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11장. 자각 - (2)
검신에게 찾아간 위일청은 독고령과 똑같은 경험을 했다.
“허억… 허억…”
“보았나?”
“… 예, 보았습니다.”
“어떤가?”
“… 무례를 무릅쓰고 가르침을 청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클클클. 노부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구만.”
남궁원청이 웃으며 위일청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자네는 참 특이하구만.”
“예?”
“내공은 혼자서 못 쌓고, 검술은 혼자서 창안하고. 맞나?”
“예, 맞습니다.”
“재밌구만. 혹시 스승은 누구인가?”
“… 내공은 가문에 내려오는 비급을 혼자 해석한 것이고, 검술은 그저 가지고 있는 막대한 내공을 살릴 방법을 고민하다 만들었습니다. 대부분은 그저 짐승의 행동들을 흉내낸 것에 불과합니다.”
“그게 바로 ‘형의권’이지. 무공의 기초 아니겠나?”
남궁원청이 나뭇가지를 들고는 자세를 취했다.
“단순히 형을 따라하면 3류, 그 속에 의념을 담으면 2류, 거기에 역사가 쌓이면 1류. 무공을 논할 때 자주하는 얘기들이지.”
“들어본 적 있습니다.”
“자네는 동물의 모습을 베껴 검술을 만들 때, 그 동물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취했나 생각해 본 적이 있나?”
“…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해보고 자신의 검술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그럼 또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걸세.”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위일청이 고개를 숙이며 포권하자, 남궁원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나야말로 고맙지. 그대 덕에 즐거웠으니 말일세.”
“… 제가 무언가를 했습니까?”
“독고령 말일세, 클클.”
“아…”
위일청이 어중간한 표정을 지었다.
웃는 것도, 그렇다고 부끄러워하는 것도 아닌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남궁원청의 눈썹이 올라갔다.
“무슨 일이 있긴 있었나보구만.”
“… 그냥 그저 그런 일이었습니다.”
“그저 그런 일이 대부분 보통 일이 아니게 되더군.”
“…”
“클클클, 노부가 너무 많이 간섭했구만. 미안하네.”
“아닙니다, 어르신. 그저…”
위일청이 고개를 숙였다.
“…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따로 없어서요.”
“음?”
“나무는 자신의 그늘에 행인이 들어오길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 나무가 먼저 행인에게 그늘을 제공하진 않죠.”
“흐음…”
“저는 일단 기다려보려고 합니다.”
위일청의 말을 들은 남궁원청은 웃으며 말했다.
“부창부수라더니, 클클.”
“저희는 부부가 아닙니다.”
“노부는 누구인지 지목하지 않았네만?”
“… 짓궂으십니다.”
“크하핫!”
남궁원청이 크게 웃더니, 위일청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나뭇가지로 가볍게 때렸다.
“이 사람아. 자네는 나무가 아니라 사람일세.”
“알고 있습니다.”
“아니, 자네도 모르는 거 같구만. 나무는 더위를 타는 행인이 자신의 그늘로 들어오길 그저 기다릴 수 밖에 없지만… 사람은 자신의 옷을 벗어 그늘을 만들어줄 수도 있지.”
“…”
“때론 시간이 독이 될 수도 있는 법. 무작정 기다리기보다는 기한을 정해두고 기다리게나.”
“… 참고하겠습니다.”
“크하핫! 그럼 가보겠네. 부디 노부의 가르침이 도움이 되었길 바라네.”
“이미 충분히 많이 배웠습니다, 어르신. 정말 감사합니다.”
“뭘 그리 큰 일을 했다고.”
남궁원청이 손을 흔들며 떠나자 홀로 남은 위일청은 그의 말을 곱씹었다.
‘나무가 아니라 사람이라…’
위일청은 자신이 독고령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몰래 제 새끼손가락을 움켜쥐세요.]
과연 독고령이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움켜쥘지 확신이 없었다.
‘참… 어려운 여인이십니다, 독고 소저.’
누구든 자신과 하룻밤만 같이 보낸다면 함께하리라 10할 확신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독고령이라는 한 여인이 그가 여지껏 쌓아온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처녀를 먼저 가져가지 않겠노라 약속했지만, 이젠 위일청이 더 참기 힘들었다.
넘어올듯, 말듯.
애매하게 자신을 애태우는 독고령을 보고 있자니 답답했다.
‘이 쪽에서 먼저 다가간다라…’
위일청이 주먹을 꽉 쥐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 그래. 어차피 답답하게 상대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내가 먼저 가는 것이 더 낫겠군.’
멍청하게 굳이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독고령 또한 자신에게 마음이 있으리라, 위일청은 확신하고 있었다.
지난 밤, 독고령이 보여준 반응이 그를 증명했다.
자신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순간, 자연스레 눈을 감은 독고령의 모습이 떠오르자 위일청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서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를 고민하며 자신의 처소에 돌아온 순간.
“아, 위 오라버니. 령 매가 한동안 따로 지내겠다는데?”
“… 예?”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
“가… 갑자기요?”
“응. 오라버니는 뭐 아는 게 있는 거 아니야?”
“아…”
백리소현의 말을 듣자, 위일청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 제가 실수했나보군요.”
“뭐 했어?”
“… 제가 독고 소저를 너무 밀어붙인 거 같습니다. 하아…”
위일청이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바닥에 앉았다.
“이걸 어찌해야할 지…”
“오라버니가… 음…”
백리소현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깐 말해주기 애매하네. 무슨 일이 있었어?”
“… 그건 좀 얘기하기 곤란하군요. 독고 소저와 비밀로 하기로 해서요.”
“그럼… 일단 오라버니가 먼저 가서 사과해보는 건 어때?”
“사과요?”
“응. 오라버니는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 예, 맞습니다.”
“그럼 일단 가서 사과하고, 실수를 바로잡으려고 해 봐.”
“정론이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백리 소저.”
방금까지 축 처진 위일청이 벌떡 일어났다.
“독고 소저는 어디에 계신지 아십니까?”
“글쎄. 잘 모르겠어. 신의 아저씨한테 물어보는 건 어때?”
“그래야겠군요. 나가보겠습니다, 백리 소저.”
“응, 다녀 와~.”
다시 밖으로 나가는 위일청을 보며 백리소현이 피식 웃었다.
“어째 둘이 하는 행동이 비슷해지네.”
*
위일청에게 심검을 보여준 뒤, 남궁원청은 운영에게 찾아갔다.
“오셨습니까, 어르신? 무슨 일이시지요?”
“슬슬 가보려고 하네. 치료도 끝났고, 할 일도 다 해서 말일세.”
“그렇군요. 약은 잘 챙겨드시고, 음…”
운영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 가족들에겐 슬슬 얘기하시죠.”
“얼마 안 남았다고? 크하핫, 그건 이미 다들 알고 있지 않겠나?”
“그래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여지를 주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닐세…”
남궁원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그래도 심란한 아들 놈한테 괜히 짐 하나 더 얹어주는 거 같구만.”
“… 어르신의 뜻대로 하시지요.”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네. 항상 고맙구만, 운영.”
남궁원청이 운영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 다음에 또 보잔 말은 못 하겠군.”
“거 불안하게 왜 그러십니까?”
“크하핫! 나이를 먹으니깐 사람이 감성적이게 되는 거 같구만.”
“기왕 드신 나이, 소소 아가씨가 혼인을 치를 때까지 살다 가시지요.”
“그러려고 노력하지. 그 전에 소홍이부터 어떻게 하게나.”
“안 그래도 소홍이한테 봄이 왔나보더군요.”
“음?”
남궁원청이 흥미로운듯 운영을 쳐다보았다.
“누구인가? 설마 위일청인가?”
“아닙니다. 노극명이라고, 모용세가에서 온 놈입니다.”
“노순평의 자식이구만. 헌데 괜찮겠나? 독고진 놈이랑 모용세가랑 사이가 영 안 좋을텐데…”
“뭐 어쩌겠습니까. 윗 세대의 원한은 윗 세대의 것으로 남겨둬야지요. 정작 결정할 것은 그 둘이고, 혹여나 부모가 그 선택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지요.”
운영이 웃음을 터뜨리곤 남궁원청을 바라봤다.
“모용세가의 가주가 이번에 저를 찾던데 내단만 완성되면 한 번 들러보려고요.”
“음? 모용벽 그 놈이?”
“모르셨습니까?”
“허어…”
남궁원청이 수염을 쓰다듬고는 운영을 쳐다보았다.
“… 말려도 갈테지?”
“그렇지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어떤 놈인지.”
“흐음…”
남궁원청이 묘한 눈으로 운영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노부의 묫자리가 정해졌나보구만…’
“내가 따라가면 어떤가?”
“… 예? 어르신이요?”
“안 그래도 요 근래 바람이나 쐴까 싶었네만… 요녕이라면 제법 괜찮은 동네지.”
“저… 저야 좋지만… 괜찮으십니까?”
“클클클, 어차피 늙은이 하나가 마실 나가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 그냥 늙은이가 아니시지 않습니까.”
“됐네.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겠다는데 누가 말리겠나? 내단을 다 만들면 얘기하게나. 나도 다른 이들에게 미리 말해둬야겠구만.”
“… 예.”
남궁원청이 이미 마음을 굳힌 듯 하자, 운영은 그저 수긍할 수 밖에 없었다.
“흐음… 뭐로 시간을 보내야할꼬…”
어딘지 살짝은 신나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운영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웃기만 했다.
*
처소에서 나온 위일청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독고령을 찾아갔다.
“후우…”
별 거 아닌, 그냥 가볍게 만날 생각이었다.
왜 갑자기 따로 지내겠냐고 했는지 묻기 위한, 아주 가벼운 말 한 마디 정도 꺼내는 일이었지만 이상하게 위일청은 긴장감을 느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괜히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냥 가볍게 물을 뿐이다. 그리고 말 한 마디로 조금씩 이야기를…’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독고령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때.
후웅!
“아, 시발… 잘 안 되네…”
널찍한 공터에서 칼을 휘두르는 독고령이 보였다.
평소처럼 붉은 머리에, 하는 게 잘 안 되는지 살짝 짜증이 배어있는 얼굴.
하지만 그 별 거 아닌 평상시의 독고령을 보는 순간, 위일청의 발걸음이 멈춰섰다.
“이게 시발 이렇게 돼야 하는데…”
같은 자세를 몇 번이고 반복하며 열심히 칼을 휘두르는 그녀를 위일청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평상시에는 저리 드세고 쾌활하면서 어찌 밤만 되면 그리 얌전해지는 것일까.
문득 어제 있었던 일이 다시 한 번 떠오르자, 위일청은 목이 타들어갔다.
‘그 때… 뭐라도 말했더라면… 아니면 그냥 끝까지…’
끝까지 밀어붙이면 독고령은 피했을까?
당시엔 분위기를 타서 자연스레 몸이 움직였지만, 지금은 어떨까?
위일청의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지며 자신이 왜 이 곳에 찾아왔는지도 잊어버릴 무렵.
“흐엑?!”
독고령이 갑자기 새된 비명을 질렀다.
위일청이 고개를 들자, 독고령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 독고 소저. 죄송합니다, 수련에 열중하고 계신 듯 하여…”
“왜… 왜왜왜… 왜 왔어… 요?!”
“오면 안 됩니까?”
“그… 그건 아닌데…”
독고령의 머리가 금세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하자, 위일청은 절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참으로 어여쁜 머리색이군요.”
“미… 미친 놈아! 그만 말해요!!”
“음? 제가 전에도 말했었습니까?”
“… 산동에서 말했거든요.”
“아…”
위일청이 기억을 더듬어보자 산동에 있을 당시 독고령과 사랑이 무엇인가 논하던 때에 그런 말을 했던 것이 떠올랐다.
“… 하긴. 보다보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 안 얘기했을 리가 없네요.”
“그… 그만 얘기해요!”
“크큭, 알았습니다.”
독고령이 볼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날뛰는 모습을 보자 오히려 위일청은 안심됐다.
‘다행이군요. 평소 같아서요.’
갑자기 따로 지내겠다고 말했을 때는 혹시 어제 일 때문에 자신이 불편해진 게 아닌가 걱정했었으나 지금의 모습을 보자 괜한 걱정을 했나 싶었다.
“그… 그래서 왜 왔어요…?”
“한동안 따로 지내겠다고 하셨다면서요?”
“… 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모습을 보니 괜찮겠군요.”
“뭐… 뭐가 괜찮아요?”
“독고 소저는 평상시와 똑같군요.”
“…”
마음에 들어찼던 응어리가 사라진 듯 느끼자, 위일청이 웃었다.
“걱정이 해결되었으니 됐습니다. 그냥 잘 있나 궁금해서 왔습니다.”
“…”
“제가 했던 말은 안 잊으셨겠지요?”
“ㅁ… 어떤거요?”
위일청이 휙 새끼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저는 기다리겠습니다. 나무처럼요.”
“히익?! 아… 안 잡을 거예요!!”
“크크큭, 예. 안 잡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위일청은 독고령을 마주 보고 웃었다.
“어떻게든 천축에 모셔다 드릴테니깐요.”
“흐엑?!”
“그리고 그 곳에서, 소저의 초야를 받겠습니다.”
“으… 그… 흐아…”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수련에 전념하시지요.”
위일청이 조금씩 멀어지며, 독고령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가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시발… 진짜 미치겠네…”
이 상태로 어떻게 수련에 전념하냐고…
다른 생각이 계속 들어차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