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12.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 - (6)
분홍빛으로 물든 머리의 색이 빠질 때까지 기다린 뒤, 독고령은 남궁원청이 머물고 있는 처소로 향했다.
‘… 이 정도면 되겠지?’
다시 머리가 빨개진 것을 확인한 독고령은 문을 두드렸다.
“영감님, 안에 있어요?”
“들어오게.”
남궁원청의 허락이 떨어지자 독고령이 안으로 들어섰다.
“아, 빨간 언니다!”
“… 소소도 같이 있었네”
“손녀와 말도 섞지 말게.”
남궁원청이 살벌한 기운을 풀풀 풍기며 독고령을 노려보았다.
“내가… 하아… 말을 말지.”
“…”
“소소는 잠시 나가있거라.”
“네.”
남궁소소가 밖으로 나가자, 독고령이 툴툴 댔다.
“… 거, 제가 얼마나 그랬다고 그러세요.”
“맞고 싶은가?”
“안 할게요…”
“후우… 그래서 무슨 일로 예까지 찾아왔나?”
“아… 혹시 안휘성으로 언제 돌아가세요?”
“같이 가기라도 할 셈인가?”
“그랬으면 좋겠다고 일청이 그래서요.”
“일청?”
“엑?!”
남궁원청이 독고령의 달라진 호칭에 눈썹이 휙 올라갔다.
“클클클. 일청… 일청이라… 풋풋하구만.”
“아…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크하핫, 알았네. 노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네. 흐음… 안휘성이라…”
남궁원청이 수염을 쓸어넘기며 대답했다.
“무림맹에는 내가 전서구를 보내놨으니 괜찮을 걸세. 오히려 노부가 부탁하고 싶구만. 소소와 함께 남궁세가의 안가에 들러줄 수 있나? 보타문으로 향한다고 들었는데 그리되면 조금 돌아가긴 하겠구만.”
“영감님은 안 가요?”
“나는 운영과 함께 모용세가에 들러볼까 하네.”
“!!”
남궁원청의 말을 들은 독고령의 눈이 사납게 변했다.
“… 무슨 연유로 가시오?”
“눈에 힘이나 풀고 얘기하게.”
“모용벽을 잡으러 가는거요?”
살기가 번들번들한 눈으로 독고령이 묻자, 남궁원청은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말했다.
“노부가 이제와서 강호의 일에 관여하겠는가. 맹주직을 사퇴하고 난 뒤로 그런 시덥잖은 일에 낄 생각은 없네.”
“…”
“다만 운영이 내공을 익히지 않은 자이니 혹여나 불화를 당할까 걱정돼서 노부가 따라가는걸세. 대답이 되었나?”
“… 예.”
독고령이 진정하자 남궁원청이 얼굴을 찌푸렸다.
“쯔쯔쯔… 거 기왕 그리 된 거 조금 얌전히 지내면 어디가 덧나나?”
“… 천성이라 그렇거든요.”
독고령의 말투가 원래대로 돌아오자 남궁원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젊은 것들이 하나같이 이리 드세서야…”
“… 다 혈기가 넘치는 나이잖아요.”
“머리에 피나 좀 빼게. 그래서 어쩔텐가?”
“한 번 물어볼게요. 소소는 언제 돌아가는데요?”
“자네들이 준비되는대로 바로 가는 게 좋겠네. 요즘 주변이 조금 흉흉하구만.”
“네?”
“못 느꼈나? 어제부터 눅진눅진한 살기가 느껴지더구만.”
“…”
남궁원청의 대답을 들은 독고령은 찝찝함을 느꼈다.
“… 그러고보니 일… 위 공자도 조금 불안해하더라고요.”
“흉흉한 시기구만.”
“…”
“아무튼 소소를 잘 부탁하네. 음… 일이 이리 되었으니 노부도 기다리는 동안 좀 도움을 줄까 싶네.”
“네?”
“백리세가의 아이가 끝나면 자네가 내게 오게. 검은 아직 안 익숙해 보이더구만.”
검을 가르쳐주겠단 말을 돌려서 하자, 독고령이 당황했다.
“지… 진짜요?”
“싫으면 치우게나.”
“아… 아니요! 저야 좋죠… 근데…”
독고령이 흘깃 그를 쳐다보았다.
“… 되게 쉽게 가르쳐주시네요?”
“응?”
“그 왜… 대부분 명문세가면 좀 거들먹거리면서… 아, 좀! 나뭇가지는 들지 마세요!”
“노부의 칼 한 번 보겠다고 저 먼 곳에서 금을 한 무더기 들고 오는 자도 있거늘… 고얀 놈 같으니라고.”
“가르침을 내려주시면 감사히 받을게요…”
“시간날 때마다 알아서 찾아오게.”
“… 눼.”
독고령이 툴툴대며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남궁원청이 가만히 지켜보다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쿨럭…”
남궁원청이 기침하자 거무튀튀한 피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그동안 잘 버텼거늘.’
괜히 무리해서 심검을 두 번이나 보여줬다 후회하며 남궁원청은 피를 닦아냈다.
더 이상 삶에 미련은 없었으나 막상 죽음이 다가오자 남궁원청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 소소는 많이 울겠지. 아들 놈은… 상상이 안 가는구만.’
늙은 몸으로 오랫동안 무림의 정점에 서있던 남궁원청이었으나 애석하게도 그 역시 사람이었다.
‘하다못해 죽는다면… 전장에서 죽었으면 좋겠구만.’
남궁원청과 헤어진 뒤, 처소로 돌아가며 독고령은 조금씩 신경을 곤두세웠다.
‘… 살기.’
남궁원청이 말한대로 수풀 사이로 아주 희미한 살기가 새어나왔다.
눈을 감고 기감을 더 확장하자 바람결에 실려오는 혈향이 독고령을 자극했다.
‘… 젠장.’
한동안 지나치게 정신을 놓고 살았다는 후회가 물씬 올라왔다.
독고진으로 지내던 시절보다 더 날카로워진 기감을 가지고 너무 여유롭게 지냈다.
‘나를 죽이려는 새끼들은 남자일 때도, 여자일 때도 여전히 많구만.’
지금 당장은 남궁원청이라는 거대한 기운에 짓눌려 감히 들어올 생각도 못 하고 있는듯 보였다.
‘다행히 시간은 있어 보이고...’
내단이 완성될 때까지는 고작해야 일주일이 안 걸린다고 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하지만 독고령은 자신이 있었다.
‘내공도 다 회복했으니 불균형을 바로 잡는데 온 힘을 다 해야겠군.’
주먹을 꽉 쥐며 독고령이 다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던 여자던.
그녀는 가만히 앉아서 당해줄 생각이 없었다.
‘먼저 찾아가주마. 버러지 새끼들아.’
독고령이 사납게 웃으며 살기가 새어나오는 방향으로 이를 드러냈다.
무엇보다 그녀에게는 방해를 받고 싶지 않은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보름 후, 위일청과의 약속을 독고령은 많이 기대하고 있었기에 방해를 한다면 누구든... 가만히 둘 생각은 없었다.
*
처소로 돌아온 독고령은 한동안 들떠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곧바로 수련에 전념했다.
“도… 독고 소저?”
“응?”
“… 무슨 일 있으셨어요오?”
“아니.”
“그… 분위기가 조금…”
“아무 일도 아니야.”
“히잉… 네에…”
날이 선 독고령의 모습을 보고 은관영은 시무룩해진 채로 백리소현에게 찾아갔다.
“언니이…”
“벌써 돌아왔어?”
“… 독고 소저가 너무 무서워서 말을 못 걸겠어요.”
“응?”
그 말을 듣고 백리소현이 슬쩍 문을 열어 틈새로 독고령을 쳐다보았다.
가부좌를 튼 채, 검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명상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자 어딘가 스산한 느낌까지 들 정도로 집중하고 있음을 백리소현 또한 쉬이 알 수 있었다.
백리소현이 문을 닫고 은관영을 쳐다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 그러게. 무슨 일이 있었나?”
“히이잉… 나도 독고 소저한테 위 오빠랑 뭐 했는지 듣고 싶었는데…”
“오라버니랑 싸운걸까?”
“그건 아닐 거예요. 내내 위 오라버니는 저랑 같이 있었거든요.”
“… 무슨 일이 있었나보지.”
백리소현이 은관영을 토닥이며 위로해주었다.
“이따가 내가 따로 얘기해줄게.”
“아니에요… 나중에 독고 소저한테 직접 들을래요. 제가 놀리고 싶단 말이에요.”
“… 그러다 또 싸울라.”
“헤헷.”
은관영이 장난스레 웃으며 백리소현을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평소에도 수련을 열심히 하던데 갑자기 독고 소저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네요. 그 일 때문인가…?”
“응? 무슨 일 있었어?”
“그으… 독고 소저한테는 비밀인데요.”
은관영이 백리소현에게 살막에 대해 알려주자, 그녀의 표정도 조금 안 좋아졌다.
“… 그거 때문에 저런가본데?”
“그쵸? 비밀로 하긴 했는데 다른 사람한테 들었나…?”
“검신 어르신을 만나고 온 뒤부터 저렇게 됐으니 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그렇겠네요오… 아쉬워라.”
은관영이 털썩 바닥에 앉아 투덜거렸다.
“나도 귀여워진 독고 소저 보고 싶은데에…”
그 때,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하오문.”
“흐엑?!”
“나와. 비무나 하자.”
“자… 잘못했어요!”
“응?”
독고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헛소리야? 내 뒷담화라도 했냐?”
“헙…! 아… 아니요!”
“나와. 검이라도 좀 휘두르려고 하는데 그나마 좀 하는 게 너라서 그래.”
“… 저는 지금 바쁜데에… 남궁세가의 무인들이랑은 어때요?”
“응?”
“저도 그 분들이랑 몇 번 비무를 했거든요. 다들 되게 강하세요…”
“그래?”
독고령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좋네. 영감한테 허락받고 올게.”
“무… 무슨 허락이요?”
“조금 망가뜨려도 되는지. 아… 어차피 운영이 고쳐주겠구나.”
“으엑… 너무 괴롭히진 마시고요.”
“내가 애냐? 적당히 힘 조절하지. 나 간다.”
“… 네.”
밖으로 나가는 독고령을 보며 은관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언니.”
“응?”
“… 진짜 귀여웠던 거 맞아요? 아무리 봐도 신이 나서 누구 하나 목 치러 가는 망나니가 되어버렸는데요오?”
“그… 러게.”
같이 목욕을 할 때까지만해도 연심에 빠진 소녀의 모습이었거늘, 어느새 호쾌한 무인의 모습으로 나서는 독고령을 보며 백리소현은 혼란스러웠다.
‘… 무슨 일 있나, 진짜…’
백리소현이 잠시 안절부절하다가 검을 챙겼다.
“응? 언니도 나가시게요?”
“… 응. 나보다 강한 령 매도 저렇게 노력하는데 나도 수련을 해야겠다 싶어서.”
“네에… 저는 근처의 하오문 지부에 연락해봐야해서요…”
“항상 바쁘네, 우리 관영이.”
“그러게요오… 요즘 강호가 너무 시끄러워요오.”
“후훗, 곧 조용해지겠지.”
“그랬으면 좋겠네요. 잘 다녀오세요~”
“응, 이따 밤에 봐.”
“네에.”
백리소현마저 밖으로 나서자, 홀로 남은 은관영은 잠시 바닥에 뒹굴거리다 몸을 일으켰다.
‘저도 빨리 일을 끝내고 수련해야겠네요.’
그녀 또한 무인이었기에 호승심이 끌어올랐다.
‘뒤쳐지는 건 싫거든요.’
속으로 그리 되뇌이며 은관영은 서책을 꺼내들었다.
남궁원청의 처소에 또 다시 찾아간 독고령은 바로 본론을 꺼내들었다.
“영감님!”
“… 응?”
“밑에 애들 좀 패도 돼요?”
“… 뭐?”
“그… 뭐시냐. 제가 지금 검술이 모자라잖아요?”
“헌데?”
“이런 건 또 실전이 최고라서요.”
“… 비무를 얘기하는건가?”
“네.”
“말 꼬락서니하고는… 맘대로 하게나. 데리고 온 아이들도 제법 싹수가 좋은 놈들이니 지금 자네 상태라면 좋은 승부가 되겠구만.”
“감사합니다. “
독고령이 고개를 푹 숙이고 나가려던 순간, 남궁원청이 그녀를 막아세웠다.
“헌데 무슨 연유로 그러는가?”
“네?”
“몸이 바뀌었더라도 한 번 지나간 길이거늘. 굳이 약한 아이들을 괴롭힐 필요가 있는가?”
“제 몸 상태 보셨잖아요. 원래 쓰던 무공이 대부분 양기로 쓰는 건데, 지금 몸은 음기가 넘쳐서요.”
“… 거기까진 못 이르렀구만.”
“예?”
“잠시 앉아보게.”
남궁원청이 손짓으로 그녀를 부르자, 독고령이 그와 마주앉았다.
“… 왜요?”
“극과 극은 통한다네.”
“또 요상한 소리를 하시네.”
딱!
남궁원청의 손이 벼락같이 움직여 그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말… 좀!”
“아으으… 죄송해요. 못 배워먹은 놈이라서요…”
“자네한테 가르침을 내려주는 매 순간이 후회되는구만.”
“…”
“수준에 맞게 쉽게 얘기해주겠네. 양기나 음기나 거기서 거기라고.”
“네?”
“극에 이르면 모든 게 다 똑같다네.”
“…”
“차가운 불을 생각해보게. 그럼 도움이 되겠구만.”
남궁원청의 말을 들은 독고령은 차가운 불을 떠올리려고 무던히 애쓰다 결국 입을 열었다.
“헛소리 같은… 아니, 좀! 나뭇가지가 왜 방에 있어요?!!”
“네 년을 징치하려고 챙겨놨다!”
“아잇, 영감님 진짜! 나이 드시고…”
“노부가 나이 먹고 이렇게 날뛰게 만드는 네 년의 그 주둥이를 먼저…!”
“아악! 갈게요!! 간다고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독고령을 보며 남궁원청이 말했다.
“정 이해가 안 가면 다시 찾아오게.”
“… 그냥 지금 가르쳐주면 안 돼요?”
“으이구, 쯔쯔… 밥을 내가 먹여주더라도 씹는 건 자네가 해야하지 않나?”
“아… 네.”
독고령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자, 남궁원청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감사를 표할 줄은 아는구만.”
“저 그렇게까지 막돼먹진 않았거든요…”
“놀고 있구만. 헌데 갑자기 왜 조바심을 내고 그러는가? 시간만 있으면 충분히 옛날의 무위를 되찾을텐데.”
“아… 그…”
독고령이 살짝 뺨을 붉히며 대답했다.
“… 2주 뒤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조금씩 분홍빛으로 물드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보며 남궁원청이 미소지었다.
“어지간히 중요한 일인가 보구만?”
“그… 네…”
“클클, 가보게.”
“… 네. 애들은 적당히 팰게요.”
“그 놈의 주둥이…!”
“아… 안녕히 계세요!”
독고령이 후다닥 밖으로 도망치자, 홀로 남은 남궁원청은 방금 그녀가 보여준 표정을 보며 실실 웃었다.
‘이젠 마음이 정해졌나보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