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7장. 도(刀)를 아십니까? - (2)
“우리 집에 며느리로 들어오지 않겠는가?”
“하… 미쳤나?”
“도… 독고 소저!”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위일청이 당황하여 독고령의 입을 틀어막고, 황보기가 분노하며 일어서려던 걸 팽유덕이 막아세웠다.
“괜찮네, 권존. ‘그’ 독고진의 여식이니 이 정도는 예상했다네.”
“허나 도선! 경우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괜찮대두, 크하핫.”
“… 죄송합니다, 독고 소저가 그…”
“아닐세. 사과하지 않아도 되네. 이 정도야 뭐 별 거 아닐세. 오히려 내가 사과하지.”
팽유덕이 고개를 숙이자 위일청이 더 당황했다.
“기별도 없이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면 미쳤다 소리를 들을 만도 하지. 사과함세.”
“아… 아니…”
“위 공자에게도 아까의 무례를 같이 사과하지. 본좌가 워낙 도를 사랑하다보니 무례를 저질렀다 생각하고 용서해주게나.”
“… 예.”
위일청이 순순히 사과를 받아들이는 걸 보고 독고령이 얼굴을 구겼다.
“미안한 짓을 애초에 안 하면 참 좋을텐데 말이야… 요.”
“크하핫! 존댓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구만. 그냥 얘기하게, 독고진의 여식.”
팽유덕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 때다 싶어 독고령이 편히 말했다.
“그럼 그러지. 도대체 이게 뭔 개소리인지 설명해.”
“…”
팽유덕이 넋이 나간듯 입을 벌리자, 독고령이 다시 물었다.
“뭐? 네가 말 놓으라매. 설명하라고, 내가 왜 며느리로 들어가야하는지.”
“큭…! 크큭…! 크하하핫! 역시 독고진의 딸이구만. 확신하네, 저 년이 독고진의 딸이 맞아.”
“… 그런듯 하군요, 도선.”
팽유덕이 웃으며 바닥을 두드리자 땅이 울리는 것만 같았다.
혹시나 기루가 부서질까 노심초사하며 은약벽이 이야기를 재촉했다.
“저도 독고 소저와 같은 생각이랍니다, 도선. 갑자기 찾아와서 혼약을 언급하시다니요. 두 분 사이에 아무 약속도 없었던 걸로 아는데요?”
“아아…, 독고진과 직접 얘기하는 게 제일 편한데 말이야. 그는 어디 갔나?”
“… 잠시 자리를 비웠답니다. 그러니 제게 얘기해주시죠.”
“정말이냐, 독고진의 여식?”
“… 어. 하오문주한테 다 얘기하면 돼.”
“이… 이 년이…!”
담담하게 반말을 내뱉는 독고령을 보며 황보기의 목에 핏줄이 솟았다.
“아무리 예의가 없다한들 자신보다 몇십 년이나 더 산 무림의 노선배에게 이게 무슨 추태인게야!”
“어머, 황보세가주가 예의를 언급하네요? 검후에게 예의로 한 소리 듣고는 개과천선하셨나요?”
“두 년이 죄다 미쳤구나!”
“… 황보기.”
팽유덕이 다시 한 번 황보세가주의 이름을 불렀다.
“… 이럴 거면 자네를 데리고 오지 말 걸 그랬다네.”
“허나 도선…!”
“우리는 부탁하러 온 입장이니 이 정도 무례는 넘어가야 하지 않겠나?”
‘응?’
천하의 팽유덕이.
그 경우를 모르는 팽유덕이 ‘부탁’이라는 단어를 꺼내자 독고령의 눈이 커졌다.
“… 부탁은 무슨 소리…”
“이…!”
“요?”
황보기가 또 다시 발작하려 들자, 독고령은 마지못해 끝에 ‘요’ 자를 붙였다.
‘지랄났네, 아주 그냥’
독고령이 잠시 황보기를 노려보다 팽유덕에게 눈을 돌렸다.
“으음…. 독고진에게 직접 말하고 싶은데 말이지.”
“그냥 날 독고진이라고 생각하고 얘기해 봐… 요.”
“이보게, 독고진의 여식.”
팽유덕이 물었다.
“자네는 얼마나 강한가?”
“어…”
“그게 중요한 이야기인가요, 도선?”
“아니, 사실 그리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네만 아무래도 안 믿겨서 말이지.”
팽유덕이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독고령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독고진에게 자식이 있다는 것도 못 믿을 이야기인데 이리 어여쁜 딸이라니. 솔직히 쉬이 안 믿기는구만.”
“아이씨…, 봐봐.”
독고령이 일어나더니 연검을 뽑아들었다.
“음?”
쐐액!
독고령이 연검을 휘두르고 다시 검을 거둬들였다.
“됐냐?”
“수라나찰도법이군. 헌데 왜 연검인가?”
“아…, 그…. 근골이 아직 덜 자라서.”
“그렇구만. 하긴… 내가 인정한 도우(刀友) 독고진이 자식에게 검 따위를 가르칠 리가 없지.”
독고령은 앉으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도우는 무슨 개지랄.’
“보아하니 수라나찰도법도 알고 있는듯 하군. 거래 내역은 그대로네. 나는 자네가 우리 아들과 혼약을 맺었으면 한다네.”
“거래라고 하는 걸 보니 주실 것도 있어보이시는군요, 도선?”
“물론이지. 독고진이 가장 좋아할만한 것으로 들고 왔다네.”
“헛소리를…”
“모용세가와 당문을 무림에서 지우는데 협력하지.”
“!!”
갑자기 큰 얘기가 튀어나오자, 독고령이 입을 다물었다.
“뭐… 뭐라고?”
“듣지 않았는가. 우리 하북팽가와 여기 같이 온 황보세가가 힘을 합쳐 모용세가와 당문세가를 무림에서 없애는 데 협력하겠다고.”
“두 분이 왜…”
“위 공자. 잠시만요.”
위일청의 입을 은약벽이 틀어막자, 팽유덕이 씨익 웃었다.
“우리 하오문주가 많이 당황하셨나보오?”
“… 진심이신가요?”
“허언이 아니라네.”
“지금 도선이 입에 담은 말은 오대세가의 내분을 의미합니다. 더 나아가 무림맹을 양분할 수도 있는 일이죠. 그 의미를… 알고 하신 말인가요?”
“물론이다네.”
대답은 옆에 앉아있던 황보기가 대신했다.
“… 전쟁이지.”
*
‘… 전쟁이라니….’
독고령은 무슨 말인지 쉽게 따라갈 수 없었다.
“… 그게 내 결혼이랑 무슨 상관이지? 전쟁이라니?”
“자네가 우리 가문에 며느리로 들어온다면 까짓 거 모용세가와 당문세가랑 전쟁도 불사하지.”
“미쳤어?”
“미치지 않았다네.”
“내… 내가 뭐라고…”
“음…, 이건 내가 이야기를 정리하는 게 낫겠소.”
황보기가 입을 열었다.
“요 근자에 말이오, 모용세가와 당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소이다. 하오문주도 알고 있겠지요?”
“… 사천이 혼란한 것은 알고 있지요.”
“그리고 모용세가 또한 북쪽을 정리중이지요. 헌데 이게 그리 탐탁치 않더군요.”
“전쟁을 일으키기에는 부족한 이유라고 보이는데요?”
“고독.”
“!!”
익숙한 이름의 단어를 듣자 독고령이 놀란 얼굴로 황보기를 쳐다보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 쪽도 알고 있나보군.”
“그… 그 저주받을 물건을 왜…”
“당문이 또 다시 고독을 만들고 있소. 사천에 하나, 그리고 산서 인근에 하나있소.”
“…”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개방도 이를 묵과하고 있더군.”
“개자식들…!”
쿵!
독고령이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자, 팽유덕이 말했다.
“사실 독고진의 여식과의 혼약은 뭐… 어디까지나 동맹 관계를 확고히 하자는 얘기에 가까운 거라네. 독고진의 도움을 받고 싶거든.”
“그렇다면…!”
“이야기는 그게 다인가요?”
은약벽이 자신의 말을 끊자, 독고령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하오문…!”
“더 하실 얘기는 없으신가요?”
“… 하오문주는 빼고 이야기할 걸 그랬구만.”
“독고 소저는 일단 머리에 피 좀 빼고 진정하시지요.”
“당문 그 개자식들이…!”
“독고 소저.”
은약벽이 질타하듯 독고령에게 말했다.
“잘 생각해보시지요. 저는 이 이야기, 함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크하핫! 그걸 당사자 앞에서 이야기하는구만.”
“독고진 대협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냥 부탁 한 번 해보시지, 아무리 봐도 혼례까지 갈 이유가 없어보입니다.”
“더 해보게, 음존.”
“모용세가와 당문과 전쟁을 할 연유도 부족해보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두 분이 당문의 ‘고독’을 알고 의협심이 끓어오르셨다면 무림맹에 찾아가셨겠지요.”
“무림맹도 이미 당문과 한 패라면?”
“아니요. 검선께서 계시니깐요.”
은약벽은 확신하듯 무림맹주, 검선 남궁진의 이름을 꺼내들었다.
“도선께서 검선께 머리 한 번 숙이면 아마 기뻐하며 나서시리라 생각합니다. 틀린가요?”
“으음…”
“의협심이 끓어올랐으나 호적수에게 머리를 숙이긴 싫다니 우스운 얘기군요.”
“크크큭. 그럼 말해보게.”
팽유덕이 몸을 앞으로 당기며 은약벽을 쳐다보곤 사납게 웃었다.
“내 말이 허언이라고 생각하는 듯 한데, 그렇다면 도대체 본좌가 무엇을 바라고 독고진의 여식을 원하지? 전쟁까지 언급하면서 말이야.”
“수라나찰도법이 가장 가능성이 높아보이는군요.”
“틀려. 모든 도객의 꿈과 같은 무공이긴 하나 하북팽가의 오호단문도도 그 못지 않아.”
“… 아니면 뒤에 무언가 숨은 뜻이 있는 듯 하나보네요.”
“아니, 시발! 아무튼 당문을 조지겠다잖아! 개소리 집어치우고… 읍!”
독고령이 발작하며 날뛰자, 은약벽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 위 공자, 미안하지만 두 분과 잠시 담소를 나누시지요.”
“음? 밖으로 나갈 셈인가?”
“설마요. 불안해서 위 공자 혼자 어찌 남겨두겠어요? 다만…”
은약벽이 내공을 일으켜 기막을 만들며 말했다.
“여인끼리 비밀 얘기가 있어서요.”
“참으로 마음에 안 드는구만. 대놓고 소곤거리겠다고 말하는 꼬락서니가 말이야.”
“어머, 저의를 숨기고 찾아오신 팽 가주가 하실 말씀은 아니랍니다? 후훗….”
은약벽이 투명한 내공의 기막을 완성하자 주변의 소리가 차단됐다.
그러자 독고령을 쳐다보며 말했다.
“손님, 일단 진정하시죠.”
“진정은 무슨! 당문이 그 고독을…!”
“손님. 진짜 그 말을 믿으시나요?”
“… 뭐?”
“손님이 당문 얘기만 꺼내면 발작하는 건 알 사람은 다 안답니다. 게다가 이제와서 저 두 세가가 모용세가와 당문을 지워주겠다니요.”
하오문주가 혀를 찼다.
“너무 좋은 얘기 아닌가요?”
“…”
“손님이 여전히 강하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연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함정이 뻔히 보이는데 들어가는 멍청한 짓은 제발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시발….”
“제가 팽 가주라면 고독을 빌미로 독고 소저를 며느리로 삼아 인질로 쓰고, 독고진 대협을 자신이 원하는 곳에 집어던져 이득을 취할겁니다. 이 쪽이 더 그럴싸하지요?”
“…”
은약벽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독고령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은약벽이 웃었다.
“후후…, 다행이네요. 말이 통해서. 저희는 아직 저 두 명이 무슨 연유로, 무엇을 노리고 온 지 모른답니다. 이럴 때는 무턱대고 저들의 말을 믿기보다 일단 관망하는 게 최고랍니다?”
“얌전히 있으라고?”
“잘 알아들으셨군요. 머리라도 쓰다듬어드릴까요?”
“다… 닥쳐! 누굴 애새끼로 보나….”
“후후훗. 그러니깐 부디 얌전히 계셔요. 이 쪽은 제 전문이랍니다?”
“…시발.”
은약벽이 기막의 밖을 쳐다보았다.
그 곳에선 다행히도 위일청이 황보기와 팽유덕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위 공자가 시간을 잘 벌어주고 있네요.”
“하지만 아까부터 팽 가놈이 계속 나를 쳐다보는 게 좆같긴 해.”
“기막을 넘어서 말을 훔쳐듣는 것은 불가능하니 걱정마시지요.”
독고령이 팽유덕을 잠시 노려보다가 다시 은약벽을 쳐다보았다.
“… 그래서 나는 그냥 얌전히만 있으면 되냐?”
“물론 아니지요. 결국 이 이야기의 중심은 손님이니깐요. 일단 저들의 저의를 파헤치고 싶은 것은 저 또한 마찬가지이니 본심을 알아낼 때까지만 참아주세요.”
“… 그래.”
“아마도 당문과 모용세가랑 전쟁을 하겠다는 얘기도 허언일 겁니다. 그러니 신경쓰지 마세요.”
“엥? 그게 가능하다고?”
독고령의 표정을 보고 은약벽이 비웃으며 얘기했다.
“안 될 건 뭐 있나요? 저희 말고 듣는 자도 없는데요?”
“아니, 시발. 네가 당황하길래 진심인 줄 알았는데?”
“하아, 손님…. 기만책도 모르시나요?”
“시발, 좀….”
“저들이 정말 전쟁을 일으키고자 하면 진즉에 했겠죠. 거기다가 손님 하나 늘어난다고 가문과 가문의 전쟁 판도가 얼마나 바뀐다고 그러겠어요?”
은약벽의 말은 맞는 얘기였다.
독고진이 아무리 강하다한들 일개 개인에 불과하다.
당장 독선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 그였고 당문의 정예들이 협공을 한다면 조금 곤란해질 상황도 많았다.
‘그러니깐 저 십새끼들이 나를 가지고 놀았단 소리네?’
들으면 들을수록 부아가 치미는 얘기였다.
전쟁, 고독과 같은 거대한 얘기로 자신을 흔들어놓고 본심을 숨기는 꼬라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빨리 힘을 되찾아야겠군.”
독고령이 자신의 연약한 손을 쳐다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은약벽이 웃으며 말했다.
“후훗, 강해질 방법은 바로 옆에 있는데요?”
“응?”
“중요한 순간이니 농짓거리는 나중에 하죠. 다시 기막을 거두겠습니다.”
“… 그래.”
“부디 침착함을 유지해주세요, 손님. 이런 정쟁에선 감정적인 자가 지는 거랍니다?”
“알았다고.”
“그럼…”
하오문주가 기막을 걷어내자 다시 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먼저 들린 것은 위일청의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도선께는 죄송하지만, 독고 소저는 안 되겠습니다.”
“진심인가?”
“예. 제가 독고 소저와 얘기를 나눠본 결과 확신합니다.”
위일청이 선언했다.
“저는 독고령 소저를 사랑합니다.”
“미… 미친 놈아!!”