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8장. 그냥 한 번 벌리시지요. - (1)
독고령에게 패하고, 위일청에게 점혈을 당해 숲에 버려진 노극명은 제압된 혈도가 풀리자마자 모용세가로 돌아갔다.
따스한 환영은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리도 모멸찰 줄은 생각도 못 했다.
‘… 3년 간 하인으로 살라니…’
마당을 빗질하며 노극명이 긴 한숨을 내쉬자 대문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이 움찔거렸다.
“… 조장님.”
“조장이라 부르지 말게. 나는 하인일세.”
“허나…”
“어허! 죄를 받고 있는 자에게 어찌 말을 높이는가!”
“…”
“장로님의 아들이라 목숨이라도 구명 받은 것을 감사히 여기고 있으니 그냥 하인처럼 대하게. 그게 나도 편하니.”
“… 알겠소.”
호위 무사들이 결국 그의 눈치를 보곤 말을 놓았다.
‘… 그래. 목숨이라도 구명 받은 게 어딘가…’
원수의 딸 년을 잡았다가 놓친 것도 모자라 다시 그 흔적을 알아냈음에도 수급은 커녕 흠집 하나 못 내고 돌아왔다.
살아남은 게 용하다 생각하고 부글거리는 속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노극명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지내겠다. 빗질 하나에도 무를 녹여내 수행을… 뭐야, 저 거지는.’
어느새 대문 앞에 거지 하나가 멀뚱멀뚱 서있었다.
늙어빠진 거지는 앙상하기 그지 없었다.
살가죽이 뼈에 들러붙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
푸석푸석한 머리와 때 묻은 더러운 옷.
거지의 다리만큼 앙상한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은 채 허리에는 옥빛으로 빛나는 몽둥이가 하나…
‘옥빛?’
거지가 아무 말도 없이 멀뚱멀뚱 대문에 서있자, 대문을 지키던 호위무사가 외쳤다.
“이 노옴! 여기가 어딘지 알고 구걸을 하… 컥!”
노극명이 호위무사를 후려치고는 거지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호… 혹시… 묵선(默仙) 어르신입니까?”
그러자 거지가 싱긋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강호의 대선배님을 뵙습니다!!”
노극명이 무릎을 꿇자, 묵선 무영개(無影匃)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바닥을 가르켰다.
그가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벽(壁)’이라는 글자를 써서 보여주자, 노극명이 당황했다.
“저희 가주님 말씀이십니까?”
무영개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어이, 자네!”
“옙!”
“나는 아버님에게 갈 터이니 당장 묵선 어르신에게 술과 먹을 거리를 내다드리게! 어서!!”
“예, 조장님!”
어느새 하인처럼 대해달라는 말을 잊고 호위 무사가 급히 움직였다.
노극명이 황급히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묵선은 흙바닥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아버님! 아버님!!”
노극명이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노순평이 분기탱천하여 외쳤다.
“이…! 이 노옴!! 하인으로 3년을 살라했거늘 어찌…!”
“큰일입니다!! 묵선 어르신이 찾아왔습니다!”
“… 뭐?”
노순평의 화가 금세 사라졌다.
“무… 묵선 어르신이? 개방의 방주이신 무영개 어르신을 칭함이 맞더냐?”
“예! 그렇습니다! 그 분의 허리에서 개방의 신물인 타구봉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무슨 일로 오셨다고 하시더… 아니지. 금언 중이시라 의미가 없겠군.”
“가주 님을 보고자 하셨습니다. 바닥에 가주 님의 존함을 쓰셨습니다.”
“허어…”
노순평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알고 오신겐가.”
“예?”
“아니다. 너는 묵선 어르신을 가주실로 모셔라.”
“예에…”
“그리고 모든 무인들에게 집을 비우라 일러라.”
“그게 무슨…”
노극명이 되묻자, 노순평이 또 다시 화가 치솟아올라 고함을 외치려들었다.
허나 그 전에 노극명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며… 명을 받들겠습니다.”
쏜살같이 튀어나가는 자신의 아들을 보며 노순평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언젠가 올 줄 알았거늘.”
노순평이 일어나 가주실로 향했다.
가주실에 도착한 그가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기별을 넣었다.
“가주, 안에 계십니까?”
“밖에 누가 왔던가요?”
“… 알고 있으셨습니까?”
“멀리서부터 거대한 기운을 흘리며 나를 들끓게 만들더군요. 그래서 누구요?”
“… 묵선 어르신이 찾아오셨습니다.”
“크하핫! 거지 새끼인가.”
“가… 가주!”
당황한 노순평이 목소리를 높이자, 내부에서 거대한 기운이 그를 덮쳤다.
‘어… 언제 이렇게 강해지셨단 말인가…!’
“매형.”
“… 예, 가주.”
“미안하게 됐군요. 독고진 그 놈이 집을 부순지 얼마나 됐다고 또 다시 부숴먹게 생겼네요.”
“아닙니다…”
“술상을 하나 내주시고 가문의 다른 이들은 다들 멀리 떠나라 이르세요. 걸리적거립니다.”
“이미 얘기해두었습니다.”
“그럼 충분하군요. 매 형은 어쩌시겠습니까?”
“… 멀찍이서나마 지켜보겠습니다.”
“그러세요.”
“술 상을 내오겠습니다…”
“예, 크큭.”
노순평이 식은 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제부터 강호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격동하는 시대에는 오직 강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노순평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
“… 오셨소? 안 그래도 혼자 마시는 술은 외롭더이다.”
묵선이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오자 모용벽은 그의 강대한 기운에 온 몸의 피부가 저릿했다.
‘이게 묵선…!’
겉으로 보기엔 그저 비루하고 늙은 거지에 불과했으나 그 안에 담긴 내공은 막대하였다.
모용벽 또한 지지않기 위해 내공을 끌어올리자 둘 사이의 공간이 마치 일그러지는 듯 보이며 바닥의 목재가 삐걱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치하다가 먼저 입을 열어 균형을 깬 것은 묵선이었다.
“생각보다 강하구만, 자네.”
“… 금언 중이라고 들었다만 아니었나 보오?”
“할 말이 없으니 입을 다물었고, 볼 것이 없으니 눈을 감았었지.”
“할 말이 생기셨나보오?”
“클클클, 그렇지.”
묵선이 웃으며 모용벽에게 다가와 마주 앉고는 그가 마시던 술 잔을 뺏어마셨다.
“크으… 맛나구만.”
“무슨 일로 찾아왔소?”
“알면서도 묻기를 좋아하는 바보들이 많아 내가 입을 다물었지. 이미 답을 가지고 있는 아해들에게 굳이 두 번 말하기가 귀찮았거든.”
“후개(後匃) 때문에 그러시오?”
“모르는 척 가면을 쓰고 위선을 떠는 자들이 싫어 내가 눈을 감았지. 그 본심이 훤히 보이는데 모르는 척 하는 것도 고역이거든.”
서로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모용벽이 웃기 시작헀다.
“큭… 크큭… 아. 이제 보니 개방의 방주가 아니라 소림의 방장이 되셨어야 할 분이셨구려.”
“권신 그 영감탱이처럼 고기도 못 먹고 살 바엔 그냥 거지가 낫지 않겠나? 클클클.”
“그것도 그렇구려, 크하하핫!”
모용벽이 시원하게 웃어재끼자, 묵선이 술을 또 한 모금 들이키고는 말했다.
“지금 하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시게.”
“얼마나 알고 있소?”
“전부. 우리 후개를 뒤에서 가지고 놀고 있는 것도, 독선 그 욕심 많은 아해와 손을 잡고 사마외도를 걷는 것도, 그리고…”
묵선이 그를 가리켰다.
“자네가 괴물이 되려하는 것도.”
“괴물이라…”
“아직 늦지 않았다 생각해서 내 친히 찾아왔다네.”
“음… 직접 확인해보시는 게 어떻소?”
모용벽이 검을 집어들며 말했다.
“늦었는지, 늦지 않았는지 말이오.”
“클클…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였다만, 막상 와보니 참으로 다행이군.”
“무엇이 말이오?”
“권신 대신 내가 찾아온 게 말이세.”
묵선이 일어나 허리에 매달려있던 타구봉을 뽑아들었다.
“권신 그 답답한 친구가 찾아왔다면 평생을 지켜온 불살을 깨게 만들었을 터이니 참 다행일세.”
“크큭, 나를 죽일 생각이오?”
“그렇다네. 아무래도 내가 늦은 듯 하군.”
“재밌구려… 아, 시작하기 전에 그거 한 번 해주시오.”
“음?”
“왜 거 있지 않소. ‘굳이 벌주를 마다하지 않겠다니…’ 같은 거 말이오. 앞으로 많이 들을 것 같아 미리 들어두고 싶었소.”
“클클클, 벌주는 무슨. 거지가 남에게 술을 왜 나눠주겠나?”
묵선의 타구봉을 고쳐잡으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대신 개 패듯이 두들겨주겠네.”
“크하핫! 그러시든가!”
둘의 신형이 사라짐과 함께 굉음이 일었다.
그렇게 두 절대고수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 아직인가.”
노순평은 초조한 마음으로 멀리서 모용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영개와 모용벽이 격돌한 지 벌써 3일 째였다.
둘의 싸움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굉음이 잠시 끊기는가 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굉음이 들리기를 반복하며 노순평의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승리만 한다면… 모용세가가 다시 날아오른다. 허나 패배한다면…’
모용세가의 역사는 강호 무림의 역사에서 지워질지도 모른다.
가문의 명운을 건 싸움을 그저 멀찍이서 바라볼 수 없는 노순평의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 없었다.
‘도대체 언제가 되야 이 싸움이…’
그 때, 옆에 있던 노극명이 그의 사색을 방해했다.
“아버지…”
“뭐냐?”
“굉음이 멎었습니다…”
“…”
그의 말을 들은 노순평이 모용세가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굉음이 멎고서 한참이 지나도 아무 소리가 없었다.
노순평이 기감을 끌어올리자 멀리서도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던 거대한 기운 중 하나가 사라졌음을 확인했다.
‘결착이 난 것인가!’
노순평이 이를 악물었다.
“모두 가주님을 모시러간다!”
“”존명!!””
노순평과 한 무리의 일행들은 천천히 폐허가 된 모용세가로 다가갔다.
‘누가 이긴 것인가…’
가주를 모시러간다며 허세를 부렸지만, 노순평은 불안함을 떨칠 수 없었다.
모용벽을 믿고 있었으나 상대가 묵선이었다.
백도 무림의 정점에 가까운 무인, 살아있는 전설.
‘혹시나… 만에 하나…’
모용벽이 패했다면 모든 게 끝이다.
아마 그에게 가담한 자신 또한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자 노순평은 신경이 바로 옆에 있던 아들에게 향했다.
‘제발… 제발…!’
노순평이 떨리는 발로 모용세가의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기감에 사람의 움직임이 느껴지자 노순평은 그 쪽으로 향했다.
“저 쪽이다!”
숨이 조금씩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노순평이 승자에게 향했다.
무너진 모용세가의 대문의 잔해 속에 서있던 승자는 거친 숨을 고르다가 노순평을 바라보고는 손을 들어올렸다.
“여, 매형.”
“가… 가주!!”
“크윽…! 아… 더럽게 강하더군요, 거지 놈.”
“겨… 경축드립니다!”
노순평은 눈물이 차올랐다.
그 거목을 꺾어낸 자신의 가주 때문인지, 아니면 구명받았다는 안도감이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모용벽이 잔해 위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다가 무언가를 던져주었다.
“매형, 후개한테 갖다주세요.”
“이… 이건…”
“타구봉이죠. 그래도 차기 방주가 될 놈한테 개방의 신물이 없으면 안 될테니 말입니다.”
“예…!”
“그리고 독선한테도 전서구를 하나 보내시고요. 내가 묵선을 꺾었으니 음… 화산파가 괜찮겠군요. 화선을 꺾으라고 얘기하세요.”
“명 받들겠습니다!”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것이 듣기 좋군요, 매 형. 크큭… 윽!”
모용벽이 웃다가 가슴을 움켜잡았다.
“괜찮으십니까?!”
“아니요… 죽을 거 같습니다. 후우… 정리가 끝나는데로 강소에도 좀 다녀오셔야겠네요.”
“신의 말입니까?”
“예. 어차피 아무나 다 치료해주는 자 아닙니까. 실력도 좋다니깐 놈에게 한 번 맡겨보지요.”
“알겠습니다. 어서 가주를 모셔라!”
“아… 잠깐만요. 조금만 쉬었다 가죠.”
“예…”
무너진 모용세가 속에서 그 현판을 침대로 삼아 모용벽이 누웠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모용벽이 입을 열었다.
“매형.”
“예, 가주.”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조금 이르지만, 지금부터 우리가 강호의 판도를 바꿀 겁니다.”
“… 예.”
“묵선은 그 첫 단계에 불과함을 기억하세요.”
“명심하겠습니다…!”
모용벽의 머릿속에 천하의 지도들이 그려졌다.
어디를 무너뜨리고, 어디를 불태울지 잠깐 고민하다 모용벽이 머리를 털어 그 생각들을 지워버렸다.
“할 일이 많아요, 매형.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예, 가주.”
“남은 일들은 다 매형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지요.”
“아닙니다. 나중에 얘기하죠. 후우… 좀 잘 터이니 알아서 잘 좀 해주십시오.”
“예!”
모용벽은 기분 좋은 피곤함과 함께 눈을 감았다.
그 때, 그의 귓가에 다른 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묵선 어르신의 시신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최대한 예를 갖춰…”
“그냥 불태우세요, 매형.”
“예?”
노순평이 되묻자, 모용벽이 몸에 느껴지는 격통을 무시하며 몸을 일으켰다.
“윽…! 그냥 불태우라고요, 매형. 아니면 저잣거리에 버려두거나.”
“허… 허나…”
“어차피 거지잖아요. 뭔 예를 갖춥니까? 그리고…”
모용벽의 눈이 처음 말을 꺼낸 무인에게 향했다.
그가 갑자기 괴로움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끄윽…!”
“이런 한심한 자가 우리 모용세가에 있다니 통탄할 노릇이군요.”
“가… 컥! 가주님…!”
“이제부터 시체로 산을 쌓을 것인데 네 놈은 그 때마다 모든 시체에 예를 갖출 생각이더냐?”
“죄… 죄송합니… 끄윽!”
우드득.
무인의 목이 꺾이자,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용벽이 다시 현판에 몸을 눕히며 말했다.
“하아… 이래서 핏줄이 중요합니다. 천한 것들은 생각마저 멍청하기 그지 없군요.”
“죄송합니다, 가주님.”
“됐어요. 여튼 나는 좀 쉴테니 나머지 일들은 잘 부탁합니다, 매형.”
“… 예.”
조용해진 모용세가의 잔해 속에서 노순평과 무인들이 시체를 치우기 시작했다.
개방의 방주 묵선과 모용세가의 이름 모를 무인은 같은 수레에 실려 대충 파둔 산구덩이에 함께 묻혔다.
그 위로 흙을 덮는 순간까지, 노순평은 묵선의 최후가 가슴 아팠다.
한 시대를 호령한 걸출한 무인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끝이라 가슴이 아팠지만, 그럴 때마다 노순평은 모용벽의 말을 되새겼다.
‘이제부터 시체의 산을 쌓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산의 일부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노순평은 눈을 돌렸다.
묵선의 죽음을 애도하기에는 그에게 주어진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강소성에 사람을 보내 신의를 끌고와라.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허… 허나…”
“가주 님이 신의를 원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는가?”
“… 명을 받들겠습니다.”
“즉시 출발하도록.”
“존명!”
그들을 보낼 때까지 노순평은 몰랐다.
악연이 또 이렇게 이어질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