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7장. 도(刀)를 아십니까? - (3)
하오문주와 독고령이 기막 안으로 들어가 둘 만의 이야기를 나누자, 위일청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 이 두 명과 담소를 나누라고 해도…’
스스로 사교성이 좋다고 자부하는 위일청이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이 두 명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긴 힘들었다.
그런 위일청의 불편한 마음을 아는지 다행히도 팽유덕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그래서… 위 공자는 어쩌다 독고진의 여식과 만난겐가?”
“아…, 우연히 만났습니다. 제가 독고진 어르신을 뵐 일이 있어서 근처로 찾아갔다 만났지요.”
“그렇구만. 혹시 어디서 만났는지 알 수 있겠나?”
“하하…, 잘 생각이 안 나는군요.”
위일청이 답하기를 꺼려하자, 팽유덕은 금세 포기하고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잘 생각이 안 나면 어쩔 수 없지. 그보다 말일세, 내 상스러운 질문 하나해도 되겠나?”
“… 제 별칭과 관계있는 질문일듯 하군요.”
“혹시 독고진의 여식과 이미 초야를 치뤘는가?”
“… 어떤 연유에서 물어보시는지요?”
“그야 며느리로 받고자 찾아왔더니 옆에 떡하니 ‘색마’라는 별호가 붙은 자와 함께 있군. 당연히 신경이 쓰이지 않겠는가?”
“…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직 초야를 치르지 않았습니다.”
“… 아직?”
팽유덕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가 기막 속에서 대화를 나누던 독고령을 쳐다보다, 다시 위일청을 바라보았다.
“아직이란 말이 걸리는구만.”
“말 그대로입니다. 조만간 독고 소저의 초야를 받기로 약조했습니다.”
“그 약조, 물러주게.”
“거절하겠습니다. 독고 소저가 정할 일이지요.”
“허허…, 요즘 젊은이들은 죄다 예를 모르는군요.”
황보기가 옆에서 참견하자 위일청이 되받아쳤다.
“글쎄요…, 아직 혼사가 결정되지도 않은 처자의 처녀를 논하는 것도 우습지요.”
“이 놈이…!”
황보기가 그 성미를 못 참고 주먹을 불끈쥐자, 팽유덕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오늘따라 우리 권존이 자주 성을 내시는구려?”
“… 죄송하오. 오늘 별 못 볼 꼴을 다 보고 있어서 그렇소.”
“하긴…, 나도 동감하는 바이오.”
팽유덕이 술 병을 들어올려 위일청에게 향했다.
“받겠나?”
“받겠습니다.”
위일청이 공손히 잔을 내밀자, 팽유덕이 그의 잔에 술을 따라주기 시작했다.
술 잔이 가득찼음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따르자, 잔에서 술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손이 젖는 것도, 술이 흐르는 것도 신경쓰지 않은 채 위일청은 묵묵히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고 팽유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술 병이 다 빌 때까지 술을 따른 뒤에야 팽유덕이 술 병을 거둬들였다.
“이런…, 술이 다 떨어졌구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감사는 무슨….”
위일청이 능청스럽게 술 잔을 받아들여 한 번에 비우자 황보기가 또 다시 눈을 부릅떴다.
“어허…! 술을 한 번에 비우는 것은 예가 아니거늘!”
“넘치게 따르는 것 또한 예가 아니지요.”
“… 해보겠다는건가?”
“그럴 리가요. 다만 저는 약속을 지키고자 합니다.”
위일청이 잔을 내려놓고 팽유덕을 똑바로 응시했다.
“도선 어르신.”
“말하게.”
“어르신은 무엇을 위해 도를 휘두르십니까?”
“음…?”
“저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휘두릅니다. 어르신이 말하셨지요, 일구이언하는 것이 어찌 사내겠냐고. 예, 그렇습니다. 저는 살면서 여인과 약조한 바를 단 한번도 어겨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팽유덕의 눈빛이 조금 흥미롭게 변했다.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도선께는 죄송하지만, 독고 소저는 안 되겠습니다.”
“진심인가?”
“예, 제가 독고 소저와 얘기를 나눠본 결과 확신합니다.”
위일청이 선언했다.
“저는 독고령 소저를 사랑합니다.”
“미… 미친 놈아!!”
“노… 놀랬잖습니까, 독고 소저.”
“무… 무슨 헛소리야!!”
날뛰기 시작하는 독고령을 보며 은약벽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하아…, 손님께 방금 막 말씀드렸거늘.”
주변의 눈도 신경쓰지 않고 독고령이 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아니…, 아까 말했잖습니까. 독고 소저가.”
“내가 뭘!”
“이 새끼 없으면 안 되겠다 싶으면 사랑하는 거라면서요. 제가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독고 소저 없이는 안 될 거 같습니다.”
“으… 흐아아….”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당신 없이는 못 살겠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듣자, 독고령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머리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쯧쯧쯧…, 요즘 젊은 것들은 참….”
“말세입니다, 말세.”
“저도 두 분의 의견에 동의한답니다. 너무 풋풋해서 제가 다 부끄럽군요.”
두 남녀의 풋풋한 사랑 싸움을 보자 팽유덕과 황보기는 혀를 찼고, 은약벽마저 옆에서 거들었다.
독고령이 멱살을 잡은 손의 힘이 풀리자, 역으로 위일청이 그녀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독고 소저.”
“흐… 흐엥?!”
“저는 독고 소저의 초야를 가져가고 싶습니다. 반드시요.”
“아… 아니이…!”
“그러기 위해서 소저와 나눈 약속을 지키고 싶고요. 그래서 묻겠습니다.”
“어… 얼굴 치워….”
위일청의 진지한 얼굴이 가까워지자, 독고령의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단전이 욱씬거리며 온 몸의 음기가 도는 게 느껴졌다.
그런 독고령의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위일청이 말했다.
“저와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팽 가에 시집가지 마십시오.”
“아… 그…”
“대답해주시지요. 접니까, 팽가입니까?”
“아… 아니이….”
“제가…”
“잠깐! 그 쯤하면 알겠네, 그만 하지.”
위기에 처한 독고령을 구해준 것은 팽유덕이었다.
위일청이 손을 놓고 떨떠름한 얼굴로 팽유덕을 쳐다보자 독고령은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했다.
‘고맙다, 팽 가…. 네 놈에게 이런 빚을 지는 날이 올 줄이야….’
쿵쾅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팽유덕을 돌아보자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 왜 그러고 게십니까, 도선 어르신.”
“낯부끄러운 짓을 다 봤구만.”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 젊기도 하군. 하아….”
팽유덕이 술 병을 들어 따르려다가 아까 다 비워버린 것을 깨닫자 은약벽을 쳐다보았다.
“… 맡겨놓으셨어요?”
“저 꼴을 보고 술을 안 마시고 싶겠나?”
“… 이번 한 번만 봐드리지요.”
은약벽이 손짓하자 새 술 병이 팽유덕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그가 술의 마개를 열고 몇 모금 들이킨 뒤,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역시 독고진의 여식.”
“뭐… 뭐가!”
“사랑마저 화끈하구만! 과연 독고진의 여식답네! 내가 포기함세!”
“아… 아니익…!”
“사실은 말일세…, 운이 좋으면 독고진의 여식을 며느리로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래저래 건드려봤는데 저런 정인이 있어서야…”
“저… 정인 아니라고옥!!”
“크하핫, 그렇겠지. 암암. 알고말고.”
팽유덕이 위일청을 바라보았다.
“위 공자.”
“예.”
“자네의 기개에 탄복했네. 내 앞에서 그런 건방진 말을 하고도 내 눈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놈이 요즘 무림엔 없거든.”
“…”
“그래서 말인데 다시 한 번 묻겠네. 내게 도를 배워볼 생각이 없는가?”
“가문의 무술을 어찌 외인이 배우겠습니까?”
위일청이 완곡히 돌려말하자, 팽유덕이 웃었다.
“이럴 줄 알고 내 슬하에 딸과 아들을 고루고루 낳았지. 어떤가?”
“… 죄송합니다.”
“끌끌끌…, 아쉽구만. 자네를 좀 더 일찍 만났어야 했거늘.”
“그럼 술을 한 잔 주시지요.”
위일청이 방금 비웠던 자신의 잔을 건네자, 그 모습을 보고 팽유덕의 눈이 크게 뜨였다.
“큭… 크하하핫!! 맘에 드는군! 정말 마음에 들어!”
팽유덕이 위일청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이번엔 결코 넘치지 않게, 하지만 잔에 꽉 차게 따라주었다.
“보아하니 검을 여러자루 들고 있군.”
“예, 어르신.”
“그럼 거기에 도 하나 추가되도 상관없겠지?”
“… 물론입니다.”
“나중에 하북에 올 일이 있거든 나를 찾아오게. 언제든지 한 수 가르쳐주지.”
“아… 안 그러셔도…”
“오늘 있었던 내 모든 무례를 사죄함의 대가일세. 부족한가?”
“… 알겠습니다. 언제든지 하북에 갈 일이 있거든, 팽 가를 찾아가겠습니다.”
“약조했네?”
“… 약조하겠습니다.”
둘의 이야기를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은약벽이 비아냥거렸다.
“어머. 손해는 제가 본 거 같은데 이득은 위 공자가 챙기네요?”
“크하핫! 하오문주에게도 내 사죄함세. 뭘 원하는가?”
“글쎼요…, 고민 좀 해봐야겠는데요?”
“이건 어떤가?”
팽유덕이 갑자기 말이 없어지고, 은약벽의 눈이 커졌다.
전음으로 둘의 이야기가 끝나자, 은약벽이 고개를 숙였다.
“… 이 정도면 충분히 셈을 치루셨군요.”
“확인해보지 않아도 되는가?”
“심증은 있었으니 괜찮습니다.”
“무섭구만, 하오문주.”
팽유덕이 다른 두 명과 이야기를 끝내고 독고령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독고진의 여식.”
“뭐.”
“여전히 예의라곤 모르는구만, 크큭. 남아였으면 진즉에 볼기짝을 쳤을텐데.”
“…”
“실은 말이지…, 오늘 내가 여기 온 진짜 이유는 정말로 그대를 내 며느리로 삼고 싶어서였다네. 뭐, 지금은 포기했지만.”
“내가 동의했을 거 같아… 요?”
“그러니깐 말했잖나. 당문과 모용세가랑 전쟁이라도 치르겠다고.”
“…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농담 같나?”
팽유덕이 그녀를 쳐다보고 말했다.
“독선이 맹에 독을 풀었어. ‘돈’과 ‘마약’이라는 지독한 독을 풀었지.”
“…”
“의협심 넘치던 거지들은 당가가 뿌리는 마약에 취했고, 맹에서 안락한 영위를 즐기던 장로들은 당가의 돈에 취했지.”
“그래서?”
“검선은 너무 여리다네. 원래부터 무에만 관심 있던 자라 맹주의 권좌가 어울리지 않아.”
“… 맹주의 자리에 오르고자 하나?”
“그래. 그리고 내가 맹주의 자리에 오른다면 가장 먼저 할 것은 사천과 요녕의 청소라네.”
“… 불가능할텐데?”
“그래서 뜻 있는 자를 모으고 있다네. 여기 황보세가의 뇌력권존 또한 그 중 하나고, 산동악가와 사마세가, 제갈세가도 모이기로 했다네.”
“…”
생각보다 많은 세가의 이름이 나오자 독고령은 살짝 놀랐다.
그에게 있어 팽유덕은 어디까지나 귀찮은 놈이었을 뿐, 거대한 야망을 가진 사내로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더 당황스러웠다.
독고령의 눈이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은약벽에게 향하자, 그녀는 또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시발. 저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구별하냐고…’
독고령이 다시 팽유덕을 마주했다.
“근데 왜 독고진이 필요한데?”
“가장 많이 싸웠으니깐. 당문과 가장 많이 싸운 자가 독고진이니 그가 필요하지. 지피지기면 백전불태 아니겠나?”
“…”
점점 은약벽이 거짓말이라고 반박한 요소들이 사라지자, 독고령은 혼란스러웠다.
“아… 잠깐만. 그럼 내 결혼이 꼭 필요해?”
“… 그건 자네가 아니라 독고진에게 주는 선물이지.”
“엥?”
“나는 독고진이 잃을 것이 없는 사내라고 생각했다만 이렇게 어여쁜 딸이 있었군. 그렇다면 그 또한 자식의 안위를 바라지 않겠나?”
“…”
팽유덕은 당연히 독고령이 독고진과 동일인물인지 모르고, 자식도 낳아본 아버지이니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근데 어차피 당문 조지겠다고 하면 알아서 참가할텐데 바로 치면 안 돼?”
“시간이 필요해서 그렇다네. 내가 맹주가 될 때까지 필요한 시간. 대의없이 바로 다른 세가를 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테지.”
“…”
독고령은 혼란스러웠다.
과연 이게 진실일지, 아닐지 머릿 속이 복잡해질 즈음, 은약벽이 전음을 보냈다.
[사실인 듯 하네요. 안 그래도 최근 팽 가에서 타 세가에 자주 방문하기도 했고, 무림맹과 접촉이 잦아졌습니다.]
“…”
은약벽이 사실이라 증언해주자, 독고령은 얼굴을 찌푸렸다.
“… 그냥 조지면 안 돼?”
“그건 안 될 말이네, 예의없는 처자.”
황보기가 끼어들었다.
“백도 무림을 양분하는 내란이 일어날걸세. 어중간한 중소문파들은 대의가 있는 쪽에 붙으려 할 테니 먼저 명분이 필요하다네.”
“그냥 ‘고독’과 ‘절독’의 존재를 까발리면?”
“혈교나 마교 짓이라고 돌리겠지. 개방 또한 한 패니 기만책에선 우리가 질 수 밖에 없다네.”
“시발….”
“진짜 말 좀… 후우…. 내가 참겠소.”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알아서 화를 삭히는 황보기를 놔두고, 독고령이 고심했다.
‘… 결혼만 하면 알아서 조져주겠다니 조금 땡기긴 한데…’
복수를 남의 손에 넘기는 것도 싫었다.
결국 독고령이 혼인이고 뭐고 거절하자고 마음먹은 순간, 팽유덕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일세, 위 공자.”
“예.”
“자네에게도 부탁할 게 하나 있다네.”
“… 말씀하시죠.”
“그게 말일세…, 음…. 내가 사실 아들 놈에게 잔뜩 바람을 잡아놨거든?”
“…”
위일청은 그가 무슨 부탁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러니 독고진의 여식과 함께 알콩달콩하는 모습을 가서 좀 보여주겠나? 그 놈이 알아서 포기하도록?”
“그러지요.”
“개… 개새끼들아! 니들이 왜 결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