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12장.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 - (3)
처형장에 끌려가는 죄수의 심정으로, 독고령은 백리소현의 뒤를 따라 걸었다.
“저… 그게…”
“괜찮아, 령 매. 시간은 많으니깐 가서 천천히 얘기하자.”
“아니… 그…”
“령 매가 위 오라버니 좋아하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어.”
“흐엑?!”
독고령이 당황하여 멈춰서자 백리소현이 웃으며 그녀를 돌아봤다.
“그럼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어… 아니… 그…”
“후훗, 귀여워 진짜.”
백리소현이 또 다시 자신을 놀릴 것을 직감한 독고령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거… 검신 영감님이랑은! 뭐… 뭐하는 거야?”
“응? 그냥 가르침을 받는 정도지.”
“그… 심검?”
“에이… 나는 그 정도는 안 돼.”
백리소현이 허리에 매달린 검의 손잡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냥… 사일검법에 대해서 배우고 있어.”
“응? 그 할배가 사일검법을 어떻게 알아?”
“다 말해줬지. 내가 알고 있던 것들.”
“그… 그래도…”
다른 문파의 사람에게 함부로 그런 이야기를 해도 되냐고 반박하려다가 독고령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백리소현의 아랫배에 있는 흉측한 자국들을 떠올리자, 충분히 그러고도 남으리라 생각했다.
그녀에게 있어 점창파는 남보다도 못한 존재일테니.
“… 진전은 좀 있어?”
“아니. 전혀~ 없어.”
“응?”
“검신께서 나보고 그러시더라고. 나는 검에 재능도 없고, 무학의 재능도 없다더라.”
“헛소리…!”
“령 매, 괜찮아.”
발끈하는 독고령을 진정시키며 백리소현이 웃었다.
그 웃음은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허탈한 웃음이 아닌,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인 달관한 자의 미소였다.
“음… 옛날부터 생각했는데. 나는 무림인은 못 될 거 같아.”
“… 왜?”
“은원이니 뭐니… 그런 거 다 이해도 안 되거든. 더 강해지려고 혈육을 해치는 것도 잘 모르겠어.”
“…”
백리소현의 손이 자연스레 아랫배를 어루만지자, 괜히 독고령이 더 화가 났다.
“… 너는 화가 안 나?”
“으으응. 나도 화가 날 때는 화가 나지.”
“그럼…!”
“근데 피곤하잖아.”
“뭐?”
백리소현이 포근한 미소로 독고령을 바라보았다.
“나는 방년(20세)을 넘겨서야 문파에서 버려졌어. 그리고 위 오라버니랑 만났어. 전에 얘기했나?”
“… 어떻게 만났는지는 못 들었어.”
“문파에서 내 하단전을 끄집어낸 뒤로 한동안은 문파에서 지냈어. 다시 또 영단이 생길지도 모른다나 그랬었지.”
“미친 새끼들…”
“근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세맥이 얼어붙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자 더 이상 가망이 없었다고 생각했나봐. 그래서 버려졌어. 정신을 잃어서 어디 버려졌는지 잘 기억도 안 나.”
“…”
백리소현에게 어두운 과거가 있는 줄은 알고 짐작하고 있었으나 생각보다 구역질나는 얘기가 나오자 독고령은 잊고 지낸 광증이 다시 올라올 것만 같이 화가 났다.
하지만 그 순간, 백리소현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깃들었다.
“그 때. 참 운 좋게도 위 오라버니를 만났지.”
“…”
“위 오라버니랑 초야가 어땠는지 잘 기억도 안 나. 근데 자고 일어나니깐 옆에 헐거벗은 위 오라버니가 있더라고. 신기하게도 몸 상태도 좋아졌고.”
“… 그래서?”
“그냥 따라다녔어. 어차피 그대로 시름시름 앓다 죽느니, 위 오라버니를 따라다니든지 똑같을 거라 생각했거든. 그거 알아, 령 매?”
“뭐?”
“나는 살면서 웃어본 적이 없었어. 위 오라버니를 만나기 전까지는.”
백리소현이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하도 우울해보였는지 어느 날, 위 오라버니가 내 이름을 묻더라고. 근데 나는 이름을 받아본 적이 없었어. 문주님이 말해준 적이 없거든.”
“… 그래서 네 이름은 위일청이 지어준거야?”
“응. 항상 내가 밝았으면 좋겠다고 해서 밝을 소(炤)에 밝을 현(顯).”
“… 잘 지었네.”
“그치?”
그녀가 말하는 과거들이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느껴질만큼 지금의 백리소현은 항상 밝은 모습이었다.
독고령이 봐 온 백리소현은 언제나 웃으며, 포근하게 남을 안아주는 따듯한 여인이었다.
“그래서 피곤하단거야.”
“… 응?”
“이제야 밝게 지내고 있어. 이제야 행복하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됐어. 은원이 어떻고, 복수가 어떻고를 따지기엔 지금부터 행복한 삶을 즐기기도 바빠.”
“…”
“그리고 내 복수는 령 매가 대신 해준다고 했잖아. 그치?”
“… 어. 대신 해줄게.”
“그럼 됐어, 히힛. 나는 령 매한테 아주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면 충분해. 사일검법도 그래서 계속 연습하는 거고. 령 매한테 가르쳐줘야하니깐.”
“… 고맙다.”
“고맙긴 뭘. 그리고 령 매한테는 다른 부탁… 아니, 바램도 하나 있어.”
“… 뭐?”
백리소현이 살짝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독고령의 눈을 쳐다보았다.
“위 오라버니의 아이를 낳아주면 좋겠어.”
“흐엑?!”
“관영이는 아마 하오문주가 될 거야. 그럼 바쁘겠지. 나는… 아이를 낳을 수가 없어. 근데 있지, 나는 위 오라버니의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
“아니… 그…”
“위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거 아니야?”
“하으으… 그… 조… 조금…”
“조금?”
“… 조금 많이…”
“히힛, 령 매가 앞으로 위 오라버니를 더 많이 좋아하면 좋겠다.”
“아… 으아…”
독고령이 당혹스러움에 눈을 뱅글뱅글 돌렸다.
“여튼! 이야기는 여기까지. 빨리 관영이랑 같이 어젯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네.”
“으… 흐아아…”
숙소에 도착하자 독고령은 조금씩 가슴이 빨리 뛰었다.
“관영아! 나 왔… 어?”
하지만 숙소에 은관영은 없었다.
“으응…? 어디 갔지? 오늘은 할 일 없다고 했는데…”
“그… 그럼 나중에…!”
“안 돼, 령 매!”
내빼려던 독고령을 백리소현이 단단히 붙잡았다.
“둘이서라도 얘기해야지.”
“으… 흐아아… 꼬… 꼭 들어야 해?”
“나랑 관영이는 위 오라버니를 먼저 좋아했는데, 굴러들어온 령 매가~~”
“아… 으아악!! 아… 알았어… 좀…!!”
“히힛, 빨리 가자.”
“으으…”
독고령은 확신했다.
자신이 백리소현보다 무력이 강할지언정, 그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으리라고.
*
백리소현과 독고령이 자신을 찾는 줄도 모르고, 은관영은 위일청의 숙소로 찾아갔었다.
“… 위 오빠, 안에 계세요?”
“은 소저. 조금 늦으셨군요.”
“네에… 다른 일이 생겨서요.”
은관영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위일청은 쓰던 편지를 잠시 옆으로 치워두었다.
그 편지를 슬쩍 본 은관영이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도 답변을 못 쓰셨어요?”
“… 어제는 조금 바빴습니다.”
“아… 뭔지 알 거 같네요, 히힛.”
“음? 은 소저가 어떻게 압니까?”
“헤헷… 어제 독고 소저가 와서 뭘 물어봤거든요.”
은관영의 답변을 들은 위일청이 난처한 듯 웃으며 말했다.
“한동안은 모른 척 해주십쇼, 은 소저. 아시잖습니까, 독고 소저가 얼마나 부끄럼이 많은지.”
“그래서 더 놀리는 재미가 있긴 한데… 이건 나중에 얘기할게요오. 중요한 얘기라서요…”
“음?”
은관영이 품에서 편지를 꺼내 위일청에게 건네주었다.
“안 좋은 소식이 특보로 날아왔더라고요.”
“… 뭡니까?”
“살막이 독고 소저를 노리는 거 같아요.”
“살막… 이요?”
위일청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은관영이 설명했다.
“중원 제일의 살수 집단이에요. 어… 진짜 모르세요?!”
“예, 잘 모릅니다.”
“그… 음… 이전 권존은 아시나요?”
“황보세가의 가주님이요?”
“그 이전의 권존이요. 소림의 백팔나한장이요.”
“아…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소림이 자랑하는 그 백팔나한의 수장이자, 백보신권을 완전히 익혀 차기 방장 후보로 언급되던 혜승 스님을 살해한 게 살막이에요.”
“…”
은관영의 설명을 들은 위일청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소림이 어딘가?
백도 무림의 태두였다.
그 흉악한 마교와 혈교가 단 한 번도 중원정벌을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항상 그 중심에 위치한 숭산의 소림사를 이겨내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번번이 그들을 막아낸 것이 소림이 자랑하는 백팔나한이었다.
백팔나한을 이끄는 수장이라면 분명 그 무위도 상상을 초월하는 강함일텐데, 살수 집단이 그 백팔나한장을 죽였다고 하니 그들이 가진 무위가 얼마나 강력한지 얼추 짐작이 갔다.
“… 혹시 무슨 이유로 소림을 건드린지는 아십니까? 이해가 안 돼서요. 그 광마 어르신도 소림이 상대라면 한 번 망설일 거 같은데요.”
“돈 때문에요.”
“예?”
“살막은 돈만 충분히 지불한다면 누구든 죽여요.”
위일청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 미치겠네요. 은 소저니깐 당연히 정보의 진위 여부는 확인하셨겠죠?”
“네.”
“의뢰인은요?”
“몰라요. 아마 광마 어르신과 척을 진 곳 중 하나 아닐까요?”
“… 짚이는 데가 너무 많겠군요.”
“네에… 무엇보다 살막이 이미 의뢰를 수락한 거 같아서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저희 측에서 이미 강소 인근에서 살막의 살수를 몇 명 확인했어요. 붉은 머리를 한 여인을 흑시에서 수소문 중이더라고요.”
“…”
강호 무림에서, 그것도 하필 강소성에서 붉은 머리의 여인을 찾는다면 독고령일 확률이 매우 높았다.
붉은 머리는 결코 흔하지 않은 머리색이었으니깐.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자, 초조함에 위일청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 검신 어르신께 보호를 요청해봐야겠네요.”
“아무래도 그 방법 밖에 없겠죠?”
“… 예. 그 정도로 강한 집단이 독고 소저를 노린다면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오문 측에도 일단 병력을 요청해봤는데요오… 은호 사형 쪽이 좀 많이 바빠서 지원은 힘들 거 같아요.”
“… 지원을 요청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군요, 은 소저.”
“죄송해요오… 도움이 못 돼서…”
“아닙니다.”
위일청이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하아… 화불단행이라더니. 정말 불행은 홀로 찾아오지 않는군요.”
“… 아버님의 일 때문에 그러세요?”
“그 쪽은 제가 대충 처리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시끄러운 것도 한두번이 아니고요.”
“… 제가 도움을 못 드려서 죄송해요오.”
“이미 충분히 큰 도움이 되고 있으니 걱정마세요, 소저.”
“그치만…”
은관영이 위일청의 눈치를 살폈다.
“… 정말 모용세가의 밑으로 들어가신대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요녕 인근의 다른 세가는 이미 묵선께서 돌아가신 이후 전부 모용세가 밑으로 들어갔으니깐요. 흑룡강이라고 그 영향을 벗어날 수는 없죠.”
“… 안 그래도 요즘 모용세가의 가주를 보고 ‘소검신(小劍神)’이라고 부르더라고요오.”
“그럴만한 무위를 보였으니요…”
은관영의 표정이 심각해보이자, 위일청은 아버지에게 보낼 편지를 구기며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별 일 아닙니다. 어차피 저는 가문에서 내놓은 자식이니깐요.”
“하지만… 아버님께서…”
“… 그 정도로 썩어빠진 인간은 아니리라 믿습니다.”
위일청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기를 바라고요.”
“…”
자신의 아버지가 모용세가에 붙든말든 위일청에겐 상관없었다.
어차피 첩의 자식인 데다가 살면서 아버지란 작자의 얼굴을 본 것은 고작 두, 세번이었다.
하지만…
[네가 광마의 딸을 데리고 있다 들었다. 그녀와 함께 집에 들르거라.]
오랜만에 받은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리고 그 편지 안에 적힌 아비의 저열한 의도가 눈에 훤히 보였기에 위일청은 또 다시 짜증이 일었다.
‘광마 어르신이라도 있으시면 좋을텐데…’
살막은 독고령을 노리고 있고, 위일청의 집안은 모용세가에 빌붙으며 그 대가로 독고령을 상납하려고 한다.
위일청에게 선택지는 하나 뿐이었다.
‘천축에 가는 수 밖에 없다. 그 곳에서 독고진 어르신께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받는 수 밖에…’
그가 주먹에 힘을 넣으며 속으로 다짐했다.
‘그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독고 소저를 지켜낼 수 밖에…’
*
목욕을 위해 하나씩 옷을 벗는 백리소현을 보며 독고령은 조금 망설이고 있었다.
“으… 으으…”
“안 벗고 뭐 해, 령 매?”
“그… 금방 벗을거야.”
“응, 그래.”
먼저 나신이 된 백리소현이 욕조로 향하는 것을 보며 독고령의 눈은 자연스레 그녀의 하복부에 쏠렸다.
끔찍한 검상은 언제봐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무명이 가진 상처보다 흉악하네. 저 어린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 개새끼들.’
자연스레 몇 안 되는 자신의 동업자를 떠올리자 독고령은 생각에 잠겼다.
‘… 그보다 나중에 무명 그 새끼를 만나면 뭐라고 해야하지…’
무슨 변명을 해야할까 떠올리다 독고령은 금세 그 생각을 부정했다.
‘시발, 몰라. 어차피 만날 일도 없겠지. 살수 새끼랑 엮일 일이 어딨겠냐…’
옷을 다 벗고 욕조로 향하며 독고령은 무명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렸다.
‘살막이 나랑 마주칠 일이 어딨겠냐, 시발.’
지금도 중원 어딘가에서 살수짓을 하고 있을 동업자 놈보다 당장 마주한 백리소현과 나눌 이야기들이 독고령에겐 더 중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