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10장. 의녀문(醫女們) - (8)
독고령이 자세를 잡자, 남궁원청이 씨익 웃었다.
‘여전히 투쟁심은 안 사라졌구만.’
아직까지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지만, 어느 쪽이든 독고령은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남궁원청은 그 선택에 아주 약간의 도움만 줄 생각이었다.
“검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예?”
“말 그대로일세. 검이란 무엇인가?”
“어… 사람을 죽이는 도구요?”
“간단하구만.”
남궁원청이 나뭇가지를 들어보이며 말했다.
“이건 검일세.”
“네?”
“이제부터 이걸로 자네를 죽일 것이니 검이네. 맞는가?”
“… 뜬 구름 잡는 소리를 하시네요.”
“자네가 말한 게 그렇지 않은가?”
남궁원청이 천천히 나뭇가지를 들어올렸다.
“말년에 이르자 고민거리가 생기더구만.”
“… 어떤 거요?”
“검은 뭘까? 내가 휘둘러 온 것은 무엇일까? 뭐 그런 시덥잖은 고민들 말일세.”
“답은 얻으셨고요?”
“그게 이걸세.”
말이 끝내기 무섭게 남궁원청의 무지막지한 내공으로 인해 주변이 일그러져 보이기 시작했다.
‘미… 미친 영감탱이가!’
남궁원청은 허언을 하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독고령을 죽일 기세로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이익…!”
독고령이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고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독고령은 갑자기 세상의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자신을 향해 내리치는 남궁원청의 나뭇가지.
그 뒤로 떨어져내리는 나뭇잎.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의 흙 알갱이 하나까지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가 느끼는 세상이 넓어졌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 독고령은 오로지 그가 휘두르는 궤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다.
온 몸이 원하는대로 움직이지 않는 답답함 속에서도 조바심 내지 않고 천천히.
마침내 그녀가 남궁원청이 휘두르는 나뭇가지의 궤적에서 벗어나는 순간.
독고령의 세상이 다시 원래의 속도로 돌아왔다.
독고령이 바닥을 구르고는 온 몸에서 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아…”
“보았나?”
“… 뭐… 뭘요?”
“그게 자네의 죽음일세.”
“…”
“자네는 피했다고 생각했겠지.”
“예?”
남궁원청이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를 가리켰다.
독고령이 그 곳을 쳐다보자 이미 베어있는 옷이 보였다.
“어…?”
분명 나뭇가지의 궤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남궁원청은 얼이 빠진 독고령을 쳐다보며 그녀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단순히 사람을 죽이고자 하면 방법은 많지. 권, 각, 지, 도 ,검, 편, 창… 수없이 많은 방법이 있다네.”
“… 네.”
“단순히 베고자 하는 것 또한 방법은 많지. 검으로 베든, 도로 베든, 아니면 손으로 베든. 베고자 마음 먹으면 다 벨 수 있다네.”
“…”
“결국 정하는 건 자넬세. 무엇으로, 어떤 걸 벨지 고르기만 하면 된다네. 그게 심검의 첫 발걸음일세.”
남궁원청이 나뭇가지를 들어 독고령의 눈 앞에서 흔들었다.
“이게 무엇으로 보이나?”
“… 모르겠어요.”
“정답일세. 정하기 전까지는 뭐든지 될 수 있다네.”
남궁원청이 씨익 웃으며 나뭇가지로 독고령의 머리를 살짝 때렸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나뭇가지로 정했지.”
“… 예.”
독고령이 얻어맏은 머리를 문질거리자, 남궁원청이 웃으며 일어섰다.
“어느 쪽이든 자네가 옳은 선택 말고, 원하는 선택을 했으면 좋겠다네. 결국 사람은 마음 먹기 따라 달라지는 법이니, 정 선택지가 보이지 않을 때는 마음 가는대로 선택하게.”
“저… 저는 항상 그렇게 살았거든요!”
“그럼 앞으로도 그리 살게나, 클클. 허나 아직은 자기 마음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구만.”
“또 알 수 없는 소리를…”
“거 성질도 좀 줄이고.”
그가 머리를 한 대 더때리고는 뒷짐을 지고서 나뭇가지를 흔들거리며 자리를 떴다.
그 뒷모습을 보며 독고령은 툴툴댔다.
“내 마음이 뭐 어쨌다고 다들 그러는거야, 시발…”
*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한 뒤, 독고령은 남궁원청의 뜻 모를 흰소리는 잊어버리고자 마음 먹고 운영을 찾아갔다.
“어이! 거기 있…어요?”
“어머, 독고 소저. 오셨어요?”
약제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쳐들어간 독고령은 운영과 같이 있는 운소홍을 보고는 말을 조심했다.
“… 내단 언제 돼요?”
독고령이 존댓말을 하는 것을 듣자, 운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독고 소저.”
“… 네.”
“뭘 잘못 먹었습니까?”
“… 뒤질래요?”
“알맹이는 멀쩡한데 어디 문제가 생겼나보군요. 진단을…”
[거기까지 해, 새끼야. 소홍이 앞에서 말을 놓을까?]
“… 할 필요까진 없겠군요.”
타박을 들은 운영이 얌전해진 걸 확인하고는 독고령이 말을 이어나갔다.
“… 그래서 내단 얼마나 걸려요?”
“한 일주일 걸립니다. 배합은 끝냈는데 일단 양기를 좀 죽여야해서요.”
“많으면 좋은 거 아니에요?”
“과하면 독이 되죠.”
운영의 말이니 그러리라 생각하며 독고령이 일주일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던 와중.
“어르신, 말씀하신 걸 가져왔습니다.”
“… 너는 왜 여깄냐?”
노극명이 품에 무언가를 가득 들고왔다.
“아… 그게…”
“제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운영의 대답을 듣자 독고령이 그를 쏘아보며 전음을 보냈다.
[미쳤냐? 저 새끼가 네 목에 칼을…]
그 때, 노극명이 품에 가득 안은 무언가를 운소홍이 건네받았다.
“고마워요, 노 대협.”
“아… 아닙니다. 더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노극명이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으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운소홍 또한 웃음을 입으로 가리며, 고개를 숙이고는 수줍게 말했다.
“그럼… 다른 일도 도와주시겠어요?”
“ㅇ… 예!”
“이 쪽으로…”
운소홍이 노극명을 끌고 이것저것 일을 지시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뭔가 분위기가 묘했다.
“광마, 이 쪽으로.”
운영이 자신을 속삭여 부르자 독고령이 그에게 다가가 턱짓으로 둘을 가리켰다.
“… 쟤네 뭐냐?”
“분위기가 심상치 않죠?”
“아니, 시발.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어제 저 놈이 저에게 찾아와 뭐든지 시켜만 주면 다 하겠다고 하길래 이 참에 소홍이시켜서 창고나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 근데?”
“그러고는 저 상태더군요.”
“에이, 시발 진짜…”
독고령이 얼굴을 찌푸렸다.
“존나 찝찝하네.”
“찝찝할 게 뭐 있습니까? 따지고보면 노극명 저 친구, 명문세가의 유명 자제 아닙니까?”
“미친 놈아. 내가 그 명문세가 박살냈거든?”
“소홍이도 혼기가 차긴 했죠.”
“…”
그 말을 듣자 독고령이 입을 벌리고는 운영을 쳐다봤다.
“너… 너 미쳤냐?”
“왜 그러십니까?”
“아니… 저 새끼 네 목에 칼을 들이댔던 새끼라니깐?”
“급해서 그랬다지 않습니까. 저런 친구가 또 지킬 게 있으면 물불 안 가리고 자신의 여인을 지키겠죠.”
“너, 시발. 전에 네 딸 평생 데리고 살겠다매.”
그 말을 듣자 운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독고령을 내려다보았다.
“하아… 광마, 당연히 농담이죠.”
“너 진짜 개새끼다. 그 때 시발 나보고는 다리 벌리라고 개지랄 떨지 않았냐?”
“개지랄이라니요. 어디까지나 의원의 판단을 내린건데요?”
“시발 새끼, 똥물에 튀겨죽일 새끼, 개새끼.”
“으하핫, 뭐 어떻습니까. 한창 때의 남녀는 하룻밤 만에 서로에게 빠져드는 법이지요.”
운영이 호탕하게 웃어재끼고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독고령을 내려보았다.
“그치요, 광마?”
“… 왜 그런 식으로 쳐다보냐?”
“흐음… 어젯밤에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닙니까?”
“흐엑?!”
독고령의 머리가 분홍빛으로 바뀌자, 운영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보십시오, 광마. 그 쪽이 제일 잘 알…”
“다… 닥쳐!”
“컥!”
독고령이 당황하여 그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운영이 배를 부여잡고 쓰러지자 독고령이 당황하며 그를 부축했다.
“괘… 괜찮냐?!”
“너… 너무 아파요. 좀 살살…”
“아이, 시발. 무공 좀 배워두지 그랬냐, 새끼야. 그럼 덜 아플텐데…”
“아니, 그게 무슨 헛소리입니까…”
“아, 시발 몰라. 네 잘못이다. 다음부터는 힘조절해서 때릴게.”
“그냥 안 때리시면…”
“…”
그래도 주둥이가 나불대는 것을 보니 많이 아프진 않았겠구나 생각하며 독고령이 그를 무시하고 일어났다.
“어이, 노극명!”
“ㅇ… 예, 소저!”
“잠시 나 좀 보자. 소홍아, 빌려가도 되지?”
“어… 네.”
“그리고 니네 아버지 좀 돌봐주고. 탁상에 허리를 찧었나보더라.”
“… 네?”
운소홍이 당황하는 것을 무시하고 독고령은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로 부르신건지…”
“닥치고 따라와.”
“… 예.”
한적한 공터에 도착하자 독고령이 뒤돌아서서 노극명을 마주 보았다.
“… 너 소홍이 좋아하냐?”
“옛?”
“뒤질라고. 나는 누가 되묻는 거 존나 싫으니깐 한 번에 똑바로 대답해. 소홍이 좋아하냐고?”
“그… 그게…”
노극명이 말을 뜸들이다가, 심호흡을 쉬고는 대답했다.
“… 좋아합니다.”
“헤어져.”
“예?!”
“헤어지라고, 새끼야. 시발, 사람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양심이 있으면 알아서 시발 마음조차 품지 말아야지, 새끼야.”
“소… 소저가 왜 간섭하십니까?”
“어쭈?”
노극명이 반발하자 독고령은 짜증이 솟아올랐다.
“이 새끼가 한동안 같이다니다 보니 주제파악을 못 하네?”
“그… 그게 아니라! 왜 소저가 거기에 간섭하시냐는 겁니다!”
“새끼야, 운영 목에 칼 들이댄 건 그새 잊어버렸냐?”
“그건 신의 어르신이 용서하신 일입니다!”
“내가 용서 안 했어, 새끼야. 자꾸 목소리 높아진다?”
독고령이 슬그머니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하자, 노극명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손이 허리춤에 매달린 칼로 가는 것을 보고 독고령이 비웃었다.
“뽑으려고?”
“… 제가 잘못한 일도 있고, 소저의 춘부장과 저희 모용세가가 안 좋은 사이인 것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뽑으면 너 뒤진다. 전에 네 모가지 따려던 거 기억나지?”
“하지만 이미 좋아하게 된 걸 어찌합니까!”
“그러니깐 그냥 접으라고!”
“소저는 위 공자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 있으십니까?!!”
“흐엑?!”
갑작스레 튀어나온 그의 외침에 독고령이 당황했다.
“미… 미친놈아! 위일청이 왜 튀어나와?!!”
“당장 광마 어르신이 튀어나와 위 공자를 죽이겠다고 하면 소저는 그냥 위 공자가 죽게 내버려두실 겁니까?!!”
“아… 안 죽여, 미친 놈아!”
“저도 같습니다!!”
노극명이 칼을 뽑아들고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첫 눈에 반했습니다! 소저가 위 공자를 사랑하는 만큼요! 어쩌면 그 이상으로요!”
“미… 미친 새끼야! 왜 계속 위일청을 들먹이냐고!!”
“그래야 이해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소저 또한 위 공자를 사랑하시잖아요!”
“아… 안 사랑해!!”
“거짓말 하지마십쇼! 눈이 있는 자라면 누구든 알아차릴 겁니다!”
“으엑?!”
독고령의 머리가 조금씩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노극명이 말했다.
“보십시오! 위 공자만 떠올리셔도 머리색이 바뀌시지 않습니까!”
“이… 이건…”
“저도 눈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올릴 때마다 머리색이 바뀌시는 거죠?!”
“그… 그런 거 아니거든, 새끼야!”
“소저도 사랑을 하시면서 왜 저를 이해 못 해주십니까?!”
“나… 나는…!”
“거울이라도 보여드리고 싶군요! 지금 소저의 표정은 평소의 그 포악한 표정이 아니라 사랑에 빠진 여인 그 자체입니다!”
“흐엑?!”
독고령이 당황하여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이 참에 위 공자를 불러서 물어보죠! 제가 운 소저를 사랑하는 게 그리 큰 문제인지요!”
“위일청한테 왜 지랄이야, 새끼약!!”
“소저가 저한테 뭐라고 하시니, 소저의 정인에게 물어보는 거 아닙니까?!”
“내… 내 정인 아니거든!!!”
“그럼 두 분은 무슨 관계십니까?”
남궁원청과 똑같은 질문을 받은 독고령은 당황했다.
“내… 내가 그걸 왜…”
“두 분이 정인이 아니시면 무슨 관계십니까?”
“으… 으으…”
“틈만 나면 서로를 흘깃흘깃 쳐다보시고! 가끔씩 오밤중에 두 분이서 어딘가로 사라지고! 두 분이 같이 있으면 묘한 기류도 흐르고 있는데 정인이 아니군요! 고백하기 직전이십니까?!”
“아… 흐엑? 아… 아니…”
독고령이 터질듯이 달아오른 얼굴과 함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나… 나랑 위일청은…’
아무리 고민해도 무슨 사이인지 모르겠다.
남궁원청에겐 동행자라고 대답했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하지만 정인은… 그것만은 아니다.
독고령은 완강히 자신이 위일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 나는…”
“소저는 위 공자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제가 운 소저를 사랑하듯이요.”
“아… 아니…”
“아니라면 두 분은 무슨 관계신데요?”
“으… 으으…”
“대답해주시죠, 독고 소저!!”
“으아아…”
독고령의 머리카락이 완전히 분홍색으로 바뀌었다.
“대답해보세요, 독고 소…!”
“다… 닥쳐, 좀!!!”
쾅!
결국 혼란을 이겨내지 못한 독고령이 닥달하는 노극명을 후려쳤다.
“끄억…”
노극명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지자, 그를 내려보며 독고령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아… 나… 나는…”
‘나는 위일청을 안 좋아한다.’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다.
“나… 나는… 나는…”
자신은 위일청을 안 좋아한다고, 아무 감정도 없다고.
“나느은…”
하지만 끝끝내 독고령은 말을 마무리 짓지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