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7장. 도(刀)를 아십니까? - (8)
통소를 건네받은 은약벽은 기루의 꼭대기에 위치한 특실로 들어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혀 창틀에 기대앉았다.
밖을 바라보니 마침 독고령과 팽문휘가 장원에 멈춰서더니 독고령이 도를 허공에 휘두르며 선물받은 무구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은약벽이 통소를 입가에 가져다 다대며 고민했다.
‘어떤 노래가 좋을까요?’
그 때, 방문이 열렸다.
위일청이었다.
“어머… 의외의 손님이네요?”
“… 하오문주 님이 심상치 않아보이셨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독고 소저에게 음공을 걸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흐음… 오늘따라 우리 위공자가 왜 이러실까?”
“하지 마시지요.”
단호한 위일청의 말을 듣고 은약벽이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명령처럼 들리네요. 제가 잘못 들었을까요?”
“간곡한 청입니다. 하지 말아주세요.”
“말은 그렇게 하시면서 언제라도 출수할 준비가 되어있는 듯 보이네요?”
“… 어젯밤에 깨달았습니다. 저는 죄가 많은 인간입니다. 하오문주 님의 말씀대로 언젠가 여인의 칼을 맞아 죽을 운명이겠지요. 사랑도 없이 그리 많은 여인을 품었던 것이 너무나 부끄럽습니다. 색마라 불려 마땅한 놈이지요.”
“어머. 이제야 깨달았나요?”
은약벽의 신랄한 대답을 듣자, 위일청은 고래르 숙였다.
“하오문주에게도 못 할 짓을 했습니다. 사죄드립니다.”
“하아… 우리 위 공자가 생각보다 많이 어리네요. 멍청하기도 하고.”
“… 예?”
“아무 것도 아니랍니다. 그래서요?”
“음공을 걸지 말아주십시오.”
“무슨 연유로 그러는데요?”
“… 독고 소저를 괜히 흔들고 싶지 않습니다.”
“아하핫! 싫다면 어쩌시려구요?”
“…”
위일청이 굳은 표정으로 소매에 손을 집어넣자, 은약벽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심이세요?”
“… 더 이상 죄를 범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랑이 뭔지 제대로 깨닫기 전까지는 어떤 여인도 품을 생각도 없고요.”
“지나친 궁상은 오히려 여인을 짜증나게 만드는 법이랍니다?”
“… 그렇군요.”
위일청이 납득한 듯 보여 은약벽은 안심한 듯 다시 통소를 입에 갖다대었다.
허나 이어지는 위일청의 말은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
“그렇다면 약간의 무례를 범해서라도 막겠습니다.”
위일청이 아래로 팔을 털어 연검을 바닥에 박아넣었다.
콰직!
마치 살아움직이는 뱀처럼 바닥을 뚫은 연검이 은약벽의 통소를 노리며 튀어올랐다.
탕!
그의 연검을 튕겨낸 은약벽이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미치셨어요, 위 공자?”
“음공을 멈춰주시지요.”
“내가 독고 소저의 심령이라도 제압하여 위 공자에게 안기라고 할 줄 알았나요?”
“그냥 독고 소저를 놔둬주십쇼.”
“…최근 들어 무엇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네요…!”
은약벽이 창틀에서 내려서자, 그녀의 발이 기루에 파묻혔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나무가 마치 고운 모래처럼 갈려나가는 것을 보며 위일청이 식은 땀을 흘렸다.
‘터무니없는 내공이다…!’
그와 동시에 은약벽의 신형이 사라졌다.
‘왼쪽…!’
빠르게 다가오는 은약벽의 주먹을 느끼며, 위일청이 신경을 곤두세웠다.
충분히 반응할 수 있는 주먹이었다.
위일청이 발을 움직여 피하려던 순간.
‘몸이…?!’
우드득!
위일청이 왼쪽 옆구리에 강렬한 고통을 느낌과 동시에 벽에 쳐박혔다.
“커억…!”
“… 이 곳이 흙바닥이 아님을 다행으로 여기세요. 진각을 제대로 밟을 수 없네요.”
“끄윽…”
은약벽과 자신의 실력 차이가 생각보다 훨씬 크자, 위일청은 당황했다.
‘어떻게…’
당황한 위일청을 내려보며 은약벽이 그를 비웃었다.
“제 영역 안에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을 줄 아셨나봐요?”
“그… 그게 무슨…”
그 때, 위일청의 귓가에 자그마한 금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은약벽의 등 뒤를 보자, 어느새 그녀의 칠현금이 허공에 떠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이미 저에게 심령을 제압당하셨답니다?”
“…”
그제서야 왜 몸이 알고도 반응을 했는지 깨닫은 위일청은 그녀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정 안 되면 아예 기루를 부수는 방법도 제겐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관영이가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머리를 터뜨릴 거예요.”
“… 못 할 거 같습니까?”
“안 하셨으면 좋겠네요. 여튼 위 공자, 제발 궁상 좀 그만 떨어요.”
“궁상이 아니라…”
“궁상이예요.”
은약벽이 그의 말을 잘랐다.
“하아… 도대체 사랑하는 여인과 밤을 함께 보내야한다는 생각은 어디서 튀어나온건지. 어린앤가요? 위 공자의 말대로라면 저희 기루의 아이들은 전부 잘못 되었군요.”
“그 분들은…”
“창녀면 괜찮나요?”
“…”
위일청이 입을 다물었다.
“위 공자. 나 봐요.”
“…”
위일청이 은약벽과 눈을 마주쳤다.
“… 내가 위 공자에게 사랑을 모른다고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평생을 함께할 정혼자’를 아직 못 찾았다 정도예요.”
“여전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아. 관영이가 있네요.”
“은 소저요?”
“나와 위 공자가 싸우면 관영이는 아마 저를 공격할 겁니다. 많이 고민하겠지만, 결국 그럴 겁니다.”
“그… 그럴 리가…”
“확신합니다. 그리고 나도 가슴이 많이 아프겠지만, 이해는 할 거고요.”
“… 예?”
“그게 사랑이랍니다.”
“…”
위일청이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자, 은약벽은 또 하나의 예시를 들었다.
“당장 도선이 당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들면 소현 아가는 허리가 끊어져도 도선의 발목을 붙잡고는 당신보고 도망칠거라 외칠 거예요.”
“그런…”
“그게 사랑이랍니다.”
“…”
“위 공자. 제가 든 예시는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세상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하아. 진짜 나이 먹고 이런 얘기하고 있자니 미치겠네요.”
“… 가르침을 주십시오.”
은약벽은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진지하게 위일청에게 말했다.
“… 몸을 섞는 일은 단순히 쾌락만 있더라도 할 수 있어요. 저도 위 공자와 몸을 섞는 일은 꽤나 즐거웠답니다?”
“예…”
“하지만 사랑한다고 꼭 몸을 섞을 필요는 없어요. 반대로 몸을 섞는다고 서로 반드시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요. 위 공자는 일단 이 차이를 알아야해요.”
“…”
“위 공자와 몸을 섞은 기녀들은 대부분 쾌락에 기뻤을 겁니다. 내공의 상승에도 기뻤을 테지요. 그러니깐 여지껏 몸을 섞은 모든 여인들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요.”
“그렇…습니까?”
“그래요. 나도 포함해서고요. 하지만 위 공자가 정 죄책감을 가지고 싶다면 그건 소현 아가와 관영이 정도겠지요.”
“두 분에게 사죄를…”
“하지 마세요.”
“… 예?”
은약벽은 도대체 어디까지 얘기해줘야 이 멍청한 남자가 이해할 수 있을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둘은 자신의 선택으로 사랑한 거예요. 동정으로 손을 뻗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최악일 거예요.”
“하지만…”
“모든 사랑이 반드시 결실을 맺는 건 아니예요. 오히려 동정으로 상대방을 사랑해주는 척 연기한다면 관영이와 소현이는 비참함 때문에 망가지겠죠. 그러니 제발 그 선택은 하지 마시고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욧! 알아서 하세요, 좀! 여기까지 말했으면 좀 알아쳐먹어요!”
은약벽이 결국 화를 못 참고 신경질을 내자 위일청이 몸을 움츠렸다.
“위 공자는 위 공자대로 알아서 선택을 하고 자기만의 사랑을 좀 찾아요! 나이 쳐먹고 사랑이 어쩌니 하고 있는 것도 부끄러워 죽겠는데 한, 두 번 대답하기 시작하니깐 밑도 끝도 없이 묻고…!”
“죄… 죄송합니다…”
“그냥 자기 생각에 ‘이게 사랑이다!’ 싶으면 그걸로 밀고 나가면 되지. 고작 말 몇 마디 나눴다고 사내 자식이 의기소침해서 궁상을 얼마나 떠는 거에요, 진짜! 양물이랑 주인이랑 전혀 따로 놀고 있네, 하!”
“…”
“여튼 그 쪽 사랑은 그 쪽이 알아서 찾아요.”
은약벽이 다시 창가에 걸터앉았다.
“독고 소저도 자기 사랑을 알아서 찾을테니깐.”
“… 허나 음공으로…”
“아잇! 내가 무슨 음공으로 독고 소저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려고 그러는 줄 알아요?!”
“아… 아니였습니까?”
“그게 되면 진즉에 나 좋다는 남정네들 모아서 문파 하나 따로 세우지요! 음공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내면에 담긴 감정을 끌어내는 정도에욧!”
“죄… 죄송합니다.”
“진짜 질척질척해가지고… 밤일 하는 거 반 정도만 좀 사람답게 지내봐요.”
“…”
칭찬과 힐난을 번갈아가며 하는 하오문주를 보며 위일청은 혼란스러웠다.
“이번에 방해하면 진짜 죽일 거예요. 건드리지 마요.”
“…”
은약벽의 통소 연주가 시작되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의 노래였다.
‘나도 위 공자의 생각엔 동의해요. 연애에 타인이 개입해서 좋은 꼴이 날 리가 없죠…’
은약벽이 마음을 실어 연주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혹시나 손님이 자기 마음을 속이고 있다면… 나중에 후회할 지도 모르는 상황은 만들기 싫네요.’
그녀가 본 독고령은 솔직하지 못 했다.
그러니깐 은약벽은 뒤에서 아주 살짝, 등을 떠미는 정도에 불과했다.
진심이 드러날 수 있게 아주 살짝만 돕는 연주.
고향을 그리워하는 이처럼, 혹시나 지금 이 순간에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다면.
독고령은 분명 반응할 것이다.
‘그러니 손님. 조금만 솔직해져 보세요.’
은약벽의 연주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
그녀가 갑자기 통소에서 입을 뗐다.
“… 어?”
독고령이 팽문휘와 대화를 조금 나누더니, 그의 칼을 맞고 쓰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위일청이 그녀에게 다가와 창문 밖을 쳐다보는 순간.
“위… 위 공자! 잠시만요!”
“이런 미친 놈!!”
위일청이 창 밖으로 뛰어내렸다.
*
팽문휘는 혼란에 빠졌다.
“도… 독고 소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독고령이 가슴을 움켜잡고 쓰러졌다.
“끄윽…! 흐윽…!”
“소… 소저…. 괜찮으십…”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위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살기에 팽문휘는 다급히 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쾅!
“끄으윽…!”
“이 개자식이…!”
마치 거대한 벽을 후려친 것만 같았다.
팽문휘가 도를 놓치며 찢어진 손아귀와 욱씬거리는 팔목의 고통을 견뎌내며 외쳤다.
“자… 잠깐만! 오해요!”
“오해는 무슨! 독고 소저, 괜찮습니까?!”
“아니… 그…!”
“무슨 일이냐아!!!!”
꾸르릉.
번개가 치는 소리와 함께 장원에 흙먼지가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팽문휘는 자신의 등 뒤에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아보았다.
“아버지! 황보가주님!”
“무슨 일이냐, 문휘?”
“그… 그게…”
“음?”
팽유덕의 눈이 쓰러진 독고령과 그 옆에 붙어있는 위일청을 보자 그가 물었다.
“… 네가 한 짓이냐?”
“아… 아닙니다! 갑자기 독고 소저가 가슴을 움켜잡고 쓰러졌습니다!”
“그래?”
팽유덕이 팽문휘의 찢어진 손아귀를 쳐다보았다.
“… 일단 상처를 돌보고 있거라. 독고진의 여식을 좀 봐야겠구나.”
“예…”
팽유덕이 가까이 다가오자, 위일청이 칼을 뽑아들었다.
“가까이 오지 마시오.”
“… 용태를 살피러 온걸세.”
“가까이 오지 말라 경고했소.”
“…”
“정황상 그대의 아들이 독고 소저를 해한 걸로 보이니 가까이 오지 마시오. 더 다가올시 검을 휘두르겠소.”
“진정하시게, 위 공자.”
“진정?!”
위일청이 핏줄선 눈으로 팽유덕을 노려보았다.
“나는… 진정하고 있소…!”
“…”
그의 모습을 본 팽유덕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 때, 뒤늦게 은약벽과 은관영, 그리고 백리소현이 장원으로 뛰쳐나왔다.
“령 매!”
“독고 소저가 왜…”
은약벽이 위일청의 옆에 내려앉더니 그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다.
“위 공자.”
“후욱… 후욱…!”
“잠시 진정하시지요. 심마가 찾아온 듯 하네요.”
“나는… 괜찮소…!”
“… 알겠어요. 그럼 그대로 계세요. 제가 잠깐만 독고 소저의 진맥을 살펴봐도 될까요?”
“그러시오….”
은약벽이 독고령의 완맥을 짚었다.
잠시 후, 손을 뗀 그녀가 팽문휘를 바라보았다.
“대공자. 독고 소저가 혹시 이상하지 않던가요?”
“… 어떤 점 말이십니까?”
“갑자기 가슴을 움켜잡든가 하지 않았나요?”
“마… 맞습니다! 가슴을 움켜잡으며 쓰러지셨습니다.”
백리소현이 그의 말을 거들었다.
“문주님… 아까 령 매가 가슴이 아프다고 그랬어요. 가슴 안 쪽이 쿡쿡 찌르는 듯이 욱씬거린다고…”
“하아… 제가 또 실수를 저질렀네요.”
은약벽이 입술을 깨물자 위일청이 심각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독고 소저는 괜찮은겁니까?!”
“… 현재까지는 괜찮아요. 하지만 치료가 힘들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다 하겠습니다!”
“…”
은약벽이 잠시 위일청을 쳐다보다가, 팽유덕을 바라보았다.
“도선.”
“말하시게, 음존.”
“잠시 물러나주시겠습니까? 독고 소저의 명예를 위해서.”
“그리 하리다. 내 아들 놈의 상처도 봐야하니.”
팽유덕과 일행들이 물러나고, 장원에 위일청과 여성들만 남아있자 은약벽이 입을 열었다.
“위 공자.”
“예, 문주.”
“그대의 도움이 필요해요.”
“말씀하시죠.”
“정액을 내주세요.”
“… 예?”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위일청이 당황하자, 은약벽이 다시 한 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위 공자의 정액을 독고 소저에게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