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7장. 도(刀)를 아십니까? - (6)
“후훗, 손님. 일어나시지요. 아무리 제 품이 좋아도 더 이상 주무시면 늦어요?”
“… 시발. 누구 때문에 잠을 못 잤는데…”
“어머, 제가 뭘 했다고 그러세요?”
“…”
독고령은 은약벽의 대답을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은약벽이 그녀의 앞섶을 여미어주며 말했다.
“여인이 이렇게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다니면 안 된답니다?”
“… 귀찮네.”
“후훗,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마저 전부 남심을 자극하는 짓인데요? 정말 타고난…”
“시발, 알았다고! 잘 여미고 다닐게!!”
“착하네요, 독고 소저~.”
은약벽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독고령이 거칠게 머리를 흔들며 손을 털어냈다.
“아이씨, 진짜.”
“그럼 씻으러 가보실까요? 팽 가의 대공자를 맞이하러 가야죠.”
“혼자 갈게, 좀! 계집들은 왜 그리 붙어다니는 걸 좋아하냐?!”
“글쎼요. 아마 독고 소저가 귀여워서 그런 게 아닐까요?”
“시발…”
“상스러운 말을 내뱉는 것도 귀여우시네요. 혹시 야한 말도…”
독고령이 손을 휘두르자 은약벽이 말을 멈췄다.
“알았어요, 그만 할게요. 후훗.”
“… 여튼 혼자 씻을 거니깐 따라오지 마.”
“그래도 의복을 입을 때는 불러주셔요. 손님은 아직 서툰 점이 많으시니깐요.”
“오냐.”
독고령이 나가는 것을 보며 은약벽은 쭈욱 기지개를 켰다.
“하아~. 어젯밤이 너무 좋았네요.”
밤이 길었으면 하고 바랬던 적은 많았으나 어제처럼 원했던 적은 없었다.
자신의 품에 안겨있던 독고령을 만지작거리는 게 얼마나 즐겁고, 또 그 반응들이 얼마나 귀엽던지.
“고양이라도 한 마리 키워볼까 싶네요.”
은약벽이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하며 서책을 펼쳐들었다.
독고령과 노닥거리며 처리하지 못한 문건들을 돌아보기 위해.
*
“하아…”
“그렇게 위 공자를 만나고 싶으신가요, 손님?”
“아니, 시발. 왜 이야기가 거기로 새냐?”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로 한숨을…”
독고령이 이번엔 작정하고 칼을 휘둘렀으나 은약벽의 앞에서 멈춰섰다.
“힘만 되찾으면 볼기ㅉ… 이 아니라 아무튼 한 번 다져주마.”
“후훗, 기대할게요? 아니면 큰 몽둥이로 때려주시는 건 어떤가요?”
“그것도 좋지. 돌아오는 길에 나무 하나 다듬어오마.”
“… 정말 순수하시네요, 손님.”
“엥?”
“아무 것도 아니랍니다, 후훗.”
독고령이 자신의 야한 농담을 이해하지 못한듯 하자, 은약벽은 그냥 넘어갔다.
내실을 지나 밖으로 나오자 문도들이 은약벽에게 고개를 숙였다.
“기침하셨습니까, 문주님.”
“네. 팽 가의 대공자는 어디쯤인가요?”
“1시진(2시간) 이내로 도착할 예정입니다. 조찬을 준비하라 이를까요?”
“어쩌시겠어요, 독고 소저? 미리 먹어두시는 게 나을 거 같은데.”
“그럼 그렇게 하지.”
독고령의 대답을 들은 문도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갔다.
문도가 사라지자 독고령이 은약벽에게 물었다.
“근데 너 문도들한테 매번 온다고 안 말하지 않냐?”
“그쵸. 이번에야 도선이랑 권존 때문에 모습을 드러냈지, 보통은 다른 애들 모습으로 변해서 찾아가죠. 관영이로 변할 때도 있고, 은호로 변할 때도 있고.”
“… 지랄맞네.”
“왜요? 입문하실 생각이 좀 드시던가요?”
“미쳤냐? 들어가면 은관영 그 년한테 고개 숙이면서 살아야할텐데.”
“어머, 입문만 한다고 하시면 바로 소문주 후보시죠. 실제로 문주가 되시긴 힘들더라도요.”
“… 소문주 후보는 아무나 되나보네?”
“관영이가 모자라 보이셨나요?”
“그건 아닌데… 야. 생각해보니깐 너네 소문주는 무슨 기준이냐?”
질문을 건네는 독고령을 보며 은약벽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른 이라면 보기 뻔한 수로 하오문의 내부 사정을 캐묻는다 생각하겠지만, 묻는 상대가 독고령이어서야 그런 의심도 안 들었다.
‘궁금하면 묻고, 물어보면 순순히 대답해주시면서 남자 앞에선 서툴다니…. 너무 위험하네요, 우리 독고 소저.’
어느새 스스로 독고령을 ‘우리’ 독고 소저라고 생각하는 것도 모른 채, 은약벽이 웃으며 대답했다.
“음… 물론 기본적인 기준이야 무공이죠. 무공도 세야하고, 아랫 사람도 잘 다루고, 정보를 파악할 눈도 있어야 하고.”
“은관영이 그런 것도 할 줄 알아?”
“어머, 우리 관영이 제가 잘 가르쳐놨답니다?”
“… 그래?”
“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동행자죠.”
“엉?”
뜬금없는 얘기가 튀어나오자 독고령이 얼 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동행자는 또 뭐야?”
“음… 저는 말이죠. 무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첫번째가 무공이라면, 두번째는 동맹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절대 배신하지 않고,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이요.”
“… 어느 정도 일리가 있네.”
“그래서 소문주 후보에게 각자 하나씩 동행자를 찾으라고 시켰어요. 어차피 가진 바 능력들은 다들 엇비슷하답니다?”
“그러니 그 들이 어떤 놈과 사귀는 가에 따라 차기 문주가 달라지는거냐?”
“네, 그렇지요. 그러고보니 이 방법은 손님의 영향이 컸답니다.”
“엥? 내가?”
독고령이 커진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뭘 했는데?”
“어머, 실망이네요. 저는 손님이 제 동행자라고 생각했는데요?”
“아니… 그냥 서로 마음이 맞으니깐 같이 일한거지…”
“그게 바로 동행자랍니다?”
“…”
“다른 말로는 친우라고도 하는 거죠. 옛날의 손님은 어딘가 다가가기 힘든 선이 있는 거 같아서 더 친해지기 힘들다 느꼈는데, 요즘의 손님은 좀 다르네요.”
“친우는 무슨… 난 그런 거 안 키워.”
“그렇죠. 친우는 키우는 게 아니라 지내다보면 어느새 되있는 거니깐요?”
“…”
더 얘기해봤자 자신이 은약벽과의 논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독고령은 그냥 침묵을 지켰다.
‘친우는 무슨…’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벗이라니, 부담스럽기만 하다고 생각했다.
한 편으로는 은약벽이 저렇게까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자 뭐라도 말해야겠다 싶어서 독고령은 고민 끝에 한 마디 뱉었다.
“… 나중에 말이야.”
“네?”
“… 혹시나 네가 위험하다고 하면 딱 한 번 정도는 손을 빌려주마.”
“어머.”
은약벽이 멈춰서서 두 눈을 크게 뜨며 입을 가렸다.
“어머어머어머.”
“… 뭐 잘못 먹었냐?”
“세상에나… 독고 소저.”
“아, 뭐? 아잇…! 야!!”
은약벽이 갑자기 그녀를 껴안자 독고령이 난리를 쳤다.
“아, 좀!! 놓으라고! 캬아아악!!”
“어쩜 이리 사랑스러운가요! 정말 제 제자 안 하실래요? 수양 딸은 어떠세요?! 저 엄마가 될 마음이 생겼어요!”
“아 개소리 집어치워! 꺼지라고오오!!”
그 때, 은약벽의 등 뒤에서 헛기침 하는 소리가 들렸다.
“크흠! 크흠! 미안합니다. 두 분이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어머, 위 공자. 어젯밤은 잘 보내셨…지는 않은 것 같네요.”
“… 예. 고민거리가 있어서요. 조금 수척해보입니까?”
“눈 밑이 거무죽죽하군요.”
“…”
위일청이 독고령을 쳐다보았다.
독고령이 급하게 은약벽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그녀의 뒤로 숨어 얼굴만 내밀었다.
은약벽은 또 다시 독고령을 세게 끌어안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꾸욱 참았다.
“뭐… 뭐! 왜!”
“… 죄송합니다, 독고 소저.”
“뭐가!”
“… 제가 착각한 모양입니다.”
“어머?”
“저는 아무래도… 독고 소저를 사랑하진 않는 거 같습니다.”
*
다 같이 모여 아침식사를 하는 내내 다들 조용했다.
그 적막을 깬 것은 팽유덕이었다.
“크하핫, 다들 어젯 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겐가? 조용하구만.”
“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
은약벽이 죽일듯이 팽유덕을 노려보자, 그가 물었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가, 음존?”
“아무 것도 아니네요. 그저 짜증이 좀 나서요.”
“음존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구만. 그럼 내가 한 번 맞춰보겠네.”
“뭘요?”
“음존이 짜증이 난 이유 말이야. 흐음…”
팽유덕이 탁상에 앉은 이들을 한 번 쭉 둘러보고는, 씨익 웃었다.
“다들 잘만 먹고 있는데 유독 음식에 손을 못 대는 이가 둘 있구만.”
“좀 조용히 하세요, 도선.”
“독고진의 여식과 옥면공자가 다퉜구만.”
은약벽이 젓가락을 집어던졌으나 팽유덕은 아무렇지 않게 붙잡았다.
“크하핫, 뭘 그리 짜증을 내는가 음존.”
“젊은이의 연애사는 빠져주는 게 예의랍니다?”
“평시라면 그럴 테지만, 지금은 아니지. 내겐 기회지 않은가?”
팽유덕이 독고령을 쳐다보며 말했따.
“이보게, 독고진의 여식.”
“… 뭐.”
“우리 아들 놈 한 번 만나보고 판단하는 건 어떤가?”
“… 꺼져. 관심없어.”
“크하핫, 글쎄. 막상 만나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 않겠나.”
“미친 놈…”
“이런… 욕에도 독기가 빠진 걸 보니 많이 슬퍼하는군.”
“아… 아니거든! 내가…!”
독고령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위일청을 가르켰다.
“자네가?”
“내가… 저 새끼랑 뭘 어쨌다고…”
“흐음…”
독고령과 위일청의 얼굴을 번갈아보던 팽유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듯이 다시 젓가락질을 시작하며 은약벽에게 전음을 보냈다.
[… 미안하네. 내 생각과 좀 다른 분위기구만?]
[그러니깐 말했잖아욧! 건들지 말라고요!]
[사죄함세. 그보다 무슨 일이 있었던겐가?]
[저도 몰라요. 그냥 위 공자가 갑자기 ‘저는 독고 소저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한 뒤에 내내 저래요.]
[어렵구만…]
[이럴 땐 시간이 약인데… 대공자를 못 오게 막을 생각은 없으세요?]
[미안하네만 나는 자네와 한 패는 아니라네?]
팽유덕이 은약벽을 바라보며 이를 드러냈다.
[기회가 있으면 잡아야지 않겠나?]
[… 어제 술 값은 비싸게 받을 거예요.]
[그러시게. 독고진의 여식만 내게 온다면 무슨 상관이겠나, 크하핫.]
[전음으로 웃지 마욧!!]
은약벽이 짜증을 내고는 위일청을 쳐다보았다.
‘하아… 위 공자야 그렇다쳐도…’
은약벽의 눈이 독고령에게 향했다.
‘우리 손님은 왜 그러실까요?’
그녀는 독고령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2 다경(30분) 전.
“저는 아무래도… 독고 소저를 사랑하진 않는 거 같습니다.”
“어…?”
위일청의 말을 듣는 순간, 독고령은 순간 사고가 멈췄다.
그런 그녀와 상관없이 위일청은 자신의 말을 쏟아냈다.
“어제… 백리 소저와 은 소저. 두 소저와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 근데?”
“그 결과… 저는 독고 소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확실해졌습니다. 하오문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는… 사랑을 모릅니다.”
“그… 그치? 역시 네 착각이지?!”
“… 예.”
위일청이 괴로운 듯 한 손을 머리 위에 올리자, 독고령의 가슴이 욱씬거렸다.
“저는… 하아… 모르겠습니다. 항상 사랑하는 두 남녀의 교접을 통해 서로에게 최상의 쾌락을 이끌어내는 소녀경의 전수자로서 저를 거쳐간 모든 여성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
“하지만 그게 아니었군요. 이거야 원…”
“그렇게 되면…”
“예. 오늘 팽 가의 대공자를 만나는 일은 독고 소저 혼자 나가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분과 사랑을 연기하는 것은 독고 소저에게도, 대공자에게도 죄송한 일이겠지요.”
그 말을 듣자, 은약벽이 끼어들었다.
“허나 위 공자. 그렇게 되면 독고 소저가 정말 팽 가의 며느리가 될 수도 있어요. 그걸 알고 하시는 말인가요?”
“…”
위일청의 피곤해보이는 눈이 독고령에게 향했다.
“… 혹시 모르잖습니까. 독고 소저가 팽 가의 대공자가 마음에 들 수도 있겠지요.”
그 말을 듣자, 독고령의 가슴이 또 한 번 아려왔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 말을 전해드리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독고 소저.”
“으… 응?”
“약속은 여전히 지키겠습니다만, 초야를 굳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이에게 초야를 바치는 일은 소저께도 괴롭겠지요.”
“어… 그래. 고맙다…?”
“다행이네요. 독고 소저도 기뻐하시는 듯 해서. 그럼 이만…”
위일청이 등을 돌려 걸어나가자, 은약벽이 독고령을 쳐다보았다.
“손님.”
“어…?”
“괜찮으시겠어요?”
“뭐가?”
“… 아니예요. 제가 참견할 일이 맞나 싶네요. 가시지요. 조찬이 준비되 있을테니.”
은약벽이 입을 꾹 다물고는 앞서 걸었다.
독고령은 그녀의 등을 보다 잠시 멈춰두었던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 기뻐야하는데…’
가슴이 또 한 번 욱씬거렸다.
‘좆같네…’
어딘지 더러운 기분을 느끼며, 독고령이 은약벽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