기 두려워졌다.
“…”
나중에 하오문이나 둔치를 통해 따로 알아보자 생각하며 독고령이 등을 돌리는 순간,
“… 어?”
“흐엑?!”
위일청이 문을 열고 나왔다.
“독고 소저. 야심한 밤에 어인 일이십니까?”
“아… 그… 그게…”
갑작스레 만난 위일청을 보자, 독고령은 머리가 새하얘졌다.
방금까지 떠올리던 모든 생각들이 사라지고, 가슴에서부터 끌어오르는 간지러운 무언가가 독고령의 입을 열어재꼈다.
“이… 일청이 보고 싶어서요.”
“…”
“바… 방해인가요?”
“저도 마침 소저가 보고 싶어서 나서던 참이였습니다.”
“엑?!”
“안 찾아오시길래 제가 먼저 갈까 싶었죠. 같은 마음이었나 봅니다.”
위일청이 웃자, 독고령의 가슴이 또 한 번 거세게 뛰었다.
가슴 속을 간지럽히는 달콤함에 독고령은 몸을 배배 꼬았다.
“지… 진짜요?”
“요즘 수련에 박차를 가한다 들어서 방해하기 싫었습니다. 그래도 몇 번 찾아뵐 걸 그랬네요.”
“… 네. 방해는 안 되니깐… 자주 만나러 와주세요…”
“예. 죄송합니다, 소저.”
위일청이 손을 뻗으며 독고령에게 물었다.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괜히 밖에서 이러기도 그렇네요.”
“… 네.”
위일청이 내뻗은 손을 보며, 독고령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저… 저기 있잖아요.”
“예, 소저.”
“저… 전에 했던 약속… 아직 기억하시죠?”
“… 네?”
독고령이 위일청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을 올린 뒤, 조금씩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리고는 그의 새끼손가락을 꼭 붙잡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 야… 야한 거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