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10장. 의녀문(醫女們) - (2)
독고령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겁에 질려있던 와중, 운영이 실실 웃으며 그녀를 가르켰다.
“저 친구가 독고진의 여식입니다.”
“호오?”
남궁원청의 한 쪽 눈썹이 올라가는 걸 보고 독고령은 이를 악물었다.
‘운영 이 미친 새끼야악!!’
독고령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남궁원청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핫, 겁 먹었는가?”
“…”
“이리 와보시게.”
“아니… 그…”
“음?”
독고령이 망설이는 것을 보고 남궁원청이 피식 웃었다.
“눈매는 애비를 똑같이 닮았으나 하는 짓은 영 딴판이구만.”
“으하핫, 아닙니다. 어르신이 광마 그 친구에게 하도 겁을 줘놔서 저 아이도 겁을 먹었나 보지요.”
“누… 누가 겁을…!”
독고령이 발끈해서 운영의 말에 반박하자 남궁원청이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크하핫! 맞구만. 독고진의 자식이야.”
“그치요?”
“자식은 부모를 닮기 마련이라더니 맞는 말일세. 그리고 옆에 있는 자가…”
남궁원청이 잠시 위일청을 쳐다보았다.
“독고진의 여식과 같이 다니는 것을 보면 자네가 위일청이겠구만.”
“예, 검신 어르신.”
“재밌는 조합이구만. 광마와 색마라… 크하핫.”
“그보다 어르신, 소개는 나중에 하고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매번 오시던 이유와 같으시지요?”
“아, 그렇지.”
“소홍아, 너는 미리 약을 준비해다오.”
“네, 아버지.”
“검신 어르신, 안으로 드시지요.”
“그래, 알겠네.”
남궁원청이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사라지자, 운영이 그 뒤를 쫓아들어갔다.
두 명이 사라진 것을 보고 독고령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흐어… 뒤지는 줄 알았네.”
“… 그렇게 검신 어르신이 무섭습니까?”
“야이 씨, 존나 세잖아. 깝쳤다가 뒤지면 어쩌려고?”
“독고 소저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검신 어르신의 대단함이 다시 느껴집니다.”
“뒤진다?!”
독고령이 발작하며 위일청에게 대드려던 순간, 안으로 들어간 운영이 튀어나왔다.
“독고 소저.”
“어?”
“검신 어르신이 좀 뵙자고 하시는데요?”
“…”
독고령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눈동자가 굴러가며 탈출구를 찾는 것을 확인하자, 위일청이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흐아앙!!”
“… 도망치지 마시고 그냥 가시지요.”
“새… 색마 새끼약!!”
“더 만질까요?”
“시발… 시발시발시발!!!”
독고령은 저항할 수 없음을 깨닫고 머리를 분홍빛으로 물들인 채 운영에게 향했다.
“으하핫, 제가 부른 거 아닙니다?”
“개새끼…”
독고령이 툴툴대며 방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서자 윗옷을 벗은 남궁원청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늙었음에도 여전히 젊은이들과 비견될만한, 경이로운 육체도 놀라웠지만 독고령은 다른 것을 보고 더 놀랐다.
“그… 그 상처는?”
“아, 이거 말인가? 전대 천마가 남기고 간 저주지.”
남궁원청의 어깨죽지부터 배를 가로지는 거무칙칙한 검흔을 보고 있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때, 운영이 다가가 그의 상처를 보며 말했다.
“전보다 더 곪았네요, 어르신.”
“그렇지? 나도 슬슬 갈 때가 다 됐나보네, 클클클.”
“일단 상처부터 긁어내고 침을 좀 놓겠습니다.”
“잘 부탁하네.”
운영이 치료를 시작하자, 남궁원청은 별 일 없다는 듯이 말했다.
“자네를 부른 연유가 궁금하겠지?”
“… 예.”
“아들 놈한테 들었다네. 추포령이 떨어졌다지?”
“…”
독고령은 그 말을 듣고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전대 맹주였던 남궁원청은 아마도 맹의 결정을 존중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잡혀가더라도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저 늙은이를 피할 수도 없었다.
독고령이 도망치자 마음 먹는 순간, 그녀는 이미 어딘가 베여있을테니.
하지만 남궁원청이 꺼낸 말은 전혀 달랐다.
“크하핫, 겁 먹지 좀 말게. 이상하구만, 정말. 아무리 봐도 독고진과 닮았는데 하는 행동은 영 딴판이구만.”
“아니지요. 광마도 검신 어르신한테 한 번 덤비고는 쫄아서 안휘성 근처는 얼씬도 안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가?”
“이익…”
운영이 대놓고 앞에서 자신을 힐난하는 것을 보고 독고령은 화가 끌어올랐지만, 꾸욱 참아냈다.
“풀어주지, 추포령.”
“엑?”
“까짓 거 뭐 어떤가.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자식 놈 부탁 들어줬으니 이 정도는 되겠지.”
“그… 그래도 돼요?”
독고령이 머뭇거리며 묻자, 남궁원청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상관없다네. 안 된다고 하면 아들 놈한테 성질 좀 내지, 뭐.”
“가… 감사합니다!”
“대신 내 부탁 하나 들어주겠나?”
“어떤 거요?”
“손 좀 잡아봐도 되겠나?”
“…예?”
순간 독고령의 잎에서 ‘영감탱이가 노망이 났나?’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 했다.
“손 말일세. 손 좀 줘보게나.”
“…”
독고령이 조심히 오른손을 내밀자, 남궁원청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으음… 손은 분명 무인의 손인데 말이야…”
“…”
“실례 좀 하겠네.”
“자… 잠깐만…!”
독고령이 거절했으나 그를 무시하고 남궁원청이 그녀의 완맥을 짚었다.
붙잡힌 완맥을 통해 남궁원청의 청량한 내기가 들어와 그녀의 몸을 헤집자, 독고령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시발… 조졌네…’
완맥을 내준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자신이 누군지 낱낱이 밝히는 것과 같았다.
어떤 무공을 쓰고, 어떤 내공을 쌓았고, 어느 정도의 실력이 되는지를 속속들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전에 은약벽이 독고령의 완맥을 짚는 순간 독고진과 독고령이 동일인물임을 알아냈듯, 남궁원청 또한 손을 떼며 탄식을 자아냈다.
“허어…”
“시발… 어떻게 알았소?”
독고령이 모든 걸 내려놓고 욕을 내뱉자, 남궁원청의 눈이 커졌다.
“… 정말로 광마, 자네인가?”
“알고 한 거 아니오? 갑자기 완맥을 다 잡고…”
“나이를 먹으면 이상한 육감 같은 게 생기지. 왠지 모르게 행동이 수상쩍어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다네. 솔직히 자네가 자식이 있으리란 생각은 안 했거든.”
“젠장… 여기 있는 줄 알았다면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오.”
독고령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운영을 쳐다보자, 운영이 시선을 피했다.
“으하핫, 나는 모릅니다.”
“시발…”
“이보게, 신의. 자네는 알고 있었나?”
“저도 들어서 알았습니다.”
“크하핫, 말년에 이런 재미가 다 생겼구만.”
남궁원청이 크게 웃으며 운영을 쳐다보았다.
“내가 차를 대접하겠다 했거늘, 왜 안 찾아왔는가?”
“거 시발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그 심검이란 것이 감도 안 잡혔소.”
“크… 크큭… 크하하핫!”
남궁원청이 독고령을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어쩌다 그리 된 건가?”
“… 나도 잘 모르겠소. 빙궁의 신물을 얻어 그 음기를 흡수하고는 운기행공을 하던 도중 환골탈태를 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지금 이 상태가 되었지.”
“끌끌끌… 분에 넘치는 과욕을 부렸구만.”
“…”
독고령이 잠시 입을 뻐끔거리며 말하길 망설이다가 결국 물어보았다.
“… 이제 나를 어쩔 생각이오?”
“응?”
“내 정체를 알았으니 이 자리에서 나를 죽일 생각이오?”
“내가? 자네를? 왜?”
“… 전대 무림맹주셨던 데다가, 내 입으로 말하기도 그렇소만 나는 꽤나 말썽을 일으키고 다니지 않았소? 어르신의 아들 놈도 쥐어팼고…”
“크하핫! 내가 그걸로 자네를 책망할 줄 알았나?”
“… 아니였소?”
호방하게 웃어재끼는 남궁원청을 보며 독고령이 당황했다.
“자네가 그 때 말하지 않았나? 내 아들을 ‘훈계’했다고 말일세.”
“…그렇긴 하오만…”
“그리고 우린 셈을 치뤘지. 그걸로 끝이라네.”
“…”
독고령이 놀란 얼굴로 남궁원청을 쳐다보다 고개를 떨궜다.
“… 진즉에 차를 대접받으러 가볼 걸 그랬소이다.”
“나는 내내 기다리고 있었지만, 자네는 잊고 있었구만. 아직 늦지 않았네만?”
“그냥 여기서 주시오.”
“크하핫! 그러지. 운영, 다기를 좀 내어주겠나?”
“… 정말 검신 어르신이 차를 내리시게요?”
“내가 손님으로 오길 청했으니 내가 하는 게 맞지.”
“예. 잠시만 계십쇼.”
운영이 밖으로 나가고 둘만 남자 남궁원청이 히죽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묘하게 기분나빠 독고령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거… 다 늙으신 양반이 왜 그러시오?”
“아니, 참… 신기해서 그러네. 살다살다 남자가 여자로 변했다는 건 처음 봐서 말일세.”
“… 나도 당황스럽기 그지없소.”
“그래서 어느 쪽을 택한겐가?”
“무슨 말이오?”
남궁원청의 입은 여전히 히죽거리고 있었으나,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네는 독고진의 여식을 자처하는 ‘독고 소저’인가? 아니면 독고진인가?”
“… 의미를 모르겠군. 나는 독고…”
“자네는 복수행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겐가?”
“… 그렇소.”
“흐음…”
남궁원청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탄식했다.
“아직도 독선을 죽이기 위해 사는가?”
“처음부터 그것 하나만 보고 무림에 몸을 던졌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 그렇군. 자네는 변한 게 없구만.”
“고작 계집의 몸으로 바뀌었다고 뭐가 변하겠소?”
“미안하네. 내 사죄함세.”
“… 무엇을 말이오?”
“자네가 색마와 함께 다니는 것을 보고 진즉에 그를 남편으로 맞이한 줄로만…”
“흐엑?!”
“…”
독고령이 당황하여 이상한 소리를 내고는 머리를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내… 내가 왜 남정네와 결혼을 해욧!”
“…”
갑자기 빽빽대는 독고령을 보고 남궁원청이 웃었다.
“크하핫!! 아… 혼란에 빠져있는구만.”
“무… 무슨 소리를…”
“아직 결정하지 못 했나보군. 다행일세.”
“… 내가 잠시 무례를 범해도 되오?”
“해보게.”
“혹시 노망이라도 들었소? 아까부터 무슨 영문 모를 소리를 그리도 혼자 하시오?”
“클클클…”
남궁원청이 실실 웃으며 옆에 있는 막대기를 집어들었다.
“또 한 번 피해보겠나?”
“… 그래서 미리 양해를 구했잖소?”
“여전히 예의도 없구만, 에잉 쯔즈…”
“… 못 배워먹어서 그렇소이다.”
독고령이 툴툴대자 남궁원청이 다시 막대기를 놓고는 물었다.
“이대로 살 생각은 없는가?”
“… 무슨 소리요?”
“다 포기하고, 이름 모를 한 여인으로 살아가는 삶 말일세.”
“… 똑같은 말을 하는군.”
독고령이 이마를 찌푸렸다.
은약벽도, 운영도, 그리고 남궁원청마저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과거의 복수귀, 독고진의 삶을 그만두고.
이대로 독고령의 삶을 살 생각은 없냐고.
그리고 그녀의 대답은 정해져있었다.
“… 전혀 없소.”
“왜 그렇지?”
“이해가 안 가는 질문이오. 내가 내 삶을 결정하는데 남의 의견이 필요하오?”
“흐음… 맞는 말일세. 허나 당사자가 삶의 의지가 없다면 어찌하겠는가?”
“나는 명백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소이다.”
“정말 그러한가? 자네의 복수는 누구를 위해서지?”
“… 내 자신의 안식을 위해서요.”
“그럼 만약, 그 복수를 끝낸다면 어찌할텐가? 생각해 본 적 있나?”
“…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
독고령이 대답을 회피하자, 남궁원청이 말했다.
“나는 말일세. 평생을 전대 천마, 천용택을 죽이기 위해 살아왔다네.”
“…”
“우리는 항상 대립했지. 백도 무림과 마교. 무림 맹주와 마교주. 검과 도. 모든 게 달랐어. 심지어 나는 아들 놈 하나지만, 그 놈은 딸 하나였지.”
“그래서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오?”
“내가 천마를 죽인 뒤, 나는 무림의 정점에 이르렀다 당당히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네. 허나 나에게 남은 게 무엇인지 아는가?”
남궁원청이 자신의 손을 펼쳐보였다.
“고독, 허무, 그리고 놈이 남겨놓고 간 상처가 다지.”
“… 복수가 허무하다 따위의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이오?”
“아닐세. 그 너머를 이야기하고 싶은 게지. 복수의 뒤를 말일세.”
“…”
“지독한 허무감에 빠져 살던 내가 어디서 재미를 찾았는가 허니… 아들 놈이었다네.”
남궁원청은 펼쳐든 손을 꾹 쥐고는 인자한 미소를 띄었다.
“자식 새끼 키우는 재미가 쏠쏠하더군. 엊그제만 해도 땅 바닥을 기어다니던 놈이 어느새 손녀도 데리고 오고 말일세.”
“…”
“나는 말일세, 그래서 자네가 걱정되네.”
“오지랖이오.”
“내겐 가족이라도 있었지만, 자네는 마음을 기댈 안식처 하나 없어보이는구만.”
“그런 거 필요 없소.”
“정말 그러한가?”
“… 그렇소.”
“망설였군.”
“아니오.”
남궁원청이 독고령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독고령은 남궁원청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클클클… 미안하네. 늙으면 늘어나는 것은 오지랖 뿐이라.”
“… 신경쓰지 마시오.”
“위일청 정도면 제법 괜찮은 배필이지.”
“… 무슨 소리요?”
남궁원청이 말했다.
“아까 얘기했지 않았나. 내 손녀가 있다고.”
“음?”
“이 참에 손녀랑 위일청을 맺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원래 명문세가들끼리는 다 이런 식으로 연을 맺는거지. 이 참에 위씨세가와도 친해져야겠구만.”
“그… 무무무… 무슨…!”
“아니, 자네가 말하지 않았는가? 둘이 결혼도 안 할거라고 했으면서. 이 참에 궁금해지는구만.”
남궁원청이 또 다시, 독고령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자네와 위일청은 무슨 관계인가?”
“아… 그… 그 녀석은!”
“그 녀석은?”
“그… 그러니깐…”
독고령이 눈동자를 뱅글뱅글 돌렸다.
그녀의 머리가 뿌리부터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하여 이윽고 완연한 분홍색의 머리가 되었을 때, 독고령이 입을 열었다.
“도… 동행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