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11장. 자각 - (3)
위일청이 독고령을 흔들어놓고 떠난 뒤, 홀로 남은 독고령은 결국 더 이상 검을 휘두르지 못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시발…’
위일청이 떠나며 보여주었던 새끼손가락이 계속 머리에 일렁였다.
‘안 잡을 거라고 시발 새끼야…’
절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먼저 나서서 그 새끼손가락을 잡지 않으리라 몇 번이고 다짐했다.
하지만…
‘… 잡기만 하면…’
그냥 눈 딱 감고, 실수인 척 꼬옥 붙잡는 순간.
위일청은 한밤 중에 몰래 찾아와 줄 것이다.
그리고 지난 밤처럼, 극상의 쾌락을 안겨줄 것이다.
“흐읏…”
그 때의 쾌락이 떠오르자 독고령의 하단전이 욱씬거렸다.
어떤 강적을 꺾는 쾌감보다,
무공이 발전하여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때의 쾌감보다,
더 강렬한 쾌감.
마치 중독이라도 된듯이 쉽사리 잊기 힘든 쾌감이었기에 더더욱 독고령은 위일청의 새끼손가락이 떠올랐다.
“시발… 시발시발시발…!”
독고령이 답답함에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와중, 갑자기 방의 문이 열렸다.
“어머, 독고 소저. 먼저 와계셨어요?”
“… 소홍이냐? 내단은?”
“이제부터는 가끔씩 확인만 하면 돼요. 피곤하네요… 읏…!”
운소홍이 기지개를 쭉 켜고는 독고령을 쳐다보았다.
“같이 목욕이라도 하실래요?”
“뭐?!”
“어머, 혹시 부끄러우시면 거절하셔도 되고요.”
“… 따로 하는 건 상관없어.”
“그럼 같이 가실래요?”
“…”
독고령은 잠시 망설였다.
옛날에 자신이 독고진이던 시절, 그가 알고 있던 운소홍은 완전 아기였다.
허나 지금은 장성한 여인이기에 함부로 같이 목욕하기는 조금 그랬다.
무엇보다… 운영이 알면 자신한테 온갖 지랄을 다 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 역시…”
“개인적으로는 독고 소저랑 위 공자의 관계가 궁금하기도 하고요.”
“흐엑?!”
“대신 저랑 노 공자의 이야기도 해줄게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으으…”
독고령이 망설이자, 운소홍은 살짝 아쉬운 듯 말했다.
“싫으시면 어쩔 수 없고요. 동생이 떠난 이후로 혼자라 외로웠는데…”
“지… 진짜 같이 가도 돼?”
“그럼요. 어차피 여자 둘이서 목욕하는 건데요, 뭘.”
“으으…”
“빼지 마시고요, 같이 가요. 자.”
운소홍이 독고령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결국 독고령은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지 못 했다.
‘운영, 미안하다…!’
“하아~, 참 오랜만이네요. 남과 함께 목욕을 하는 것도요.”
“어… 어.”
“후훗, 뭘 그렇게 가리고 그러세요?”
“아… 아니… 그…”
“혹시 상처라도 있으신가요?”
“그건 아닌데… 좀…”
독고령은 욕실에 들어간 뒤로 내내 눈둘 곳을 못 찾았다.
무엇보다 운소홍의 벗은 몸 때문이었다.
‘… 복잡한 심정이네.’
어릴 때만해도 진짜 그냥 어린 아이에 불과했는데 어느새 저렇게 자랐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알몸은 보여주는 것도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독고령이 말을 못 꺼내고 눈치만 살피고 있자, 운소홍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서, 독고 소저는 어때요?”
“어? 뭐... 뭐가?”
“위 공자랑 말이에요. 어떻게 만난 거예요?”
“그… 어쩌다 우연히. 나… 의 아버지를 찾으러 온 위일청이랑 우연히 만났지.”
“그리곤 같이 여행을 다니시는 거고요?”
“… 어.”
“독고 소저,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 뭔데?”
“위 공자랑 했어요?”
“흐엑?!”
갑작스런 질문에 독고령이 당황했다.
“아… 안 했어!!”
“진짜요? 같이 여행을 다니셨다길래 진즉에 몸을 섞으신 줄 알았는데 아니였네요.”
“…”
독고령은 굳이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후훗, 그럼 두 분은 무슨 관계인가요? 아직 정인이 되기 직전의 그런 단계인가요?”
“아… 아니! 도대체 왜 다들 나보고 그렇게 말하지?”
“으음? 그것도 아니에요?”
“아… 아니야! 나… 나는 위일청은 별로 막… 그…”
독고령이 얼굴을 붉히고 적절한 단어를 찾아 망설이고 있자, 운소홍이 웃었다.
“후훗, 솔직하지 못 하셔라.”
“아… 아니거든! 난 진짜로…”
“저희 아버지가 자주 말하시는 게 있는데 거짓말 중에 제일 아픈 거짓말은 자기 자신한테 하는 거짓말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응?”
“‘위 공자가 싫다’, ‘나는 위 공자를 안 좋아한다’라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독고 소저를 보니깐 그 말이 떠오르네요, 후훗.”
“나… 나는…”
“알았어요. 더 얘기하지 마세요, 충분히 이해가니깐.”
“흐으으…”
독고령이 입을 물 속에 집어넣고 부글부글 거품을 내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풉, 애기 같아요.”
“너… 너는 어떤데?! 너 노극명 좋아하냐?”
그녀 딴에는 나름의 역공이었으나, 운소홍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좀 마음에 들던데요?”
“으엑…”
“…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보이세요?”
“진심으로?”
“네, 괜찮던데요?”
운소홍이 웃으며 말했다.
“생긴 것도 마음에 들고, 덩치도 좋고, 훤칠하고, 저 배려해주는 것도 눈에 보이고, 무엇보다 제가 좋다는 게 눈에 훤히 보여서 기분 좋던데요?”
“… 고작 그걸로 노극명이 좋아졌어?”
“어머, 독고 소저는 그럼 어떻게 해야 남이 좋아지는데요?”
“그야…”
독고령이 잠시 고민하다 말을 내뱉었다.
“… 잘 싸우고, 말 잘 듣고, 나 도와주고.”
“위 공자가 그랬나요?”
“위… 위일청이 왜 튀어나와?!”
“귀여우셔라, 후훗. 진짜 신기하다니깐요? 어떻게 광마 아저씨가 이런 딸을 낳으셨지?”
“… 에이 씨.”
운소홍이 자신을 애취급하자 이상한 기분을 느낀 독고령이 툴툴거렸다.
“… 진짜 노극명이 좋아?”
“왜요? 별로인가요?”
“하아… 그건 아닌데…”
독고령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노극명이 정말 나쁜 놈인가를 물었을 때, 결국 문제 되는 것은 운영의 목에 칼을 들이댄 게 전부다.
그리고 그 착해빠진 운영은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댄 노극명을 용서해주었다.
당사자가 아닌 독고령이 그걸 가지고 계속 물고 늘어질 수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소속이었다.
“… 걔 모용세가 놈이야. 알지?”
“알죠. 대충은 들었어요. 저희 아버지를 모시러왔다죠?”
“괜찮겠어? 모용세가는 요즘 영 문제가 많아서…”
“정 안 되면 포기하죠.”
“으엥?!”
독고령이 당황하자, 운소홍이 또 다시 웃었다.
“아하핫! 독고 소저, 왜 이렇게 귀여우세요?”
“포… 포기한다고?!”
“제가 뭐 노 공자랑 결혼까지 하겠다고 했나요. 그냥 한 번 만나보고, 마음에 들면 혼인까지 하는 거죠. 아니다 싶으면 도중에 헤어지고요.”
“… 대단하다, 너.”
독고령은 진심으로 운소홍에게 감탄하며 말했다.
“아… 아니… 그… 사랑이 그렇게 막 왔다갔다…”
“독고 소저, 너무 그렇게 무겁게 생각하지 마세요.”
“응?”
“사랑이 뭐 다 이루어지나요? 좋다고 해서 다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싫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 좋아질 때도 있는거죠.”
“…”
“너무 하나의 답만 정해두지 마세요. ‘나는 이거 아니면 안 된다!’ 그런 건 없잖아요?”
“그런…가?”
“그런 거예요, 후훗. 그러니깐…”
은근슬쩍 운소홍이 독고령에게 다가왔다.
“위 공자랑도 한 번 가볍게 만나보세요.”
“흐엑?!”
“같이 마을이라도 나갔다 오는 게 어때요? 가서 장신구라도 사달라고 졸라보세요.”
“미… 미미미… 미쳤냐?!”
“어머, 다들 그렇게 친해지는 거죠 뭐.”
운소홍이 손을 뻗어 독고령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독고 소저는 귀가 예쁘시니깐, 귀걸이가 괜찮겠네요.”
“흐… 흐엑?!”
“스리슬쩍 위 공자의 팔을 껴안으면서 속삭이는 거예요. ‘공자님, 저는 저 장신구가 가지고 싶어요.’라고. 독고 소저는 예쁘니깐, 어떤 남자에게 부탁하더라도 들어줄걸요?”
“으… 으으…”
“더군다나 위 공자도 독고 소저한테 제법 마음이 있어보이던데요?”
“아… 그… 어…”
독고령의 눈동자가 빙빙돌기 시작했다.
‘위일청이 나한테? 아니, 내가 위일청의 팔에 안기라고? 내가?’
그녀의 머리가 완연한 분홍색으로 바뀌자 운소홍이 웃었다.
“참 예쁜 머리색이시네요, 독고 소저.”
“흐엑?!”
그 말이 결정타였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참으로 어여쁜 머리색이군요.]
위일청이 아까 했던 말이 다시 떠오르자, 독고령은 욕조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부끄러움 때문인지 결국은…
“흐에에…”
“도… 독고 소저?!”
천천히 물 안으로 가라앉았다.
*
정신을 차린 독고령이 가장 먼저 본 것은 백리소현이었다.
“… 왜 여깄냐, 둔치?”
“일어났어?”
“… 어.”
“욕실에서 쓰러졌다고 신의 아저씨네 아가씨한테 듣고 왔어.”
“…시발.”
“나쁜 말 하지 마.”
백리소현의 말을 무시하고 독고령이 몸을 일으키자, 그녀가 물을 건네주었다.
“자, 마시고 정신차려.”
“… 고맙다.”
독고령이 벌컥거리며 물을 들이키자 백리소현이 뒤에서 그녀의 머리를 쓸어넘기기 시작했다.
“… 뭐 하냐?”
“그냥. 령 매 머리 정리해주는 중?”
“… 굳이?”
“이렇게 잘 안 해주면 머리가 상해. 령 매는 머릿결이 고우니깐 더더욱 세심하게 관리해줘야하거든?”
“귀찮게스리…”
뒤에서 백리소현의 손길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걸 느끼며 독고령이 얌전해질 무렵,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일어나셨어요오?”
“… 넌 왜 왔냐, 하오문?”
“어… 도와드리러요? 그보다 독고 소저는 목욕하다 기절하는 경우가 참 많네요. 튼튼함에 비해 자주 쓰러지시는 거 같아요.”
“캬아아악!!”
“오랜만에 듣네요, 히힛.”
은관영이 웃으며 무언가를 들고와 독고령의 맞은 편에 앉았다.
“… 넌 뭐하냐?”
“가만히 있어요. 눈도 감으시고요.”
“분칠은 왜 해?”
“입도 다무세욧! 안 그러면 입에 들어가요!”
“…”
독고령이 어딘가 찝찝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입에는 뭘…”
“가만히 계세욧!”
“령 매, 자꾸 움직이면 안 돼.”
“…”
뒤에서는 백리소현이 머리를 매만지고, 앞에서는 은관영이 얼굴에 뭘 칠하고.
이건 뭐 마치…
“… 나 뭐 어디가냐?”
“응? 독고 소저가 먼저 꺼낸 얘기 아니였어요오?”
“령 매가 얘기했잖아.”
“… 어?”
당황한 독고령이 눈을 떴다.
“… 내가? 뭘 얘기해?”
그 때, 문이 열리더니 또 하나가 들어왔다.
“아, 독고 소저. 일어나셨어요?”
“… 어젠 미안했다, 소홍아. 네가 나 옮긴거지?”
“후훗, 괜찮아요. 덕분에 많이 만졌거든요.”
“…”
독고령은 어느새 저리 커버린 운소홍을 보고 심사가 복잡해졌다.
“… 그래서. 나 어디 가는데?”
“어머, 독고 소저. 기억 안 나세요?”
“응?”
“어제 밤새도록 위 공자를 찾으시던데요.”
“내… 내내내… 내가?!”
독고령이 갑자기 날뛰려고 하자 뒤에서 재빠르게 백리소현이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
“얌전히 있어, 령 매.”
“자꾸 그러면 번져요, 독고 소저. 가만히 있어요오.”
“아… 아니, 내가 누굴 찾았다고?”
독고령이 당황하며 묻자, 운소홍이 씨익 웃었다.
“어제 독고 소저가 잠꼬대로 몇 번이고 ‘위일청… 으으… 나는 위일청을… 으으…’ 이러시던데요?”
“엑?!”
독고령이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자, 그 모습을 보고 운소홍이 배실배실 웃었다.
“그래서 제가 위 공자에게 말했죠. ‘독고 소저가 위 공자가 너무 보고 싶어서 쓰러지셨더라고요. 내일 꼭 같이 나가주시겠어요?’ 라고 약속을 잡아놨어요.”
“너… 너너너… 네가 왜?!”
“독고 소저가 솔직하지 못 한 거 같아서요. 다행히 옆에 두 분이 제가 말하니깐 도와주시더라고요.”
“나… 나는…!”
“독고 소저, 아시죠? 어제 말한대로 해보세요. 팔짱, 귀걸이!”
“아니… 난 진짜 관심 없는데…”
그 때, 은관영이 손을 떼며 말했다.
“저는 끝! 소현 언니는요?”
“… 다 했어. 나도 끝. 이 정도면 오라버니도 좋아하지 않을까?”
“그쵸?”
“야, 이것들아…! 나는 진짜…”
독고령이 다시 날뛸 기운이 보이자, 백리소현이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령 매, 령 매. 팔은 이렇게 붙잡아.”
백리소현이 독고령의 팔을 붙잡아 자신의 가슴 사이에 끼워넣으며 말했다.
“령 매가 팔을 당기지 말고, 은근슬쩍 가슴을 밀어넣는 느낌으로. 알았지?”
“으… 음탕한 년아!”
“아무튼 이렇게만 하면 돼. 꼭 해야된다?”
“나… 나나나는…!”
“저는 대충 경로를 위 오빠한테 알려드렸으니깐, 그냥 위 오빠가 가자는 데로 가시면 될 거예요오.”
“나 안 간다고, 새끼들악!!!”
독고령이 악을 지르며 거절했음에도 다른 여인들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독고 소저, 안 가면 아빠한테 말해서 내단도 없던 걸로 만들 거예요.”
“그… 그딴 거…!”
“그리고 검신 할아버지한테 가서 이를 거예요.”
“아… 좀! 진짜 부녀가 쌍으로 검신을 들먹이고 진짜…”
독고령이 머리를 벅벅 긁으려는 순간, 백리소현이 그녀의 팔을 잡아 멈춰세웠다.
“머리는 건드리지 마. 내가 잘 해놨단 말이야.”
“캬아아악!! 미치겠네, 진짜!!”
그 때, 문이 열렸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독고… 소저?”
위일청이 독고령을 쳐다보더니 조금 의아한 듯 그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는 그가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 준비가 다 되셨나보네요. 가실까요?”
“아… 아니… 그… 난 진짜로…”
독고령이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던 와중, 다른 사람의 손이 그녀의 등을 가로막았다.
“빼지 마세요오, 좀!”
“령 매, 내가 말한 거 꼭 기억해!”
“아… 아니… 난 진짜아…!”
독고령이 머뭇거리자 답답함에 백리소현과 은관영이 그녀를 떠밀었다.
갑자기 등을 떠밀리자 독고령이 쓰러지듯 앞으로 기울었고, 그런 그녀를 위일청이 붙잡아주었다.
“흐앗…!”
“어이쿠… 괜찮으십니까?”
“흐아아…”
독고령이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이자, 위일청이 그 모습을 보곤 피식 웃었다.
“예쁘게 꾸미셨네요. 어울리십니다.”
“그… 그게…”
“잡으시죠.”
“아… 아니… 나는…”
독고령의 눈이 갈 곳을 잃은 채 주변을 헤매자 위일청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흐엑?!”
“손을 잡는 건 부담스러워하셨으니 이렇게 하시죠.”
독고령의 손을 자신의 소맷자락으로 옮긴 그는 손수 그녀의 손가락을 접어 자신의 소매를 붙잡게 만들었다.
“어떤가요?”
“그… 으…”
“여기 더 있으신 것보다는 나을 거 같은데요?”
“으으으…”
독고령의 손이 꼬옥, 위일청의 소맷자락을 붙잡고는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 녜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