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9 장. 음란검(淫亂劍) - (1)
“아버님은 어디 계신가?”
“늘 계시던 곳에 있으십니다.”
“… 알았네.”
오랜만에 본가에 들린 무림맹주 남궁진은 곧바로 아버지의 처소로 향했다.
“아버님, 계십니까?”
“… 왔느냐.”
“매화를 보고 계시군요.”
“… 화선이 먼저 갔으니 떠오르더구나.”
남궁원청이 매만지던 매화를 놔두고 남궁진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오늘은 누구로 왔느냐?”
“… 무림맹주 남궁진으로 왔습니다.”
“귀찮은 부탁을 하러 왔나보구나.”
“… 예. 아버님의 무료한 삶을 달래드리러 왔지요.”
“에잉, 쯔쯧. 자식을 잘못 둬서 말년에 이 무슨 고생인지 원.”
“…”
남궁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맹주직을 포기하고 나온 뒤, 검신(劍神) 남궁원청의 삶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전대 마교주와 신화로 남을 일전을 펼친 이후, 검의 끝을 본 그는 다시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길 원했다.
맹주직을 내려놓고, 그저 본가에 위치한 자신의 소소한 정원을 가꾸는 재미에 온 정성을 쏟고 있는 평범한 노인.
그것이 남궁원청이 바라던 바였다.
하지만 그렇게 살기엔 일신의 무력이 너무나도 강력했다.
“그래서 무슨 부탁을 하려고?”
“… 사천에 가주십사 청합니다.”
“사천?”
“가서 독선 어르신과 차 한 잔 나누고 오시지요.”
“애비를 독구렁이의 소굴에 집어던지는구나.”
“독구렁이라면 차라리 다행이지요.”
남궁진의 표정이 굳었다.
“… 화선 어르신이 정말 천수를 다 누리고 돌아가셨다 생각하십니까?”
“맹주가 입에 담을 말이 아니도다.”
“아버지!”
“어허!”
쿵!
남궁원청이 진각을 밟으며 그의 말을 끊으려 들었으나, 남궁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모용세가와 당문이 이상했던 것은 진즉에 알고 계셨지 않습니까?!”
“그럼 광마라 불리는 그 불쌍한 아이의 추살령이나 풀어주거라! 가만 놔두면 알아서 당문을 끊임없이 억제할 아이가 있거늘, 어찌 늙은 애비를 부려먹으려 들어!”
“어차피 할 일도 없으시지 않습니까?”
“이런 고얀…!”
남궁원청이 손을 뻗자 그의 손으로 나뭇가지가 날아들었다.
“장성한 자식한테 매질이라도 해야겠구나!”
“진짜 이러실 겁니까? 좀 도와주십쇼. 이 참에 바깥 바람도 좀 쐬시고요!”
“이 자식이 보자보자하니깐… 애비를 하릴 없는 늙은이로 아느냐?!”
“맞지 않습니까?”
“어허… 통재로다. 내가 패륜아를 키웠구나!”
“뭘 이런 걸로 인륜을 어겼다고 그러십니까!”
둘 사이의 공간이 조금씩 일그러지며 유형화된 내공이 넘실거릴 즈음.
“… 그냥 갖다오시면 안 돼요, 할아버지?”
한 소녀가 남궁진의 뒤에서 빼곰 고개를 내밀었다.
“소소야, 예까지는 어찌 왔는고?”
“할아버지 보고 싶어서요.”
“어이구, 착하구나. 이리 와보거라.”
“네, 히힛.”
남궁소소가 달려가 안기자 방금까지의 살벌한 기운은 어디가고 남궁원청의 표정이 풀렸다.
손녀를 안고 조금씩 몸을 흔들며 남궁원청이 남궁진에게 전음을 보냈다.
[고얀 놈. 애비를 부려먹으려고 딸 아이도 이용해먹느냐?]
[맹주의 부탁도 안 들어주시니 아들로서 청해야지 않겠습니까?]
[애초에 네 놈이 맹주직을 받지 말아야했거늘…]
[그냥 좀 한 번 다녀와주십쇼, 아버지. 맹의 사정도 뻔히 알면서 왜 그러십니까?]
[귀찮아서 그렇다, 이 놈아! 그 시간에 소소한테 검을 가르쳐주는 게 낫지.]
그 때, 둘이 전음을 나누는지 모르고 남궁소소가 끼어들었다.
“할아버지.”
“응?”
“나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어딜 말이냐? 사천?”
“네. 저 요즘 검도 열심히 배웠는데…”
“흐으음… 아직은 안 되겠구나. 조금만 더 나이를 먹으면 같이 가자.”
“네…”
남궁원청이 남궁소소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소소는 잠깐 나가있을테냐? 애비와 얘기할 게 있단다.”
“네! 엄마한테 가있을게요!”
“착하구나. 이따 당과를 사주마.”
“감사합니다, 히힛!”
밖으로 달려나가는 남궁소소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다가, 손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남궁원청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 맹이 그리도 심각하더냐?”
“예.”
“얼마나 개판이기에 나한테까지 찾아와?”
“… 8할 이상이 당문과 개방, 모용세가에게 포섭됐습니다. 사실상 저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대신 발표하는 대리인에 불과하지요.”
“쯔쯔쯧. 그냥 힘으로 눌러버리래도 끝끝내 그리 하지 않고 맹을 무너뜨리는구나.”
“… 그러면 사파하고 저희가 다를 게 무엇입니까?”
“없다. 어차피 똑같은 칼잡이, 무엇이 그리 다르다고 자존심을 지키는지. 에잉…, 쯔즛.”
“…”
남궁원청의 질타를 듣고, 남궁진이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아버지. 독선을 한 번 살펴보고 와주십쇼.”
“뭐가 궁금해서 그러느냐?”
“… 목적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목적?”
남궁진이 답했다.
“그냥 맹주직을 원한다면 저한테 비키라고 하면 될 일입니다. 허나 하는 행동들이 하나같이…”
“마교 같더냐?”
“… 예?”
“옛날부터 패도를 추구하던 아해다. 늙었다고 그 성정이 달라질 줄 알았더냐?”
“…”
“못난 놈.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더냐. 네 놈은 맹주의 자리에 안 어울린다고. 그냥 그 팽가의 아해한테 고이 양보나 할 것이지.”
“… 제가 저지른 것은 다 치워야지 않겠습니까. 저는 언제든지 물러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됐다. 번지르르한 변명으로 스스로를 추하게 만들지 말거라.”
남궁원청이 붓을 꺼내들어 종이에 무언가를 휘갈겼다.
“가져가라.”
“… 뭡니까?”
“나 말고 거 방장 보고 다녀오라고 해라. 편지에 적어뒀으니 알아서 다녀오겠지.”
“…”
남궁진이 떨떠름한 눈으로 쳐다보자, 남궁원청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 거 참. 어차피 독선만 살펴보고 올 거면 나보다 권신 그 놈이 나으니 그런거지. 숭산이 사천이랑 훨씬 가깝지 않더냐!”
“귀찮으신 건 아니시고요?”
“허허… 매질로 부족하겠구나.”
남궁원청이 자신의 애병을 꺼내들려하자, 남궁진이 잽싸게 그의 편지를 받아들고는 고개를 숙였다.
“… 방장께 잘 물어보겠습니다.”
“그래. 이 애비를 전가의 보도로 생각치 말고 네 능력 내에서 좀 해결해보거라.”
“… 예.”
“바쁜데 예까지 왔으니 밥이나 한 끼 같이 하자꾸나. 검도 얼마나 늘었는지 한 번 보고.”
남궁원청의 말을 듣는 순간, 남궁진의 온 몸에서 투기가 끓어올랐다.
“허허… 비무를 먼저 하고 싶더냐?”
“맹에서 쌓인 게 많아서요. 모처럼 다 잊고 검을 휘두르고 싶군요.”
“… 밖으로 나가자꾸나.”
“예.”
그 날.
안휘성의 주민들은 ‘하늘이 갈라졌다’며 너나 할 거 없이 웅성거렸다..
누군가는 지진이 찾아왔다고도 말하고, 누군가는 갑자기 온 몸에 오한이 들며 벌벌 떨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나와 ‘검신과 검선의 비무가 있었다’라고 설명하자 다들 그러려니하고 넘어갔다.
*
정신을 차린 독고령이 가장 먼저 들은 것은 운영의 웃음소리었다.
“… 그러니깐 으하핫. 풍유환을 만들어달라고요?”
“네에! 신의께서는 그런 것도 하나 만들 수 있지 않으신가요?”
“아, 있죠. 할 수야 있죠. 재료만 구해오시면 까짓거 하나 만들어드리지요.”
“저… 정말요?!”
“물론입니다. 우리 딸이 말입니다, 어마어마합니다? 으하핫!”
“여… 역시 신의셔욧! 근데 무슨 재료가 필요한가요?”
“음… 일단은 천 년 묵은 이무기의 심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요?”
“불을 내뿜는 소의 혀도 필요하고요.”
“그… 그런 게 있나요?”
“없죠.”
“…네?”
“으하핫! 죄송합니다, 소저. 풍유환이 어딨습니까? 그냥 잘 먹고 잘 자면 커지는 겁니다.”
“히이잉…”
“근데 또 우리 딸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 아이가 워낙 영특하니 혹시 방법을 찾을 지도요.”
“저… 정말인가요?!”
“한 번 가보시죠.”
“믿을게요?!”
“믿긴 뭘 믿냐…”
독고령이 몸을 일으키며 말하자, 주변의 이목이 집중됐다.
“아…, 일어나셨어요 독고 소저?”
“일어났어, 령 매?”
주변을 한 번 둘러본 독고령은 자신이 마차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어. 그보다… 어디 가는 길이냐?”
“으하핫, 우리 집으로 갑니다. 어차피 가는 길이 겹쳐서요.”
“의녀문?”
“예.”
“의녀문이라…”
“하오문주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태양화리로 내단을 만들어야한다지요?”
“어.”
“어차피 만드는데 시간이 걸리니 거기서 잠시 머무르시죠.”
“… 그래. 근데…”
독고령이 마차 안을 둘러봐도 안 보이는 사람을 찾았다.
“… 색마는 어디갔어?”
“아, 그게요오…”
그 때, 마부석의 창문이 열리며 위일청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저 여깄습니다. 일어나셨군요, 독고 소저.”
“어… 얼굴 치워!!!”
“… 찾으시곤 첫 말이 어찌 그렇습니까?”
“이익…!!”
독고령이 벌떡 일어나 마부석의 창문을 세차게 닫았다.
그 모습을 본 은관영과 백리소현이 음흉하게 웃었다.
“으히힛… 독고 소저도 참 귀엽다니깐요오.”
“그러게 말이야, 후훗.”
“다… 닥쳐, 좀!”
상황을 이해 못 한 운영이 실실대며 말했다.
“으하핫, 마치 풋풋한 연인 같군요. 두 분이서 거사라도 치루셨습니까?”
“…”
“어라? 진짭니까?”
“아… 아니야 미친 놈아!!”
“주먹은 좀 내려놓으십쇼, 진짜! 성질머리 하고는…”
“다… 닥쳐! 다 닥쳐!! 캬아아아악!!!!”
독고령이 날뛰기 시작하자 백리소현과 은관영이 그녀를 뜯어말렸다.
그 모습을 보며 운영은 은약벽에게 감사했다.
‘좋은 마차네요. 흔들리지도 않고…’
가는 길이 생각보다 지루하진 않을 것 같았다.
아플 거 같아서 그렇지...
개울가에 도착하자 위일청은 말을 멈춰세웠다.
“잠시 말들의 목을 축이겠습니다. 여기서 쉬다 가시죠.”
“네에!”
“응.”
“…”
백리소현과 은관영을 뒤따라 마차 밖으로 나가려던 운영을 독고령이 붙잡았다.
“으하핫, 독고 소저. 안 나갑니까?”
“너는 나랑 얘기 좀 하자.”
“때… 때리실려구요?”
“새끼야, 네가 맞을 말만 안 하면 안 때리지.”
“어려운 얘기를 하시는군요.”
운영이 포기하고 다시 마차에 앉자 독고령이 밖을 살펴보고 마차의 문을 닫았다.
“왜 그러십니까?”
“… 쟤네는 내가 독고진이였던 걸 몰라.”
“비밀 지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너는 아는군.”
“어… 느낌이 꼭 살인멸구라도 할 거 같습니다?”
“야잇 씨 진짜 해 봐?”
“… 뭘 말하려고 그러십니까?”
“그… 그러니깐…”
독고령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곤 허둥대며 설명했다.
“나… 나는 색마랑 아무 일도 없었어!”
“아, 예.”
“지… 진짜로 아무 일도…”
“광마, 그만 얘기하시죠.”
운영이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 한 때 친우라고 생각했던 이가 하루 아침 만에 제 딸아이만한 여자아이로 바뀌었습니다.”
“시발…”
“근데 그 친구가 남자와 아무 일도 없노라 하고 변명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음. 복잡하군요.”
“아니, 시발 놈아! 변명이 아니라 진짜…”
“이해합니다, 소저!”
운영이 독고령의 말을 끊었다.
“원래 그… 성욕이란 자연스러운거고. 몸이 여자로 바뀌었다보면 남정네한테 끌릴 수도 있는 것이지요. 위 공자는 같은 남자인 제가 봐도 참으로 멋진…”
“아잇 시발놈아! 그거 아니라고, 진짜!!”
“… 나중에 두 분이서 혼인이라도 올리게 되면 청첩장이나 보내주십쇼. 제가 직접 가는 건 좀 그렇고 딸 아이라도 보내겠습니다.”
“캬아아악!!”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착잡하군요…”
“이 시발놈아! 착잡해도 내가 그렇지, 왜 네가 지랄이야!! 캬아아아악!!!”
독고령이 마차의 벽을 몇 번이고 머리로 들이박았다.
“이 시발… 진짜…”
운영도 저 정도인데 나중에 무명과 만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니 몸에 소름이 끼쳤다.
‘아니, 시발… 무명 그 새끼한테는 그냥 얘기하지 말까?’
생각해보니 은약벽한테도 가능한 안 얘기하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벌써 두 명이나 알게 되었다.
무명도 입이 무겁기로는 강호에서 둘 째라면 서러운 자긴 하지만, 그와 별개로 ‘내가 여자가 되었노라’라고 말하는 것은 어딘지 망설여졌다.
“아, 시발… 모르겠다…”
어차피 정리될 생각도 아니라 생각하며 마차의 밖으로 나오자…
“읍! 읍읍!”
“…”
검은 두건에 잠행복을 차려입은 자가 운영을 붙잡고 있었다.
야행복의 사내가 운영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말했다.
“얌전히 있지 않는다면 이 자의 목숨은…”
“너, 시발. 노극명이지?”
“…”
“병신아. 잠행복을 입을 거면 목소리라도 바꾸든가.”
“…”
“칼 내려. 콱 씨... 뒤질라고.”
”...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