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2화 〉11장. 자각 - (5) (82/225)



〈 82화 〉11장. 자각 - (5)

독고령이 몸을 잔뜩 굳히곤, 눈을 감았다.


천천히 다가오는 위일청의 얼굴이 느껴졌다.


그의 코가 독고령의 코를 살짝 스쳤다.

그리고는 위일청이 자그맣게 속삭였다.


“독고 소저.”
“ㄴ… 녜헷…!”
“이런 상황에서 눈을 감으시면 저도 오해합니다.”
“흐에에… 그… 흐아아…”


독고령이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고개를 더욱 숙이자 그녀의 이마가 위일청의 얼굴에 맞닿았다.

그의 숨결이 독고령의 머릿칼을 간지럽혔다.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으으… 하… 할 꺼면 빨리 해요…”
“미행이 있습니다.”
“흐엑?!”

독고령이 당황하여 눈을 크게 뜨자, 위일청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처음부터 그냥 전음으로 하려 했는데 상대방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싶었습니다.]
[으으… 다… 다음부턴 이런 거 미리 말하고 해요!]
[죄송합니다. 솔직히 분위기 타서 은근슬쩍 할까도 싶었는데… 상대방이 아는 사람 같아서 떼어놓고 싶었습니다.]
[엑?!]


독고령이 중간에 신경쓰이는 말이 있었지만, 위일청의 말투가 워낙 심각해보여 넘어갔다.

[잠시만요. 저도 기감을 좀 끌어올려서 살펴볼게요.]

독고령이 눈을 감고 집중하여 기감을 확장시켰다.

그러자 금세 그녀의 기감에 두 명이 잡혔다.

‘하오문이랑 운소홍이 여기 왜…’

그제서야 눈치 챈 독고령이 얼굴을 확 붉혔다.

[서… 설마…]
[… 아까 꽃을 떨어트린 건 저 두 분의 소행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장 조지러…]
[독고 소저, 일단 침착하시지요. 어차피 이 곳은 외길입니다.]
[이익…!]
[그러니깐…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 어떻게요?]
[일단 뛰죠.]
[넷?]

갑자기 위일청이 독고령의 손을 잡아끌었다.

“꽉 잡으세요, 소저!”
“으으… 넷!”

위일청이 무릎을 굽히고 힘을 주더니 하늘로 뛰어올랐다.


“이대로 한동안은 쭉 도망치죠!”
“네… 넷!”


독고령이 그의 손을 붙잡고 같이 하늘로 뛰어올랐다.


“달리겠습니다!”
“네!!”


독고령과 위일청이 하늘로  것을 보고 멀리서 은관영의 새된 비명이 들렸다.

“아…! 눈치 챘나봐요, 언니!”

그 목소리를 듣고 독고령이 속으로 다짐했다.

‘다음에 반드시 조진다…! 돌아가서 보자, 하오문…!’

이를 악물고는 독고령이 지붕 위에 내려앉아 발에 힘을 주었다.

“일단 무조건 멀리 가요!”
“그러죠!”

또 한 번의 도약으로 독고령과 위일청이 한없이 멀어지자, 남아있던 은관영과 운소홍은 멍하니 그 둘을 쳐다보았다.

“… 놓쳤네요오.”
“그러게…”
“으으… 이따 독고 소저가 어떤 난리를 피울지 벌써부터 걱정이네요오…”
“… 힘내.”
“히이잉… 오지 말 걸…”

우울해진 은관영을 달래며 운소홍은 그녀와 함께 의녀문으로 향했다.



*



“후우… 이 정도면 더는 안 쫓아오겠군요.”
“그러게요…”


한참을 달려 한적한 곳에 다다르자, 독고령과 위일청은 잠시 멈췄다.


위일청이 허리춤에서 물 주머니를 꺼내 마시고는 독고령에게 건넸다.


“좀 마시겠습니까?”
“으… 아… 아니요.”
“예. 이따가 갈증이 느껴지시면 얘기하시죠.”
“ㄴ… 네에… 그보다…”


독고령이 붙잡힌 손을 들어올렸다.


“… 이젠 놓아주시면  돼요?”
“제 손을 잡고 있는 게 싫으십니까?”
“아… 으아… 그…”


독고령이 얼굴을 붉혔다.

도대체 위일청이 무슨 사술을 쓴 것인지, 그가 저렇게 당당하게 물을 때마다 독고령은 가슴 한 켠이 아려오며 말문이 막혔다.


입을 벌린 채,  말을 찾고 있는 독고령을 보며 위일청이 말했다.

“저는 소저와 손을 잡고 있는 게 좋습니다.”
“흐엑?!”
“평소에 그리 괄괄하시면서도 손은  고우시더라고요. 붙잡고 있으면 은은한 온기가 느껴져서 기분 좋습니다.”
“아… 으아… 그… 그런 말 좀 하지 마요!!”
“어떤 거 말입니까?”

위일청이 독고령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사랑의 말을 속삭이는 것이요? 하긴… 이런 건 정인들 사이에서나 하는 일이겠지요.”
“흐에엣…”
“사실 아까 은 소저가 저희를 미행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기뻤습니다. 덕분에 그 핑계로 이렇게 소저가 더 이상 도망칠 수도 없고, 둘이서 진득히 얘기할 곳까지 왔으니깐요.”
“아… 으…”


독고령은 순간 함정에 빠졌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 처음부터 한 패였나?!’


독고령의 머릿속이 혼란에 빠졌으나 위일청은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전에 못 했던 얘기를 마저해볼까요, 소저?”
“으… 어… 어떤 거요?”
“사랑이 뭔지 말입니다.”
“지… 지금요?”
“예. 지금요.”


위일청의 눈은 꾸준히, 올곧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독고령은 차마 위일청과 눈을 맞추지  하고, 고개를 돌렸다.

“지… 지금 말고…”
“전에 소저께서는 사랑이 ‘이 사람 없으면 안 되겠다’라고 정의하셨죠.”
“그… 그렇긴 한데… 저…”
“하지만 그 후로 꾸준히 지내본 결과, 저는 조금 다르다 생각했습니다.”


위일청이 붙잡고 있던 독고령의 손을 살짝 풀고는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을 집어넣어 깍지를 끼웠다.

“요 며칠, 저는 그 동안 저와 함께 지낸 모든 여인들을 다시 떠올려봤습니다. 책으로 배웠던 사랑에 대해서도 되새겨보고, 음… 다시 떠올리기 싫지만 아버지가 제가 어릴 때 보여주셨던 모습도 회상해봤죠.”
“소…  그렇게 잡지 마세요…”
“이렇게라도 꽉 붙잡지 않으면  도망가실  같아서요.”
“흐앗?!”

위일청이 깍지 낀 손을 잡아당겨 다른 손으로 독고령의 허리를 휘감으며 말했다.


“저는  방식대로 독고 소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 으아… 으…”
“그리고 이 방식이 아마 소저가 생각하는 사랑과 조금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가지는 소저와 겹치는군요.”

위일청이 독고령의 허리에 감은 손을 당겨 그녀에게 더욱 몸을 붙이며 말했다.

“저는 독고 소저 없으면 제 인생이  심심해질 거 같습니다.”
“흐에엑… 그… 그만 말해요!”
“이런 반응 하나하나 보는 것이 너무나 즐겁습니다. 낮에는 그리 괄괄하셔도, 밤만 되면 얌전해지시는 게 너무나 사랑스럽고요.”
“아흑?!”
“오늘 소저가 저를 보자고 하셨을 때 많이 기대했습니다. 오늘이라면 소저에게 무슨 얘기라도 들을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무… 무슨 얘기요…”
“소저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흐아아…”


독고령의 머리칼이 완연한 분홍빛으로 바뀌었다.


위일청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천천히 쓸어넘기며 말했다.


“이렇게 몸은 솔직하신데… 그래도 확인하고 싶더군요. 소저의 입으로, 직접.”
“으아아…”


독고령은 어떻게든 몸을 빼고 싶었으나, 위일청의 손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늘은 대답을 듣기 전까지 절대 놓아주지 않겠습니다.”
“그… 흐에에…!”

독고령이 당황하며 어디에 머리를 들이받을 바위라도 없나 찾아보았으나 애석하게도 주변에 그런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정말 탈출구가 보이지 않자, 독고령은 역으로 그에게 물었다.


“아… 위… 위 공자는 그… 왜 저한테 그러세요…”
“말했잖습니까.”

위일청이 독고령의 머리칼을 한 움큼, 손으로 붙잡아 거기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어여쁜 머리색이라고요.”
“그… 으으… 뭐… 뭐 해야돼요?”
“네?”
“뭐… 뭘 바라고 이러시는지…”
“풉.”


위일청이 갑자기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아내다가, 결국 터졌다.


“크큭... 크하핫!! 하아… 진짜…”
“예?”
“대답을 원합니다. 독고 소저의 솔직한, 진심이 듣고 싶어서요. 말했잖습니까.”


위일청이 몸을 숙여 독고령을 향해 얼굴을 가까이했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고요.”
“저… 저는… 그… 으…”


독고령은  번도 자신이 위일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긴 했지만, 단 한 번도 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당장 떠오르는 대답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아무 말로 무마하기엔… 위일청이 너무나 진지해보였다.


“저… 저는… 그…”


결국 독고령은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웅얼거렸다.


“… 나…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될까요?”
“지금 말하지 못 할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그… 으…”

독고령이 급하게 머리를 굴리다가, 결국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두… 두고   있어서 가지러 가봐야해서요!”
“무슨 물건입니까?”
“거… 검신 할아버지랑 약속도 잡아놨어요.”
“대답해주시고 가시면 금방이겠죠.”
“아... 으…”
“말했잖습니까,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안 놓을 거라고.”
“으으…! 모… 몰라욧!!!”
“네?”

결국 심리적으로 벼랑 끝까지 몰린 독고령은 어떻게든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내공을 끌어올려 위일청의 배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소… 소저?!”


주먹을 피하기위해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손을 놓고 살짝 거리를 벌린 위일청이 독고령을 보며 말했다.

“하아… 소저, 갑자기 주먹을…”
“나… 나도 잘 모르겠단 말이에요!!”
“예?”
“나… 나도… 잘 모르겠다고요…!! 진짜… 왜 다들 계속…”
“그냥 솔직하게 말씀을…”
“어… 어떻게 말해욧!!”


독고령이 빼액 소리를 지르며 위일청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자신이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자, 그녀의 얼굴이 조금씩 붉게 물들었다.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독고령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낮게 읖조렸다.

“나… 나중에 얘기해욧!”
“소저?”
“나중에요!!”

독고령이 땅을 박차고 경신술을 이용해 멀리 도망치는 것을 보고, 위일청은 허탈함에 주저앉았다.

“… 그냥 솔직히 말해주시면  텐데…”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어떻게 말해요라…’

싫어한다는 건지, 좋아한다는 건지…


매번 솔직한 모습을 잘만 보여주면서 막상 이런 순간에는 도망치는 그녀를 보며 위일청은 머리가 아파왔다.

“… 그냥 나무처럼 기다렸어야했나…”

다음엔 아예 도망가지 못 하게 묶어두거나 어디 동굴 같은 데 둘만 갇힌 상태에서나 말을 꺼내야겠다 생각하며 위일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다음엔 안 놓아줄 겁니다, 소저.’

참 어려운 여인이었다.


*

“하아…! 하아…!”

쿵쾅대는 가슴의 소리를 무시하고, 독고령은 한참을 내달렸다.

땅을 박차고, 나무를 박차고, 그렇게 최대한 멀리.

목적지도 없이 한참을 달린 끝에 그녀가 도착한 곳은 절벽이였다.

“하아…! 흐윽… 하아…!”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로 한참을 떨어지는 돌멩이를 바라보며 더는  수 없다 여긴 그녀는 멈춰서고,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으… 시바아아아알!!!!!”


한참을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리 소리를 내질러도 그녀의 마음 속 응어리는 가라앉지 않았다.


광증이 끌어오른 것보다 답답하고, 간질간질한 그 응어리는 계속하여 그녀로 하여금 방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했다.

[저는  방식대로 독고 소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소저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으으… 좀! 제발!!”

제발 그만 떠올리고 싶다며 아무리 몸부림쳐도 잊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 위일청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차자, 독고령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나느은…”


또 다시,  번이고 반복했던  말을 내뱉으려고 애썼다.

나는 위일청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주 가벼운 한 마디.

하지만 끝끝내 독고령의 목 끝에 걸려서 나오지 않는  한 마디에 독고령은 바닥을 내리쳤다.

“왜…! 왜! 못 말하냐고, 등신아…!”

몇 번이고 바닥을 내리치고, 손이 아려올 즈음.


독고령이 고개를 들었다.

계속하여 외면했지만, 이제는 슬슬 그녀도 진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나느은… 위일청을…”


고작 한 단어로 의미가 크게 바뀌는 문장이었다.


이전에는 어딘가 아려오는 가슴의 고통 때문에, 스스로를 속인다는 죄책감에 차마 목 끝에 걸려나오지 않던 말이었으나 이제는 전혀 다른 감각 때문에 쉬이 꺼내지 못 했다.

혹여나 누군가 듣지 않을까하는 부끄러움에,

오직 혼자만이 가슴  깊이 간직해두었다 생각하던 비밀을 풀어헤치는 긴장감에,


그녀는 아주 천천히, 떨려오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을 내뱉었다.

“나는… 위일청을… 좋아한다…”

마침내 완성된  문장에 독고령은 후련함마저 느끼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시발…”

이유 모를 눈물이 흘러나왔다.


“내가… 위일청을 좋아하는구나…”


결국, 독고령은 자신의 연심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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